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과 고토 – Win Win

어제 코라 이야기를 했더니, 언젠가 보았던 한국 가야금과 일본 고토, 이 비슷한 두개의 전통악기에 관한 어떤 티비 도큐멘터리가 생각이 나네요. 나는 가야금과 거문고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인데요, 그때 내가 보고 감동했던 내용은 두 악기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또한 인간의 이야기기 때문에 오래 기억이 나요.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하고 또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들도 세상에 있으니, 가야금과 고토를 비교하면 어떤 악기가 더 우수한가 이런 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가 ‘politically correct’하자고 ‘세상 모든 문화는 다를뿐이지 우열은 없다’ 이렇게 겉으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다만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낫고 못한 우열이 있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이 솔찍한 심정이지 싶네요.

예를 들자면 나도 한국의 음식과 다른 아시아권 혹은 서구권 음식을 비교하면서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는 동남아시아 음식을 좋아한다’ 이런 말을 했을때, 나는 속으로 ‘그들이 음식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들이 (한국음식과 비교하면) 도대체 무었이 있는가’ 이따위로 생각을 했었다니까요 🙂 다른 방면에서도 그렇지만 음식을 통해서 보아도 한국인의 뛰어남이 음식에 그대로 베어 있다고 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동시에 그 음식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 혹은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음식에는 한국인의 번뜩이는 총명함과 재주가 베어있음과 동시에 다른 문화권에서는 광범위하게 다량으로 사용하지 않는, 강한 맛을 내는 향신료들을 자주 또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이것 우연도 아니고 또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지 싶네요.

좀 옆길로 셋는데요. 다시 가야금과 고토 그리고 win win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한국 최고 가야금 명인중의 한분이 일본에 갔어요. 그리고 일본 고토 최고 연주자와 함께 연주를 하고 또 대화를 하면서 가야금과 고토에 대해서 서로 배우고 또 좀 비교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두분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또 연세도 좀 있었던 것 같네요. 서로의 연주를 존경하며 예술가의 태도로 감상하고서 거의 마지막에 일본 고토의 명인이 말씀하세요 ‘나는 고토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고토를 위해서 일생을 바쳐왔어요. 오늘 한국의 가야금을 알게 되고 또 그 연주를 직접 듣게 되니, 나는 한국의 가야금이 (낼 수 있는 소리와 기교 그리고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의 광범위성등을 고려할때) 일본의 고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악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이었다고 나는 기억합니다. 이렇게 도큐멘터리는 끝이 났어요. 나는 악기 비교 연주도 감동적이었고 또 가야금을 연주했던 한국의 명인도 훌륭하셨지만, 자신의 솔찍한 감동을 밝힌 일본의 고토명인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게 되었어요.

세월이 지나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가야금이 더 나으냐 고토가 더 성능이 좋으냐 이런 이야기도 세상을 살면서 필요는 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정말 더 필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야금이나 고토를 가지고, 무었을 배워서 어떤 연주를 하며 어떻게 사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는, 어떤 장비 얼마나 좋은 무었을 ‘가지고’ 있는가가 인간의 행복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교훈을 나는 그 분을 통해서 배웠어요.

그 고토의 명인은, 그의 솔찍하고 훌륭한 태도로 말미암아 결국은 가야금도 훌륭하고 또 고토도 훌륭하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진심으로 동의하게 하는, 소위 말하는 win win을 만들어 내신 것이지요. ‘사자가 세냐 호랑이가 세냐’ 혹은 ‘재주 좋은 한국 음식이 무조건 튀기고 보는 짱게 음식보다 더 나으냐’ 하는 그런 수준보다 한두단계 위로 올라가신 것이지요. 그것이 정말 이기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는 결코 이기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일부러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위로 올려주고 또 자신도 더불어서 한두단계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간 것이지요. 이것 참 고수들이 만드는 win win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눈치 채셨나요? 일부러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에 바람을 잡았던 것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으니 하고 싶네요. 일본을 이기고 싶지요? 일본에게 존경받고 또 최소한 대등한 관계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지요? 그러려면 시장에서 다투는 잡상인들처럼, 우악스럽고 큰소리로 어거지를 써서 상대방의 입을 막고 내가 원하는 것을 힘으로 빼앗아 보려는 시도를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해야 해요. 서로가 상대방을 성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한 상대가 여태껏 내게 했던 것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순진한 이야기라고요? 교활한 상대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가는 당장 잡아먹힌다고요? 오십년전 백년전보다 세상은 훨씬 더 발전하였고 또 우리나라의 힘도 엄청나게 세졌어요. 누가 가야금을 가지고 있나요? 그러니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상대방과 발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지 싶어요.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특히 상대가 나보다 힘이 더 센 경우에는, 내가 ‘힘으로’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들’ 수는 결코 없어요. 언젠가 블로그에서 말했듯이 영어권에서는 ‘you earn respect’입니다. 인정과 존경은 ‘내가 무었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입니다. 어떤 힘으로도 그리고 아무리 악을 쓰고 발광을 해도 상대가 나를 참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외교란 ‘잘 치장된 방에서 잘 차려 입은 신사들이 매너있는 말을 나누고 있을때, 옆 방문을 슬그머니 열어서 그곳에 앉아 있는 사나운 불독개를 슬쩍 보여주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어요. 이렇게 싸워야 합니다. 당장 잘 차려 입은 신사에게 욕을 하고 구정물을 끼얹으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나중에 정말로 그넘의 불독에게 물려서 크게 다쳐요. 이것 알아채고, 상대방 불독이 지금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좀 조심해서 상대하면서, 우리도 불독을 기르고 또 살살 달래서 우리 불독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자꾸 상대를 해야 결국은 균형이 잡히게 되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커다란 불독으로 상대방이 우리에게 나쁜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면서도, 서로가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오가며 좀 국민들끼리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모두가 바라는 것 아닌가 싶네요. 그곳에도 좀 미친넘이 있고 그넘이 태평양 건너에 있는 더 미친넘과 한편이 되어 자기들의 이익을 함께 쫓는 꼴을 보면 우리는 불안하기도 하고 또 불쾌해요. 하지만 누구나 또 어떤 나라나 자기 능력껏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나무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길게 보면 이런 미친넘들은 그런 선진국 이런 현대사회에서 오래가는 주된 세력이 될 수는 없어요. 마치 우리나라에서 군사쿠데타가 더 이상 실제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세상은 돌아가는 어떤 방향과 수준이 있고 얼마 이상은 뒤로 혹은 아래로 되돌아 가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상대방까지 우리 가야금이 더 좋다는데도 우리가 너무 자신감 없이 행동해 온 것은 혹시 아닌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우리의 가야금에 대한 참된 자심감과 믿음을 스스로가 가질 수가 있을지 그래서 장차 우리도 일본의 고토가 매우 훌륭하다고 짐심으로 칭찬해 줄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 해야 되지 싶어요.

가야금을 연주하는 우리가 차차 고토를 연주하는 이웃과 대등하고 성숙한 관계로 서로의 음악을 평화롭고 진심으로 즐기게 되길 바래요. 인생은 싸우고 다투다가 가기에는 아깝고 또 한번 뿐이잖아요? 아이에게 늘 말해요 ‘자유롭게 살거라’ 물론 내가 저질렀던 과거사가 찔려서 또 내가 만들었던 카르마가 무서워서 하는 말인 것도 맞아요. 그래도 아이는 ‘응 아빠 알았어’ 합니다. 무심하고 진심인것 같아요. 그러면 되지 않나요? 우리 이렇게 좀 살아요 🙂

멋진 고토연주 그리고 이 아름다운 연주자가 고토에 맞춰서 부르는 우리의 아리랑을 함께 들어 봐요.

영화속 명장면 명대사 1

상류사회 (2018)

“이 나라가 좋은 게 다들 억울해. 자기 자리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어, 다들 저 꼭대기가 자기 자리라고 믿고 살아.”

“이 나라가 좋은 게 다들 부족해. 자기가 가진 돈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부패한 정치가 그리고 그와 공생하는 부정한 사업가. 그들이 자신들을 성공을 자축하면서 슬쩍 알려주는, 성공적인 정치와 사업의 비결, 그 비옥한 토양.

 

Monsignor (1982)

“I feel I belong nowhere. I fooled the church. I fooled myself.”

“That happens.”

“And then what?”

“You come here as I do and pick the olives out of the trees. Everyone transgresses without end. It’s the very nature of our existence.”

사랑하는 교회를 (바티칸) 위해서 기꺼이 독배를 손에 든 주인공 신부. 방아간을 하다보면 떡고물이 묻게 마련이니, 이래저래 완전히 쳐박음.

장차 교황이 되실 분, 독배를 손에 든 주인공 신부를 깊이 이해하고 좋아하고 또한 감사하는 추기경, 그분 고향 마을에 함께 올리브를 따러와 잠시 고요한 오후를 보내고 나서 신부가 하는 말.

“X된 기분입니다. 교회를 개꼴로 만들었고 내 자신을 뵹신으로 만들었어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요?”

“나처럼 여기와서 나무에 올라 올리브를 따는 것이지. 사람들은 끝을 모르고 무리한 짓을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인간 존재의 적나라한 본질이다.”

 

밀양 (2007)

“지랄하네 주방까지 기들어와 가꼬. 멜로드라마가 따로 없다 이자슥아.”

“내가 신경마이 쓰인다 오늘. 니가 이해를 해야지.”

“암만케도 니는 인상이 아인나 멜로쪽은 아이거든. 코메디쪽이지. 사람이 풍기는 이미지가 있는데.”

“멜로가 뭐 주인공 따로 있나. 코믹멜로라는 것도 있다 아이가.”

“아 오늘 시간이 와이래 안가노. 전화 한번 해보까.”

“이 음악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좋아. 음악 자체가 수준이 있다 아이가.”

“수준은 자슥아. 다 골라 쓰는기지.”

“선곡하는 것도 수준 아이가 임마. 니는 모른다.”

“정신좀 차리라 김사장.”

하수고수

1. 있는 줄 조차도 모른다. 봐도 안보이고 들어도 안들린다. 잘 모른다고 누가 좀 말했다고 길길이 날뛰며 죽이려고 한다.

2. 보고 듣고 감탄하며 사진을 마구 찍는다. 사진은 묻히거나 업로드 해도 정작 본인은 안 본다. 자기 인생과는 거의 무관한 수준.

3. 혼자서 와보고 또 와보니 너무 좋아서 사서 가지려고 시도 한다. 구입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다양하고 집요한 시도를 통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가진다. 일종의 비약이다. 하수들을 알아 보긴 하는데 피한다.

4. 오랜 씨름 끝에 어느듯 하나 되어 누가 무었을 시도 했었던지 조차도 흐미해지고 그냥 하루하루 살게 되었다. 이젠 옛날에 생각했었던 그 의미도 기억에 없고 또 원했던 것을 가졌어도 가진 줄도 잘 느끼지 못한다. 흡사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처럼…하수들이 자기들 친구인 줄 여기며 친하게 대해 준다… 잘도 어울린다.

그때 그 사람

Silly old Gordon fell in a ditch…

이자는 허우대도 멀쩡하고 또 한때 큰 회사에서 돈을 주무르는 일도 한적이 있어서, 한 큰 종교단체에 사무장 비스무래한 자리를 꽤차게 되었다. 매우 훌륭한 분을 근처에서 자주보며 그 큰 그릇의 언행과 삶을 보면서, ‘혹시 나도 격이 비슷한 것이 아닐까? 나 정도면 어쩌면 이런데 좀 끼일 수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자가, 자기와 유사한 종류의 인간들과 함께 일을 했었다면, 그들이 어떤 이유건 방식으로건 이자의 발상에 재동을 걸어 일종의 경고를 해주었을 테지만, 이자의 주위에는 그런 유용한(?) 자들이 없었다. 일단 이것 저것 주어 모아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한 권 출판하였다. 비영리출판단체가 아니고서는 출판하기 어려운 내용과 수준으로, 인쇄된 책 대부분은 아마 자기 서재에 꽃혀있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집을 방문하여 목격한 적은 없다 – 실재로 책은 대략 읽어 보았다. 역시 쓰레받기… 읽는 모든 사람들은 아는데 정작 쓴 본인만 모르는 경우. 장차 큰 비 내릴 징조…

어쩌다 이자와 한번 엮일 기회가 있었다. 이자가 무언가 강연을 하는 중에 내가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잠시 졸았다. 뒤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아마 이때 이넘이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뭐 중요한 사람이라고… 사람이 좀 졸 수도 있고 그렇지… 아니 아니다.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니, 중요한 사람이 말씀하시는데 발칙하게 졸은 넘을 용서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 이외에는 이넘과 엮인적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10년에 한번씩, 어떤 종교단체들은 ‘Synod’ 라는 매우 큰 행사를 주최한다. 관련성직자들, 관련단체들 그리고 신도대표들이 참가하여 2박3일간 큰 회의를 한다. 나도 그때 우연히 참가 하게 되었다. 행사중 많은 소모임 토론등이 있는데, 한 토론장에서 이넘과 정통으로 마주 앉게 되었다. 난 아는 것도 없지만 그보다 꿀을 먹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글세 이넘이 주변에 앉은 참가자분들에게 ‘저 자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여기서 뭐하나’ 투의 조롱하는 말을 하는것을 듣게 되었다.

큰 행사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큰 행사장에서 오고가며 복도나 계단에서 마주치게 되며, 그 중에는 안면이 있거나 아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한참 좁은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이 내려오기에 문득 얼굴을 들어보니 그넘이었다. 그래도 때와 장소가 나를 경건하게 하는지라, 좋은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아마 이름도 불렀겠지. 이넘이 면전에서 완전히 무시하며 그대로 지나가는거라.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2박3일이 지나서 행사를 마치는 총회가 열렸다. 수백명의 참가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서 행사 마무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의견을 수렴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큰 강당에 여러명의 ‘젊고 잘 뛰는’ 지원자들이 무선 마이크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닐 준비가 되었고, 모두들 숨죽여 누군가가 첫 스타트를 끊기를 눈치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뒤에 내가 손을 들었고 이내 한 발빠른 젊은이가 내손에 마이크를 쥐어 주었다. 나를 보낸 단체의 견해를,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용기있게 피력하고는 자리에 앉으며, 그 넘의 놀랐을 상판이 문득 떠올랐다. 그넘 때문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넘에게 받았던 것을 면전에서 되돌려 주었다. 그넘과 나 (그리고 그때 함께 계셨던 고맙고 유머러스 하셨던 그분) 이외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그넘은 잊기를 바랬고 또 편리하게 잊었을 것이다.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자는 이번에는 다른 줄에 서서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이자가 속한 정당은, 늘 대표 1인만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는 1인당이었는데, 투표전후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며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바람에 당선확률이 0%었던 이넘이 졸지에 비례투표로 국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넘이, 당대표 즉 자기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준 바로 그사람과 다툼을 벌이다가 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탈당하면 더 이상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면 안된다. 처음부터 제 능력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었었고, 그 당수에게 기회를 되돌려 주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건데 이넘은 남은 한두해를 꼬박꼬박 봉급받으며 국회의원 노릇 잘 해먹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당수가 된 듣보잡 당을 하나 새로 만든다. 더 하고 싶다…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그저 수백표를 획득하며 우연히 올라왔었던 그 무대에서 영영 사라진다. 옛날 이자가 출판했던 그 책 수준이다. 그리고는 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거나 자기 말을 듣으려고 하지 않는지 아마도 오늘날 까지 몹시 의아해 하는, 늙고 꼬장꼬장한 은퇴한 영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의 그릇이 달라지는가? 그릇의 크기가 있는가? 무었이 그것을 결정 짓는가?

오래전 한 월간지에서, 교도관으로 수십년 근무했던 분의 긴 인터뷰를 읽었다. 많은 질문 중에 지금도 가끔 기억나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선천적인 악인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예. 교도소에 오는 사람 10명중 1명 정도는 아마도 선천적인 악인이거나 보통 사람과 확연히 달라서, 비록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범죄자가 되었을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자의 이름이 ‘고든’이었고, 그때 이자가 악인이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릇이 작은자였고 그러한 자신을 잘 보지도 또 알지도 못했던 자였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그릇은 처음부터 너무 작았던지 아니면 결코 그 크기나 모양이 바뀌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 열 명 중의 한 명처럼…

내 자신도 내가 어떤 그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어떤 ‘엮임’이 벌어지면, 쌍방 그릇의 크기와 내용물이(?) 동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Silly old Gordon fell in a ditch…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Thomas the Tank Engine’ 만화에 나오는 노래중의 하나로, 나도 아이와 함께 자주 불렀던 노래.

마라톤 500회

마라톤을 수백번 완주하여 마라톤기록의 새로운 세계를 열고 또 경쟁의 차원을 달리한 ‘남다른’ 사람들이 있다. 몇 년 전에는, 풀코스 마라톤을 500회 완주한 자와 같은 클럽에서 함께 마라톤을 한차례 뛰었던 적도 있었다. 이자는 매주말을 전국을 다니며 마라톤을 뛴지가 수십년이 되었다.

너무 좋아서 매주 뛰지 않고서는 죽겠다는데 또 제 돈들여 찾아가서 제 몸으로 뛰겠다는데 내가 왈가왈부할 바가 아니다. 다만 한가지가 궁금하다. 만약 폴코스 마라톤을 수백번 완주했다는 기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너무 좋아서 수백번 주말을 그렇게 뛰었을 것인가?

매일 5킬로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1년 5년 혹은 10년을 달리는 기록은 어떤가?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인터뷰도 없고 또 매달도 없겠지만 이것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더 건강하고 더 균형 잡힌 행복을 누리지 싶은데? 이것이야말로 그대도 나도 진정 원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