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식물원 그리고 투표

이런 곳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좋아 보이나? 그래도 내일이면, 바쁜 와중에 먹는듯 마는듯 점심을 먹었을지도 모를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밖으로 나오지 않나. 시작은 다를지 몰라도 끝은… 🙂

봄을 맞은 식물원에 아름다운 꽃들과 푸른 잎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을 만끽하며 호사를 한다. 산림욕이니 뭐니 해쌋더만,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리 그리고 내음에 흠뻑 빠져 있다 보면 심신에 좀 베어들기도 하겠지? 기어 나오자 말자 피톤치드니 치유니 떠들어대며 모조리 뱉어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식물원 옆에 작은 증기기차 박물관이 있는데 마침 한구석에 국민 투표를 미리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준비를 해 두었더라. 국회의원 뽑아 다수당이 집권하여 내각을 구성하는 것에는 그대가 흥미 없을 테지만, 이번 투표에 2가지 국민 여론조사가 덧붙어 있더라. 여론 조사 결과로 입법이 바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어쩌면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첫째는 ‘안락사를 동의하는가’ 하는 질문이었고, 둘째는 ‘대마초를 합법화하는데 동의하는가’하는 질문이었다.

언젠가 블로그에 쓴데로 어떤 나라들에서는 00주 이하에 태어나는 미숙아를 살려 주지 않는다. 과학이 증명하기를 (대다수는) 살아도 본인과 가족에게 너무나 큰 고통과 짐을 오랜 세월 지워준다고, 태어나면 한번 엄마품에 안겨 주고선 조용히 데리고 나간단다. 물론 예외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면에 다른 어떤 나라들에서는 00주 밖에 되지 않은 미숙아를 어떻게 살려 냈다고 무슨 의술의 기적을 발휘한 영웅담처럼 알려지곤 하던데, 내 주관적인 생각에는 선무당이 사람 여럿 잡는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측면이 더 많지 않은가 싶다. 인간들이 의식적이고 또 조직적으로 하는 모든 행동에는 그 인간과 집단의 의지와 철학이 담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와 철학의 크기와 깊이에 그 인간과 집단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나라를 포함한 소위 선진국들에서는 죽음에 대한 개인의 선택을 더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사회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또 그에 따른 법적 제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 생명은 (당신의) 신이 내려주신 절대적인 가치가 있어서 내 생명도 네 생명도 결코 인간의 의지가 개입 되어서는 안된다고? 글쎄. 그렇게 떠들어 대다가 나중에 당신 자신이나 가족들이 당신의 부매랑에 맞아 엄청 괴롭게 갈지도 모른다.

이 나라의 무료의료보험은 (외국에서 여행 온 사람들까지 치료해 준데요) 많은 나라들에 부러움의 대상이라더라. 특히 노인들을 위한 의료와 복지는 세계에서 손꼽힌다고. 그런데 훌륭한 의료보험이나 평등한 의료시스템은 어떤 것일까? 이나라 사람들 다수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다. 암처럼 시간을 다투거나 사고가 아닌 경우, 더 젊고 더 일을 할 시간이 많이 남은 사람들에게 수술기회나 의료자원이 우선적으로 배분되는 것이 당연하다. 먼저 등록했다고 먼저 수술해 주는 것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니까…

대마초는? 이나라 국민의 레크리에이션 활동에 차지 하는 비중이 꽤 크단다 🙂 대량으로 사고 팔며 장사를 하거나 다른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개인적인 사용은 경찰도 보통 눈감아 주는 편이라는데, 이것을 합법화하여 부작용도 줄이고 또 실제로 의료용이나 어떤 삶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길을 더 열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많은 선진국에서도 아직 전면적으로 합법화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하더라. 옛날에 시골 할배 할매들이 밭 귀퉁이에 양귀비를 심어 두고서 ‘아이고 팔다리 쑤씨네 하나 뽑아서 삶아 먹을까’ 했다더만. 나도 언젠가 나이들어, 항공사진 판독후에 우리집 문을 두드리는 경찰에게 ‘아이고 늙은 내가 뭘 아나. 그저 삼배 옷이나 하나 만들어서 여름에 시원하게 입으려고 대마 몇 그루 심었어’ 오리발 안 내밀어도 되지 싶다 🙂

학문 하악문

처녀 총각 시절 아내가 내게 들려준 유머인데,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떠올릴때 마다 웃음 짓게 한다.

  • 도서관에서 –

학문을 넓힌다.
학문에 힘쓴다.
학문을 닦는다.

  • 그리고 화장실에서도 🙂

시스템 확인

그때 오사카는 신입사원들이 시작하는 시기였다. 여자 신입사원들이 한결 같이 입고 있었던 그 베이지색 바바리처럼, 점잖고 튀지 않는 건물 디자인과 외벽 색깔이 한결 같아 보였던 오사카 시내. 우리 내외는 그중 하나에 들어가 일층에 있는 아케이드 상점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한쪽에는 수십명 신입사원들이 모여 있었는데 아마도 첫날 소개식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문득 나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아내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나는 그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아내의 가방을 들고. 들어가는 일본인 여자 두세명이 아마도 짧은 농담을 던지며 웃으며 갔던 기억이 난다. 잠시후 아내가 랄랄라라 하면서 나오는데, 동시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 혹은 보안회사에서 나온 듯한 남자가 급히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며 큰 소리로 무언가를 외쳤다.

나는 이게 무슨일일까 왜 남자가 갑자기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면서 소리를 지르는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내를 바라 보았다. 아내도 의아한 듯. 그때 아주 적으나마 이것이 혹시 아내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서늘한 느낌이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밖으로 점잖게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별 일 없었지?’ ‘응. 그런데 물내리는 손잡이를 찾는데 좀 어려웠네.’ 공용화장실은 포함한 일본의 거의 모든 화장실에는 비데가 설치되어 있고 때로는 복잡해 보이는 버턴이 여러개 달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는 그 중에서 물내리는 버턴을 찾느라 애를 먹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찾았는데?’ ‘이곳은 새 건물이라서 그런지 더 복잡해 보이더만. 여기 저기 찾아 보다가 한쪽 구석 밑에 빨간색 버턴이 있길래 누르고 나왔지.’

그것은 비상벨이었다. 일본에 있는 다른 많은 시스템들처럼, 그 시스템도 완벽히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목격하였던 것이다 🙂

박부장 개부장

혹시 ‘자체발광 오피스’라는 티비 드라마를 본적이 있나? 최근 블로그에서도 짧게 언급했었다. 인생과 인간을 아주 잘 묘사하고 또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많은 생각과 토론의 소재를 제공하는 ‘훌륭한 책’과 같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서 수상한 신예 작가 정회현님의 주옥과 같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수준의, 한국판 인생철학 대사들도 참 훌륭하고. 두고두고 다시 보며 되씹고 있다. 여기 나오는 ‘박부장=개부장’ 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성도 직급도 또 하는 짓도 똑 같은 자와 오래전 잠시 직장 생활을 했었던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내가 이곳에 오기전 모국에서 만났던 실존인물 ‘박부장=개부장’은 이 드라마에 나오는 박부장과 그의 상사 한 본부장을 합친 x2 라고 할 수 있겠다. 궁금하거든 드라마 한 번 보던지 🙂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드라마에 그런 캐랙터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런 종들이 매우 흔하던지 (계속 번식 중?) 아니면 모국의 직장 환경에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자가 어떤 자였던지는 이 드라마에서 매우 잘 묘사되고 있으니 내가 길게 언급 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한 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소개 하면서 내가 발견한 ‘인간의 진면목’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강제적인 야근에 시달리는 부하직원들을 매일 밤 찾아와서 족치는데 용이한, 회사 바로 앞 아파트에 살던 ‘박부장=개부장 x2’ 이 한번은 부서원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무슨 생일이나 그런 날이었겠지.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그 별로 유쾌하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때우려고 하고 있었는데, 마침 책꽂이에 꽃혀 있던 잡지책 (출간한지 오래된 학생잡지 그리고 같은 달 치의 잡지가 두어권 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내 눈길을 끌었었겠지) 한 권을 빼서 흩어 보다가 이자가 신입시절, 입시를 앞둔 후배 고교생 독자들을 위해 기고했던 글을 발견하였다.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는 교훈적인 내용에 덧붙여 자신이 어떻게 공학쪽으로 진로를 결정했으며 그 결과 의미있고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인생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이런 이야기들을 진실하게 나눌 의지와 능력이 이자에게도 있단 말인가? 내가 매우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수 십년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지 않겠지.

빛과 어두움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뒤섞여 공존하는 것이다. 개부장들에게도 당신에게도 또한 내게도. 하지만 흡사 우리가 은하수를 이야기 하고 또 어떤 중요한 가치를 생각할 수는 있으되, 그 은하수에 결코 말로써 다다를 수 없고 또 그 가치가 생각만으로는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그 빛 또한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오늘 바로 이순간, 어떤 식으로든지 의식적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그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하류인생 그리고 악인들도 어떤 죄책감이나 선악의 느낌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선택에 영향을 끼칠만한 힘과 기운이 없으니 그저 짧게 왔다가 쉽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리라. 그들에게는, 빛이 이론적으로는 존재하되 실제로는 그들의 삶 속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영향력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점심시간에 신나게 산에서 달리기를 하고 사무실로 되돌아 오는 길에 종종 비만한 사람들을 지나친다. 나는 늘, 누구나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나처럼 이런 시간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지나칠때 나는 늘 두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이 사람에게 현재의 어두움이 너무나 짙어서 (고도비만) 그것을 빛으로 몰아 내기가 (감량을 하고 체력을 길러 결국 산을 뛰게 되는 그 과정이) 너무나 힘이 들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이런 고도비만이 내게도 어떤 다른 면에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다. 이 사람의 어두움은 눈에 뜨이고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어떤 어두움은 잘 보이지 않아 더욱 빛으로 몰아내기가 힘이 들지도 모른다.

어두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면 빛으로 몰아 낼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교묘한 과정을 통하여 어떤 어두움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때로는 남들에게) 정당화시킬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모르게 늘 추구하며 산다. 그래서 책을 읽고 산을 오르고 여행을 하며 자주 자신을, 먼 거리에서 홀로 조용히 되돌아 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어두움과 그것을 위장하고 정당화하는 그 뿌리 깊은 메카니즘을 보아야, 빛으로 그것들을 몰아 낼 가능성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만한 사람치고 운동 좋아하는 사람없고 또 아마도 운동을 좋아하지 않으니 비만하게 되었듯이, 어두운 사람치고 빛 좋아하는 사람없고 또 빛을 추구하지 않으니 어둡게 된 것이다. 어떤 순간이 지나면, 이론적으로는 아직도 가능하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어두움을 몰아낼 가능성이 사라진다. 내가 스쳐 지나갔던 그 뚱뚱이들 중에서 몇 명을, 장차 언젠가 내가 산에서 마주치게 될 것인가?

내가 이곳으로 떠나기 위해 사직하고 작별하던 그 날, 나는 다른 상사 동료들을 찾아 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자가 나를 불렀다. 동물적인 감각이 있으니 알아 챗겠지. 내게 묻더라. ‘나는 너를 이곳에 채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또 한때 너의 상사였는데’ (왜 인사하러 오지 않느냐?) 내가 정확히 어떤 대답을 했었던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자의 반응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한 두 마디 하는 순간 딱 안색을 바꾸더니, 알았으니 가보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때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아마 표정과 눈빛으로 분명하게 말했었으리라. ‘당신이 받을 감사와 상은, 당신 스스로 항상 넘치게 당신 자신에게 주었지 않느냐. 내가 더 줄 무었이 있다고 달라는 것이냐?’. 지금은 후회한다. 그저 통속적인 감사의 말을 한 두마디 던지고 걸어 나왔으면 더 이상의 기억도 또 이런 글도 없었을 것을. 하지만 인간은, 그 연속극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잘 묘사하고 있듯이, 모든 관계와 이벤트 에피소드를 통해 생각하고 배우고 또 성장한다. 죽는 순간까지.

나와 잠시 인연이 있었던 그 ‘박부장=개부장 x2’ 지금은 인생의 산을 즐겁게 사뿐사뿐 뛰어 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더 큰 어두움 속에 같혀 신음하는 중늙은이가 되어 있을까? 전자이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때 고마웠고 또 미안했었다는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