종교, 본능, 무식 그리고 한잔 더

나이가 들면서, 인간이 만들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들은 하물며 종교까지도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는 뗏목이며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이 우연히 타게 된 배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우연히 가지게 된 종교가 그 사람일 수는 없다. 인간이 종교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배에서 우연히 만난 승객들끼리 치고 박는 것이 그 배의 탓이 아님과 같다.

늘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었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때때로 ‘이것이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자문해야 한다. 만취하여 배우자를 줘패는 넘이 순간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내게 도움이 되며 내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참으로 자문할 수 있다면 그 넘을 결국은 달라지게 된다. 인간이 종교를 이유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어떤 형태로건 싸우고 다툴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상대방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끊임없이 자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종교가 실패하고 종교가 다투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실천한답시고 언행하는 인간이 실패하는 것이 마치 종교가 실패하고 다투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이 실패하는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둘 다 우리 모두가 극복하고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것들이다. 첫째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본능과 감정들 때문이다. 숫사자들끼리 암컷들을 차지하기 위해서 벌이는 싸움 그리고 때로 맺는 숫사자끼리의 동맹은, 인간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힘과 지능을 가지고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서로 치고 박는 것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인간의 본능은 인간이 종교를 참으로 (주로 개인 차원에서) 실천하는 최대의 걸림돌이 된다. 때때로 이러한 본능을 콘트롤 하거나 혹은 제압 (?) 하는 것이 마치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듯 보이기까지 하다. 둘째는 무식 때문이다.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나는 ‘무지’는 정말 모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내가 미분적분이나 스웨덴어를 모르는 것은 무지한 것이다. 화성의 표면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인간을 되돌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내가 (기회가 아직 없어서) 무지한 것이다. 무지는 도움이 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집단을 이루어) 직접적인 해를 크게 끼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무식’은 시대나 상황에 걸맞는 인간의 도리 혹은 길을 모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때 모른다는 의미는 대부분 ‘듣고 보아서 머리로는 아는데 무슨 이유로던지 내게 register가 되지 않으니 (당연히 결과적으로) 몸과 마음이 그곳으로 향하지 않으며 또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분적분을 잘 알아도, 스웨덴어를 배워서 잘 구사해도, 화성의 표면을 보았어도, 공룡의 화석과 그 과학적 발견을 보고 배웠어도 ‘더 이상 스스로 하는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이 무식의 한 예가 아닐까 싶다. 집단 차원에서 집단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경우가 꽤 있다.

이 두가지 즉 인간의 본능과 무식이 종교와 결합하면 그야말로 가관이 된다. 우연히 한배를 탄 넘들끼리 (개인 차원에서) 치고박음은 물론이려니와 주변에 있는 다른 배에까지 기어올라 그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집단 차원에서) 동참하기까지 한다. 이미 말했듯이 이런 인간의 본능과 무식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며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아무리 가방끈이 길어도 지갑이 터져도 미모가 출중해도 또 큰 모자를 써도 전혀 예외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이 본능이 더 추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무식이 더 해로운 꼴로 구현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회사로 오가는 언덕길에 매우 고급 주택가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즐비하며 성공한 (주로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2주에 한번 재활용 병들을 시청에서 마련한 박스에 담아 집앞의 길가에 내놓는데 뚜껑이 없으니 오가며 지나는 길에 자연스레 박스 안이 보이게 된다. 그 큰 박스에 집집마다 한결같이 쌓아 놓은 온갖 술병들을 보면서 (대부분 비싼 와인병이나 고급 술병들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생을 생각하며 씁쓰레 웃게 된다. 나도 한때 그 만큼 비싼 술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정말 남부럽지 않게 (?) 마셨었다. 와인 특히 화이트 와인이 세계적인 나라에 사는데 그리고 아주 좋은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쩌겠나. 그 정도 크기의 박스에 와인병과 각종 술병들이 그득히 차는 것은 잠깐이다. 맥주병들은 애교라고나 할까. 산소같다는 뇬도 리처드 기알도 딜라이 라말도 그 누구도 그렇게 레드 와인을 들어 부으면 아침에 피똥 비슷한 색깔의 시커면 설사를 줄줄하게 된다. 무슨 와인과 특히 잘 어울린다고 품위있게 함께 드셧던 (아마도 블루) 치즈도 뜨뜻한 뱃속에서 발효가 되어서 그런지 그야말로 모진 (?) 향내를 풍기면서 같이 나온다. 누가 예외일 수 있겠는가?

아침에 밑을 씻고 낮에 술이 깨면 저녁에 다시 반복 그리고 다음 날이 또 오고… 그렇게 술병은 쌓여가고 인생은 흘러가는데 본능과 무식은 늘 그자리…

사는 것이 이 모양이다 🙂

2022 새해 방담

오랜만에 여름다운 여름이 한번 제대로 온듯 연일 폭염에 그 흔하던 바람조차 별로없어 그야말로 환상적인 한여름 날씨가 계속되네요. 이렇게 한여름에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으며 (긴 휴가를 보내면서) 살아온 햇수가 어느듯 한겨울에 그랫던 햇수와 맞먹게 되었어요. 이번 휴가중에는 몇차례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했고 또 초대받아 가기도 하면서 연말 연시를 보냈는데요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저 먹고 마시고 떠들며 취했던 과거와는 달리 무언가를 배우고 또 느끼는 기회가 되는 것 같네요. 더운 여름에 힘들게 음식을 준비했던 아내도 비슷한 생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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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와 제이브는 클럽 챔피언 골퍼 부부입니다. 아름답고 늘씬한 부인은 정말 멋있게 차려입고 왔는데, 저녁도 한접시 맛있게 들고는 금새 포크와 나이프를 딱 내려 놓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가 지어준 별명이 ‘500’ 인데요 여태껏 골프 레슨을 500회 이상 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연습을 거의 매일 한다고 해요 물론 풀타임 직업이 있어요. 아마 챔피언 골퍼로서의 프라이드가 남달라서 그런지 이야기를 나눌때도 상당한 컨피던스를 (자신감) 가지고 하네요. 그런데 막상 실제로 인게이지는 (정말 대화나 관계에 깊게 참여)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무슨 일은 하는가 아내가 물으니 회사 이야기를 먼저 길게 하고선 마지막에 살짝 사장 비서라는 말을 붙여요. 우린 보통 내가 무슨일을 하는지를 길게 먼저 이야기하고선 어디에서 일하는가를 덧붙이지 않나요? 아름다움도 그렇지만 쳄피언이다 최고다 하는 그런 의식도 사람에게 일종의 부자연스러움을 주어 때로 자유를 빼앗는 듯 해요.

이 사람들과 함께 라운드를 하면, 내가 처음 만나는 4번째 동반자에게 나를 ‘아주 훌륭한 골퍼’라고 자주 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뜸 핸디가 얼마인데요? 이렇게 물어요. 요샌 사람들이 내 대답을 듣고선 실망하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쳐서 먼저 말을 해줘요. ‘고작 보기플레이어 인데요 이 사람들이 나를 과대 과장 광고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러면 남편이 말해요,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는데, 나는 이사람이 골프를 대하는 평온하고 기쁜 마음을 배운다’ 이렇게 말이에요. 언젠가 크게 망한 샷을 치고선 내가 웃으면서 ‘당신은 이런샷을 하지도 않지만 만약에 한다면 연습장으로 달려 가겠지만, 나는 집에 가서 명상을 하면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인다’ 농담을 했기 때문인가 싶네요. 사실 나는 퍼팅을 하고선 (들어가라고) 몸을 배배 꼬지도 않고 또 황당무계한 샷이 나와도 너무 화를 내거나 괴로워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물론 아무렇게나 치지는 않아요. 남편 제이브는 명랑하고 즐거운 성격이라, 그날 저녁시간에 가장 말을 많이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내가 틀렸어요. 적당한 타이밍에 좋은 질문들을 (한국과 우리 내외에 관련된) 진짜 흥미를 가지고 하면서 아내와 내 말을 경청했는데요, 여태껏 내가 만났던 사람들중에서 가장 흥미로워하고 경청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내가 좀 많이 떠들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많이 놀랐어요. 나이가 들면 ‘아내에게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하던데 단지 아내에게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나이가 들면서 입을 더 다물고 귀를 더 쫑긋이 세울수가 있다면 정말 도인 계열에 속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러면 진심으로 존경받고 사랑받지 싶어요, 내가 제이브를 그날 저녁 이후에 더 존중하고 좋아하게 되었듯이. 하지만 쉽고도 어려운 것이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는 되지 않아요, 마치 골프와 같습니다. 최소한 이런 진실을 이론으로나마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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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구 신부님은 이제 팔순이 훨씬 넘어, 올해 초에야 비로소 은퇴를 (?) 하시게 되었다고 기뻐하셨어요. 우리가 이민초기에 인연이 되어 친구로 오고간지도 이제 몇십년이 되었어요. 나는 그동안 2분의 추기경을 직접 만나 보았고 (그냥 악수하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인간적인 면을 한 이틀 가까이서 본 적도 있었어요) 주교나 다른 높은 지위에 있는 성직자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이름난 성직자들을 삶을 직간접적으로 듣고 보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성인에 (혹은 도인에) 가장 가까운 성직자를 꼽는다면 우리 친구 신부님을 꼽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겠어요. 이분은 젊은 시절에는 (천주교 계열) 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오래하셨지만 중년이 넘어서는 라쉬 커뮤니티를 이곳에도 세우고 직접 몸으로 수십년을 봉사하신, 내가 아는 현존한 사람들 중에서 성자에 근접한 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라쉬 커뮤니티는 정신박약등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독립된 가옥에서 지원자들이 함께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도와주고 돌보아주는, 캐나다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에 퍼진 (정신지체인을 위한) 박애운동 입니다. 한방을 노리거나 한번의 도움으로 극대화된 최대의 결과를 추구하는 나 같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수년에서 수십년을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일상속에서 가족처럼 그들을 돌본다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비효율적이며 하찮은 (?) 목표를 지향하는 일종의 낭비처럼 (?) 처음에는 느껴졌는데요, 세월이 지나면서 차차 깨닫게 되었어요.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를 박멸하는 빌 게이츠도 (큰 돈을 조직적으로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도) 몹시 존경스럽지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스스로의 삶을 (시간을) 나누어 주며, 연연을 맺은 보잘것 없는 장애자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우리 친구 신부님도 (라쉬 커뮤니티도) 아주 존경스럽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결국 이 세상을 사는 인간들의 괴로움은 끝이 없으며 (예를들어 말라리아로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생즉고해가 아닐수가 없겠지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과 그리고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함께 무난하게 잘 사는 것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바로 그 자리에 우리 친구 신부님과 라쉬 커뮤니티가 무언의 가르침을 주면서 조용히 있는 것 같아요. 나는 큰 명예와 높은 지위 그리고 많은 학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이리저리 옅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무거운 계급장이나 긴 가방끈 그리고 커다란 모자에 걸맞는 인격을 가지고 또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이 보지 못했어요. 결국은 배움도 성취도 성공도 다 행복하자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택했던 방법들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주객이 전도된 경우를 많이 보았어요. 인간이란 제 스스로 이룬 성취에 휘둘려 본질을 망각하는 어리석고 약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 관찰의 결론입니다. 나야 성취가 없으니 휘둘릴 것도 별로 없는 좀 이상하지만 안전한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

기골이 장대하던 우리 친구 신부님은 이제 키도 작아지고 체중도 많이 줄어든 조그마한 할아버지가 되셨는데요, 수십년 즐겨오신 아내의 한국음식을 아직도 2회 이상 거뜬히 비우시고 와인도 한잔 하셨어요. 오고 갈때는 (처음으로) 내가 모셔오고 모셔다 드렸어요. 평생 운전을 하신 분에게는 쉽지 않은 양보 (혹은 결정) 이기도 하지요. 다행히 우리집과 가까운 성직자 커뮤니티에 살고 계세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신 우리 친구 신부님은 내가 여태껏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한 손가락에 꼽을 만큼 머리가 명석하고 지혜로운 분이기도 한데요 아직도 머리가 녹슬지 않았어요. 부모가 자식들에 남기는 마지막 선물은 죽음의 과정을 자식에게 보여주면서 자식들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고 또 준비하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작년에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 친구 신부님도 나와 아내에게, 노화의 과정과 노년의 삶을 몸소 무언으로 보여 주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내일을 생각하며 ‘자연스럽지만 힘껏’ 사는 삶을 실천 하심으로써 우리가 주머니에 넣어 드리는 작은 선물의 수백배 수천배 가치의 레슨을 이번에도 저희에게 주고 가셨어요. 언젠가 우리도 헤어질 날이 오겠지만, 이렇게 이역만리에서 인연으로 만나 뿌리와 삶이 전혀 다른 우리가 맺은 우정은, 서로가 서로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영원히 남을 것이라 믿어요. 삶과 죽음 그리고 시작과 끝은 다만 물리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어요. 우리가 맺은 인연과 함께 했던 시간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주었던 좋은 영향들은 물리적인 종말과는 상관없이 남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것이에요. 때로는 대를 이어 전달이 되기도 하겠지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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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권선생 부부와 우연히 한 라운드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요, 벙커샷을 옆이나 뒤로 쳐서 일단 빼내는 부인의 골프를 보면서 좀 놀랐어요.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나는 한라운드에 벙커세이브를 (벙커샷 후에 한번의 퍼팅으로 홀 아웃) 2번씩 하기도 하는 ‘나름대로’ 벙커샷에 일가견이 있는 골퍼인데요, 그 부인이 가끔, 대부분의 여성 골퍼들처럼 깊은 벙커에서 한번에 나오기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어요. 잘했지요? 약은 약사에게 골프팁은 프로나 배우자에게 🙂 세상에는 알아도 안되는 것이 참으로 많고 (하지만 몰라도 되는 경우도 가끔 있지요 그래서 인생이 웃기는 면도 있어요) 또 몇번 된다고 장차 좋을지 안좋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에요. 우리 친구 신부님은, 우리 내외가 더 이상 종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전에 이미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단 한차례도 언급을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들 마음속에 인간적인 미안함이 큽니다.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이곳에 살았던 시절에 우리집을 방문하시면 신부님께서는 어머니께 꽃다발을 선물하신 적이 많았는데요, 언젠가 어머니께 했던 말씀 (내가 어머니께 잘 전달했던) 그 말씀을 떠올리면 요샌 눈물이 나네요. ‘사람이 착하고 훌륭한 삶을 살면 종교와 관계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어요. 권선생 부부도 종교를 가진듯 한데 우리에게 일언반구 그런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내외와 관련이 적은, 예를들면 교민사회 이야기 등도 별로 하지 않았어요. 입을 다물 줄 아는 것. 때와 장소를 가려서 말하는 것 이것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서 마치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 혹은 인생의 진리를 모두 깨우친 듯 망상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요새는 (나만 그런가?) 이런 좋은 태도에 더 감동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들께 감동을 받았다면 요새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두분이 좋아하던 케잌을 앞으로도 아내가 종종 구울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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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와 데이비드는 내게 매주말 함께 라운드를 할 기회를 준 고맙고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IT 관련 일을 하는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인데요 세 사람이 함께 라운드를 하면서 요즘 세상에 우리들 만큼 오래 결혼 생활을 유지 하고 있는 3명이 한자리에 모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농담을 합니다. 마음이 선하고 social IQ 가 높은 사람들이니 배우자에게도 잘 하면서 오랜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닌가 싶네요. 물론 나는 예외로 배우자의 마음이 선하고 social IQ 가 ‘극히’ 높기 때문에 원만한 결혼 생활이 가능했겠지요 :)이곳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서 저녁을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를 보통 ‘small talk’ 이라고 해요. 잡담 정도의 뜻이겠지요. 이 사람들의 부인들이 바로 이런 small talk 을 많이 했는데요, 우리 내외와 케이스 데이비드도 장단을 맞추어 주면서 좋은 저녁 시간을 보냈지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긴 했어요. 대화란 핑퐁처럼 (탁구) 왔다갔다 하면서 가지를 치고 새로운 주제로 변화하고 하는 것이지 싶은데요, 이 두 중년부인들은 핑퐁을 아주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전혀 그들을 나무래는 마음은 없지만, 그들이 ‘미친듯이’ 🙂 아내가 마련한 저녁과 케잌을 맛있게 잘 먹고 되돌아 가고 나서 우리 내외는 공감했어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외모 (몸매) 관리에 못지 않게 마음을 (정신) 잘 관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외모는 겉으로 드러나고 눈에 보이기에 오히려 관리가 수월한 면도 있지만 마음은 잘 드러나 보이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그 관리의 주체와 객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정말 자신을 잘 되돌아보고 reflect 하지 않으면 금새 중년의 뱃살이나 기름낀 혈관처럼 (마음이나 정신이) 퇴락하여 아름다움과 건강함을 잃게 된다.’ 골프를 해본 분들은 이해가 되겠지만, 작심하고 연습했던 (특정 트러블) 상황에서 정신을 100% 차려서 (상황을 명백히 자각하고 전후를 생각하면서) 샷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전에 망쳤던 샷들과 다름없이 물속이나 수풀로 공이 날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신을 똑똑히 차린다고 몸이 (혹은 결과가) 늘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나는 자주 받는데요, 정신마저 차리지 않으면 (길게 보아) 어떤 꼴이 될지 정말 아찔하고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케이스와 데이비드와 함께 라운드를 하다가 벙커샷을 하면 늘 한 사람이 따라와서 곁에 서 있다가 대신 모래를 정리해 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해줍니다. 아마추어 골프 최고수들과 수많은 라운드를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나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어린 시절 들었던 지옥과 천국의 이야기를 다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사람들이 같은 크기의 테이블에서 같은 수준의 음식을 같은 모양의 수저로 먹기는 하는데, 다만 수저의 길이가 1미터쯤 된다. 지옥에서는 남의 접시의 음식을 (수저가 길기 때문에) 퍼다가 제 입에 쑤써 넣을려고 난리를 치면서 온 테이블과 음식이 난장판이 되는데 반하여, 천국에서는 서로가 웃으면서 상대방의 입에 음식을 친절히 넣어주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만족하며 아무런 다툼이 없다.’ 이런 어린시절의 이야기 인데요, 너무나 적나라한 인생의 진실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싶네요. 절대적인 빈곤으로 먹을 것이 없어 괴로운 나라들도 물론 있지만, 어떤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부유함에도 만족이나 행복 그리고 질서가 부족한 경우를 봅니다. 남의 접시의 음식을 마음대로 퍼다가 긴 수저로 제 입에 쑤써 넣으려고 해서 생기는 결과가 아닌가 싶네요. 이렇게 (당하게) 되면 어지간히 마음이 굳은 사람들도 (자기 접시에 음식을 이미 빼았기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접시에서 음식을 빼앗지 않을 수가 없게 되겠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 여겨며 사는 그들의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내가 벙커샷을 할때면 헤븐을 떠올리게 도와주는 이 동반자들과 오래오래 라운드를 하기를 기원합니다. 나이 80 넘어도 걸어서 18홀을 도는 사람들도 있어요. 핸디캡 얼마가 목표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내 목표입니다. 그러면 핸디캡은 내 능력과 투자만큼 저절로 따르겠지요. 이것이 골퍼의 순리가 아닌가 그리고 또 좋은 목표가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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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원장으로 일하는 공립 유치원에 처음으로 한국 아이들이 왔어요. 아이들 하면 무질서와 카오스를 떠올리는 나로서는, 이 아이들을 그리 밉상으로 보지 않는 내 자신에게 좀 놀랐습니다. 엄마 아빠도 요즘 사람들 (?) 같지 않게 좋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아내에게 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음식 솜씨가 좋은 부인의 초대로 저녁을 얻어 먹었어요. 집이 마침 옛날에 내가 골프를 쳤던 그 클럽 바로 근처인데요, 마당에서 앞을 보니 내가 한 2백번은 서 있었을 그 15번 홀의 그린이 정면에 보였어요. 수년전 그때 (자주) 어처구니 없는 퍼팅을 하고선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의 마음을 (?) 삼키며 바라보던 그 앞쪽의 집들에 (그중의 하나에) 오늘 내가 인연이 되어 이번에는 반대쪽 그린을 바라보고 있네요 🙂 인생이란 이런 면이 많은 것 같아요. 이미 지난 일들이 내 삶의 변화에 따라 달라 보이고 재해석 되는 경우 말이에요. 인간만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지요? 나는 그것에 덧붙여 인간만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재해석하는 존재라고도 말하고 싶어요. 과거를 ‘기억’ 하는 것은 죽은 우리 버둑이도 했어요. 강아지때, 개용 발톱깍이로 발톱을 깍아주다가 한개를 살짝 들여다 깍아서 피가 약간 났어요. 우리 버둑이는 죽을때까지 내가 제 발을 쥐면 싫어 했었어요 🙂 여자가 거룩하게 되는 때는 어머니일 때가 아닌가 싶고,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 때는 과거를 기억하고 재해석하여 그 깨달은 바를 진심으로 표현할 때가 아닌가 싶네요.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들의 장래에 큰 기대가 있을 이 부부에게 나는 말했어요. ‘나는 과거 어린 자식에게 어리석은 짓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어떤 시기와 상황에서 그 지나간 과거가 표면에 떠올랐을때 나의 잘못을 인정했고 장성한 자식에게 되풀이 하여 용서를 빌었다. 나의 어리석음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무난히 사회생활을 하며 화목한 가족의 일부로 아직도 (?)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게 이러한 antidote가 (항독성물질?)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공간적으로만 입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15번 홀 그린을 반대쪽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시간적으로도 입장이 바뀐다는 것을 이번에 또한 깨달았어요. 어린 나이에 이민온 우리 내외는 (이민 초기에) 10-30세 연배가 높은 분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그저께 이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어느듯 시간이 흘러 바뀌어 버린 나의 입장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지만 인생은 다만 그 길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 흘러갈 뿐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기억하려 합니다.

나는 운이 좋게도 2개의 전혀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어 내 자신과 소속된 사회를 좀 더 비교하고 또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 싶은데요, 마찬가지로 인간 이외의 유인원들을 연구한 학자들의 도큐멘터리나 책에 관심이 있는 편이에요. 인간의 폭력성이나 (양면성) 우리가 인간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그냥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근원이 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우리 조상과 가까운 유인원들의 (침팬지 고릴라등) 삶을 관찰 연구한 내용들에 관심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유명한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침팬지를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관찰 연구한 내용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침팬지 대가족의 일부가 우연히 분가하여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재정착을 하고 난 이후에 바로 이 ‘거리’가 장차 두 침팬지 무리들이 벌이는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평화롭고 사랑스럽던 침팬지들이 어느날 서로의 무리를 (이전까지 가족이었던) 계획적이고 폭력적으로 공격하여 죽이고 또 잡아온 침팬지를 나눠 먹는 모습을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목격하면서 무었을 깨달았을까요? 우리 인간도 이러한 본능과 자연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침팬지들도 어떤 무리들은 개미를 간식으로 잘도 먹는데 멀리 떨어진 어떤 무리들은 전혀 먹지 않는다지요. 집단 교육의 결과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신체의 변화, 아마도 호르몬 변화에서 기인된 심리적 변화와 사고 전반에 걸친 변화 또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만 는다고 (신체만 변화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피부의 주름보다는 머리와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우리들의 삶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어요? 나는 마흔쯤에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호르몬의 변화와 그에 따른 심리적 사고적 변화였지 싶네요. 아이들 아빠 엄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이런 시기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있으니 서로 대화하면서 이런 시기를 함께 잘 넘겨야 한다고 했어요. 위에서 말했던 그 골프 트러블 샷은 뻔히 눈뜨고도 망치긴 하지만 그래도 알고 망치기를 반복 하노라면 차차 나아지고 또 데미지도 덜 한것 같아요. 사랑스런 아이들을 위해서 엄마 아빠가 앞으로 최소한 십년 정도는 stable 한 가정을 잘 유지하면서 서로의 사랑이 (인간적인 연민과 감사를 바탕으로 하는)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도 봄이면 바람이 거세게 불며 소나무의 분진이 온 천지를 뒤덮습니다. 소나무의 집단 짝짓기 입니다. 소나무가 때를 맞출까요 바람이 때를 맞출까요? 물론 소나무가 때를 맞추며 진화 했겠지요. 우리도 이런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것을 알고 또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고 낫지 않겠어요? 신년 방담이었어요. 올해는 더 규칙적으로 이야기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그래도

처음엔 그저 마음이 그리로 흘러 갔었다
마음을 쏟아 우정을 사랑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을 쫒았다

다음엔 그저 마음이 그렇게 멀어 졌었다
마음을 쏟을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없었다

나중엔 다시 마음이 어쩌면 돌아 오리라
마음을 비워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어쩌면

지금은 그저 조용히 내버려 두자 바란다
나중에 찾을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그대로

그대로 남겨 두고파 혹시나 알아 언젠가
사람의 마음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무었으로 홱 변할런지 뉘아나

하지만 지금 멀어진 내맘을 난들 어쩌리
세상이 모두 그런줄 이꼴이 우리들 수준인줄 왜 모를까만 그래도

석별

잘 가오 그대 행복하시오
축복의 노래로 그대 보내오리다
신의 손길 따뜻이
그대위에 머물리
아름다운님 그대 위에
신의 손길 머물리
내 노래 나래달고 그대 곁 날으리라
내 마음 등불 밝혀 그대 앞길 비추오리
우리님 가시는 길
꽃비단비 내리소서
발자욱 자욱마다
행복 넘쳐흐르소서.

잘 가오 그대 행복하시오
축복의 노래로 그대 보내오리다
우리님 가시는 길
꽃비단비 내리소서
아름다운님 발자욱마다
행복 넘쳐흐르소서
웃으며 함께 머문 기쁨의 이시간이
영원히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오리
설운님 가시오니 내 마음은 울고파라
설운님 가시오니 내 마음은 울고파라.

(작사 유승자수녀 작곡 이종철신부)

라텍스 장갑 같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다양한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내 자신을 멀찌감치에서 떨어져 바라보는 기회도 더 많아진다.

인간들이 스스로 여기기에, 배웠다고 있다고 그리고 안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힘도 주고 거드럼도 피우며 사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나도 점점 닳아 빠지면서 덜 속게 되니 보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그 배움이, 있음이 그리고 안다는 것이 마치 라텍스 장갑처럼, 끼고 있을때는 안팍 구분이 되긴 하지만, 그 장갑 자체는 너무나 얇고 연약하여 하찮은 변화나 충격에도 쉽께 찢어져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안팎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만나서 자식 낳고 몇십년을 살다가도, 마치 영원할 듯한 그 사랑이 얇은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져 남남이 되는 경우도 흔해 빠졌고, 아무리 부유하고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욕망에 사로잡히고 오감에 휘둘리는 인간의 본질 앞에서 단 한치도 더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마치 찢어져 속이 훤히 보이는 라텍스 장갑처럼 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안스럽고 또 내심 걱정되기도 하는 것은,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이런 상황이 나아지거나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마치, 젊은뇬은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보기 좋은데 늙은넘은 아무리 발광을 해도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으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인간들이, 지성이니 사랑이니 철학이니 문화니 종교니 ‘이름붙여 드러내 감동받고 지랄떠는 것들’ 중에서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지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가지 위안이라면 모든 인간들이 점점 ‘level playing field’에 다가 가다가 (강제 평준화 이후에) 종을 치게 된다는 것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어 가는 이야기를 하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 있지만, 반대로 나이를 먹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며 살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The Age of Adaline’ 라는 영화도 있다. 두 영화의 결론은 ‘둘 다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비로소 깨닫게 되는 ‘라텍스 장갑같은 인간’ 이라는 것을 내가 수십년 전에 깨달았었다면 좋았을까? 혹은 죽는날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생각에는 ‘역시 둘 다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