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is everything

‘원근법’이니 그런 소리 아니고, ‘견해 혹은 시각이 극히 중요하다’ 라는 뜻이 되겠다. 어제 소개한 One Strange Rock에 나오는, 명언중의 명언이다.

견해나 시각은, 여러개 있는 중에서 (구두나 자동차처럼) 고르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지는 것일까? 당신이 만약 골프를 쳐 본적이 없고 골프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실제로 해본 것이 없다고 치자. 그러면 골프에 대해서 (골프라는 운동 자체) 당신이 견해나 시각이 있을 수 있나? 당연히 없다. 자연훼손이나 농약 그런 이야기들은 골프 ‘관련’이지 골프 ‘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골프에 관한 견해나 시각은 골프를 치면서 생기고 또 발전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인간에게는 6개의 감각이 있다고 가르치셨다고 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감에 더해서 ‘마음’을 6번째 감각기관 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이 ‘마음’이 저기서 말하는 ‘perspective’와 아주 관계가 깊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감이 받아들인 것을 뇌가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듯이, 세상만사 모든 것들과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perspective’에 따라서 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이 ‘견해’ 혹은  ‘시각’이 인간을 규정하고 그의 삶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왜 perspective를 그렇게 강조해서 이야기 하는가 하면, 내 생각에는, 첫째로 대기권 위에서 오랫동안 수없이 (하루에 열두번도 더 지구 주위를 돌면서 세상을 본다), 지구의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과 디테일로 본다는 것이, 그 우주인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한 견해 혹은 시각의 변화를, 단지 지구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전체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왔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과학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던 (너무 거대한 스케일 이거나 혹은 극히 작은 스케일의) 자연 현상들을 밝혀 내어 우리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견해 혹은 시각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에,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써, 아마 우주에서 보았던, 엄청난 규모의 연어 (salmon) 이동과 산란 그리고 죽음 (산란후 자연사). 그 집단적인 죽음 뒤에 실로 엄청난 규모의 질소 (nitrogen) 이동이 있고, 그렇게 이동된 질소가 다시 거대한 규모의 숲을 만들어 내는, 자연의 어마어마하며 또 정교한 ‘rebirth’의 과정을, NASA와 과학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무덤 위에 심은 사과나무 이야기 기억하지? 바로 그 이야기를 붓다가 하셨던 것이고 또 수천년 지나서 NASA와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NASA의 우주인들이 그들의 특별한 경험을 통하여 깨닫은 그 어떤 perspective를, 붓다께서는 수천년전에 이미 밝혀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시다. 그 가르침을 어리석음에 휩쓸리지 않고 밝고 정확히 배워 조금씩이라도 실천한다면, 당신도 나도, NASA의 우주복을 입지 않고서도 그들과 다름없는 perspective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더 많은 삶의 진실과 해답을 붓다에게서 찾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Perspective is everything.

윤회냐 스르럭뽕이냐? 두번째 이야기

‘Rebirth=스르럭뽕’ 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었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들이 끝없이 돌고 도는 것, 또 하나는 비물질적인 것들이 (정신적인) 끝없이 변화하는 것. 이번에는 세번째 rebirth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최근에 ‘One Strange Rock’ 이라는 네셔널지오그래픽 도큐맨터리를 보았다. 8명의 NASA출신의 우주인들이 도합 1,000일 이상 지구밖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꼈던 것을, 과학적인 근거로 해석하고 또 이야기 나누는 ‘지구 이야기 10편’인데 내게는 그야말로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엄청난 사건’이라고 할 만한 최고의 도큐멘터리였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하겠다. 각설하고.

카르마 혹은 업 (業 업보 )이라는 말 들어 봤겠지? ‘무언가 나쁜 짓을 하면 그 댓가를 언젠가 어떤식으로든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런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싶은데, 틀린말은 아니지만 불충분하다.

붓다께서는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 로부터 카르마가 생겨 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카르마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죽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던 남아 그들의 삶에 영향을 계속 미친다. ‘카르마가 돌고 돈다’는 말이다. Karma rebirth.

이순신 장군은 돌아가신지가 오래 되었지만 한국사람이면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그분의 영향으로 (그분이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했던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민족의 역사와 삶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순신이라는 한 개인의 카르마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이 블로그를 지금 내가 일본어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었이 좋고 나쁘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도 그분의 영향으로 해군사관학교 갔던 군인들도 많지 않겠나? 명량해전도 없었고 이순신장군도 몰랐었더라면, 요리사나 농부가 되었을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군함을 타는 해군이 되었다면, 그 해군이 된 사람들의 삶 속에 이순신 장군께서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영향으로든지) 존재하고 계신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말이 아니지 싶은데? 그 해군의 자식 손주들이 선대를 따라서 또 해군이 될 지도 모른다. 이것이 카르마가 끝없이 돌고 돌며 ‘rebirth’ 하는 하나의 예인데, 그런 엄청나고 역사적인 삶이 아닌, 그대와 나 우리들의 평범한 삶에도, 당연히 카르마가 생기고 또 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은 (rebirth)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던, One Strange Rock 이라는 도큐멘터리에 나오는 8명의 우주인 중에 한 사람인 Jerry Linenger. 이사람은 미해군 장교요 의사요 박사인 동시에 우주인이었는데, 이 사람이 도큐멘터리에 나와서 했던 말을 이곳에 적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지구 상공 수백킬로 위에 떠 있는 인공위성 안에 있었을때,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자주 떠올렸다. 이 순간 내가 이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일생을 통해 내게 미친 그의 영향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오늘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장성한 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되돌아보건데) 나는 크디 큰 수많은 인연들의 결과로 이시간 이장소에 태어나, 나의 아내를 만났고, 이 새로운 생명들을 세상에 오게 했으며, 그들에게, 나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이어) 내게 했었던 것과 똑 같은 영향을 미치고 좋은 삶을 주었다.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왔던 의미가 대부분 이루어졌으니 나는 언제 떠나도 여한이 없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카르마도 인연을 따라 돌고 도는 것이다. 이 우주인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 또한 거대한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로써, 그의 인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어떤 카르마를 따라 오고 가며 돌고 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붓다께서는 우주선도 허블망원경도 NASA도 없었던 2,600년 전에, 이런 진실를 알아 내셨고 또 그것을 지금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다.

열아홉 후안마이의 마지막 편지

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은 한국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도 부인이 기뻐 보이지 않으면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남편은 왜 오히려 아내에게 화를 내는지, 당신은 아세요?

남편이 어려운 일 의논해 주고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내를 제일 아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저는 당신의 일이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저도 한 여자로서, 아내로서 나중에 더 좋은 가정과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은 아세요?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는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려 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 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한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있어요. 좋으면 결혼하고 안 좋으면 이혼을 말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진실된 남편으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결혼에 대한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어요.

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누구든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되요. 물론 부부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처가 너무 많아 결국 이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 사람의 감정을 존경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는 상황들과 원망하게 하는 상황들이 무관심하게 지나가게 되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자존심이 있고 자신을 ‘정답’에 서게 하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부부가 행복할 수 없고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에요. (중략)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아세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치민 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하지만 봉급은 얼마 못 받았지요. 저는 노동이 필요한 일도 했었어요.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그것이 가축을 기르는 일이든, 농작을 하는 일이든. 가족들은 노동일로 벼를 심고 베는 일을 했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랬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가 베트남에 돌아가게 되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에요. 저는 당신이 저말고 당신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래요. 당신이 잘 살고 당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길 바래요.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 저를 잘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다시 처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의 희망은 이제 이것뿐이에요. 당신과 전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저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 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이 그 경위에 어찌 되었던 간에 피고인과 결혼하여 피고인만을 의지하여 말도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에 온 19세의 피해자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그 결과가 지극히 무거워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가 남긴 편지 내용을 보자. 피해자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피고인과 서로 이해하고 위해주는 애틋한 부부관계를 이루고, 한국어를 빨리 배워 한국생활에 적응하면서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한국에 와 피고인과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고인의 피해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 어려운 경제적 형편 및 언어문제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원만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였다.

피고인의 무관심과 통제로 인하여 피고인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기는커녕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누리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피고인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을 것이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이와 같은 반응을 보고 피해자가 처음부터 피고인과 결혼할 생각 없이 사기결혼을 하였다고 오해한 것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에 이른 주된 원인이 되었다.

거기에 피고인의 피해망상적 사고경향과 음주 중 폭력습벽이 더 해져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사건 범행은 결국 계획적이거나 미리 의도된 범행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피고인의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피해망상적 사고경향 및 음주 중 폭력습벽에 기인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이러한 그릇된 성행을 교정하기 위하여서도 상당한 기간동안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형의 선고는 불가피하다고 판단된다.

한편 시각을 바꾸어 이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돌아보고 싶다. 특히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남성과 제3세계 여성 사이의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국제결혼의 명암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고 있다. 배우자감을 국내에서 찾을 처지가 되지 못했던 피고인이 결혼정보회사를 통하여 베트남 현지에 임하여 졸속으로 피해자를 만나게 된 전 과정을 보면서 스스로 깊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은 그저 피해자가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단 몇 분만에 피해자를 배우자감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누구 집 자식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도 알려 준 바 없었고, 그래서 이를 전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또한 스스로 알고자 하지도 아니하였다. 목표는 단 한 가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일 뿐, 그 이후의 뒷감당에 관하여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지탄을 피고인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의 한 발로일 뿐이다. 노총각들의 결혼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는 남녀를 그저 한 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혼인은 사랑의 결실로 소중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의 아내가 되고자 한국을 찾아온 피해자 후안마이. 그녀의 예쁜 소망을 지켜줄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19세 후안마이의 편지는 오히려 더 어른스럽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되리라는 소망을 해 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다.

이 법원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사람과 결혼하여 이역만리 땅에 온 후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한 채 살해되어 19세의 짧은 인생을 마친 피해자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무하고 싶었다. 그 전제로 피고인이나 결혼을 알선한 결혼정보업체를 통하여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리려고 하였다.

결혼정보업체는 피해자의 성장배경, 생활환경 및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에 대한 이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고, 관계당국이나 피고인을 통하여서도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릴 길을 찾지 못한 채 이 사건 판결에 이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피고인으로서도 피해자의 가족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기회를 갖지도 못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에 피고인의 연령, 성행, 전과관계, 범행의 동기, 경위, 결과 및 범행 이후의 정황 등 양형의 조건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에 대하여 징역 12년을 선고한 제1심의 형량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대전고등법원

 


한 여름의 캠퍼스를 오고 가는,
활짝 핀 장미처럼 아름다운 여학생들을 보며
나는 그대를 기억하네.

어떤 이들이 축복 속에서 태어나 이런 여름을 살때,
그대는 가난 속에서 태어나 모질고 짧은 겨울을 살다가
한 번 펴 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봉오리가 되었네.

꽃씨가 인연을 따라 내 마음에 심어졌으니
나는 정성을 다해 가꾸어 꽃을 피울 것이네.
비록 육신은 이제 없으나 그대는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닐세.

또 다른 그대가 될 수도 있는 그 아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주어질 기회,
그리고 그 기회를 가능케 할 선생님들께 달아 드릴 작은 날개들이,
그대가 견뎌야 했던 그 모질고 혹독한 겨울을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삶에서라도 막아낼 수 있다면
그대는 그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함께 사는 것이네.

그대와의 인연에 감사하네.
그리고 참 미안하네.

타클라마칸 –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그 인연

오랜만이다. 시간도 많았고 생각도 있었지만 쓰기가 어려웠다. 한 수 가르치려는 내용, 비난하는 내용, 그리고 나 잘났네 하는 내용, 이 세가지를 빼고 나니 쓸것이 없더라.

타클라마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두 바닥 인생이, 각자의 인연속에서 살아 오다가 우연히 엮이게 되고, 어떤 결말을 맺게 되는데, 그 결말이 각자가 지나온 삶에서 지은 인연이 결국은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잔인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한때 건설업쪽에서 잘 나갔었지만 부도를 냈고, 배우자로부터 멸시와 냉담 속에서 이혼을 당했고, 십대초반의 아들이 하나 있으며 (엄마와 살지만 아빠를 좋아 한다) 노모와 둘이 산다. 노모가 싸주는 도시락과 보온병을 가지고, 봉고차를 몰며 고물을 사서 (혹은 때때로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어쩌면 괜찮은 대학을 나왔을 것이다.

그 여자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좋다. 네일아트를 하고 싶어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다리의 한 계단도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비슷한 수준의 여자를 (나이 많은 거리의 통기타 노래꾼 – 현실을 회피하는 사람) 우연히 만나서 동성애로 발전하며 함께 잠시 낭만을 나누기도 하지만, 현실의 무게를 견딜 방법이 없어,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다가 장차 몸을 팔게 된다. 그 첫번째 그리고 생의 마지막 손님이 바로 그 남자.

늘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우연의 장난으로, 초보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화대를 주지 않고 도망쳤던 그 남자를 (아침에 잠든 그 여자를 보며 돈을 손에 들고 망설이다가, 돈을 기다리는 가족 생각에 도망을 쳤다만, 돈이 있었더라면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처럼 황량하고 우울한 곳에서 조우하였다. 각자의 과거, 그 가난과 우울의 시간속에서 쌓여온, 좌절과 배신의 기억들 그래서 이제는 악만 남은 두 사람의 마음이, 바로 그 곳 그 시간 그 인연속에서 부딛친다. 결국은 두 사람 다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살인.

우리 삶의 인연도, 그 실타래가, 단 두개의 실마리만 존재하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닥의 실타래가 얽키고 설키어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인연을 만들며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을때에도, 설령 잘 보지 못하고 즉시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여러 차례 다양한 실마리를 보게 되고 수 차례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었더라면, 평소에 술마시고 운전대 잡는 버릇을 들이지 않았었더라면, 그날 한잔으로 중지했었더라면, 그때 잘난체 우기지 말고 대리운전을 불렀었더라면, 그때 너무 늦게 마치지 않아서 좀 돌아가는 한적한 길을 선택했었더라면, 내일 해야 할 산더미 같은 회사일을 떠올리며 그때 과속하지 않았었더라면… 무단횡단 하던 그 사람을 치어 죽이지 않고, 어쩌면 서로에게 욕이나 퍼붙고는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 갔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끔찍한 인연으로 엮이게 된다. 그 수차례의 기회들을, 그 실마리들을, 쌍방 모두, 하나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다가, 결국은 그 인연의 결과를 크게 후회하면서 깨닫게 된다. 하지만 너무 늦다.

짧게 보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필연이고, 짧은 시간에는 우연의 역할이 커 보이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만 인연이었지만,

그 남자가 만약 부도가 나지 않았었더라면?
이돈철 회장도 ‘운7기3’ 이라던 사업이 자기만 열심히 한다고 다 성공하나. 그리고 돈은 악연을 더 많이 만들 가능성이 크다, 어떤 곳 어떤 사람들에게는. 따라서 이를 통해서 그 인연의 끝에 다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은 10%.

그 남자가 만약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런 장소에서 그런식으로 어울릴 친구들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그런 상황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이 오기전에 맨정신으로 기회를 하나라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50%.

그 남자와 아내가 만약 금실이 좋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였다면?
마지막 기회, 즉 그 여자의 극한 비난을 듣고 있던 그 남자가 손에 든 헤머를 위로 들어 올릴지 (살인) 혹은 아래로 내려 놓을지를 (사과나 도망) 결정지은 것은, 어쩌면 그에게 아무런 희망도 갈곳도 의지할 곳도 없다는 절망감이었으리라. 만일 집에 따뜻한 저녁을 해 놓고 그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마지막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70%.

그 남자가 만약 그런 어리석고 질 나쁜 친구들과 엮이지 않았었더라면?
좋지 않은 곳을 들락거릴 기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그런 상황에 빠진다고 하여도, 거짓말로 함께 가짜 사장노릇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녀와 조우했을때 그런 최악의 모욕적인 비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헤머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거짓말로 가짜 사장노릇을 했기에 반대 급부로 받은 극단적인 모욕이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그냥 별 볼일 없는 바닥인생이라는 것을 서로 속이지 않고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면 어쩌면 하나 정도의 기회는 잡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30%.

그 남자가 만약 아내와 금실도 좋고, 술도 전혀 마시지 않고,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부도가 났지만 열심히 하루하루 일하면서 살았었더라면?
그런 인연에 처음부터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런 상황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마지막에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전무. 이들 모두의 조합으로 그 인연과 그 결과를 피했을 가능성 90% 이상.

그 여자가 만약 현실을 참아 견디며 미래를 위해서 투자했었더라면? 현실이 억울하고 답답하고 암울하지만, 그래도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네일아트에 투자 하고 노력을 했었더라면? 아마도 노래방 도우미 노릇은 하지 않았지 싶고 또 나아가 몸을 팔지도 않았지 싶다. 소위 흙수저의 현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 한국 수준이 밥 굶고 기본 생활비를 벌지 못해서 몸을 팔아야 하는 사회는 아니지 않는가? 이로인해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80%.

그 여자에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 비록 레즈비언 파트너라 하더라도 그래서 ‘미래’와 ‘희망’을 진심으로 나눌 사람이 있었더라면?
몸을 팔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피했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그런 인연에 그 남자와 엮이게 되었더라도, 극단적인 모욕을 퍼부어, 모든 기회를 쌍방에게서 빼았고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60%.

그 여자가 만약 ‘남들 다하는데 나는 왜 못해?’ 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억울해 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남들 보기에 이게 무슨꼴?’ 이렇게 남들을 신경 쓰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노래방 도우미나 혹은 몸을 팔지 않으면서도 생존하고 또 생활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다리 위로 올라갈 생각 혹은 올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아득함도 절망감도 슬픔도 적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좋은 네일아티스트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70%.

그 여자가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완벽한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그 영화 속에서 그 여자는 (그리고 사실상 그 남자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인연의 끝에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젊은날,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현실속에서 비록 상대적으로 좋은 외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지와 무명속에서 그저 본능에 따라 눈에 뜨이는데로 큰 무리를 쫓아 다니다가 늙게 되면,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질 그 인연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외부적인 조건으로 궁극적인 인연과보를 바꿀 가능성 10%.

그대는 어떤 괴로움을 안고 살고 있나?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이 블로그를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들이라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 아닐까? 주로 가까운 사람들?

인연의 실타래, 여러개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 낸 그대의 현재 삶. 다양한 모습의 다수의 실마리가 존재하건만, 어쩌면 그대는 밖을 보느라 혹은 남들을 탓하느라 너무 바빠서,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그 중 단 하나의 실마리도 붙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대의 종착역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될 (위구르어로 ‘되돌아 나올 수 없다’는 뜻) 가능성이 크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되건 얼마나 좋은 옷을 걸치고 가건 간에, 그 사막에는 홀로 간다. 그리고 나올 수 없다.

안을 보자. 지난 날에는 오직 생존과 발전을 위해 정열과 노력을 쏟았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쌓아온 그 인연의 실타래를 보는데에, 그리고 실마리를 찾고 붙잡아 푸는데에 정열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지 않겠는가?

어떤 일이 일어나면 혹은 어떤 관계로 부터 괴로움을 당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지난 날 알게 모르게 만들었던 인연에 의해서 왔고 또 생겨난 것이다. 바로 지금, 과거의 인연을 일시에 바꾸어 현재의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또 미래의 괴로움을 막을 방법이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어떤 속임수로도 피할 수 없다.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돈도 속임수도 필요 없고 또 다행히 상당히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방법이다. 이미 예를 들면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있거든, 지난 블로그 글들을 읽어보면 더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도 나도, 행복의 길을 찾고 또 그 길을 걷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스톡홀름 마라톤

아를란다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정오가 좀 지났다. 시간을 10시간 뒤로 돌릴 만큼 길고 힘든 여행이었다. 아내도 일단 안심할 것이다. 참으로 오고 싶어 했던 곳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마음속에서 간직하며 그리워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늘 흥미로워 하였다. 지금은 없어진 그 멋진 SAAB 자동차도 그 대학도시들도 또 영화들도. 어린시절 나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그 예뻣던 스웨덴 소녀는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지만 이곳은 늘 생각하면 즐거운 내 마음의 작은 사치라 할 수 있다.

나는 작은 백팩을 매고 흡사 늘 그랬었던 것처럼 시내로 들어 가는 기차를 탄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와 일상이 마치 내가 전에 일부였었기라도 한 듯 익숙하다. 고색창연한 중앙역 건물을 빠져 나와 호텔 방향의 출구를 따라 거리로 나온다. 21세기 인터넷 기술의 도움으로 수만리 밖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걸어 보았던 익숙한 거리다. 곧바로 호텔을 찾아 들어 간다. 4명의 아가씨들이 리셉션 데스크에서 반겨 주는데 ‘이것이 스웨덴에서 방문객을 환영하는 방식인가요?’ 농담을 하니 모두들 활짝 웃는다. 나를 도와주는 스웨덴 아가씨는, 내가 좋아하는 ‘잉리드 베리만’ 이라는 이름의 장미꽃처럼 참으로 아름답다.

이제 이 도시의 거리들을 내 발로 뛰어 보게 되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며 오래전 읽었던 최인호작가의 ‘깊고 푸른밤’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남자는 차를 몰고 미국을 횡단하며 작은 도시들을 지나며 생각한다. 지금 이 거리를 지나는 저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같은 모습으로 주차를 하고 햄버거를 사며 맥주를 마시고 아이를 낳고 웃고 울다가 죽게 되겠지. 내가 자기들의 삶을 지금 차창밖으로 바라 보는 줄 상상도 하지 못하며 말이다.

어제는 내가 어떤 거리 어떤 일상의 일부였는데 오늘은 어떤 거리 어떤 일상을 바라보는 이방인이 되어 여기에 있다.

이제 출발선에 섰다. 이만명의 다른 사람들도 같은 기대와 희망으로 함께 섰다. 말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고 온 곳도 다르고 갈 곳도 다르다. 이 넓은 우주 그리고 그 끝없는 시간속에서 그야말로 우연히도 잠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속에 서 있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무슨 기록도 다짐도 목표도 이제 더 이상 없다. 내가 사랑하게 되었던 그 가파른 산길도 끝없이 발랐던 선크림도 또 *을 쌋던 그 길가의 숲도. 난 이 시간을 위해 그것들을 잠시 빌렸을 뿐이었다. 출발전 가슴 두근거리는 작은 흥분…

이 아름다운 도시를 달리고 달려 이제 백년 전 올림픽이 열렸었던 그 스타디움으로 뛰어 들어 온다. 그때 그 올림픽의 함성은 어디로 갔고 또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백년이 지난 오늘 어떤 우연과 또 의지로 내가 이 곳에 오게 되었다. 또 다른 백년이 지난 후에도 또 다른 사람들과 함성들이 이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 그 함성의 주인들은, 백년 전 오늘 이 순간의 나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삶과 인연이 이렇게 지나가고 또 오가는지… 나의 마라톤은 끝이 났고 나는 절룩거리며 그 공원 옆 호텔로 되돌아 왔다. 파란색 기념 티셔츠를 입고 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서.

유람선을 탄다. 이 바다 그리고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시와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낸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내가 아직도 가끔 부르는 동요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그리고 Carola가 부르는 이 아름다운 노래 ‘Song to the North’. 그때 그 펜팔 친구도 지금은 이 가수와 비슷한 중년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잊은지 오래겠지만 난 그 인연으로 이렇게 세월이 흐른 지금 여기에 와 있다네. 그대에게 감사하노라. 행복하시오.

수십 년 전 한때 유학을 꿈꾸었던 그 대학. 일요일의 고요한 캠퍼스를 찾아와 조용히 걸어 본다. 그 단과대학 건물 앞에 섰다. 내가 공부했었었을지도 몰랐던… 지난 수십 년 간 나는 지금 내눈에 보이는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 왔다. 내가 그때 만약 이곳에 왔었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 나의 인연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인간의 삶은 일부의 숙명과 그 안에서 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부의 작위가 어울려 서서히 무르익으며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우연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되돌아 오는 길에 공원벤치에 앉아 이 이야기를 전부 아는 아내와 문자를 주고 받으며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 나의 삶 나의 인연에 대한 큰 고마움과 더불어,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그 길을 뒤늦게 보게 되면서 생기는 감상적인 아쉬움 때문이리라.

하지만 삶의 본질은 내가 어떤 길을 선택했어도 달라질 수가 없으며,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단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임을 나는 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물어 보았지만 부자건 성직자건 늙은이건 그 누구도 ‘되돌아 가고 싶다’ 라고 대답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어떤 조건속에 던져져 시작 된 우리의 삶. 다만 그 조건속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이나마 인간의 길을 찾고 걷다가 떠나기를 나는 희망할 뿐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오르며 그저께 내가 실로 온 몸으로 그 인연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이 아름다운 도시를 뒤로 한다. 이 사람들은 내일 또 출근을 하고 가구를 만들며 여름휴가를 계획할 것이다. 이곳에는 여름이 깊어가고 또 내가 사는 곳에는 겨울이 깊어가고… 내가 다시 이 여름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운 공원 그 벤치에 다시 앉을 수 있을까? 인연이 허락 하면…

일상의 제자리로 되돌아 오고 나니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던 것 같고 또 내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육개월 전의 내가 아니다. 며칠전 그 이벤트 때문이 아니다. 인연을 따라 내가 그 목표를 ‘선택’ 했었고 또 그것을 내 삶의 중요한 의미로 삼아 노력했었던 그 시간이 나를 변하게 했고 내 삶을 조금은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뀌어진 삶은 장차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선택, 어쩌면 더 나은 선택을 허락 할 것이다. 추수 뒤에는 새 봄이 오고 그때 농부는 또 다시 씨를 뿌린다. 세상은 추수에 맞추어 돌아가지만 내 삶은 씨뿌리는 봄 그리고 땀흘리는 여름이 하이라이트. 추수는 선택의 시간이 아니고 지나간 선택의 결과일 뿐. 나는 봄 그리고 여름에 이미 행복을 맛보았다. 그리고 내가 씨뿌리고 땀흘리는 한, 내 여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