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삼매 그리고 몰입

드라마 ‘미생’을 여름휴가때 마다 본지가 몇해 되었다. 이번이 세번째 어쩌면 네번째. 25시간 내외가 걸리는 전체 20편을 연달아 모두 보려면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중노동이다. 물론 한방에 끝내기는 불가능하다. 며칠 걸리는데, 그 기간동안에는 일체의 일상적 활동이 중단되며, 그나마 최소한의 활동은 드라마를 더 잘 보는데 집중된다. 예를들면 음식준비나 식사시간을 최소화 하면서 중간 중간에 운동을 한다 🙂

신심 깊은 기독교신자가 휴가기간에 성경을 완독하거나, 열성 불교도가 경전들을 필사하는 것에 견줄만한, 우리 내외에게는 일종의 연례 행사라 하겠다. 내게는, 어떤 유명한 경전들보다도 훨씬 더 내 삶에 관련이 있는, 내게 와닿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지혜를 얻는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삼매경에 빠진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깨닫게 된것은, 해를 거듭하여 보면 볼수록 동일한 드라마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느끼는 장면들과 또 강하게 와닿는 내용들이 (배우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다.

방금 ‘삼매’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삼매의 의미가 아마 황농문박사께서 가르치고 있는 ‘몰입’과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할 것이라 생각이 된다. 그리고 드라마 미생에서도 ‘샤를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여, 한 결정적인 장면에 바로 이 ‘삼매’ 혹은 ‘몰입’을 (삶에 대한, 일상에 대한, 일에 대한)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시 전문을 아래에 실었다. 읽어보기 전에, 미생에서 이 시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바로 오늘을 지금 이순간을 사는 그런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직접 이 장면을 보고나서 읽으면 더욱 좋지만 아니라도 그만.


항상 취해있어야 한다.
모든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속으로 꼬부라지게하는 가증스런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세없이 취해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었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미덕이든 그 어느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쨋던 취해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위에서 혹은 당신방의 음울한 고독가운데서 당신은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이 몇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를 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라. 술이든 시든 미덕이든 그 어떤것이든 당신 마음대로.’
(샤를 보들레르)


일부 번역에서는 마지막 문장이 생략된 경우를 보았다. 드라마 미생에서 사용된 번역도 마지막 문장이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에서 끝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 휴가기간에 미생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오늘에 몰입해서 그 취함속에서 그 삼매경에 빠져서 살던지, 아니면 내일에 몰입해서 오늘 취하지 못하고 삼매에 빠지지 못하며 엉거주춤하게 살던지 둘중 하나지, 둘다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주고 받는 거래도 어쩌면 이런 불문율 속에서 대부분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미생의 오과장처럼 혹은 장그레처럼 뜨겁게 살면 그 하루 하루는 행복하겠지만 길게 보아서 소위 출세를 하긴 어렵고, 반대로 잔머리 굴리며 라인타고 줄서는데 정신빠져서 살면 어쩌면 장차 출세는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다음에 뒤돌아 보면 텅빈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을 살게되지 싶다는 말이다. ‘출세해서 돈이 남고 지위가 남지 않는가?’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면 내가 굳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회사를 떠나면? 밖에도 삶이 있고, 당신도 가족들도 밖에서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이것 지위나 돈보다 어쩌면 훨씬 더 심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신은 빼고 🙂

Est-ce que tu parles français? 나는 불어를 못하니 실제로 샤를 보들레르가 드라마 미생에서 인용된 바로 그 의미로 이 시를 썼던가 직접 그리고 확실히 알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어와 영어로 된 자료를 몇가지 보니 이 요절한 시인이 그야말로 술과 여자 마약 기타등등에 쩔어서 살다가 일찍 가버린 사람,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그의 시들이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상황인듯 하더라. 드라마 미생 만든 사람들이 적절하게 인용해서 나 같은 사람까지도 소름이 쫙 돋게 만들었지만, 어쩌면 ‘표본실에서 해부한 청개구리에서 김이 모락모락’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삼매에 대해서도 조금 아는체를 하자면, 이글에서 내가 말했던 Samatha 혹은 Samadhi를 (영어로는 calm meditation 혹은 concentration meditation) 중국인들이 한자로 옮긴것이 바로 ‘삼매(三昧)’인데, 붓다께서는 물론이고 내가 이전에 몇차례 언급했었던 티라다모 스님께서도 ‘그것으로 해탈 열반을 증득할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일부 사람들이 그야말로 ‘삼매 삼매경’에 빠져 (혹은 ‘명상 삼매경’에 빠져) 숨쉬는 느낌이건, 공학연구건, 무역프로젝트건간에 완전히 몰입하고 그것에 빠지는 것이 마치 삶의 궁극적인 해결책이양, 혹은 삶의 최고 최상의 경지인양 말하는 듯하지만 (명상이나 몰입이 훌륭하고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다시 말하건데, 붓다께서도 그리고 바로 이 삼매와 몰입을 평생 밥먹듯이 해오신 티라다모 스님께서도, 그 자체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인간이 다다를수 있는 최고 최상의 경지도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뭐?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우연히 바로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말했다 ‘흡사 운동화 끈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잘 매는 연습을 밤낮으로 오래하여 그것에 도사가 됨과 같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화 끈을 잘 매고 아름답게 매도 오직 그것만으로는 마라톤을 완주할 수 없다.’ 아내는 조용히 식사 계속 🙂

‘그럼 뭐?’에 대한 대답들을, 내가 듣고 보고 배운데로 블로그에 써왔는데 올해도 계속할 작정이다. 당신이 못찾으면 내 블로그가 개판이요, 찾아서 읽고나서도 무슨말인지 모르겠으면 내가 확실히 몰라서 그렇다. 둘다 차차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새해복 많이 받으시라.

Perception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를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대를 기쁘게 해줄(?) 독설이 너무 많이 들어 있네요. 좀 묵혀 두었다가 잊혀질만 하면 다시 봐요 🙂

오늘은 대신에 ‘Perception’에 관한 이야기를 ‘티라다모 큰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좀 해볼까 해요. 한자로는 ‘지각’(知覺)이라는 단어와 대응하는 것 같군요. 좀 어려운 말 같은데요?

불교적 시각에서 영어로 하는 설명은 ‘Perception (Pāli – saññā, Chinese – 想蘊) is sensory and mental process that registers, recognises and labels, for instance, the shape of a tree, color green, emotion of fear’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Perception은 기록하고 인지하며 표식을 붙이는 (표를 다는), 감각 및 정신의 작용. 예를 들자면, 나무모양, 초록색, 공포감등이 perception이라 할 수 있어요’. 참고로 (perception으로 영역된) 팔리 원어 ‘saññā’는 ‘관련된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associated knowledge’라고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perception에 대응하는 태국어 단어는 그 의미가 ‘기억’ (memory) 이라고 하네요.

어떤 한국어 불교사전에서는 ‘6가지 감각기관의 접촉과 동시에 생기는 것이다’ 라고해요 (간접적인 설명이지만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어봐요). 우리가 모두 아는 오감에다가 ‘마음’을 더해서 6감인데요. 붓다께서는 마음도, 보는 것이나 감촉하는 것과 동일하게, 감각의 한 종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이 6가지의 감각기관에, 외부적인 접촉이 가해질때 발생하게 되는 것이 perception 즉 지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카레는 맛과 향은 좋지만 그 모양으로 말미암아 영국여왕의 만찬에 오르기는 어렵겠다’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말속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의 perception이 드러나겠지요. ‘짱께들은 다꾸앙들보다 더럽고 시끄럽고 무질서하다’ 이렇게 누가 말을 한다고 하면 또한 어떤 사람의 perception들이 그 말속에 들어 있겠네요.

자 이제 perception이 무었인지 좀 감을 잡았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가 궁금하지요? 혹시 기억을 할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에 이 글에서 The Five Aggregates를 간략하게 언급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다섯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perception입니다. 그 당시에는 cognition으로 번역했었던 책을 참조 했었네요.

이 perception은 ‘나’ (자신,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요소 중 하나로써, 우리의 일상 삶에도 (현실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칠뿐만 아니라, 그대와 내가 장차 수행을 해서 해탈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수행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들 모두, 오늘 하루 동안에, 수많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perception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었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하루를 보냈을 꺼예요. 그리고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그 세번째 글 안에 들어 있다는 ‘독설’들도 또한 나의 perception이 많이 드러나고 표현된 것들이지요.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모든 사람들이 perception을 가지고 있다. 지혜란, perception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perception을 자각하고, 나아가 그것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때로 그것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perception과 자유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 또한 변화하며 영속하지 않고 또한 당신이 아니다.’ 좋은 말씀이지요? 그래서 내가 쓴 세번째 글을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블로그에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

내 생각에, 그대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들은 무슨 크고 거창한 사건 사고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perception이 사람들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견해의 차이, 시각의 차이, 생각의 차이 그리고 느낌의 차이에서 비롯된 알력과 충돌이 아닌가 싶어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이라는 ‘아상’과 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perception도, 위에서 언급한 다른 The Five Aggregates들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생각이나 견해 혹은 느낌이 바뀌었던 적이 많지 않았나요? 바뀌기 전에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어떤 것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그리고 다른 경험이 쌓임으로써 변하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perception에서 비롯된 견해나 생각 혹은 느낌을 가지고 타인들과 언쟁을 벌이며 충돌할때, 혹은 말 못할 괴로움에 빠질때, 그대와 나는 바로 이러한 perception의 참 모습을 기억하도록 노력해요. 우리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지혜를 얻고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길 바래요.

두카에서 벗어나는 8개의 훌륭한 길 – 네번째 이야기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방법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난번에 이야기 했지요.

‘지혜’ (머리로 하는 앎), ‘덕행’ (몸으로 하는 실천) 그리고 ‘집중’ (마음으로 하는 수행) 이렇게 3개의 그룹으로 나누며, ‘머리’ ‘몸’ 그리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고’ ‘실천하며’ ‘수행하라’고 붓다께서 가르치셨어요.

맨 아래에, 이렇게 나뉘어진 3개의 그룹이 적혀 있지요? 이미 세가지 정도는 이야기 나누었는데, 나머지는 (특히 ‘덕행’에 관련된 것들은) 특별한 설명이 따로 필요가 없을 듯 해요. 어쩌면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집중’에 관계된 3가지 길은 조금 더 이야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더 읽고 배워서 다시 이야기해요.

이렇게 수행하여 얻고자 하고 또 얻을수 있는 결과가 ‘니르바나’입니다. 영어로 Nirvana라고 쓰며, 팔리어로는 nibbana 혹은 nibbāna로, 그리고 한자로는 열반(涅槃)으로 씁니다. 붓다께서는 니르바나를 ‘불이 꺼진 상태’ 그리고 ‘목마름이 사라진 상태’라고도 표현하셨어요. 이렇게 ‘마음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경지’를 인간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계셔요. 열반은 나이 많은 스님이 죽어서 드시는 (가시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대와 나 우리 누구나,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따라서 노력하면, 살아 있을때, 각자의 능력과 그릇에 따라서 증득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 혹은 상태가 ‘니르바나’입니다. 너무 좋지요 🙂 아닌가? 혹시 무었인가 엄청난(?) 한방을(?) 기대했다가 실망 했나요? 그 엄청난 한방이 그리고 또 그런 한방을 찾는 그 마음이 바로 ‘불 타는 상태’ 그리고 ‘목 마른 상태’라고 내가 말한다면, 다만 말장난이라고 하겠어요?

태권도가 9급도 있고 9단도 있지만 그 중간에 또 많은 급과 단이 있듯이, 그리고 또한 설령 5단이었었다고 하더라도 수련하지 않고 술퍼먹고 놀다가는 5급에게도 대련하면 얻어 터질 수가 있듯이, 니르바나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 그렇게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 좀 더 꺼진 사람 혹은 목마름이 좀 더 사라진 사람처럼 다양한 수준이 (차원이 혹은 레벨이) 있겠지요. 또 분명한 것은, 한번 획득하면 그 사람에게 철썩 들러 붙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붓다께서도 매일 몸소 실천 하셨듯이, 죽는날까지 수행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수행을 할 수 있는 그 ‘습관’을 참으로 기르게 되는 것이 또한 니르바나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Wisdom (Paññā) ‘The head’
Right Understanding
Right Aspiration

Morality (Sīla) ‘The body’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Concentration (Samādhi) ‘The min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Right Concentration

약장수

어렸을 적에, 동네 공터에서 공연도 하고 약도 파는 ‘차력 + 마술 + 약장수’들을 보았던 적이 한 두번 있었다. 신기한 마술이나 차력을 보여주고 나면 박카스병처럼 생긴 것에 넣은 ‘만병통치약’을 팔았었다. 지금이라면 아마 사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공연할 공터도 또 데리고 다닐 원숭이도 구하기 어렵고 🙂

어제 니르바나에 (열반)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니르바나를 경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리고 니르바나가 무슨 신비한 것도 또 보통 사람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대상도 아니라, 니르바나를 자주 오래 유지하며 사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었다.

왜 나는 니르바나가 그런 것인 줄 예전엔 몰랐을까? 나는 왜 그것이 어떤 특별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특수하고 비범한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가 있고 또 한 번 얻고 나면 그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며 살았을까? 물론 내가 무지하고 무식해서 그랬었겠지만, 그 이전에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이런 엉터리 약장수 짓을 오래 그리고 광범위하게 해 왔던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왜 사법고시만 통과하면 인간사의 극히 복잡하고 (또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그 자리에 앉아서 검은 옷 입고 전부 이해하고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 옷 입은 사람들도 왜 정말 그런듯 꾸며 댓을까? 왜 어떤 자격증만 따면 또 어떤 계급장만 붙이면, 차원이 다른 능력이 생기고, 또 한 번 그렇게 달라진 사람들은 영원히 그렇게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살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을까? 흡사 그때 그 박카스병에 든 가짜약을 팔던 사람들 그리고 앞다투어 샀던 사람들처럼…

가짜약을 샀던 그나마 ‘돈이 좀 있는’ 사람들 중에서, ‘머리도 좀 있어서’ 자신이 샀던 것이 가짜약이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엉터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가, 특히 가난한 곳에서는 (다시말해, 서로를 지나치게 비교하고 자기 성공과 행복의 척도를 다른 사람들로 부터 찾는 경향이 심한 곳에서는), ‘내가 샀던 약이 엉터리니 사지 마시오. 내가 좀 쪽팔리지만 알려 드려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보다는, 침묵을 지키거나 아니면 ‘너희들도 똑같이 고생 좀 해봐라. 내가 못한 것을 감히 너희들이 해?’ 혹은 질이 좀 나쁜 넘들인 경우에는 ‘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더 정교한 가짜를 만들어 나도 벌어야겠다’ 이런 태도들이 더 보편적이지 않을까?

연예인들이 결혼할때 가끔 기사에 등장하는 표현이 ‘일반인’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연예인들은 무슨 특수인? 특별인?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가난의 (부족함=모자람) 소치인 것이다. 만약 누가 나보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박카스병에 든 가짜약을 사고 있는가. 당신 바보 아닌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몹시 기분 상해하고 또 성을 낼테지만,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자. 정말 약장수에게 아직도 속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그리고 혹시 그 시스템을 힘을 합쳐 같이 유지하면서 생기는 이득을, 삶의 어떤 최고 최선의 목표인양, 그 넘들과 더불어 사수하고 견고히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 비슷하게 어울려 사는데 굳이 그게 아니라고 밝혀서 뭐하냐고? 인류가 ‘유인원’에서, 그대와 나도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문명인’이 되었던 이유가 가짜약을 사고 판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내 주변에 늘려 있는 가짜 ‘불교’ ‘철학’ 약장수들 중에서 내가 좀 씹고 싶은 넘들도 꽤 있는데, 지금은 정신이 너무 맑아서 안되겠고, 언젠가 술기운에 떠들때까지 좀 기다리셔야겠다 🙂

니르바나 열반

하도 ‘뱀장사 약파는 수준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어릴때부터 많이 들어서, 나는 ‘니르바나(열반)’는 오로지 도를 엄청 닦은 일부 노승들이 죽어야만 가는 무슨 신세계인 줄 알았었다.

니르바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마음의 불 말이다. 욕심, 걱정, 성냄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뜨겁게 그리고 활활 타고 있는 그 마음의 불.

내가 자연속에 있을때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 살아 있을때, 가끔 무심하고 아무생각 없는 상태로, 그저 눈 앞에 보이는 나무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코 끝을 지나가는 냄새에 빠져 있을 때가 잠깐씩 있었다. 니르바나를 경험했던 것이겠지.

때때로,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사이즈가 좀 작다. x만하다) 힘겹게 보냈던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아!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때 괜찮았었네’ 생각하며 그 기억과 평화를 만들때, 그때도 아마 불이 꺼진 상태일 것이다.

내가 좋아 하는 한 노스님의 말씀대로, ‘깨달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깨달은 상태로 사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내가 덧붙이자면 ‘니르바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니르바나의 상태로 사는 것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