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

서양아이들은 철이 일찍든다지요. 빠다 먹어서 그런가 🙂

언젠가 네덜란드 음악가 안드레 리우 이야기할때, 그 사람의 초기 대표 음반인 Dreaming을 우리 아이가 수천번을 들으며 잠이 들어서 머리에 인이 박혔을 것이라고 했었지요. 무슨 조기교육? 언젠가 부모의 카르마가 자식들에게 대를 잊는다고도 했었는데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아시안 아이들이 지각을 하거나 오전에 유치원에서 맥을 못추는 일이 많다고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설령 부모가 이곳에서 태어난 이민 2-3세라고 하더라도, 자기들의 부모가 했었던대로, 자기 아이들을 어른들 주변에서 뒹굴면서 밤늦도록 함께 있게 하다가 불규칙적으로 잠자게 하니 그렇다고 했어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서양아이들이 철이 일찍드는 이유는 ‘부모가 오냐오냐 오래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를 한국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싶은데요, 부모세대가 하도 없이 살고 또 눌려 살다 보니 한이 맺혀서 자식이라도 좀 큰소리 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면도 있지 않을까 짐작해요. 그런데 그런 성격은 이곳에서는 미숙아 혹은 성격에 문제가 있는 철부지로 취급되요.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언젠가 어떤 일본지식인이 ‘한국엄마들이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시작할때부터 한국도 선진국이라 불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물론 나도 100% 동의 🙂 아주 어려서 젖먹이며 안아 기르는 거야 어딘들 다르겠나요 하지만 아이가 한두살이 되면서부터 (정확한 시기를 기억 못하겠네요) 이곳에서는 소위 말하는 routine을 (일정한 생활 ’습관’) 적용시켜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예요. 저녁먹고 재미있게 놀다가 이른 저녁이 되면 자기방으로 데리고 가요. 엄마가 (그리고 아빠도) 방에서 함께 노래도 불러주고 책도 읽어주며 잠을 잘 자도록 도와주다가는 딱 문을 닫고 나와요. 우리 경우는 ‘Dreaming’ 시디를 늘 틀어 놓고선 나왔지요. 그래서 아이가 그 음악을 수천번 들었던 것이지요. 좀 적응의 기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 아이는 아무리 난동을 부리거나 악을 써도 (아이에게 위해가 되는 상황인지는 부모가 잘 봐요) 결코 나타나지 않는 부모를, 다시말해서, 아무때나 같이 뒹굴면서 ‘오냐오냐 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잔인하다고요? 아니지 싶은데요. 아이의 인격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요? 이것 하나만 듣고서 나머지 아홉은 모르면서 하는 말 같은데요 🙂 우리가 어떤 과정에 대한 언쟁을 벌이면서 결말이 나지 않을때는 그 과정이 초래한 결과들을 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물론 또 다른 종류의 언쟁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지만요…

가난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난을 벗어나고 난 이후에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언젠가 말했어요. 아시아 아이들이 부모와 뒹굴게 된 것은 어쩌면 그 부모 혹은 그 조부모 시절, 가난한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뒹굴던데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지금 그 2-3세들은 성실하게 노력하여 방이 여럿 있는 큰집에서 살면서도, 마치 단칸방에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말이예요.

이야기가 좀 옆으로 더 새는데요. 옛날에 훌륭한 부모와 착한 아들이 살았대요. 아들은 부모님이 제사 지내는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자랐는데요, 아들이 어릴때 집에서 고양이를 길렀어요. 제사상에 생선이나 고기를 얻을때면 몰래와서 먹어보거나 훔쳐가는 고양이를, 부모님은 제사를 지낼때면 방 한쪽에 좀 목을 묶어 놓았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착한 아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요. 이 착한 아들은 정성껏 제사를 준비하면서 어릴적에 보았던 그 고양이를 기억했대요. 부인이 고양이를 싫어하기 때문에 집에는 없는대요, 잘 아는 집에서 좀 고양이를 빌어다가 제사를 지내는 날에만 방 한쪽에 목을 묶어서 놓아 두고선 절을 했대요 🙂 만약 이 착한 아들이 장차 큰 벼슬을 하게 되고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제사용 고양이 빌리거나 혹은 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지 싶네요. 우리는 때로는 몰라서 장님 노릇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알고도 아무 생각이 없이 살다 보니 그냥 장님으로 지내는 경우도 있지 싶어요.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렇게 ‘습관’을 어릴때부터 몸으로 익히며 자라나는 아이들, 세상에 아무리 악을 써도 안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룰 속에서 플레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아기때부터 배우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해야한다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저절로 싹트기 시작하고, 이러다보니 일찍 철이 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빠다 때문은 아닌것 같아요 🙂

철이 든다는 의미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어쩌면 ‘역지사지’ 하는 능력이 아닌가 해요. 언젠가 읽었는데, 미스월드대회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으로 경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미리 촬영해서 그 화면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전문가와 함께 보고 분석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거지를 수도 없이 수정한다고 해요. 자신이 상상하는 ‘화면에 비치는 내 언행은 이럴꺼야’와 실제 화면에 나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한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된 상황을 잘 그려볼 능력과 의사가 있어야 하겠지요. 역지사지 그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쌓는 엄연한 능력이지 싶네요.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 일어서 본 사람만이, 그것이 무었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또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도움과 자비를 배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바로 이런 이유로, 이나라 사람들이 매우 개인적인 경향이 높으면서도,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자발적으로 잘 돕는다고 나는 생각해요. 아이는 아비를 닯아서 축구를 잘 못했는데요, 어리버리한 아이가 축구팀이나 어떤 운동팀에 끼어서 함께 시합을 할때도, 어떤 아이도 부모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싫어하거나 배척하는 느낌을 주지 않았어요. 나는 이것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내 생각에는, 물론 여유있고 또 성격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그 바탕에는 ‘역지사지’ 하는 부모들의 성숙함이 있었고 그 영향 아래있는 아이들이 ‘감히’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거역하면서 잘 하지 못하는 동료 친구에게 나쁘게 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버릇이 대를 이어요. 그리고 이렇게 대를 이은 버릇들이 모이면 그 사회의 어떤 큰 흐름이 되는 것이겠지요.

지진이 났을때도 또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송이 될 때도, 수 많은 이곳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리고 ‘조용히’ 해준 아름다운 미담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사회전체가 어떤 ‘안전망’ 같은 것으로 둘러 쌓인 느낌이 들어요. ‘내가 곤경에 처하면 누군가가 도와준다’는 잔잔하지만 확실한 믿음이 (경험을 통해서 오래 증명된 것이)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이, 곤경에 처한 타인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또 다른 큰 이유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개인주의적이지만 결코 이기적이지 않아요. 한국은 전체주의적이라 얼핏보기에 덜 이기주의적이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대를 이어온 가난과, 어릴적부터 남을 존중하지 않고 군림해야 그들로부터 받들어진다는 전근대적인 육아로 길러진 결과라고 생각해요.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리지 싶어요 이것이 변화하는데… 고양이 빌리는 것도 그만두고 또 방 여러개인 큰 집에서 정말로 부유하게 사는 것에도 익숙해지길 바래요. 우리 모두가 참된 의미의 ‘부자 되기를’ 기원합니다.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두번째 이야기

옛날부터 흥얼거리던 노래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그리고 언젠가 이런 말도 했었다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 차리기가 무척 힘들다’. 오늘은 어제부터 시작한 ‘개인주의’ 이야기를 비교문화적인(?) 시각에서 좀 더 하고자 한다.

• 소속감 혹은 ‘자신을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일시 하는 어떤 경향’이 한국과 이 나라는 무척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팔았던 어떤 물건이 (서비스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반대로 잘되었을때, 한국에서는 흡사 자기 잘못인 듯한 태도로 사과를 하거나 혹은 기뻐하는데 반해서, 이곳에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하거나 일하는 집단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소비자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또 당연하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회사일을 가지고 자기의 일처럼 이리뛰고 저리뛰지도 않고 마음을 졸이지도 않으며, 그저 계약서에 써진 상식적인 수준 만큼만 자신의 삶과 에너지를 일터에서 사용한다. 다시말하건데, 반대편이나 혹은 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 앞서말한 태도와 관련이 있지 싶은데, 예를들자면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다고 (좋지 않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했거나 혹은 제공하는 방법에서 매끄럽지 못했다고) 그 개인을 직접적으로 나무래고 또 무릎을 꿇리며 사과하게 하는 짓 따위는 이곳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라면, 첫째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사람과 그가 속한 집단을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 댓가로 실질적인 이익을 취하는 주제를) 동일시 하지 않으므로 ‘무슨 이런 썩을 상점 / 회사 / 단체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지 (물론 ‘종업원 교육이 개판이구만, 이 회사 곧 망하겠네’ 이정도는 마음속으로 덧붙이겠지) 개인 차원으로는 잘 확대하지 않는다. 두번째로, 평등한 사회구조상 개인의 권리가 매우 존중된다. 위치고하를 막론하고 ‘좀 해달라’고 부탁하지, 돈을 줬고 당신 입장이 이러저러하니 네가 당연히 이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입고 있는 제복보다 그 사람 본연의 권리가 훨씬 더 크다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당연히 생각하므로, 제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그래서 ‘지나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이 이곳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학생때, 한 친구에게 ‘어디 들어가면서 누군가가 문 열어주기를 당연한 듯 기대하는 넘’과 ‘목욕탕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다른 사람의 힘으로 때미는 것이 당연한 넘’은 대가리가 근본적으로 좀 잘못됬다고 내가 말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지나친’ 서비스 업종은 이곳에 거의 없다. 인건비가 비싼 것도 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사려고 상상하는 사람들조차 없으니 당연히 팔고자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이 더 맞지 싶다. 어제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일을 자기 스스로 해내기를 서로가 기대한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나? 그리고 업종 자체의 존재유무만을 가지고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을 ‘한국에서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 이곳에서 대하는 경우와 그럴만한 업종이 잘 없다는 뜻이다.

•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들 말이, 영어는 존대어법이 없고, 같은 동양권에서라도 중국어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편이고, 일본어가 가장 존대어법이 많고 복잡하며 한국어는 그 중간쯤 된다고 하더라. 영어문화권에서는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 보다는 (구조적으로 제한이 있을터이니) ‘같은 말이라도 어떤 태도나 혹은 방식으로 전달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또 그런식으로 존대를 (존중을) 표현한다. 여담으로, 어제 어떤 국제적인 온라인 서비스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아마도 주말이라서 인도 어디에 있는 콜센터와 연결이 되었던 것 같다. 24x7x365 서비스를 제공하는 큰 회사들은 주말이나 야간에, 인도에 있는 콜센터로 서비스 번호를 되돌리는 경우가 많다. 영어가 좀 되고 또 시간에 관계없이 일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콜센터 비즈니스가 인도에서는 큰 산업이란다. 말끝 마다 ‘Sir sir’ 하면서 버벅대며 시간을 질질 끄는 것에 거부감이 많이 생기더라. 그런 ‘말’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고 숙련된 ‘태도’로 응대해주면 좋으련만 ‘문화적차이’ 때문에 그만큼까지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것을 나도 안다. 내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고 또 못된 면이 있어서 (무슨 삼위일체냐? 인생 쉽지 않았겠네?) 이런 경우에 통화를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경우가 이전에는 많았었는데, 어제는 그런 시도를 시작하다가 상대방이 어필하는 말을 좀 들어주고 더 시간을 주어서 좋게 잘 끝을 냈다. 밤에 누워서 문득, 이 여자 아마 중년의 인도여자 같은데, 그녀도 그 콜센터에서 퇴근하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되돌아 가고, 또 다른 어떤 어려움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터에서조차 괴롭지 않게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옛날에 이곳에서 콜센터를 지원하는 기술자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아는데, 이런 콜들을 매니져들이 모니터 하다가 고객을 잘 응대하지 못하고 콜을 놓치면 혼난다. 그리고 만약에 이런 곳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쫒겨나겠지. 죽을때까지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지만, 그녀가 하루를 잘 마치고 또 보수도 무사히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식사도 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기를 나는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내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더 버벅거리는 기술자였을때, 그 누군가도 어쩌면 내게 이렇게 해주었고 또 기원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철드네… 붓다의 가르침이 차가운 콘크리트를 뚫고 스며드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와 관련된 단순 호르몬 교란인가 🙂

• 일반화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선진국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다못해 다혈질이고 가족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조차도, 개인주의적 경향이 훨씬 큰 것을 볼 수 있다.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새로운 세대들은 어쩌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롭고, 영어권 문화에 오래 노출되고 또 인터넷사용등의 이유로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상대적으로 훨씬 크지 싶다. 동시에, 더불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전세대들의 영향으로 집단주의적인 경향도 함께 가지고 있는 (예를들어, 자신의 무지나 선대의 카르마에 기인한, 일본에 대한 지나치거나 이율배반적인 태도등) 어떻게 보자면 좀 복잡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한 두세대가 더 지나야 안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내가 존경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스승들은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 혹은 실제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 만으로도 (‘자각하는 것’ 만으로도) 큰 발전이며 장차 더 큰 변화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 의미있는 것이라고. 내가 전에 말했는데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때에는 그것이 카르마인줄 깨닫기가 무척 어렵지만, 만약 깨닫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께 이야기 해보는 것이다. 당신이 혹시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깨닫지 못한 당신의 자화상을, 숲밖에서 보는 숲속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어쩌면 훗날 어떤 실수를 저지른 백화점 종업원이 두려움 속에서 당신에게 혹시라도 무릎을 꿇을때,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당신 개인의 잘못만이 아니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좋은 태도로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한국도 그런 멍멍이 같은 일들이 그야말로 멍멍이 같은 일들로 모든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는 나라, ‘개인주의’가 잘 발달된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참된 해탈은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다. 니르바나는 어떻게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일 뿐이라더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가 모르겠지만 그래도 굳이 밝히고 싶다 🙂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첫번째 이야기

우연히 이곳에서 아래에 보이는 도표와 ‘개인주의’에 관련된 설명을 보게 되었다. ‘개인주의적 성향’을 나라별로 표시한 이 도표에 따르면, 미국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한국은 반대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높은 국가중의 하나로 나타나 있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은 스페인과 소련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통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을 더 뒤지며 교차검증을 시도하던 중에 원문으로 생각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몇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것인데, 그 중에서 ‘개인주의’ 편에 쓰인 글을 아래에 옮겨와 대략 번역하였다.

이토록 차이가 크게 나는 두개의 상이한 나라에서, 이럭저럭 살아온 내 자신이 나름대로는 놀랍고(?) 또한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이 통계를 기억하면서 되씹어 보니, 나름대로 설명이 되어지는 부분도 좀 더 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Individualism is the one side versus its opposite, collectivism, that is the degree to which individuals are integrated into groups. On the individual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the ties between individuals are loose: everyone is expected to look after him/herself and his/her immediate family. On the collectiv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people from birth onwards are integrated into strong, cohesive in-groups, often extended families (with uncles, aunts and grandparents) which continue protecting them in exchange for unquestioning loyalty. 개인주의는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와는 상반되는 수준만큼 (정도로) 개인들이 단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보살피는 것이 기대된다. 집단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태어나면서 부터 강하고 끈끈한 유대로 단체와 대가족의 일부가 되며, 그러한 무조건적인 충성의 댓가로, 단체와 대가족은 그 구성원을 지켜준다.

For example, Germany can be considered as individualistic with a relatively high score (67) on the scale of Hofstede compared to a country like Guatemala where they have strong collectivism (6 on the scale). 예를들면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독일은 상대적으로 과테말라같은 나라보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In Germany people stress on personal achievements and individual rights. Germans expect from each other to fulfil their own needs. Group work is important, but everybody has the right of his own opinion and is expected to reflect those. In an individual country like Germany people tend to have more loose relationships than countries where there is a collectivism where people have large extended families. 독일 사람들은 개인의 성취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 여긴다. 그들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단체의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런 구성원들의 의견이 단체에 반영되기를 (구성원들은) 기대한다. 독일처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인간관계가 보다 느슨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대가족에 소속되어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와 비교하자면 그렇다.

The United States can clearly be seen as individualistic (scoring a 91). The “American dream” is clearly a representation of this. This is the Americans’ hope for a better quality of life and a higher standard of living than their parents’. This belief is that anyone, regardless of their status can ‘pull up their boot straps’ and raise themselves from poverty. 미국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것을 확실히 대변한다. 그들이 떠나온 부모의 나라보다도 더 나은 삶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이를 통하여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아메리칸 드림’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희망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사회적 위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구두끈을 졸라매면’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죽으면서 후회하는 다섯가지, 첫번째 이야기

그저께 신문 칼럼에서 언급된 책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 by Bronnie Ware을 아마존에서 구입하여 대략 읽어 보았다. 좋은 세월이다. 인구에 희자되는 거의 모든 책들을, 아마존이니 교보문고니 하는 전자책방을 통해서, 마우스 몇 클릭으로 실시간으로 구입해서 읽을 수 있는 세상이니.

저자는 가방끈 짧은 호주여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솔찍하게 잘 쓴’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와 닿았지 않는가 싶다. 솔찍한 그녀가 했던 말들 중에서 내가 매우 공감했던 것으로는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가, (젓을) 잘 먹고 트림을 잘하고 응가를 잘 하면 100점이고 행복이듯이, 세상을 떠나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도, 잘 먹고 잘 배설하는 것이 극히 (가장) 중요하다’ 라는 말인데, 내가 감동을 받아서(?) 아내에게 힘주어 전달해 드렸다. 눈이 하나 없어도, 다리를 못 쓰게 되어도, 이빨이 없어도 어떤식으로든 (보조 장치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 있지만, 저자의 지혜로운 말처럼, 이 두가지 기관 즉 ‘들어가고 나가는 장치가’ 고장이 나면, 거의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이 매우 힘들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자신이 사람들을 돌보면서 얻은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더라. 이것 잘 기억해야겠다 싶다. 이것 어느날 그저 마음 먹는다고 그때부터 저절로 되는 것 아니지 싶은데… 간이 완전히 재생되는데 7년인가 걸린다고 하더만, 지금 당신의 간에 당신이 수년 전에 들어부었던 알코올 아직 남아 있는 것 아닌가요? 아! 젊고 건강한 그대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라고요? 그렇겠네요 🙂

아래에 그 다섯가지를 옮겨 놓았는데, 각각의 항목 아래에 한두개씩 작은 제목들도 같이 옮겨 놓았다. 내가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아니면 저자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분의 가르침이 여기 저기에 녹아 있는 듯 하다. 참 그리고 일전에 ‘돈 잘쓰는 법’ 이야기할때 내가 하나 슬쩍 끼워 넣었다던 것도 여기 등장하네 🙂 ‘당신은 환경의 산물이니, 환경을 바꾸는데 돈을 쓰라’.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 by Bronnie Ware

1. I wish I’d had the courage of live a life true to myself, not the life others expected of me.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했던 삶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원했던 삶을 살껄…)
– Products of our environment (우리는 환경의 산물)

2. I wish I hadn’t worked so hard. (그렇게 돈벌이만 하지 말껄…)
– Purpose and intention (목적과 의도)

3. I wish I’d had the courage to express my feelings. (내 자신에게 좀 더 솔찍했고 또 그것을 표현했었더라면 좋았을껄…)
– No guilt (죄책감 없이)

4. I wish I’d stayed in touch with my friends. (친구들과 좀 더 오갈껄…)
– Allow yourself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을 허락하라)

5. I wish I had let myself be happier. (내 자신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겼었더라면…)
– Happiness is now (행복은 바로 지금)
– A matter of perspective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가)
– Darkness and dawn (새벽이 오기전에 가장 어둡다)

인경씨

유명한 사람을 우리끼리 지칭할때, 김모 이모 이렇게 이름을 부르지, 누구 누구씨 하면서 존칭으로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지요? 인경씨는 서른이 넘은 프로골퍼예요. 전에 세계에서 유일한 도마 (뜀틀) 기술인 ‘양1’을 창조했다고 소개했던 체조선수 양학선 선수처럼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 늘 ‘인경씨’라고 불러요. 아내도 그 이유를 잘 알고 또 그녀를 좋아한답니다.

인경씨는 키도 작고 얼굴도 평범하며 또 나이도 많은 축에 속하는 골퍼예요. 온갖 스폰서들의 이름이 붙은 옷을 잘 차려입고서 섹시하게 배꼽을 드러내며 스윙을 날리는 상품성(?) 있는 골퍼는 아니랍니다. 인경씨 보면, 다른 골퍼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한복을 잘 차려 입은 북조선 미녀를 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인경씨는 언제나 열심히 스스로 훈련을 하는 골퍼였고 또 재능도 있었어요. 그래서 한 5년쯤 전에 미국에서 열린 아주 큰 경기에서 (‘매이저’라고 해요)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어요. 얼마나 가까이 두고 있었던가 하면 30센티 앞에 두고 있었어요. 이것을 굴려서 넣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못 넣었답니다. 결과적으로 연장전이 벌어졌고, 그렇게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어떻게 잘 칠 수가 있었겠어요? 졌답니다. 유튜브에, 골프 최악의 순간, 비운의 골퍼 이런 종류의 영상에 나오게 되는 치욕과 수모를 당하게 되었어요. 다시 마음을 추스려 잘 해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다음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우승은 커녕 상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점점 잊혀졌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그 30센티 퍼팅을 실패한 직후의 모습입니다. 차마 인경씨 얼굴을 보기가 어렵내요.
인경씨는 순례여행도 홀로 다녀 보고 또 법륜스님이 계시는 정토회에도 나가서 수행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그때 그 고통을 딪고 일어나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칠흑같이 깜깜한 절망의 밤이 아마도 한 3-4년은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포기했지 싶어요. 그렇지만 인경씨는 포기하지 않고, 그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아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계속 했대요.

30센티 퍼팅을 실패했던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났어요. 인경씨는 영국에서 벌어진, 가장 권위있다는 브리티쉬오픈에서 (‘매이저’ 입니다) 우승을 하게 됩니다. 참 잘했어요. 그야말로 골퍼의 해탈 열반이 아니겠어요? 부활한 인경씨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훨훨 날고 있군요 🙂
오늘 이곳 신문에, 한때 박인비선수를 밀어내고 여자골프 세계1위를 2년간 차지 했었던 한국계 뉴질랜드 골퍼 ‘리디아고’에 대한 기사가 났었어요. 그 기사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인경씨 생각에 이 글을 씁니다. 참 기사 내용은, 옛날 리디아고의 코치였던 데이비드 리더베터라는 세계적인 코치가, 리디아고의 ‘극히 무지한 부모’가 리디아고 침몰의 원인이라고 힐난하는 내용이예요. 이런 이야기들과 또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숨길수 없는 일들이 지난 몇년간 이곳에서 있었어요. 이 ‘극히 무지한 부모’와 그들의 ‘순종적인 딸’의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해요.

인경씨는 이제 서른이 갓 넘었는데요. 앞으로도 오래 선수생활을 하길 바라지만 또 장차 은퇴를 하더라도 참 행복하게 살지 싶어요. 한 훌륭한 인간으로, 좋은 배우자 좋은 엄마 노릇을 하며, 인생의 많은 행복을 누릴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녀가 벌어들인 돈때문이 물론 아니예요.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어떤 사람도 대신 찾아 줄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을, 행복의 열쇄를, 인경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찾은 것 같은 느낌이 그녀를 볼때면 들어요. 그 길고 절망적이었던 어둠을 인내와 노력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빛으로 다시 채운 인경씨. 한 인간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무르익고 여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참 훌륭하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나는, 이나라 여자 챔피언 골퍼와도 일대일 라운드를 2-3번 했던 적이 있었어요. 줄리엔과 골프장에서 스쳐 지나갈때 한국 사탕을 손에 몇개씩 쥐어 주곤 했었는데, 나중에 챔피언골퍼가 되고나서 우연히 마주쳤을때 ‘한번 같이 칠까요?’ 했더니 ‘그래요’ 하면서 핸드폰 전화번호를 주길래 시간을 정해서 둘이 쳤었어요. 1번 홀에서 많은 골퍼들이 다 보고 있는데 (물론 사람들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요) 줄리엔과 둘이서 티샷을 하면서 기분이 참 좋았어요. 저 동양인 남자는 누구 🙂 옛날에 읽은 피천득선생 수필에 나오는 ‘반사적 광영’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 순간이었지요. 줄리엔은 미국에서 골프유학중인데 조만간 졸업을 하면 아마도 LPGA 투어에 나오지 싶어요. 만약 인경씨와 붙으면 누굴 응원하지? 그래도 사탕보다는 핏줄을…

잠시 이야기가 샛는데요. 누가 내게 ‘어떤 프로선수와 한라운드를 함께 해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섹시한 미녀골퍼도 또 300미터 티샷 날리는 괴물골퍼도 아니고, 물론 인경씨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겠지요. 이제와서 사탕 줄 사이도 아니고 또 이미 세계적으로 성공한 골퍼이니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인경씨와 한 라운드를 함께 한다면, 그녀가 부러진 날개로 더 높이 나르게 된 그 힘들고 외로웠던 과정을, 그리고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는 그녀의 품위 있는 삶을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인경씨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지 싶네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 ‘더 로즈’ 베티 미들러가 불러요. 그리고 나름대로 번역을 덧붙였어요.

The Ros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

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

And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어떤 이는,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익사 시키는 강물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이 그대의 영혼을 피흘리게 하는 면도날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랑이 끝없이 아픈 갈망이며 굶주림이라고도 말하는데
나는, 사랑은 꽃이며 당신은 그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상처 받기 두려워 하는 마음이 결코 춤을 새로 배우지 못하게 막고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무언가를 결코 시도하지 못하게 막아요.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베풀지 못하는 법이며
죽는것을 두려워 하는 영혼은 정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요.

밤이 너무 외롭고 또 갈 길은 너무 멀 때
사랑이란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성공한 사람들만의 것인가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한겨울 차가운 눈 아래 묻혀 있는 그 씨앗이
봄이 오면 따스한 햇님의 사랑으로 장미로 피어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