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시뇰 그리고 결혼계약

‘몬시뇰’은 우리에게 슈퍼맨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1982년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결혼계약’은 2016년에 방영된 티비 주말드라마입니다. 보았고 또 어쩌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몬시뇰은 언젠가 한번은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이야기 했던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훌륭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영화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이 영화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IMDB에서 서양사람들이 (아마도 미국인들이) 매긴 점수가 10점 만점에 5점 정도로 그야말로 형편없는 어쩌면 중간도 못되는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는 내가 미친 것일까요 🙂 여하튼 내가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은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인터넷 관련 기술의 발달로 옛날에는 가능하지 않았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싸게 가능해진 것들이 있지요? 지나간 티비 드라마를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일것 같네요. 일년에 한 두번 한국 드라마를 볼까말까한 우리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만큼 감동적으로 보았던 ‘어른들의 동화’ 같은 드라마가 바로 이 드라마 ‘결혼계약’입니다. 물론 ‘묜시뇰’ 보다는 훨씬 한국에 더 알려진, 감수성 있는 어른들이 많이 좋아했다던 통속적인 소재의 티비 드라마 입니다. 이런 통속적인 프리티우먼 백설공주 신데렐라 이야기를, 훌륭한 대본과 연기 그리고 연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묜시뇰과 결혼계약은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개의 어른 동화에서 크나큰 공통점을 봅니다. 이 두개의 족보가 전혀 다른 드라마들이 인간에게 극히 공통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게 됩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 미국에 유학했던 우리 선대들이 남긴 이야기들 중에서 한두가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학 식당에서 식판 위에 건드리지도 않은 그 크고 맛있는 오렌지가 식사 후에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의 놀람과 더불어 미국 남녀 대학생들이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날때면 방문을 열어 두었다던 이야기 입니다. 그때 당시 그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 유학생의 시각은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과 다르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이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마치 조선시대에나 일어났을 그런 풍습을 유지했던 것은 문화적 시각적 차이를 떠나 사실로 여겨집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을 숭배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그 당시 미국인들을 지배했던 삶의 방식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보고 듣고 알게된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면들이 있어요.

그저께 우연히 독일국영방송 DW에서 만든 ‘미국의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에 관한 도큐맨터리를 잠시 보다가 무척 놀랐어요. 일대일로 대응하는 한국말이 없어보여서 그냥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라고 했는데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신앙’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요? 침례교냐 장로교냐 이런 종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주어 해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전세계에서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도큐맨터리에 어떤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러한 삶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십대 중반의 두 딸들은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21세기 미국인들과 한참 거리가 멀어 보었어요. 침대옆 서랍에서 오래된 낡은 책을 보여주는데요 아주 어릴때부터 닳토록 읽어 그야말로 닳고 닳은 성경이었어요. 그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다못해 아빠가 학교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도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매일 새벽기도를 몇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던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어요. 어떤 특정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 매우 훌륭한 신자일 그런 사람들과 만약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램 관련 사태들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까요? 아까 이야기한 도큐맨터리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많은 어른들과 학생들이 켄터키 어디에 있다는 노아의 방주를 방문해요. 미국답게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 박물관이에요. 그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역사에 언제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 배우고 또 기억합니다. 참 인간이란 안타까운 존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결과가 ‘비정상’ (?) 이라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묜시뇰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미국의 한 젊고 멋진 천주교 사제가 이차대전을 참전한 후에 로마에 남아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며) 카톨릭 최고 권력에 (?) 다가가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희노애락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이 주어진 어떤 상황 혹은 사회적 구조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친구와 적을 만들고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좌절하며 또한 천주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황의 암묵적 동의하에 마피아와 손잡고 아슬아슬한 사업을 벌이며 일어나는, 거룩한 천주교 의복 뒤에 감추어진 정말 있을 법한 인간들의 진면목을 담은 영화입니다. 왜 10점만점에 5점일까요? 그것은 흡사 우리가 어릴때, 부모님의 섹스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부끄럽고 괴로워했던 그런 상황이, 종교와 현실이라는 상황에도 일어난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나아가 걸프렌드와 섹스를 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케하는 (?) 자식을 둔 나이가 되고보니,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사랑을 나누셨다는 것에 조금도 거부감이 생기거나 이상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어요. 마치 식사를 하셨고 화장실을 가셨었다는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와 마주치게 될때 그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신도들’ 그리고 지금도 미국 어디선가 아마도 ‘방문을 열어두고 남녀가 이야기를 나눌 그 에반젤리컬 크리스쳔들’에게는 큰 혼란과 부끄러움 그리고 괴로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상황을, 어릴때는 그냥 괴로워 했겠지만 어른이 되고 힘이 생기고 나면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넘들의 가짜 진리’를 막으려고 하겠지요. 바로 이 결과가 묜시뇰이라는 탁월한 영화가 IMDB에서 10점 만점에 5점을 받은 이유지 싶네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신도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들이 자유로우며 그들이 사랑으로 자신과 타인들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실까요?

묜시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었을 만들어 어떤 매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명백히 알고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대본을 (혹은 원작 소설을) 쓴 분 그리고 영화를 만든 분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알았었고 생각했었고 또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내 블로그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이지 싶네요.

나는 ‘결혼계약’ 드라마를 보고선 그 극본을 쓰신 분의 뒷조사를 (?)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위에서 묜시뇰 영화의 대본을 쓴 분이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분도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분이 미디어에 인터뷰하는 (결혼계약 드라마에 대해서) 것도 읽어 보았어요. 이분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나는 알길이 없지만, 이분은 인터뷰 끝에, 어떤 철학 혹은 믿음이 결혼계약 극본 바탕에 깔려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 내게, 이 결혼계약이라는 드라마를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 반복 시청하고선 도대체 무었을 보았던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이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에서 해탈을 얻는 과정을 그린 (붓다의 가르침을 표현한) 위대한 현대판 경전이다’ 🙂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교니 사랑이니 붓다의 가르침이니 해탈이니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그리스도교도 사랑이라는 의미도 또 붓다의 가르침도 해탈이라는 표현도, 우리 인간의 삶이 먼저 있고 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들 인간의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먼 미래에도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조건들 속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도, 사랑을 주고 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도, 그리고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도 변치 않고 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임에 분명해요.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시고 내 놓으신 일종의 해결책들이 (?)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본질이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엄마와 둘이 사는 7살 은성이도,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멀리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동시에 엄마를 몹시 사랑하며 그 엄마의 행복을 깊이 바랍니다. 은성이는 결국 이 두가지 커다란 마음의 갈등을 이겨내고 스스로 해결하여 해탈에 도달합니다. 엄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닥쳐온 상황을 더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 냅니다. 그 싫어하던 아저씨를 받아들이며 결국은 새 아빠로 삼고 가장 아름다운 부녀의 관계로 발전시킵니다. 한 인간의 해탈을 이렇게 마음에 와닿도록 훌륭하게 표현한 것을 나는 일찌기 보았던 적이 없어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도대체 (현실 속의)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연기를 극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뛰어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래 느낍니다.

남자 주인공 지훈씨의 친모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도 아니고 마음이 제대로 밖인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들의 사랑으로 결국은 마음을 비워내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아들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기생하고 나아가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는 삶의 방식을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참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해요 (비록 내 몸은 병들어 죽지만) ‘나는 너 덕분에 살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보고 또 그의 대사를 들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밤에 이룬 해탈이 아침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나는 또한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블로그에 골프 이야기를 몇차례 쓴 적이 있었는데요. 골프 자체가 주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골프의 속성이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것이 주제였던 적이 많았어요. 유튜브 골프 레슨을 보거나, 잠시 연습을 하거나 혹은 새 골프채를 손에 쥐게 되면 골프가 ‘이렇게 하면 되지 싶다’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해탈을 (?) 하게 되요. 그런데 그런 해탈이 얼마나 힘이 없고 현실에서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지를 온몸으로 뼈져리게 깨닫는데 필요한 시간을 별로 길지 않아요. 마치 밤에 얻은 깨달음이 다음 날 아침에 (마주치는 현실속에서) 산산조각 나듯이, 다음 라운드를 나가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 (현실자각타임) 속에서 더욱 더 괴로워 지게 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남자 주인공 멋진 지훈씨는 여자 주인공이 (서로 지극히 사랑함에도 시한부 생명의 짐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지 않으려고) 자신을 밀쳐내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이제 너도 한번 살아봐. 내가 살릴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벌 2세로 제멋대로 살아온 지훈씨.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정말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심성을 가진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만나 차차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지훈씨는 주변 모두가 놀라자빠질 자신만의 해탈을 이루어 냅니다. 인생에서 무었이 중요하고 그 중요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힘을 주는지 재대로 맛본 다음부터 이 인간말종은 완전히 변화합니다. 한 인간을 참으로 존경하게 되면서 싹튼 사랑은 세상 그 무었도 막을 수가 없고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합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말했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극작가가 배우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하듯이) ‘돈으로 막으려면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해탈하고 나면, 그래서 돈을 진심으로 포기하고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보려는 시도를 진정으로 그만두게 되면, 상대방은 신기하게도 저절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결코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우리 삶의 큰 진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주인공 혜수씨. 신데릴라 입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 시한부 생명. 어린 딸을 위해 모든 것 무슨 짓이던 하고선 세상을 뜰 훌륭한 엄마입니다. 난 남자 주인공 지훈씨가 쓰레기짓을 할때 ‘아 저런 것들을 사람들이 쓰레기 짓이라고 하는구나’ 배운 것이 많아요 🙂 그리고 동시에 ‘어 나도 보통 저렇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적이 (때로 훌륭한 일이라고 조차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렇게 좀 놀라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미남에 금수저라는 것만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 지훈씨와 내가 닮은 점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이토록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동시에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훈씨와 닮은 점이 많듯이 아내는 혜수씨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혜수씨가 지훈씨를 ‘살게 해 주었듯이’ 어쩌면 아내도 나를 살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산다는 것이 무었일까요? 지훈씨가 혜수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했고, 또 지훈씨 엄마가 아들 지훈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했는데요, 도대체 이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까 위에서 비유로 말했던, 매일 새벽 기도를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다는 그리스도교인과 내가 마주 앉아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 다난한 일들에 대한 견해를 서로 밝히고선, 전 세계에서 뽑은 수 많은 배운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누구의 견해가 보다 균형 잡혀 있는가 묻는다면,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나의 견해가 좀 더 균형 잡히게 들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또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언행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두 개의 상반된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기울이며 여태껏 살아 왔어요.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안타까움은 (수십년 매일 새벽기도 같은) 그런 노력과 성취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변화하며 나아가 그런 변화의 영향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싶어요. 이처럼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 인생이라, 아마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 (불완전, 불만족, 괴로움) 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다시 되돌아가서 ‘살게 해주었다’ 혹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몽고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야생 늑대는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최약의 적이기도 하다고 해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추적하여 죽이고 때때로 새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요, 태어난지 몇주만 지나도 늑대 새끼들은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이 되지 않은 핏덩이 새끼들을 데려다가 사람들과 가축들 사이에서 기르기도 한다는데요, 한살 정도가 되고 나면 (그동안 그렇게 같이 잘 놀고 좋았던 그 녀석이) 야성을 결코 감출 수가 없어 사람과 가축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가 되어 결국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녀석과의 우정은 (?) 한장의 늑대 가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숙명이라네요. 늑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물려받은 DNA가 합쳐서 빚어낸 삶을 살겠지요. 그 드라마에서는 혜수씨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훈씨가 알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그의 형을 그 자리에 대입한다고 똑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다만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공평하기도 하지 싶네요. 서론이 길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산다’는 의미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그리고 물려 받은 DNA에 지배되는 그 작은 세계, 좁은 믿음 그리고 굳어진 가치관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세상에 산재하는 다른 환경들 그리고 과거에 살다간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와 믿음 그리고 가치관을 (최소한) ‘볼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무언가 작은 것들이라도 배워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결과적으로 덜 다투고 더 사랑하고 더 가볍게 왔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그리고 묜시뇰 영화에서도 많은 등장 인물들이 바로 이렇게 ‘살게 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뛰어나게 그리고 있어요.

두가지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며 오늘 이 길었던 두 편의 드라마 이야기, 내가 생각컨데 가히 최고의 드라마의 이야기를 마칠까해요. 먼저, 위에서 비유로 들었던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 드라마를 보고선 아내에게 비유로 말했어요. 평생 권투를 한 사람의 주먹은 부드러울 수가 없다. 샌드백을 때린 정권과 손에 베인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심신도 다르지 않다. 권투선수에게 부드러운 손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새벽기도 평생한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고 부드럽기를 기대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리고 두번째는, 밤에 얻은 해탈이 아침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나면, 다시 말해 비록 다음날 아침에 산산조각 나는 해탈이나마 하고 또 하면서 시간이 지나노라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덜 나든지, 산산조각이 나도 덜 괴롭든지 아니면 산산조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든지 하면서 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해탈에 가깝게 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에베레스트 산을 목숨을 걸고 오르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웃기는 존재 입니다. 그 등반을 이 세상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목숨걸고 그 힘들고 위험한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그래도 할 사람이 소수는 있겠지요). 어떤 면에서는 해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 모두 각자 각자 어떤 시간이 오면 홀로 세상과 작별해야 합니다. 해탈? 그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좋아하는 당신이나 가지세요 🙂

글쓰기가 점점 어렵다

‘회색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 보건데 참으로 지당하고 또 훌륭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상대나 상황을, 경멸하거나 혐오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마음속에서 지레 포기하는 의사도 가지지 않으면서, 다만 기대치를 내리는 것이 그 열쇄가 아닌가 싶다. 이것, 일단 되기 시작하면 잘 되고 또 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 까지는 상당히 어렵고 때로 절망적이라고 까지 느끼지 않겠나 싶다.

글쓰기가 점점 어렵다. 굳은 신념을 (?) 가지고 큰소리로 떠들며 사람들과 상황을 나무랬던 (?) 지난날의 시간들이 때때로 그립기 조차하다. 부끄러운 내용의 글들이지만 일부러 내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인생의 어떤 시기 이후부터는, 심신의 변화와 여러가지 겪은바로 말미암아, 돌고도는 세상만사, 오가는 계절 그리고 시작과 끝 같은 것들을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최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며, 일전에 보았던 ‘Being 97’ (‘A 97-Year-Old Philosopher Ponders Life and Death: ‘What Is the Point?’) 라는 도큐멘터리가 여러차례 떠올랐다. 맨아래에서 볼수 있다.

동화를 스스로 지어서 손주들에게 녹음해서 보내주었던 자상한 할아버지. 평생을 철학 그리고 죽음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살았던 미국의 한 학자가 생의 마지막 몇달을 보내는 모습을, 그리고 그의 삶을 지배하던 생각과 언행들을,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나 이제 영화 도큐멘터리 제작자가 된 손자가 촬영하고 편집하여 세상에 내놓은 매우 특이하고 또 드문 훌륭한 도큐멘터리라는 생각이다.

UCLA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UC Santa Babara 철학과에서 평생을 가르치며 살았던 이 석학, 죽음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던 이 노인이 말한다.

‘노년이 실제로 되어보지 않고서는 노년의 정신세계를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다’. 자신은 오랜 세월 죽음을 연구하고 또 책을 쓰면서, 죽음을 이해했고 나아가 인간은 (자연의 질서속에서)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었지만, 막상 죽음이 몹시 가까운 상황이 되니 혼돈스럽고 두려우며,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What is the point of it all?’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혹은 ‘종말에 가까워 느끼는 이러한 두려움과 회의 등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이어령 선생의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내게 이 도큐멘트리가 왜 그렇게 자주 떠올랐던가 그리고 죽음에 임박한 이 미국 상노인의 일상이 내게는 왜 그렇게 더 와닿았을까 여러차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도

처음엔 그저 마음이 그리로 흘러 갔었다
마음을 쏟아 우정을 사랑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을 쫒았다

다음엔 그저 마음이 그렇게 멀어 졌었다
마음을 쏟을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없었다

나중엔 다시 마음이 어쩌면 돌아 오리라
마음을 비워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어쩌면

지금은 그저 조용히 내버려 두자 바란다
나중에 찾을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그대로

그대로 남겨 두고파 혹시나 알아 언젠가
사람의 마음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무었으로 홱 변할런지 뉘아나

하지만 지금 멀어진 내맘을 난들 어쩌리
세상이 모두 그런줄 이꼴이 우리들 수준인줄 왜 모를까만 그래도

라텍스 장갑 같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다양한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내 자신을 멀찌감치에서 떨어져 바라보는 기회도 더 많아진다.

인간들이 스스로 여기기에, 배웠다고 있다고 그리고 안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힘도 주고 거드럼도 피우며 사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나도 점점 닳아 빠지면서 덜 속게 되니 보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그 배움이, 있음이 그리고 안다는 것이 마치 라텍스 장갑처럼, 끼고 있을때는 안팍 구분이 되긴 하지만, 그 장갑 자체는 너무나 얇고 연약하여 하찮은 변화나 충격에도 쉽께 찢어져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안팎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만나서 자식 낳고 몇십년을 살다가도, 마치 영원할 듯한 그 사랑이 얇은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져 남남이 되는 경우도 흔해 빠졌고, 아무리 부유하고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욕망에 사로잡히고 오감에 휘둘리는 인간의 본질 앞에서 단 한치도 더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마치 찢어져 속이 훤히 보이는 라텍스 장갑처럼 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안스럽고 또 내심 걱정되기도 하는 것은,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이런 상황이 나아지거나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마치, 젊은뇬은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보기 좋은데 늙은넘은 아무리 발광을 해도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으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인간들이, 지성이니 사랑이니 철학이니 문화니 종교니 ‘이름붙여 드러내 감동받고 지랄떠는 것들’ 중에서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지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가지 위안이라면 모든 인간들이 점점 ‘level playing field’에 다가 가다가 (강제 평준화 이후에) 종을 치게 된다는 것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어 가는 이야기를 하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 있지만, 반대로 나이를 먹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며 살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The Age of Adaline’ 라는 영화도 있다. 두 영화의 결론은 ‘둘 다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비로소 깨닫게 되는 ‘라텍스 장갑같은 인간’ 이라는 것을 내가 수십년 전에 깨달았었다면 좋았을까? 혹은 죽는날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생각에는 ‘역시 둘 다 아니다’ 🙂

아는 것 하는 것?

지난번 블로그 글을 읽고 난 아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훈계조의 글로써 쓴 사람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라는 혹평을 하였어요. 밥상을 뒤엎으며 대판 싸우려다가 (요샌 스스로 차려서 바닥에 놓고 먹기도 하니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고) ‘그렇게 보여질 소지가 있으며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한 내 한계’라고 쿨하게 말을 하고선 내 방으로 꺼져서 혼자 한잔 하면서 울분을 삭였어요. 나이가 들면서 가정의 헤게모니도 생체 호르몬 구성비의 역전과 더불어 반전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요 🙂

오늘은 새해맞이 시리즈로, 지난 글에 이어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지만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말투도 좀 덜 건방지게 써보려고 해요. 잠시라도 그대들께 즐거움을 주기를 바래요.

우리가 어릴때 말을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 혹은 버버리라고 불렀어요. 그들은 왜 말을 못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소리를 내는 입이나 성대에 문제가 있어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에 말을 못하게 된 주된 이유는 (청각기능의 문제로)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흉내를 낼 수가 없고 또 소리를 어떻게 낸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들을 수가 없으니 자신이 내는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해요. 마치 태어나면서 장님인 사람이 색깔을 전혀 상상할 방법이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닥치게 되어 생각을 하게 되면, 예를 들면 ‘지금 그녀에게 고백을 할까 말까’ ‘저 떠나려는 버스에 지금 뛰어가면 놓치고 괜히 망신만 당할까 아니면 탈 수 있을까’ ‘앞에 고약한 호수가 공 내놓아라 하면서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데 다음 샷을 어떻게 칠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머리속으로 생각을 하는데요,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국어로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하게 되지요 (내면의 대화). ‘지금 고백했다가 망신만 당하고 괜히 잘 되고 있는 관계를 망칠지도 몰라 그만 두자’ ‘지난번에 버스 세워서 잘 탓는데 뛰어가 보자’ ‘힘을 빼면 된다던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말이에요. 나는 물론 한국어로 내면의 말을 하고 꿈도 한국어로 꾸는데요, 드물게 영어로 꿈을 꿀 때도 있어요. 꿈속에서 영어로 말을 술술 잘하고 또 어려운 단어를 쓰는 꿈을 꾸다가 내 자신이 (그것에) 놀라서 이게 왠일 하면서 꿈꾸는 자신을 놀라워하는 꿈을 꾸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는) 일도 있었어요. 자기가 꿈속에서 사용하는 영어단어들을 자기가 이해를 못하는 웃기는 경우지요. 이민와서 힘들게 살다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

옛날에는 의사 과학자들이 벙어리들에게 (소리내어) 말을 하게 교육을 시킨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좋은 뜻이었겠지요. 자신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목이나 혀의 감각등 만을 (센세이션) 기억하면서 내야하는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수화를 (손으로 말하는 사인렝귀지) 덜 배웠거나 안 배웠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의사와 과학자들이 차차 깨닫게 된 것이 있어요. 어떤 이유로던지 수화를 배웠던 사람들보다 이렇게 말을 했던 벙어리들이 지능이 더 낮고 사회생활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요. 왜 그랬을까요?

입으로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벙어리지만 수화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만약에 골프를 치면서 앞에 물이 딱 버티고 있는 고약한 상황에 부딪치면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할까요? (어떤 내면의 말을 할까요) 수화를 통해서, 우리가 음성언어로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내면의 말을 ‘저넘의 물에 안빠지려면 왼쪽으로 힘을 좀 빼고 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할 수가 있다고 해요. 꿈도 수화로 꾸며, 약간 중국어처럼 한 글자에 많은 의미가 주어진 그런 방식으로 꿈을 꾸기도 하고 또 상황극 비슷하게도 꿈을 꾼다고 연구한 사람들이 말하네요. 그런데 수화를 전혀 모르면서 다만 보통 사람의 음성 언어를 흉내낸 사람들은 이렇게 하기가 훨씬 힘들거나 할 수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지능발달도 더디고 또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고 하네요.

왜 이런 벙어리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나는 전산기술자로 오래 일을 해왔는데요, 내가 전문적으로 일해 온 분야는 ‘utilising management infrastructure such as Microsoft Configuration Manager to centrally manage large scale Standard Operating Environment’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것을 한국어로 잘 옮겨서 한국에 있는 (전산을 전혀 모르는) 나이든 친척분들에게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아주 풀어서 말을 많이 하면서 장시간 설명을 하면 대략 머리속에서 이 비슷한 일을 하는가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학창시절 수학을 아주 못했는데요 물론 머리가 나쁜 것도 큰 이유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습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시작 부분에 나오는 개념들을 (수학적 약속들) 이해하지도 또 외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론들을 점점 발전시켜나가는 중반 이후에 가면 무슨 외국어인 듯 단어의 소리 그 자체는 들리는데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괴이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선생님들로 하여금 낙심한 마음에 주변에 우연히 놓여 있던 몽둥이를 손에 들게 만들었던 나쁜 학생이 되었던 것이지요. 비록 학창시절 수학의 언어를 익히는데는 실패했지만, 나는 부모님께서 주신 능력을 다른쪽에는 사용하여, 예를 들자면 전산의 언어를 스스로 익히는데는 실패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내 자랑 이야기가 아닌 줄 알지요?

사람이 왜 나이가 들면 수학 영어 말고 다른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명상등을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또 내면의 대화를 자주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내가 조금이나마 배우고 깨달은 것을 여러분들께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내면의 소리에는 두 종류가 있지 싶어요. 사자가 팀웤을 통해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사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냥 로보트처럼 초원에 지나가는 아무 작은 동물이나 앞발로 퍽쳐서 이빨로 물어 띁어 잡아 먹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도 (비록 본능에 기인한 것이지만) ‘일종의’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하며 서로 신호를 보내서 공동의 목표를 협업을 통해서 달성합니다. 이때 사자의 머리속에 어떤 ‘내면의 언어’가 존재하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어쩌면 위에서 말했던 (벙어리 꿈꾸는 예에서) 어떤 상황이나 이미지는 떠오르지 싶어요. 물소때를 혼자 쫒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위험을 감지하면, 어쩌면 지난날 겪었거나 보았던 어떤 상황에 대한 기억으로 말미암아) 몇번 해보다가 뒤돌아 섭니다. 잘못하다가 죽는 줄 알아요.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서 좀 미안한데요 (좀 씹혀도 싸다는 생각도 약간은 있네요) 그 전 서울 시장이 젊은 비서에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냄새를 맡고 싶다’ 이런 종류의 성추행의 말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짐작컨데 아마 사자처럼 ‘본능을 따르는’ (그런쪽으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그런 생각을 했었을 꺼에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접근을 하고 시도를 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가 있을까’ 바로 이러한 사자가 사냥할 때와 유사한 내면의 대화를 자신과 (사자와는 다른 고도의 인간 언어를 이용하여) 했었겠지요. 육신을 가지고 욕망의 지배를 죽는날까지 받는 그대들과 나는 이런 것들에서 결코 (아마 죽는 그날까지)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 ‘수학 영어 말고 어른이 되어서 하는 다른 공부’를 통해서, 그것과는 수준이 좀 다른 ‘내면의 대화를 나눌 능력 또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소위 도를 많이 닦으면, 사람 육신으로 말미암은 (정상적인) 욕망이나 욕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해요. 만약 늙은 승려나 성직자 혹은 철학자가 그런말을 하면 나이가 들어서 밥맛도 좀 없고 또 그곳이 작동이 잘 안되는 것을 어쩌면 득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세상에 알려진 반증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도를 많이 닦는다는 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좀 다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인간과 삶에 대한 연구 / 공부를 하고 (수학 물리등과 마찬가지로 그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또 관련된 내면의 대화를 (reflection) 좀 많이 해 보았다’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이것을 많이 하면 무슨일이 생길까요? 내가 배운 바로는 ‘생각의 기술 그리고 삶의 기술’이 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뭐요?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인간의 육신에 기인한 원초적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요 그런데 뭐가 나아진다는 것일까요? (상대적으로) 그것들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는 있지는 않을까요? 먹고 마시고 그리고 으음… 뭐하고 등등에 ‘덜 집중하고 덜 휘둘리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을 좀 더 지혜롭게 매니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더 많이 먹고 더 비싼 것들을 마시고 더 많은 이성과… 이런 궁리만 사자처럼 만날천날 하면서 사는 대신에, 자기에게 길게 보아 더 나은 선택들을 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학교때 배웠던, 청각장애를 (아마 시각장애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 극복하고 훌륭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미국인 헬렌 켈러를 기억하세요? 그분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남긴 이야기에 ‘나는 나이들어 수화를 (아마 점자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기 이전에는, 사람으로서 의식은 있었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말해 그 당시에 나는 (사람으로 누구나 가지는) 의식은 있었으되 아무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사자와 같이)’ 라는 말이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수학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우리가,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것들이 차원을 달리하는 어떤 것으로 진화 발전하여, 자신의 현재 삶을 그리고 다가올 죽음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산중에서 수행을 오래하여 득도했다는 사람에게 시장에 가서 한 두해 생선장사를 하면서 그 득도 수행의 효과를 한번 증명해 보라고 하면 생선장수로서의 성공이 별다른 노력없이 저절로 가능할까요? 수십년 성직자 노릇을 한 사람에게 한 일년 룸싸롱 매니저로 일하면서, 오래 닦은 도를 그 현실에서 한번 직접 적용하고 활용해 보라고 하면 과연 별 어려움이 없이 잘 될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한때 수학에 능했었고, 어떤 시험에 합격했었고 다만 어떤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해왔을 뿐이지 싶어요. 그것들이 우리가 나이들어 자신의 삶을 잘 경영하며 행복한 중년 노년을 누리다가 흙으로 (혹은 천국으로) 잘 되돌아 가는데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도나 수행을 몇십년 해도 삶의 현실에 직면하면 (육체적 욕망 감각 고통, 정신적 고뇌, 관계속에서의 이해의 충돌등)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 싶은데요?

지난 글에 골프 이야기를 좀 했었는데요, 그것 골프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줄 알고 있었지요? 그래도 조금만 더 할까봐요 🙂 위 항공사진에 보이는 파5는 내가 회원인 골프장의 소위 시그너쳐 홀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또 사람들이 훌륭하게 설계했다고 생각하는 홀). 드라이버를 200미터 이상 날리면 작은 개천을 건너 점 두개가 찍힌 장소에서 세컨 샷을 하게 됩니다 (점 세개를 향하여) 혹은 아이언으로 짧게 끊어쳐서 점 한개가 찍힌 장소에서 셋컨 샷을 하기도 합니다. 드라이버의 난조와 더불어 전술골프를 시도하는 요새는 주로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여 점이 한개 찍힌 장소에서 (비교적 자신있어 하는) 우드로 세컨샷을 점 세개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개의 점이 찍힌 장소에서 앞 개울까지는 몇십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너서 멀리 있는 두번째 벙커와 큰 호수까지는 거리와 방향도 넉넉하여 거의 문제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수차례 그것도 연속적으로 공의 대가리를 까면서 (탑핑) 세컨샷을 개울에 쳐박았습니다. 아무도 내 샷을 방해하지도 않았고 또 라이도 좋았으며 (또 내게는 너무나 놀랍고 또 억울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내가 그자리에서 세켠샷을 어드레스 하면서 100% 모든 상황을 명백히 의식하고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찬찬히 생각하고 나서 (내면의 대화 후에 충분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서) 샷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울로 풍덩 빠지는 꼴을 연속적으로 당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절망했어요. 그리고 무슨 대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마치 그 작은 개울이 악마처럼 두려워졌습니다. 해답이 없는 기분이었어요. 지난 글에 골프를 잘 치지 못하는 내게도 한가지 강점이 있다고 했지요? 바로 이런샷을 치고도 성을 별로 내지 않는 것이지요. 물론 마음에 (이고에) 상처를 받긴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깨닫게 되었어요.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잘 하려면 생선을 팔면서 (그와 관련된 희노애락에 시달리면서) 배우는 수 밖에 없지 다른 방법은 없으며, 100% 상황을 의식할 능력이 있고 또 충분한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 된다고 기대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때때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라는 내게는 중요한 교훈이었어요. 아무리 정신을 바싹 차리고 최선을 다해서 가진 능력을 전부 발휘해도 (결과적으로는) 생각대로 안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생이 아닌가 다시금 깨닫게 되었어요. 궁금하지요? 어떻게 끝이 났는지 무슨 발전이 있었는지 🙂

우드클럽을 잘 다루어 160-200미터를 직선으로 쳐내던 ‘어제가’ 항상 지금의 내 실력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마치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초보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에요. ‘그 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나의 우드 실력은 50미터 앞 개울에 연속적으로 쳐박는 수준’이라는 것을 아픔과 혼란을 겪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다시 그 자리에 몇차례 서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목표를 바꾸어 마치 초보 생선장수처럼 (이윤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몇 마리 팔고보자는 심정처럼) ‘무조건 공을 띄우기만 하겠다. 저 50미터 앞 개천 주변에 있는 우거진 잡풀을 넘기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공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나는 성공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진심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이것 속이다가는 심하게 혼나게 된다고 지난번에 말했지요?

그때부터 작은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 세켠샷이 개울에 빠지지 않고 멀리 멀리 하염없이 날아가는 모습을 요새는 자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요. 내가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프의 여신은 뒤돌아서 나를 보게 될 것이며, 내 공은 (마치 마술과 같이) 다시 그 개천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요. 이 웃기는 골프가 나를 겸손하게 하네요. 탁구나 마라톤을 빌어 이야기 했었어도 전달하려는 내용은 다를 바가 없었을꺼예요. 혹시 골프 이야기를 자꾸 한다고 기분이 언짢았었다면 미안합니다. 이곳에선 누구나 하는 평범한 스포츠일 뿐이에요. 다른사람 말의 본질을 잘 이해 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이때 발생하는 자신의 반응을 자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은 기술이라는 생각인데요 🙂

아는 것과 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과 또 우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오늘은 이만 줄여요.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