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또 입에 올리지도 말고

이것, 어떤 대상을 상대하는 방법 중에서 때로는 효과가 높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엮이면 서로의 에너지가 (기가) 맞부딪히고 또 교환 된다. 꼭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설령 그것이 물건이거나 혹은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에너지를 가질 수 있지 싶다.

붓다께서는 사람에게 6가지 감각 기관이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오감에 더해서 ‘마음’을 여섯번째 감각기관이라고 말씀하셨다. 짧게 부연하자면, 오감으로 느끼게 된 어떤 감각이, 많은 경우에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해석되어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의 해석에 따라, 오감으로 ‘느꼈던 어떤 것이’이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되어지고 또 기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말하는 이 세가지가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외부를 받아들이고 또 소통하는 (엮이는) 대표적인 창들이 (window)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들 창들에서 그 대상을 좀 멀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마음’에게도 좀 자유와 공간을 더 줄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어떤 싫거나 힘든 대상이 있나? 그러면 최대한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또 입에 올리지도 않도록 하면서 좀 에너지를 덜 소모하면서 시간을 벌면 어떨까? 엮이면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고 또 이런 대상과는 자주 많이 낭비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이 내 마음의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게 된다.

엮이지 말고 좀 멀리하라. 그래서 시간을 벌고 좀 나중에, 혹시 다시 보이거나 들리거나 또 입에 올리게 되면 그때는 어쩌면 좀 덜 싫거나 덜 힘이 들지도 모르는 것 아닐까? 그 대상이 변했거나 아니면 내 ‘마음’이 변했거나?

욕심과 두려움

아내는, 서너살 먹은 유치원 아이들이 어울려 놀며 갈등하고 부대끼는 것을 오래 보아 오면서, 그 본질은 성인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지금 그들이 보이는 언행에서 그들의 장래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코헨’ 이라는 서너살 된 사내 아이에게 관심이 많고 자주 그 아이의 이야기를 저녁 시간에 하곤 하였다. 이 아이는,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멋진 사내’ 라고 한다. 아! 그런 넘도 있구나. 그 어린 나이에도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구나. 하지만 이 아이는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엄마는 알코올과 약물 중독자였고, 현재도 비록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은 하고 있으나 그 상태를 크게 벗어 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아이의 할아버지, 아내의 말에 따르면 한때 한 주먹 했을 법한 무섭게 생긴 노인이, 손자를 유치원에 데리고 오가며 부모 노릇을 대신 한다고 했다. 원장님께는 깍듯이 한다고 🙂

어떤 좋은 유전자를 받아 멋진 면을 가지고 태어난 이 어린 녀석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특히 유년기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유치원에서 또래 아이들과 또 교사들에게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일으킬때, 아내는 화가 나기 보다는 성장 환경의 영향으로 이 아이의 삶이 서서히 ‘험난한 인생’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기에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기 어렵다고 한다. 아내가 말했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을 내가 지금 보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내가 묻는다. 당신이 이 아이가 그토록 마음에 걸린다면 유치원을 떠나고 난 이후에도 선생님으로 남아 도와 주면 되지 않겠는가? 아내가 덧붙인다. 그럴 수가 없다. 내게는 오늘, 바로 지금 돌봐야 할 수 많은 아이들이 있고 또한 내가 만약 이 아이 주변에 계속 머무른다면 그 아이와 그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나조차 휩쓸려 떠내려 갈 것이다. 아내와 그 멋진 녀석과의 인연은 곧 끝이 날 것이요, 그 아이는 태어난 환경이 짐지워준 숙명의 길을 오래 그리고 힘들게 걷게 될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모국에 머무는 동안, ‘두두두’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두어차례 재미있게 보았다. 한 지방 채널에서 매주 방영하는, 초등학교 대항 발야구 중계방송(?) 이다. 보통 열댓살 된 초등학교 6학년들이 팀을 이루어 발야구 시합을 하는데, 그 준비 과정, 임하는 자세, 응원 그리고 실전과 경기 후일담까지, 흡사 사회생활의 축소판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하다.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대화를 통하여,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욕심 때문에 그리고 운동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기가 공을 차는 공격 순서가 왔을때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처구니 없이 그리고 때로 우습게 아웃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전후해서 보이는 그들의 반응을 통하여 그들이 장차 성인이 되었을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내 나름 상상해 보게 된다. 아직 초등학생들이지만 성격의 많은 부분은 이미 형성이 되었으리라.

내 자신을 되돌아 보자면, 주로 두려움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는 우스꽝스럽게 타석을 내려가는 아이였을 가능성이 크겠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신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나니 이미 나의 발야구는 끝난지가 오래 되어버렸다는 씁쓰래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참 사회 생활을 할 때는, 특히 모국에서는 이런 단체경기에서 주동이 되고 기량을 발휘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 하리라 생각 한다. 하지만 이제 내 나이가 되고 또 개인주의가 발달한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것 이외의 다른 능력들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지위에 있건 얼마나 부유하건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지배하는 이 욕심과 두려움이라는 큰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나는 차차 깨닫게 된다. 욕심은 노력하면 줄일 수 있고 욕심이 줄면 두려움도 준다는 것을.

골프 샷을 망치는 가장 큰 두가지 이유는 역시 욕심과 두려움이다. 이 둘을 조금이라도 더 컨트롤 하며 라운드를 즐길 수 있기를 나는 바라며 또 노력한다. 골프의 참맛은, 딴 돈의 크기나 카드에 적인 점수보다는 오직 자신만 알 수 있는 바로 이 욕심과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싸움에서 자주 이기면 라운드의 결과는 2차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그래서 썩좋지 않은 스코어카드를 손에 들고서도 몹시 행복해 하는 고수들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클럽에서는, 로컬룰에 따라 겨울 동안에는 페어웨이에서 공을 집어들어 닦고 한 클럽 거리 안에서 더 나은 자리에 놓고 샷을 할 수 있다 (플레이싱). 몇 주 전 라운드중에 세켠샷을 3우드로 칠 때가 왔다. 몸 왼쪽으로 기울어진 좋지 않은 라이. 3우드샷에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득, 나는 우드샷에 강한데 공을 그대로 두고 내 실력껏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가지고 프리샷 루틴을 따라 욕심과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해 샷을 날렸다. 좋은 샷이었지만, 좀 떨어진 페어웨이 벙크 앞 턱을 맞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아내에게도 말했었다. 나는 그때 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욕심과 두려움 없이 내 실력대로 한방 날려 보았노라고. 그래서 결과야 어떻게 되었건 내 속이 시원하고 내 자신에게 기분이 좋다고. 욕심과 두려움을, 최소한 그 순간에는 나의 역량과 에너지로 제압 했었다. 나에게는, 삶에서도 골프에서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따고 또 좋은 점수가 적힌 스코어 카드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쭐거려도, 그 과정에 욕심에 휩쓸리고 두려움에 시달렸다면 자기 자신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나 나나 떠날때 돈을 좀 덜 땃던 것 혹은 남들에게 좀 못 우쭐거렸던 것을 후회하면서 눈을 감을 것 같은가? 내가 듣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좀 더 해보았었더라면 하고 후회를 한다고 하던데.

욕심을 줄이면 두려움도 줄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내 능력껏 내 기량을 내 속이 시원하게 발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 참 중요하고 또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덧붙이는 이야기: 어제 라운드 후반에 다시 그자리에 서게 되었다. 200미터 이상 남은 곳에서 3우드로 그린을 공략하는 그곳에. 동반자들에게 종게 양해를 구하고 그린에서 앞팀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욕심과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프리샷 루틴에 따라 천천히 샷을 날렸다. 공은 똑 바로 날아가 230미터 떨어진 그린 중앙에 안착하였다. 물론 3펏 하고 내려오는 백돌이 수준이지만, 나는 이런 맛도 때로 즐길 줄 안다 🙂

다시 본 영화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고단한 여행길, 수천미터 상공을 떠가는 조각배 안에서 다시 본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오래전에 보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같은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또 받아들이는지 궁금한 생각에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

사람마다 그리고 처한 환경에 따라 받아들이는 모습이 다를 것이며 또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륜에 촛점을 맞출 것이요,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 또 어떤 사람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삶의 본질에 촛점을 맞출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는 스토리 전개 끝에,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장성한 아이들에게 남긴 유서가 마지막에 등장한다. 프란체스카가 이제 어른이 된 남매에게 말한다. ‘Do whatever you have to do to find happiness in your life. There’re so many beauties.’ ‘아이들아,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너희들 자신의 행복을 너희들의 삶 속에서 찾아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거라.’

내가 느끼기에,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원작을 쓴 사람이) 전하고자 했던 매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은 각자가 태어나서 자란 사회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며 (물리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대부분의 인생이 그리고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 지배하에서 보내다가 죽게 된다. 태어난 환경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옵션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상대적으로 (옆사람들 보다) 낫고 유리한 것들을 고르려고 애쓰며 살다가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리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옆사람들 보다 낫다고 내가 저절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행복을 찾기 보다는 내가 참된 행복을 느끼는 그 무었을 스스로 찾아보라’는 것이다.

주어진 것들 중에서 최적의 선택을 해 온 사람들, 사지선다에 능한 인생들에게는, B학점이 가능하고 또 노력하면 얻게 될 것이다. B학점이 쉽다는 말이 아니다. B학점 못 받는 사람이 대다수고 또 엄청난 노력의 결과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혹시 A학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B학점과는 다른 무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사지선다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떻게 찾느냐고? 사지선다가 아니라니까…

6언더파

지난 한 두해 중단 했었던 골프를 최근에 다시 시작하였다. 새로 가입한 클럽에서 주선해 준 회원들과 주말에 한 라운드를 함께 했다. 간략히 나를 소개하고 싸구려 중고공을 많이 가지고 왔으니 폐를 끼치지 않겠노라 좋게 부탁 말을 하였다.

그저 평범한 라운드였다. 각자의 능력대로 각자의 골프를 치며 모였다 흩어졌다를 18번 반복하였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라운드였다. 그리고 아무도 특별하게 생기지도 또 행동하지도 않았다. 배가 조금 나온 중년 남자들 그리고 중년 여자 한명. 그들은 친절하게 남은 거리를 내게 알려주며, 어쩌다 가뭄에 콩나듯 괜찮은 샷이 나오면 ‘굳샷’이라고 외치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나는 이리뛰고 저리뛰며 힘들었지만 라운드를 마치고 경치 좋은 곳에 앉아 음료수 한 잔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기분이 좋더라.

몇 년 전에 인터넷에서 활동 하던 ‘마이클’이라는 필명의 골퍼가 있었다. 마음골프 김헌선생에 버금갈 만큼 좋은 글을 쓰고 또 내게도 도움이 된 많은 골프 팁을 나누어 준 고마운 분이다. 이 재미교포 분의 글 중에서 ‘내가 이븐을 치던 날’ 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처절(?) 했던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잘 기억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골프의 공포를 내게 선명하게 부각 시켜준 흥미로운 글이었다. 아마추어가 이븐파를 한 번이라도 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나는 그때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수 년에 걸친 그의 처철했던 노력을 읽고나서.

음료수를 마시며 내가 묻는다. 오늘 스코어가 어땟어요? 아! 오늘 6언더파 66을 쳤어요. 좋은 라운드였네요. 그래요… 그것뿐이었다. 이상한 골프장이었나? 한 두해 전에 아시아퍼시픽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쉽이 열렸던 코스다.

이렇게 골프를 치는 사람들도 있더라. 아무것도 심각해 보이지 않았고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들 스스로도 또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해탈이란 어쩌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붓다께서도 말씀하셨다. ‘너무 (해탈에) 광분하지 마라’ 🙂


한 파트너가 6언더파를 칠때 또 다른 파트너는 1언더파를 쳤다. 한 사람은 공무원 다른 사람은 전산직에 종사한다고 했다. 1언더파 친 사람의 부인은 핸디가 3이라는데 그녀도 풀타임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날 따라 나처럼 이리저리 헤매면서 뒤땅에 뱀샷을 날려 대길래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내심 흐뭇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80대 초반의 스코어를 기록했더라…

어떤 사람에게 쓰레기통에 바로 넣고 싶은 스코어카드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나도 한번이라도 해봤으면 꿈꾸는 스코어카드일 수도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며, 또한 (최고 수준의 아마추어 골퍼들인) 이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느끼는 불만족과 괴로움은, 백돌이인 내가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레지나 보따리장사, 매리 레인보우

기차 혹은 기차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근래에 ‘인도 국경을 지나는 기차들’ 이라는 3부작 BBC 도큐멘터리를 보다가, ‘레지나’라는 네팔 여자의 삶을 잠시 옅볼 기회가 있었다.

레지나는 네팔과 인도 국경간 몇 십킬로 구간을 오가는 그 완전 고물 기차의 단골 고객이다. 그녀는 네팔 상점들에서 (고객들이) 원하는 물건들을, 인도에서 사다가 기차로 밀반입 해주고 얻는 적은 수수료로 아들 둘과 함께 사는 여자다. 십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서는 열아홉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 받고 그때부터 두 아이들을 기르며 홀로 살아 왔다. 최빈국에서도 하층 삶을 산다.

비록 국경은 없으나, 때때로 네팔 군경들이 기차가 도착할 때를 기다렸다가 출입구를 막고 밀수를 단속하여 물건들을 압수한다. 관세를 내야만 되찾을 수 있는데, 하루벌어 하루먹는데 무슨 관세를 어떻게 내나… 도큐멘터리 속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데, 레지나는 죽을 힘을 다해 보따리를 지키려고 하고 다만 하나라도 빼돌려 담장 밖으로 아들과 함께 가지고 나가려고 사력을 다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며 슬퍼한다.

레지나는 ‘unshakable spirit’의 소유자다. 달리 좋은 표현을 잘 모르겠다. ‘불굴의 영혼’? 그녀는 보따리장사지만, 가수요 신앙인이며 또한 달변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하버드 옥스포드 박사들이 쓴 그 어떤 책들 보다도 더 많은 훌륭한 가르침을 나는 레지나에게서 받는다.

밀수품 보따리를 잔뜩 실고 가는 고물 기차에서 노래하던 레지나. 무슬렘이면서도 힌두교 큰 축제때 염소 한 마리를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도 바치던 레지나. 그녀가 말한다 ‘그들의 신과 나의 신이 다르지 않다. 오직 인간의 마음이 분별할 뿐이다’. 다음날 떠날 기차를 기다리며 허름한 곳에서 고단한 몸을 누이면서 ‘비록 거적때기지만 (어떤 사람들처럼 몸을 팔지 않고) 내 손으로 벌어서 산 내 것 위에 눕는다’고 말하던 레지나. 자라나는 아들들이 엄마를 위해주고 또 밖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여 작은 돈이라도 벌어 오는데 감동해서 기뻐하던 엄마 레지나. 그때 레지나가 말하더라. ‘내 삶이 하도 힘이 들어서,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꺼졌다는 생각에 죽고 싶었던 적도 많았었다’고.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이리 잘 해주니 내 영혼이 충만하고 기쁘다’고 (Now my soul is content). 죽기 살기로 보따리 장사를 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하루벌어 하루먹으니. 그 고물 기차가 자기에게는 삶의 터전이요 기쁨이요 신 (god)이라고 하던 레지나.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이 훌륭한 인간을, 그 불굴의 의지를, 그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고 싶다.

이제 그 고물 기차는 영원히 멈추었고, 협괘는 부서졌으며, 낡은 역건물은 허물어졌다. 중국과 인도의 자본을 들여와, 세 나라를 연결하는 최신식 기차를 네팔 정부가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아! 레지나. 잘 살고 있기를…


아내가 만든 새로운 음식을 ‘레인보우 매리’라고 명명하였다. 여러가지의 채소를 오븐에 구운 다음에, 한 두가지 소스를 위에 뿌린 것이다. 맛있겠나 🙂 ‘매리 베리’라는 우리 내외가 좋아하는 요리사로부터 티비를 보며 배운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내가 음식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매리의 무지개’.

매리는 84살 할머니 요리사인데, 지금도 현역으로 티비에서 요리를 가르치고 또 책도 쓰고 한다. 영어권에서 가장 알려진 요리사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왼손이, 아마도 류머티스 때문에, 손가락들이 기형이 되어 제 구실을 못한다. 얼굴은 화장을 하지만 목 아래로는 쪼글쪼글한 상할머니다. 그 연세에 그 손으로, 보통 사람들이 만들기 쉽고 또 좋아할 음식들을 소개하고 또 쉽게 배우도록 도와 준다. 은근한 진짜 유머도 있고 또 멋도 잘 부린다. 우리 내외가 좋아하기도 하고 또한 존경한다. 이 분은 끝까지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지켜내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태워 촛불을 밝혀 자신에게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빛을 그리고 기쁨을 주는 삶을 산다. ‘래인보우 매리’를 함께 먹으면서 아내에게 ‘당신도 아마 저 분처럼 살게 될 것이오’ 덕담을 건넨다. 어떤 사람들은 흡사 그런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똑같이 힘들고 아무것도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레지나 보다 어쩌면 수 백배 더 부유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리 베리 할머니 보다 월등히 젊고 좋은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환경이 인간을 좌우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또 인간의 행복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노력해서 홀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계단,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스스로 알아내어 스스로 올라야 하는, 그 계단이 인간의 품격을 결정짓고, 행과 불행을 좌우하며 또한 해탈 열반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기차에 사람들이 매달리고 지붕에 잔뜩 앉고 또 동물들과 사람들이 섞여 있는 그런 사진을 보면, ‘아! 어떻게 저렇게 사나’ 생각했었다. 마치 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동물들과 비슷한 수준인 것처럼. 레지나를 알게 된 나는 이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와 똑 같은 삶이 그곳에도 있다는, 어쩌면 어처구니 없도록 명백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품격은, 그가 무었을 먹고 입고 어떤 차를 타고 집에 사는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되기에.

레지나 그리고 매리 베리. 두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