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세번째 이야기

이전 글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은 ‘out of proportion’이라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이영훈선생은 ‘반일 종족주의’ 책에서 한국인 위안부의 숫자가 3,600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했어요. 그대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서 살해된 베트남 양민의 숫자는 9,000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어요.

우리가 위안부문제와 징용문제를 국내외적으로 아주 큰 이슈로 만들고 또 일본정부에 지속적으로 완전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요구할때, 그와 ‘동시에’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큰 잘못에도 완전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우리 국력수준 국가수준에 맞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국제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우리가 존중 받으며, 우리가 하는 말에 힘이 생기고 또 우리의 요구가 정당하고 떳떳한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어요? 스스로의 언행이 앞뒤가 맞지 않고 또 그것을 세상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존중 받을 수 없으며, 하는 말에 힘이 실릴 수 없으며 또 그 요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지 않겠어요? 다만 때쓰고 어거지를 쓰는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게 되지 싶네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라들 사이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베트남전쟁시 벌어진 양민학살에 대한)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국민정서는,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고 또 그들로부터 받아 내고자 하는 것들과 큰 차이가 있어 보여요. ‘전쟁통에 민간인이 죽을 수도 있다. 그들이 베트콩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어디 있는가. 다른나라는 그런 짓 안했나. 이미 반세기도 지난일을 가지고 뭘 그렇게 따지자는 것인가’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여요. 베트남전쟁 보다도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이고 또 사람을 학살한 것도 아닌 이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은 그동안 여러차례 성의를 보이고 노력을 했어요. 수차례에 걸쳐 정부(최고) 차원의 사과와 금전적 보상이 직간접적으로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 속이 후련하지 않고 또 진정성이 부족해 보인다고요? 그러면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는 왜 그들에게 후련하고 진정성 있는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단지 돈이 아깝거나 사과의 말을 할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 이면에 매우 복잡한 국내외의 이슈들이 묻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국민 대다수는 오래 묻혀 있던 부끄러운 과거사를 끄집어 내고 파헤치기를 바라지 않겠지요. 우리 선대 아버지들 삼촌들이 했던 짓이잖아요. 일본은 다를까요?

정상적으로 살려면 그리고 좀 잘 살려면 앞뒤가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은 물론이지만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소리를 내고 더 힘으로 밀어부치기 전에, 과연 무었이 지금 우리들에게 좀 더 앞뒤가 맞는 것인지 생각하면 좋지 싶어요.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베트남 여러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 중에서 비교적 알려진 2곳에 씌어 있는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아래에 옮겼어요.


“디엔즈엉은 예전에 강과 바다가 있던 곳으로, 신성한 이곳에서 락과 홍의 자손이 호앙선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땅을 열고 500년 전 나라를 세웠다. 사람들은 하미, 하깡, 하방, 하록, 지아록 등 마을을 세웠고, 이곳은 예로부터 평화롭게 살면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땅이었다.

먹구름과 천둥, 번개가 치고 적이 마구 몰려와 평탄한 땅에 파도를 일으키고 마을 사람을 한데 모아 마을을 버리게 하고 고향을 버리게 했다. 칼로 끊는 듯 내장이 찢기는 아픔으로 주민들은 땅을 잃고 강을 잃고 바다를 잃고 농사일을 잃고 낚시일을 잃었다. 악독하고 끔찍하여라. 떨어진 목에서 흐르는 피, 경악으로 야자수 숲은 마른 머리카락이 떨어지듯 흩날리고 강은 휘어져 돌고 눈물은 고여서 늪이 되고 만이 된다. 거기에는 단두대가 있었고 교회는 갑자기 잿더미가 되었고 하지아 숲은 마른 뼈들로 흰색이 되었고 케롱 해변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스무 넷째 날 청룡부대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흉포하게도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였다. 하미 마을은 30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는 산산이 흩어지고 태워졌다. 그 지역은 붉은 피로 덮였고 모래는 뼈와 섞이고 집들은 사람과 함께 불태워졌다. 탄 고기와 비린 피를 탐하는 개미들, 화염이 지나간 후 더욱 짙어진 어둠을 생각한다.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가 툇마루에 머리를 떨구고 쓰러져 있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 있겠는가. 아이들이 신음하고 시체가 서로 포개져 쌓여 있다. 아직도 죽은 사람의 피가 말라서 고여 있고 아이는 엄마 배 위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을 찾는다. 어린아이는 입을 다쳐서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다. 더 처참한 것은 그 후에 탱크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악마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지 위의 메마른 뼈, 무고한 영혼의 외침이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진다.

하늘은 어두울 때도 밝을 때도 있는 법. 지난 25년간 고향은 평화롭게 다시 세워지고 디엔즈엉 땅은 다시 비옥해지고 감자와 쌀이 잘 자라고 강의 물색도 좋아져 물고기와 새우도 많다. 당이 갈 길을 인도하여 거친 땅을 개간하였다. 과거 전쟁터의 아픔도 줄었다. 이 깊은 상처를 남긴 그때의 한국인은 지금 찾아와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용서 위에 비석을 세우고 고향 발전을 위한 인도적 협력의 길을 열고 있다. 모래와 소나무는 하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향불은 저세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함이다. 천 년의 흰 구름은 마을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한다.”

2000년 8월 디엔즈엉 당, 정부, 주민

출처 참고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우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출처 참고


출처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두번째 이야기

해마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대학은 한동안 온갖 행사등으로 왁자지껄 활기를 띠게 되요. 서양여자들이 10대 후반에 활짝 꽃 핀 모습을 실제로 많이 본 적이 없지요? 나는 이곳에 살아서 뿐만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 대학이고 또 사무실이 중앙도서관에 위치한 이유로 아주 많이 보았어요. 값싼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쳤지만 어떤 여학생들의 외향적인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넋을 잃게 하는 신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때가 많아요. Dirty old man?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많은 경우에 자연스러운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그 스케일이나 수준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압도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예요.

기분이 좀 나빠졌을지도 모를 당신을 위해 덧붙이자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여성이 일생을 통해서 누리는 아름다움의 양은 어쩌면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마치 코스모스와 장미를 비교하는 것처럼, 이런 서양여성들의 아름다움은 장미처럼 활짝 피었다가 금세 시들어서, 이르면 20대 후반 혹은 30대만 되어도 급격히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흔한 것 같아요. 유전적인 면도 있을 것이고 또 육식을 바탕으로 하는 그들의 식생활과도 관계가 있지 싶네요 🙂

‘있는 그대로 이미 충분히 아름다우며 인공미를 덧붙이는 것이 그 아름다움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많은 경우에 치명적이다’ 라는 나의 생각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시킬 수 있지 싶은데요. 요새는 하도 성형기술이 발달을 해서 성형을 했는지 않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만큼 자연스럽게 성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어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테고 또 그중에는 (개인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는 이유들도 있을꺼예요. 하지만 ‘미용성형천국’이라는 이 표현이 내게는 ‘참되지 않다’ 그리고 ‘속이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영어표현에 ‘out of proportion’ 이라는 말이 있어요. (큰 그림에서 볼때 각각 요소들의) ‘비율이 서로 맞지 않는다’ 이렇게 번역되겠지만, 어쩌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라는 우리표현에 더 잘 대응하지 싶네요. 참된 아름다움, 큰 힘등 세상의 가치있고 좋은 것들은 ‘앞뒤가 맞는’ 경우가 많지 싶네요. 내 자신만 돌이켜 보아도 ‘out of proportion’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았을때’ 여러가지 어려움과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고, 때때로 proportion이 좀 적절해지고 앞뒤가 더 맞았을때 평안했던 것 같아요.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인터넷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안중근의사 어머니의 편지’라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여러가지 조사를 통해서 이 글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께서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가 아님이 밝혀졌어요.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지어낸 이 글이, 어쩌면 안중근의사의 뜻을 더욱 기리고 그 가족의 훌륭함을 세상에 알리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만들어낸 가짜가, 사람들의 입에 이리저리 오르내리다가 어느듯 신문방송에 까지도 인용되는 ‘사실’이 되어버렸던 것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안의사와 안의사의 어머니를 크게 모욕하는 나쁜짓이며 사기인데요, 어쩌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뭐 어때서’ ‘안중근 의사는 위대하니까 이정도야’ 이렇게 생각하지 싶어요. 없는 것을 가짜로 만들어 있다고 속이는 것은 거짓이며 사기입니다. 만들어 내는 사람의 어리석음 욕심과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 사람도 또 그 대상도 (이런 거짓을 통하여) 결코 더 나아지거나 의미있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바로 이런 짓들을 저지르는 정신상태가, 미용성형천국의 예로 표현했던 ‘참되지 않고 속이 비어 있음’ ‘out of proportion’ ‘앞뒤가 맞지 않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어리석음이 지속되는 것은 첫째로는 그것이 어리석음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둘째로는 비난을 당하면 그 좋은 머리와 정력을 동원해서 극렬하게 반발하며 온갖 변명들을 찾아내기 때문이지 싶어요. 그래서 바뀌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겠지요.

이책에서 이영훈박사께서, 위안부문제와 그 전면에 나서 있는 정치단체인 ‘정대협’에 (지금은 단체 이름이 바뀌었어요) 대하여 가지는 생각에 나도 많이 공감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고 또 참되지 않고 속이 비어 있으면, 잠시 반짝할지는 모르지만, 정말 힘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참된 힘은 자연스러움 그리고 진실함에서만 비롯된다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이런 정치단체의 거창한 구호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업적들 보다도, 그 이면에 가려지고만 사람들의 진실된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많아요. ‘정치행위’는 일종의 ‘허구’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어떤 에너지입니다. 마치 자기장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지지 않나요? 하지만 그 정치행위의 대상이 되었던, 예를 들자면 그 위안부 여성들의 삶은 허구가 아닙니다. 현실이었고 실재였지요.

한국에서 두번째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혔던 문할머니. 일흔 전후해서 돌아가신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분이 친구분을 통해서 책으로 남긴 진실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 속에서 행복을 맛보기도 했었다던 그 다사다난 했던 삶이, 이분이 위안부였던 몇년 그리고 정치적인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에 좋다’고 이리저리 끄집어 내서 세상에 까발린 어떤 것들 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고 (듣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고 또 감동적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대가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 일본 사람의 이름 ‘치바 도이치’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글을 마무리할까 해요. 그는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로 있었던, 그 악명 높았다던 일본군 헌병이었어요. 정말 무서운 넘들이었겠지요.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자기들의 영웅을 (이토오 히로부미는 일본 지폐에 등장할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살해한 테러범 안중근을 다루었을까요. 상상만 하여도 몸서리쳐질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젊은 일본넘이 이순신장군을 암살한 후에 한국 감옥에 갖혀 있는 경우라고 하겠지요. 안중근의사는 훌륭한 어머니의 (그리고 아버지의) 교육을 받은 아주 훌륭한 인격자셨고 또 글에도 뛰어난 분이었어요. 치바 도이치는 차차 대화를 통해 (내가 감옥 안팎에 있어 봐서 좀 아는데요 -오잉?- 이야기 나눌 시간이 참 많아요. 쌍방이 할 일이 거의 없는데 뭘 하겠어요?) 인간 안중근을 존경하게 되고, 또한 서로의 입장은 다르지만 안의사가 왜 자기들의 영웅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 이것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안의사께서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셨기 때문이지만, 이 사람 치바 도이치 또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지 싶어요. 안의사께서 대략 서른 그리고 치바 도이치는 이십대 중반이었다고 하는군요.

안의사께서 사형당하던 그날, 문득 치바 도이치가 ‘글을 하나 남겨 달라’고 이전에 부탁했었던 것을 기억하시고 써 주신 것을, 장차 치바 도이치는 가보로 간직하며 매일 안의사의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차차 마을에도 알려져서, 마을 절에도 안의사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고 또 기념석도 세웠다고 해요. 비유하자면, 이순신 장군을 암살한 어떤 일본 젊은이의 위패를 한국의 사찰에서 모시고 또 비석을 세워서 그 정신을 기린 것인데요. 이것 감동적이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무서운 힘을 느끼게 되요. 바로 이런 인간의 진심과 진실이 일본의 힘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동의하기가 그래도 무척 어렵겠지요? 왜냐하면 ‘그깟 왜넘들’이니까요. 한쪽에서는 가짜 편지나 만들어서 반짝 ‘lip service’ 하는 동안에, 다른쪽에서는 매일 그분의 명복을 대를 이어 빌어 드리고 또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분을 기리고 있어요… 진심의 힘 그리고 진실의 힘.


치바 도이치 선생의 후손들이 한국정부에 기증하여,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국보로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안의사께서, 마음에 큰 괴로움을 가지게 된 그 일본 헌병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이 글귀에 담겨 있네요. 안의사께서는 참으로 크고 훌륭한 분이셨지요?

혹시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인간 삶의 진실 그리고 참된 힘은 무었일까요?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모두들 평화를 추구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한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고의로 그렇게 되지 못하게 안팎으로 못살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이 ‘정말 가난한 꼴’이 아니면 도대체 무었일까요?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에서 개탄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일본 대림사입구에 설치된, 안중근의사와 치바도이치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 라고 씌어 있어요.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첫번째 이야기

어떤넘이 어두운 골목에서 강도짓을 목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뒷머리를 벽돌로 내려쳤다고 하자. 그런데 맞은 사람이 격투기 선수였거나 강력계 형사였던 바람에 곧바로 반격을 당해서 강도짓을 하려던 그넘이 오히려 코뼈가 부러지고 떡실신 되어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자. 단지 위협해서 돈을 빼았으려 했던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뒷머리를 벽돌로 가격한 경우’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넘이 퇴원하고 나서 나중에 ‘폭력은 나쁘고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이렇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복잡해지는데, 만약에 당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그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그 강도의 하수인으로 골목 끝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당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였었다면, 폭력은 나쁘고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며 ‘평화’를 외치는, 그 강도넘의 자식 손주들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눈치챗지? 일본과 한국의 과거사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사는 그대와 내게 끼치고 있는 영향을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카르마와 그 엄청난 에너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히로시마 핵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늘 ‘평화’를 기리고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즐겨 찾는다던 이곳의 아름다운 그 식물원, 그곳 한켠에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평화’의 불꽃과 히로시마에서 가져온 기념석이 있다. 오래전, 아름답게 단장된 이구역에 우연히 발을 들였다가 플라그에 (설명판) 씌여진 ‘히로시마’ ‘평화’ 이런 내용을 보고서 마음에 파장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그래도 들어보기라도 해본 사람들이니, ‘perception은 육감의 경험에서 비롯되나, 설령 그 경험이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사람마다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서 상이한 perception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내가 하는 이야기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대와 내가 ‘해탈을 증득하고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지, 어떤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책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를 강하게 표현하거나 혹은 그것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전서울대교수 이영훈선생과 다른 다섯분의 학자들이 쓴 책이다. 이영훈선생 말씀처럼, 여태껏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출판된 적이 역사상 없었다. 또한 이토록 충격적으로 우리모두를 발가벗기는 책도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리고 팩트에 근거하여 직설적으로 하는 책도 없었다. 물론 이분이 알려주는 사실을 넘어, 이분의 주장을 100%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개인이 해탈 열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또 괴로움을 참으며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껍질을 깨고 나와서 병아리가 되고 또 장차 훨훨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할 수 없고 미룰 수도 없다. ‘이런 책을 왜 썼어요?’라는 질문에, 이영훈선생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가 크게 망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하였다.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직장생활의 어려움

그저께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곳에서는 한번 ‘정해진대로 늘 하듯이’ 해보고 안되면 ‘안되는가보다’ 하며 지나가거나, 내버려 두거나 혹은 다른 방법을 나중에 찾아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언젠가 듣고서 나도 상당히 공감했는데, 영국과 일본에서는 무슨 새로운 일이나 혹은 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회의’를 한다고 하더라. 또 일전에 한국군 공병으로 미군 공병들과 작전을 많이 해본 분의 이야기에서, 미군 공병들은 정해진 교본에 따라서, 못 하나 나무 한쪽도 곧이 곧대로 따라서 하기 때문에, 같은 시설을 완공하는데 한국군 공병보다 시간도 더 걸리지만 정말 큰 차이는, 교본에 나오지 않은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더라는 것이 (따라서 문제 해결을 자기 윗선으로 돌린다) 기억이 난다. ‘전혀 모른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지 싶다.

이곳에서 예전에, 많이 배우고 성공한 중국인들과 가끔 일을 같이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방식은, 위에서 묘사한 영국 일본의 회의 문화 (머리를 함께 모아서 새로운 것에 대처하자) 혹은 미국의 교본 따라하기 (자기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만든 것을 따라서 하고 그것을 넘어가는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절차에 따른다)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제기업에서 함께 일했던 어떤 중국인 매니져가 이런 말을 내게 직접 하기도 하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어. 자기가 좀 적당히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저렇게 꾸물거리며 의논을 하고 절차를 밟아야 하니 머리가 좀 모자라는 것 같아’.

그때는 나도 공감했었고 또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우를 경험했던 일도 많았고 또 지금도 경험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세상의 다양한 면들을, 흡사 양파의 껍질처럼 여러 겹의 그리고 여러 수준의 진실들을 차차 보게 되니 생각이 달라지더라.

그렇게 개인적으로 똑똑한 중국인들 그리고 인도인들의 역량을, 적재적소에서 잘 발휘하게 해서 결국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강대국을 건설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그 영국 일본 미국인들이고,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그사람들이 머리를 모아 만들어내고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절차와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 개인 차원에서 동일한 시간에 벽돌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데는 이 사람들이 아마 그 중국인 매니져 같은 사람들보다 뛰어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 벽돌의 질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벽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오랜 기간에 걸쳐서 큰 건물들을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짓는데는 이 사람들이 더 뛰어 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머리를 모아서 함께 계획을 하고 합의를 하고, 그 합의된 절차와 방법을 시스템을 만들어서 적용시키고 또 적절한 자원을 분배하는 그런 능력에는, 개인의 뛰어남 보다는, 개미처럼 조직의 일부로 개인이 따르는 그런 능력이 좀 더 필요하지 싶고, 내가 만났던 그 중국인들 그리고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만든 어떤 시스템이나 절차와 방법을 자연스레 받아들여 따르는 것이 어렵지 않은가 싶다. 이것이 모이고 쌓이고 지속되면 한 나라의 국민성 그리고 어떤 집단의 특성이 되는 것이리라.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것이 얼마나 뿌리가 깊고 또 직장생활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아내와 내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이곳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느꼈고 또 지금도 느끼고 있다. 이것 자각하기도 어렵고 또 자각하더라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붓다께서 가르치신 아상과 (我相 ‘스스로가 가지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 –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실체가 없는 허구라고 한다. 중요한 가르침이다)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로 알고 나서도 자기 생각의 습관 그리고 마음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다.

요새도 헬조선이니 하면서 이민이니 무슨 스칸디나비아 라이프스타일 이야기를 하던데, 이렇게 잘 살게 된 한국 사람들이 옛날처럼 먹을 것이 부족해서 혹은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렇게 떠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위 ‘자아실현’ 그리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찾아서 가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꿈꾸는데로 그곳에 가서 살게 되더라도 바로 위에서 말한 이런 차이 때문에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곳에서 직장도 다니며 상당한 정착을 이룬 후의 이야기다. 다시말해 세탁소나 구멍가게 하며 사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고, 퍼런 눈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이야기하는 그 사람들과, 이해관계 속에서 다투고 따지고 조정하면서 매니지를 하기도 하고 매니지를 받기도 하며 사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데, 당신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오늘날의 당신을 만들어 준, 그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언행들이, 그곳에서는 특이하거나 혹은 괴이한, 다시 말해 문제성 언행으로 보여질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데, 이것 깨닫기도 어렵고 또 깨닫고 나서도 바꾸기는 더 어렵다. 우리의 DNA에 ingrained 되어 있다. 세포에 각인되어 있고 또 그것이 대를 잇는다. 그래서 머리 좋은 이민 2세 3세 중에서 의사나 공학박사는 많지만 성공한 변호사는 찾기가 좀 더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좀 사는 곳에서 인간들이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인간과 인간의 이해 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충돌’이고 (혹은 인간들이 만든 집단끼리의 충돌) 그 해결책이 미분적분이나 화학구성의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도둑을 잡으려면 경찰이 더 세야 하듯이, 그런 충돌을 해결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할려면, 그들보다 그 방면에서 한 두 수 더 높아야 되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우리 아이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 거라. 돈을 많이 벌게 되서가 아니라, 엄마 아빠가 이민와서 어려워 하는 그 게임을, 부모를 대신해서 종결 짓고 한을 풀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물론 아이는, 내가 하는 이런 생각을 상상해 본적조차 없겠지. 어제 밤에 이 이야기를 한번 시도해 보았는데, 무슨 클라이언트 대하듯이, 예의바른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지키더라 🙂 지금 생각하니,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이런 것인가 상상하며 쓴웃음이 지어진다. 해탈이 무었인지도 모르고 해탈에 대한 생각조차 아예 없는, 그래서 얻을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또 그 주체도 없고 헐…

헬조선 진단서 1

최근 자료들에 따르면, 권위 있는 국제기구들이 나라들을 구분할 때 대한민국은 확실하게 선진국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 헬조선 하면서 이민을 고려한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흡사,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멀쩡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근육미 넘치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 죽겠다 죽겠다 하는 꼴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런 기사들이 가끔 신문에 나는데, 나는 원본 내용들을 찾아서 자세히 살펴본지가 꽤 오래 되었다. 이번에도 그 레가툼연구소의 웹사이트를 살펴 보았는데, 이전에 다른 조사들에서 보아왔던 어떤 패턴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어쩌면 ‘헬조선 진단서’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아래에 보이는 그림이 바로 그 레가툼연구소의 2018년 리포트인데, 각 나라들을 경제, 안전, 자유, 환경등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순위를 매기고 그 합산으로 전체 순위를 정하는 식으로 리포트가 작성된 듯 하다. 내가 검은색으로 표시한 항목이 ‘Social Capital’ 이라는 항목인데 오른쪽에 설명이 붙어 있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간의 유대, 사회지원망, social norms 그리고 사회참여등의 역량을 측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 ‘social norms’라는 것은 ‘구성원들의 언행을 제어하는 상호간의 비공식적인 이해 혹은 약속’이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더라. 다시말해 ‘사회 구성원 다수가 볼때, 무었이 좋고 나쁜지 어떤 짓이 부끄러운지 아닌지를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하고 또 서로 지키게 하는 어떤 약속 혹은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 순위에서 1,2위를 차지하는 노르웨이와 뉴질랜드가, 이 항목에서도 각각 3위 1위에 랭크되어 있는데 반해서, 한국은 78위에 랭크되어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권위 있는 조사결과를 보자.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소위 말해서 선진국 36개 나라만 속해있는 OECD회원국 간의 행복도 조사 결과를 비교한 것이다. 한국도 여러 항목들에서 다른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함은 물론이려니와 어떤 항목에서는 톱을 달리기도 한다. 역시 검은색으로 표시된 ‘Community’라는 항목을 주의해서 보자. 위에서 본 ‘Social Capital’과 거의 동일한 항목이다. 뉴질랜드가 거의 톱을 달리는데 반해서 한국은 그야말로 ‘빵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Social norms’가 무었이라고 했던가? ‘사회 구성원 다수가 볼때, 무었이 좋고 나쁜지 어떤 짓이 부끄러운지 아닌지를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하고 또 서로 지키게 하는 어떤 약속 혹은 힘’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 ‘social norms’가 0점인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사회 구성원 다수가 무었이 좋고 나쁜지, 어떤 짓이 부끄러운지 아닌지를 모르거나 동의하지 않고, 또 나아가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이런 사회라면 그 구성원간에 유대나 지원이 가능할까?

헬조선? 자신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 이 모두가 그들 탓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남 탓하는 그 모습이 또한 헬조선의 반증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런 ‘강대국’을 만든 한국인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존경해 마지 않는다. ‘선진국’?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