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ception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를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대를 기쁘게 해줄(?) 독설이 너무 많이 들어 있네요. 좀 묵혀 두었다가 잊혀질만 하면 다시 봐요 🙂

오늘은 대신에 ‘Perception’에 관한 이야기를 ‘티라다모 큰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좀 해볼까 해요. 한자로는 ‘지각’(知覺)이라는 단어와 대응하는 것 같군요. 좀 어려운 말 같은데요?

불교적 시각에서 영어로 하는 설명은 ‘Perception (Pāli – saññā, Chinese – 想蘊) is sensory and mental process that registers, recognises and labels, for instance, the shape of a tree, color green, emotion of fear’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Perception은 기록하고 인지하며 표식을 붙이는 (표를 다는), 감각 및 정신의 작용. 예를 들자면, 나무모양, 초록색, 공포감등이 perception이라 할 수 있어요’. 참고로 (perception으로 영역된) 팔리 원어 ‘saññā’는 ‘관련된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associated knowledge’라고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perception에 대응하는 태국어 단어는 그 의미가 ‘기억’ (memory) 이라고 하네요.

어떤 한국어 불교사전에서는 ‘6가지 감각기관의 접촉과 동시에 생기는 것이다’ 라고해요 (간접적인 설명이지만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어봐요). 우리가 모두 아는 오감에다가 ‘마음’을 더해서 6감인데요. 붓다께서는 마음도, 보는 것이나 감촉하는 것과 동일하게, 감각의 한 종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이 6가지의 감각기관에, 외부적인 접촉이 가해질때 발생하게 되는 것이 perception 즉 지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카레는 맛과 향은 좋지만 그 모양으로 말미암아 영국여왕의 만찬에 오르기는 어렵겠다’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말속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의 perception이 드러나겠지요. ‘짱께들은 다꾸앙들보다 더럽고 시끄럽고 무질서하다’ 이렇게 누가 말을 한다고 하면 또한 어떤 사람의 perception들이 그 말속에 들어 있겠네요.

자 이제 perception이 무었인지 좀 감을 잡았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가 궁금하지요? 혹시 기억을 할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에 이 글에서 The Five Aggregates를 간략하게 언급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다섯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perception입니다. 그 당시에는 cognition으로 번역했었던 책을 참조 했었네요.

이 perception은 ‘나’ (자신,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요소 중 하나로써, 우리의 일상 삶에도 (현실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칠뿐만 아니라, 그대와 내가 장차 수행을 해서 해탈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수행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들 모두, 오늘 하루 동안에, 수많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perception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었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하루를 보냈을 꺼예요. 그리고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그 세번째 글 안에 들어 있다는 ‘독설’들도 또한 나의 perception이 많이 드러나고 표현된 것들이지요.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모든 사람들이 perception을 가지고 있다. 지혜란, perception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perception을 자각하고, 나아가 그것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때로 그것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perception과 자유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 또한 변화하며 영속하지 않고 또한 당신이 아니다.’ 좋은 말씀이지요? 그래서 내가 쓴 세번째 글을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블로그에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

내 생각에, 그대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들은 무슨 크고 거창한 사건 사고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perception이 사람들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견해의 차이, 시각의 차이, 생각의 차이 그리고 느낌의 차이에서 비롯된 알력과 충돌이 아닌가 싶어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이라는 ‘아상’과 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perception도, 위에서 언급한 다른 The Five Aggregates들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생각이나 견해 혹은 느낌이 바뀌었던 적이 많지 않았나요? 바뀌기 전에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어떤 것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그리고 다른 경험이 쌓임으로써 변하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perception에서 비롯된 견해나 생각 혹은 느낌을 가지고 타인들과 언쟁을 벌이며 충돌할때, 혹은 말 못할 괴로움에 빠질때, 그대와 나는 바로 이러한 perception의 참 모습을 기억하도록 노력해요. 우리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지혜를 얻고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길 바래요.

두카에서 벗어나는 8개의 훌륭한 길 – 네번째 이야기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방법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난번에 이야기 했지요.

‘지혜’ (머리로 하는 앎), ‘덕행’ (몸으로 하는 실천) 그리고 ‘집중’ (마음으로 하는 수행) 이렇게 3개의 그룹으로 나누며, ‘머리’ ‘몸’ 그리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고’ ‘실천하며’ ‘수행하라’고 붓다께서 가르치셨어요.

맨 아래에, 이렇게 나뉘어진 3개의 그룹이 적혀 있지요? 이미 세가지 정도는 이야기 나누었는데, 나머지는 (특히 ‘덕행’에 관련된 것들은) 특별한 설명이 따로 필요가 없을 듯 해요. 어쩌면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집중’에 관계된 3가지 길은 조금 더 이야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더 읽고 배워서 다시 이야기해요.

이렇게 수행하여 얻고자 하고 또 얻을수 있는 결과가 ‘니르바나’입니다. 영어로 Nirvana라고 쓰며, 팔리어로는 nibbana 혹은 nibbāna로, 그리고 한자로는 열반(涅槃)으로 씁니다. 붓다께서는 니르바나를 ‘불이 꺼진 상태’ 그리고 ‘목마름이 사라진 상태’라고도 표현하셨어요. 이렇게 ‘마음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경지’를 인간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계셔요. 열반은 나이 많은 스님이 죽어서 드시는 (가시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대와 나 우리 누구나,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따라서 노력하면, 살아 있을때, 각자의 능력과 그릇에 따라서 증득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 혹은 상태가 ‘니르바나’입니다. 너무 좋지요 🙂 아닌가? 혹시 무었인가 엄청난(?) 한방을(?) 기대했다가 실망 했나요? 그 엄청난 한방이 그리고 또 그런 한방을 찾는 그 마음이 바로 ‘불 타는 상태’ 그리고 ‘목 마른 상태’라고 내가 말한다면, 다만 말장난이라고 하겠어요?

태권도가 9급도 있고 9단도 있지만 그 중간에 또 많은 급과 단이 있듯이, 그리고 또한 설령 5단이었었다고 하더라도 수련하지 않고 술퍼먹고 놀다가는 5급에게도 대련하면 얻어 터질 수가 있듯이, 니르바나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 그렇게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 좀 더 꺼진 사람 혹은 목마름이 좀 더 사라진 사람처럼 다양한 수준이 (차원이 혹은 레벨이) 있겠지요. 또 분명한 것은, 한번 획득하면 그 사람에게 철썩 들러 붙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붓다께서도 매일 몸소 실천 하셨듯이, 죽는날까지 수행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수행을 할 수 있는 그 ‘습관’을 참으로 기르게 되는 것이 또한 니르바나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Wisdom (Paññā) ‘The head’
Right Understanding
Right Aspiration

Morality (Sīla) ‘The body’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Concentration (Samādhi) ‘The min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Right Concentration

약장수

어렸을 적에, 동네 공터에서 공연도 하고 약도 파는 ‘차력 + 마술 + 약장수’들을 보았던 적이 한 두번 있었다. 신기한 마술이나 차력을 보여주고 나면 박카스병처럼 생긴 것에 넣은 ‘만병통치약’을 팔았었다. 지금이라면 아마 사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공연할 공터도 또 데리고 다닐 원숭이도 구하기 어렵고 🙂

어제 니르바나에 (열반)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니르바나를 경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리고 니르바나가 무슨 신비한 것도 또 보통 사람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대상도 아니라, 니르바나를 자주 오래 유지하며 사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었다.

왜 나는 니르바나가 그런 것인 줄 예전엔 몰랐을까? 나는 왜 그것이 어떤 특별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특수하고 비범한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가 있고 또 한 번 얻고 나면 그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며 살았을까? 물론 내가 무지하고 무식해서 그랬었겠지만, 그 이전에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이런 엉터리 약장수 짓을 오래 그리고 광범위하게 해 왔던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왜 사법고시만 통과하면 인간사의 극히 복잡하고 (또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그 자리에 앉아서 검은 옷 입고 전부 이해하고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 옷 입은 사람들도 왜 정말 그런듯 꾸며 댓을까? 왜 어떤 자격증만 따면 또 어떤 계급장만 붙이면, 차원이 다른 능력이 생기고, 또 한 번 그렇게 달라진 사람들은 영원히 그렇게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살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을까? 흡사 그때 그 박카스병에 든 가짜약을 팔던 사람들 그리고 앞다투어 샀던 사람들처럼…

가짜약을 샀던 그나마 ‘돈이 좀 있는’ 사람들 중에서, ‘머리도 좀 있어서’ 자신이 샀던 것이 가짜약이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엉터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가, 특히 가난한 곳에서는 (다시말해, 서로를 지나치게 비교하고 자기 성공과 행복의 척도를 다른 사람들로 부터 찾는 경향이 심한 곳에서는), ‘내가 샀던 약이 엉터리니 사지 마시오. 내가 좀 쪽팔리지만 알려 드려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보다는, 침묵을 지키거나 아니면 ‘너희들도 똑같이 고생 좀 해봐라. 내가 못한 것을 감히 너희들이 해?’ 혹은 질이 좀 나쁜 넘들인 경우에는 ‘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더 정교한 가짜를 만들어 나도 벌어야겠다’ 이런 태도들이 더 보편적이지 않을까?

연예인들이 결혼할때 가끔 기사에 등장하는 표현이 ‘일반인’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연예인들은 무슨 특수인? 특별인?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가난의 (부족함=모자람) 소치인 것이다. 만약 누가 나보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박카스병에 든 가짜약을 사고 있는가. 당신 바보 아닌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몹시 기분 상해하고 또 성을 낼테지만,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자. 정말 약장수에게 아직도 속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그리고 혹시 그 시스템을 힘을 합쳐 같이 유지하면서 생기는 이득을, 삶의 어떤 최고 최선의 목표인양, 그 넘들과 더불어 사수하고 견고히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 비슷하게 어울려 사는데 굳이 그게 아니라고 밝혀서 뭐하냐고? 인류가 ‘유인원’에서, 그대와 나도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문명인’이 되었던 이유가 가짜약을 사고 판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내 주변에 늘려 있는 가짜 ‘불교’ ‘철학’ 약장수들 중에서 내가 좀 씹고 싶은 넘들도 꽤 있는데, 지금은 정신이 너무 맑아서 안되겠고, 언젠가 술기운에 떠들때까지 좀 기다리셔야겠다 🙂

니르바나 열반

하도 ‘뱀장사 약파는 수준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어릴때부터 많이 들어서, 나는 ‘니르바나(열반)’는 오로지 도를 엄청 닦은 일부 노승들이 죽어야만 가는 무슨 신세계인 줄 알았었다.

니르바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마음의 불 말이다. 욕심, 걱정, 성냄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뜨겁게 그리고 활활 타고 있는 그 마음의 불.

내가 자연속에 있을때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 살아 있을때, 가끔 무심하고 아무생각 없는 상태로, 그저 눈 앞에 보이는 나무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코 끝을 지나가는 냄새에 빠져 있을 때가 잠깐씩 있었다. 니르바나를 경험했던 것이겠지.

때때로,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사이즈가 좀 작다. x만하다) 힘겹게 보냈던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아!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때 괜찮았었네’ 생각하며 그 기억과 평화를 만들때, 그때도 아마 불이 꺼진 상태일 것이다.

내가 좋아 하는 한 노스님의 말씀대로, ‘깨달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깨달은 상태로 사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내가 덧붙이자면 ‘니르바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니르바나의 상태로 사는 것이 어렵다’.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팬, 그대에게 미안하다.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배우고 알게 될수록, 쓰고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일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요, 장차 원래 계획했었던 것들을 포함하여, 더 낫고 좋은 원을 가지고 되돌아 올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나눌까 한다. 그대들에게는 어쩌면 처음 듣는 좀 놀라운 이야기 일수도 있고, 내게는 눈물 나는 이야기니 기대하시라 🙂

‘불교가 종교인가 철학인가?’ 하는 논쟁에 맞물려 자주 등장하는 것이, ‘붓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혹은 인간으로 왔었지만 신이 되었던 존재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신이었고 지금도 신으로 남아 있는 존재인가?’하는 질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어떤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가지를 먼저 밝힌다. 첫째는,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약 150년 전에 그리고 일본에서는 약 80년 전에 번역되어 누구나 구입해서 볼 수 있다. 많은 분량의 책들이기도 하고 또 독자가 한정적이니 책값이 좀 비싸다고 하더라. 한국에서는 약 20여년 전부터 훌륭한 분들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일한 문헌이 영어와 일어로 이미 번역이 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가 흔히 들어 이름이라도 익숙한, 무슨 x장경이니 y강경 z심경 등은 이 원본 불경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전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쓰던 후대의 지식층 인도인들이 ‘자체 제작’ 했던 것들을, 그 짜장면 원조국에서 천년 세월 자기네 문화와 언어에 녹여 ‘다시 제작’ 하여 우리들에게 전파했던 것들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처음에는,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으로 보고 혐오했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에게 어떤 사회문화적 혹은 종교인류학적인 이유들이 있어서,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이런 모습의 불교를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장차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아래에 적은 이야기는, 내가 존경하는 두분의 세계적인 불교 학자들의 저서에서 발췌하였다. 한 분은, 스리랑카 출신의 학자이자 스님이신 ‘왈폴라 라훌라’ (Walpola Rahula Thero)라는 분인데, 위에 언급한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과 그에 사용된 고대 언어에 정통했던 학자요 스님으로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이분 이전에는 승려가 영어권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참고로 ‘라훌라’라는 예쁜 이름은, 붓다께서 출가하시기 이전에 낳은 아들의 이름이다 (그럼 붓다께서 섹스를? 물론이쥐 🙂 부인 이름은? ‘야쇼다라’. 둘다 실존했던 사람들로서, 아빠와 남편의 길을 따라 해탈 열반을 성취 했다고 전해진다 – 훌륭한 전례가 있으니 나도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정생활에 힘쓰고 있다). 이 분께서 쓰신 ‘What The Buddha Taught’라는 책을 참조하였다. 아름다운 책이니 기회가 되면 읽어 보시라. 한국어 번역도 있을 것이다. 이분은 1997년에 90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두번째 분은,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라는 일본의 불교학자시다. 선생의 ‘아함경 이야기 – 지혜와 사랑의 말씀’ 이라는 한국어 번역서를 참조하였다. 매우 아름다운 책이니 이 또한 추천한다. 왜 아름답다는 표현을 되풀이해서 사용하는지,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좀 공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 불교는, 1800년대에 이미 학승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을 배우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문헌들을 일본어로 1930년대에 완역함으로써 ‘제2의 불교전래’ 라고도 할만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마스타니 후미오 선생은, 도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서 ‘일본종교학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이다. 아빠가 스님. 오잉? 🙂 이분의 저서 ‘아함경 이야기’는 붓다의 일생과 가르침을, 종교학자로서의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한 책으로써, 저자 본인께서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 그 부제에 많은 독자들이 동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1900년대 초에 출생하였으니 아마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그 당시의 기록들이 영어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붓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붓다께서 80세 고령에 이르러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돌아가시는 생생한 모습이 경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게 와닿은 세 개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첫째, 어떤 열렬 극성팬이, 아파서 돌아가시는 와중인데도 꼭 좀 만나서 말씀을 나누어 보고 싶다고 졸랐다. 하도 조르니 제자들이 어렵게 말씀을 드려 붓다께서 허락하셨고, 너무 아프고 돌아가시기 직전임에도 붓다께서는 이자의 장광설을 모두 들어 주시고, 이은 가르침으로 그를 깨닫게 하여 마지막 제자로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식중독을 일으킨 음식을 제공한 그자를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심히 비난함에도, 붓다께서는, 내게 처음으로 공양을 한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의 복을 빌었듯이, 내게 마지막 공양을 한 이 사람에게도 감사하며 또한 복을 빈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스승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나의 가르침에 관계 되어 확실하지 않거나 혹시 물어 볼 것이 있는가’ 물으셨다. ‘없습니다’ 라는 거듭된 대답에 마지막으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 ‘너희들이 혹시 스승이 아파서 죽어가는 마당에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질문할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혹시 원하거든 너희들 친구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 물어 보게 하거라’.


‘매일 먹고 싸야 살수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한계와, 매순간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인생의 본질’ 바로 이것들 위에 붓다의 가르침이 있고, 그 분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수행과 해탈을 통하여 증득한 ‘그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시면서 큰 가르침을 주시며 돌아가신 것이다.

가식 없고 진실한 가르침을 주신 붓다의 말씀은, 그 돌아가시던 장면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원본 불경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가, 혹시 미안한 마음에 돈 더 달라고 말 못하겠거든, 옆집 돌쇠한테 부탁해서 좀 더 달라고 대신 말하게 해도 된단다’. 고통속에서 돌아가시는 마당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면, 흡사 남겨 두고 떠나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미 아비의 마음과 같이 한없이 큰 사랑과 자비가 느껴진다. 하물며 가식이나 욕심 권위 혹은 우월감이 어디에 있을손가! 신? 나이키 아디다스 말인가?

비록 몸에서는 대소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위대한 정신과 자비의 마음은 조금의 흐트짐도 없이 오히려 이런 극도의 고통과 최악의 상황에서 그 빛과 아름다움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다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으며, 오직 수행 정진으로 매일 매순간 스스로를 닦아 살아서도 그리고 죽을때도 빛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똥오줌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것이 우리를 더럽히고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오물들이야말로 참으로 더럽고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인 줄을 그대와 내가 깨달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닦아 낼 수 있도록 형편이 되는데로 부지런히 걸레를 빨아대며 우물가를 들락날락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분의 위대함은, 무슨 뜬구름 잡는 도술이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신비함, 혹은 주인 자리 빼앗아 아랫목 차지한 그 난해한 경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와 나, 오늘 마음이 아프고 몸이 괴로운, 이것 저것 닥치는데로 잡아 먹고는 쪼글쪼글한 구멍으로 한 두 덩어리 똥을 밀어 내고서는 또 다시 쪼르르 달려가 같은 짓을 반복하며 한 평생을 살다가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삶의 본질을 참으로 이해 하시고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갈 수 있는 훌륭한 지혜와 방법들을 우리들 같이 눈멀고 귀먼 똥대가리들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상세히 가르쳐 주시는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마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