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나코 시부노, 루이 우스테이즌

들어본 이름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유명한 골프 선수들입니다. 한사람은 일본 여자고 한사람은 남아공화국 남자인데요, 두 사람 모두 소위 말하는 ‘major championship’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는 아주 훌륭한 골퍼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골프는 아닙니다. 이 두사람, 연령대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었’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저는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오래전부터 알고 좋아했었지만, 사실 히나코 시부노 선수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김인경 선수 이야기 하면서 언급했던 그 ‘브리티시 오픈’이라는 최고의 여자 골프 대회에서 히나코 시부노 선수는 201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아마도 처음으로 우승을 했었습니다. 그 장면을 우연히 유튜브로 보는 중에 무언가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년전에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의 ‘마스터스’ 대회 장면을 보고서 놀랐던 것과 비슷한 바로 그 ‘무었’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골프에서는 원래 정해진 홀의 타수보다 3타를 적게 치는 것을 (홀아웃) ‘더불 이글’ 혹은 ‘알바트로스’ 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홀인원’ 보다 훨씬 더 (천문학적으로)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12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바로 이 더불 이글을 쳤는데요, 저도 생방송으로 경기를 보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선 매우 놀라고 흥분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파5 홀에서 두번째로 친 아이언샷이 그대로 홀에 들어간 경우였습니다. 물론 운도 따라야 하지만 그 두번째 아이언 샷도 훌륭한 것이었어요. 관중들로부터 엄청난 박수를 받으면서 홀에 도착한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인사를 하고 홀컵에서 공을 꺼내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그 공을 관중석에 서스럼 없이 선물로 던져 주고 다음 홀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의미가 있고 또 고마운 골프공이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 공으로 계속 경기를 하거나 아니면 잘 넣어 가서 오래 보관하려고 하지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2012년 마스터스에서 연장전 끝에 패하여 그만 준우승에 머물고 맙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우승했던 버바 왓슨 선수보다는 이렇게 스스럼 없고 그야말로 무심하게 골프를, 그 엄청난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도 웃으며 즐기던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를 늘 오래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별명이 슈렉인데요 아래 사진을 보면 닮았지요? 성격이 참 좋은 선수로 원래 잘 알려져 있는데요, 경기를 하는 태도를 보면 그것이 진실임을 잘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히나코 시부노 선수의 브리티시오픈 마지막날 모습입니다. (그녀와) 동점을 기록한 선수들 한두명이 조금 전에 마지막 72번째 홀을 끝내고 경기를 마무리 하면서, 이제 히나코 시부노 선수가 마지막 18번 홀로 이동하는 모습이 여기에 나옵니다. 길지 않은 비데오니 전체를 한번 보시길 바라지만, 원하면 2분40초 경부터 보세요. 저도 많은 LPGA 그리고 PGA 결승전을 보았는데요, 물론 매이져 챔피언쉽도 포함해서 입니다, 이렇게 극도로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히나코 시부노선수와 유사한 행동을 하던 선수를, 제 기억으로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분은 (20대 초반이지만 ‘여자분’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대회 마지막날 라운드를 시작하기 전에도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주며 웃고 친절했지만, 이제 결승전 마지막 홀을 향해서 이동하는 그 지극히 중요하고 또 어쩌면 일생을 살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도, 주변 관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는 얼굴로 그들의 성원에 감사하고 있어요. 히나코 시부노 선수의 얼굴에는 어떤 긴장도 보이지 않지만 동시에 꾸미는 모습이나 가장하는 태도도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그녀는 참으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저도 볼수가 있네요. 어쩌면 동양의 일개 무명선수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녀가 침착히 샷을 합니다. 이제 홀에서 몇 미터 떨어진 자리까지 온 그녀의 공. 이것을 퍼팅으로 넣으면 우승하지만 아니면 연장전을 가야 합니다. 상대는 경험도 많고 또 우승도 했었던 노련한 노장선수들입니다. 그 짧지 않은 퍼팅을 하면서 히나코 시부노 선수가 만약 이런 것들을 생각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침착하고 용감한 퍼팅으로 그녀는 일본 골프는 몰론 세계 골프사에 길이 남을 매이저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 입니다. 김인경 선수의 ‘로즈’ 노래 같은 부활도 너무 훌륭하지만, 동시에 히나코 시부노 선수의 우승 또한 매우 훌륭합니다. 세상은 이런 두가지 종류의 놀라운 성공들이 공존하지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골프장에 갈때 늘 이 두사람의 멋진 모습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매우 훌륭한 골퍼고 또 우승을 하고 성공을 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상황에서 온몸으로 보여준 ‘골프를 대하는 자세’ 아니 어쩌면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보았고 또 크게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그들에게 보고 배운 ‘자세’로, 제 자신의 골프를 대하고 또 제 자신의 삶을 대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이길녀선생. 선각자요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며 교육사업가(?) 그리고 90세가 되도록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대단한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여자 정주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하네요. 얼마전에 로타리클럽에서 주는 봉사상을 받으셨는데, 구순의 나이에 마치 오육십대의 중년여자분처럼 꼳꼳하고 바른 몸매로 단상에 걸어올라 감사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길녀선생이 도대체 어떤 비결로 그런 ‘건강한 장수’를 누리고 계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것 같네요. 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아마도 젊은 학생들과 늘 함께 지내며 공감하고 일을 하면서 그들의 좋은 기를 많이 받아서 그렇지 않겠나’ 하시더만요. 오늘 이분을 언급하면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전 블로그에서 언습했던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길녀선생의 인터뷰나 기사를 접하면서 여러번 놀라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최근에 나를 깜짝놀라게 만들었던 말이 어떤 인터뷰에서 나왔어요. ‘지난 9일 연휴동안에 나는 매일 골프를 쳤다. 젊은 시절 쳐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바로 이 말입니다. 참고로 이분은 일찌기 일본 미국 유학을 하셨던 선각자세요. 골프를 몰랐겠어요 아니면 칠 돈이 없었겠어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문화나 사고방식대로 해석하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승과 대승’으로 불교를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방법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다투어온 것이라 할수 있어요. 붓다의 가르침에는 소승도 대승도 그런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이런 허망된 판단, 나눔 그리고 다툼이 덧없으니 하지 말라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참 우리 인간이 이런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요?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사람들 각자가 속한 환경과 가치 그리고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 이러한 일이 어쩔수없이 발생한 것이겠지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화 시키다보니 어떤 세력 혹은 이익 집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면 밥그릇 싸움을 하면서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로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어떤 종교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만 그분의 가르침을 훌륭한 분들을 통해 배울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람들은 일단 먼저 자신을 돌보고 그 이후에 여력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기에, 아마 소승불교에 가깝다고 할수 있겠네요. 같은 맥락에서, 비록 그 결과나 효과는 세상에 도움이 될지라도,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함께 모여 조직적으로 타인들을 돕고 가르치고 또 그들의 삶을 향상시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 하는 그런 시도를 저는 선듯 동의하기도 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은 예외없이 얕고 이기적이며 오감의 지배를 받는, 때로는 어처구니 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저는 제 자신을 통해서 늘 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주 상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이 있고 내 뱃속이 편안할때 주변에 굶주린 사람에게 내가 가진 일부를 내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어쩌면 일부 동물들조차도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그것이 그냥 저절로 되거나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모습이나 상상하는 이상을, 타인들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도움으로써 획득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행동은, 비록 그 상대방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상당한 부작용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전에 적선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한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여러가지 증거로 볼때 이러한 부작용을 잘 피하며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적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어요. 그래서 크게 존경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런 정말 똑똑한 부자들의 공통점은 배우자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무것도 몰라도 거대한 성공을 극도의 노력으로 성취하고 나면 아마도 인간의 한계와 행복의 진정한 비결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모습이 엄청난 문화와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붓다의 가르침과 별반 다를바가 없음을 보면서 저는 정말 놀라게 됩니다.

붓다께서도, 그 위대한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이전에 무척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일단 사람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살다가 가실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나 고민을 오래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그랬을것 같네요. 붓다께서 결국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로 결심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일단 자신이 먼저 가졌기에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베품으로써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나 발상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주고 받고 의도하는 그런 차원 위에 존재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박원순 전서울시장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업적이 있겠지만, 결국은 자기자신의 어처구니 없도록 앞뒤가 맞지 않는 삶 그리고 인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어리석고 교만하며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물론 지켜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지킬 명예가 과연 있었던가 싶기도 해요, 상황이 이꼴이 되고 나니) 부인과 자식 친구들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해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어쩌라고요? 그 성추행 대상이었던 여자분은 어쩌고요? 자살도 일종의 살인 아닌가요?

다시 이길녀선생의 9일 연휴 골프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일전에 블로그에 적었듯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되면 세상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때문에 길게 보아 인간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며 감사드렸던 고 김근태선생도 또 사람들이 존경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사실상 그분들이 아니었더라고 하더라도 길게보면 오늘날의 한국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우연히 역사의 수래바퀴에 딱 끼였던 인연으로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며 칭송하고 또 이곳에도 언급할 뿐이겠지요. 좀 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전에 언급했던 ‘적선을 베푸는 것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짐작하듯이), 동물에게 베푸는 적선은 10배로 되돌아 오고, 사람에게 베푸는 적선은 100배, 수행자에게 베푸는 적선은… 사찰을 지어주는 적선은… 이렇게 죽 계속되다가 거의 끝에 가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적선의 은혜에는 0000000배’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최고의 가성비를 (return on investment) 자랑하는 적선은,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한 순간이라도 붓다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묵상하는 행위’라고 하네요. 어때요 놀랍지 않나요? 붓다께서는 결국에는 인간의 모든 행과 불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듯 한데요?

다시 말하자면, 민주화운동도 좋고 나라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무었보다 먼저 자신을 잘 돌보고 배우자와 가족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한다면 비약인가요? 그것 먼저 하고 나서 민주화운동도 하고 서울시정도 돌보고 또 다른 야망도 가꿔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 같은데요? 그리고 두가지가 충돌할때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쪽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만약 그랬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 필요한 지혜를 얻은 사람이었다면, 시장이 되고나서 가장먼저 밀실 침대를 없애고, 사무실과 주변의 벽을 유리로 갈아치우고 비서들을 적절한 사람들로 바꾸는 일을 아무 소리 소문없이 했었겠지요. 이미 말했듯이 자연의 지배를 받는 몸을 가진 우리 인간은 자주 어처구니없이 앞뒤가 맞지 않고 지극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상황에 (오래) 빠지게 되면 특출하게 심신이 반응하는 사람들은 전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혜롭고 훌륭한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미리 알고서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에게 참으로 유리한 상황들을 계속 만들고 유지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황진이가 옷 벗고 유혹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큰소리 칠 수 있나요? 만약 그랫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길게 보아 나중에 더 큰 이익을 취하려고 잠시 참았던 수준이겠지요.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능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황진이가 자신에게 다가올 이유도 원인도 애초에 제공하지 않는 것이, 그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정도 되고나면, 황진이도 없고 뭐 보호하고 잣이고 할 아무것도 결국은 없는 상황이 되겠지요. 아마 이것을 붓다께서는 ‘불이 모두 꺼져버린 상태’ 즉 ‘니르바나’ 혹은 ‘열반’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열반은 고승들만 죽어야 들어가는 무슨 거룩한 천당 극락이 아니라 그대와 내가 이러한 배움과 실천의 결과로, 살아서 누리는 조화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곳과 비교하면 한국은 참으로 살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밥을 못먹거나 스마트폰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에서 서로에게 간섭하고 참견하고 좋지 않은 영향을 심하게 끼치는 것이 흔하고 일반적인 곳이라, 어떤 도인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최소한 2시간 이상의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해야 살아 남을수 있을까 말까한 곳이라고 하네요. 공감합니다. 어떤이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네요.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추함위에서만 존재하거나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그렇게 상대성과 가성비를 따지며 살지는 않아요. 자신 내면의 은밀하지만 진실한 아름다움은, 주변의 추함이나 서로 드러내어 계산하며 비교하는 상대적인 아름다움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추한 주변과 가짜 아름다움을 멀리해야만 존재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Five Aggregates 이야기로 다음 글부터 되돌아 갑니다.

Five Aggregates

지난번에 예고했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Five Aggregates’라고 번역되며 한자로는 ‘오온 (五蘊)’ 그리고 붓다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언어인 팔리어로는 ‘Khandha’로 표현되는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내용의 하나라고 합니다.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한글로 다시 번역한 설명들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는데, 마침 티라다모스님의 좋은 설명이 있어서 여러차례 반복하여 들어보고 의역할 작정인데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그 다섯가지 입니다. 일단 중요하니 써놓고 시작합니다.

Material Form (형태, 몸)
Feelings (느낌, 기분)
Cognition (인식, 알아챔)
Volition (의지, 선택)
Consciousness (의식, 생각함, 깨어있음)

우리가 옛날에 길렀던 버둑이 녀석이 팔팔했던 어린 시절에 (안락사한지 몇년이 지났네요) 하도 말을 듣지 않고 개구장이 짓을 하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주말에 개훈련을 함께 시키는 곳에 데려갔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떤 영감이 우리가 버둑이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도와준답시고 자기가 데리고 가서 힘으로 버둑이를 제압하려 했던 적이 있었어요. 우리는 멀찌감치에서 보고 있는데, 그 영감은 우리개의 목줄을 단단히 잡고서 자기가 명령하는데로 걷게 만들려고 했어요. 버릇을 고쳐주려는 것이었지요.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처럼 쩔쩔매는 것이 아니라, 목줄을 죄면서 무릎으로 사정없이 버둑이의 머리와 몸을 쥐어박으면서 말을 듣게 만들려고 했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기는 고마웠지만 통하지도 않을 엉터리 방법으로 버둑이만 괴롭혔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때 아내와 나는 우리 버둑이 녀석이 ‘아이고 아저씨 아줌마 좀 구해주세요. 이넘이 못살게 하는데요’ 눈으로 호소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예요. 정말 눈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었어요. 그때 이후로 과연 다른 영장류나 개, 소나 말처럼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정말 어떤 ‘생각’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게 되었어요. 좀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그런 말을 눈으로 할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지 싶은데요, 예를들면,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할테고, 또 눈길을 보내는 상대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해줄 가능성이 있는 대상이라는 판단이 필요하지 싶네요. 다시말하자면 어떤 개는 단지 반사적으로 그 영감을 물거나 혹은 그냥 깨갱거리면서 끌려다니거나 했지 싶네요. 우리 버둑이는 장난을 좋아했었는데요, 좀 야비하고 엄하게 구는 제게는 장난을 잘 걸지 않다가, 아내가 밖에서 무었을 하고 있을때면 늘 가까이와서 무었을 물고 도망가면서 뒤돌아보고선 ‘나 잡아 봐라’ 혹은 ‘놀~자’ 이렇게 몸짓과 눈으로 말하곤 했어요. 상대를 가려가면서 하고 또 어떻게 하면 우리를 약 올려서 자기를 따라다니게 만들어서 함께 놀수 있는지도 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글을 시작할때 말했던 그 다섯가지 중에서 어쩌면 한두가지는 버둑이도 아마 조금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네요.

갓난 아기에게 주사를 놓으면 앙~~ 크게 우는데요, 과연 아기가 그때 우리 버둑이처럼 ‘아이고 아파라. 엄마 좀 말려 주세요’ 그런 ‘의식’이나 ‘판단’이 있어서 우는것일까요. 아니겠지요. 아주 갓난 아기는 잘 보이지도 않고 또 두세살인가 되어야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이 된다고 하네요. 어쨋던 우리는 갓난 아기를 벗어나면서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되고 또 발전되면서 점점 ‘자기’ 혹은 ‘자아’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으며 굳어지는 것인데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어떤 구체적이고 혹은 변치않는 무었이 개개인 사람안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고 하지요. 또 그것을 직접 간접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많은 시도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사람이 죽기 전후에 무게를 재기도 했고, 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니 병원의 아주 높은 천정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그림을 몰래 그려 놓고서 죽다가 살아 왔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았는가 따져 보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 얼마나 다른 많은 시도들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어서 신체가 완전히 생명활동을 중지하고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정말 다시 살아나서 세상에 되돌아온 사례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물론 이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갖가지 색다른 증거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참으로 잘 살아보려고 진정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확인되고 반복적으로 검증된 훌륭한 것들 조차도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또 이 짧은 인생에 굳이 그런 것들로 다투며 인생을 낭비할 이유는 없지 싶어요.

Five Aggregates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왜 붓다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그리고 왜 이 Five Aggregates에 대한 참된 이해와 실천이 우리를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길이라고 강조하셨는지 먼저 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해요.

위에서 말한 버둑이를 통해서도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직접 경험했었지만, 아내가 몰던 작은차의 시작과 끝도 또 직접 경험했어요. 자동차의 시작과 끝이라니 좀 의아한 생각도 들겠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십년쯤 전에 마침 세일하던 작은 차를 아내 출퇴근을 위해서 좀 융자를 내서 샀었어요. 계기판에 6킬로인가 찍힌 새차를 처음 집으로 데려오던(?) 그 신나던 운전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요, 이후로 그 차는 ‘풍댕이차’라고 불리며 아내에게 10년 가까이 잘 봉사를 했었답니다. 어느날 그만 추돌사고가 나는 바람에 랙카차에 끌려가서 폐차되면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데요, 그 이후로 집에 남아있던 그 차의 두번째 열쇄를 볼때마다 이름모를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상에 태어난 한 물건이 폐차장을 통해 분해되어 차차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이 세상에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마찬가지로, 붓다께서는 이 Five Aggregates를 가르치시며,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개인은 이러한 다섯가지의 과정이 (process) 조화롭게 지속되고 반복되는 어떤 집합체이지 (마치 그 풍뎅이 자동차가 한때 수천개 부품의 조합으로 잘 움직였듯이) 그 안에 나를 나로 규정하는 절대적이고 변치않고 영속하는 어떤 것이 (Atman)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나’ 혹은 ‘자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그 강하디 강한 ‘집착’과 ‘갈애(욕망)’로 부터 자유를 찾고 장차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진정 편안하고 좋은 삶을 살다가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되며 저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연하자면, 아내의 차가 그 부품들이 조화롭게 작동하며 씽씽 달릴때 ‘풍댕이차’라는 또 다른 실체가 그 차에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말해 지금은 사라진 아내의 차가 그 부품이 조화를 이루어 지속적으로 작동될때 ‘풍댕이차’라는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처럼 취급을 받긴 했었지만, 사실상 그 당시에도 그리고 부품들이 부서지고 또 분해되고 난 지금도, 그런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은 실제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뒤로 더 되돌아가서 따져보자면, 그 자동차의 부품들도 결국은 흙에서 (혹은 지구에서) 왔었던 것이었고 이제 서서히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우연히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고 할수 있네요.

버둑이도 마찬가지였지요. 안락사 시킨 버둑이를 집에 싣고와 잘싸서 미리 파두었던 뒷산에 묻으면서 우리 모두는 징징 짯어요. 이후로 가끔씩 무덤에 꽃을 올려 놓거나 찾아 가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잘 가지 않게 되네요. 그리고 차차 잘 깨닫게 되었어요. 버둑이도 그 어미개 아비개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이, 어떤 조건속에서 흙으로부터 와서, 조화롭게 반복되는 생명체의 과정으로 (process), 우리와 장난도 치고 돼지처럼 먹고 드렁드렁 코골면서 자다가, 암이라는 변화로 조화가 깨어지고 또 그 깨진 것을 땜질하여 겨우 이어붙여 한두해를 더 살다가 결국은 완전히 무너지면서 흙으로 되돌아 간것이라는 것을요. 버둑이의 사진과 비데오는 남아 있지만 그 사진 주인공의 실체는 이제 어디에도 없지요.

이런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너무나 어두운 느낌이 들고 어렵고 또 모욕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언제나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따져 보지도 않고서, 다만 죽은 버둑이를 묻으면서 ‘안녕 또 만나’ 하는 감정으로 엉엉 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잊기도 하고 또 주변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행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사람들과 더불어 흘러가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죽음 뒤에 또 다른 생이 있으며 (영생) 그리고 그때도 지금 ‘나’와 동일한 그 무었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환생) 믿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붓다의 가르침을 굳이 종교라고 이름 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어쩌면 유일하게 그러한 영생이나 환생을 주장하지도 또 가르치지도 않는 특이한 종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기복신앙 비슷하게 타락한 괴상한 불교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에 포함되지 않아요 🙂 오늘은 여기까지인데요, 다음번에는 그 유명한 이길녀선생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랍니다. 그럼 이만.

존버 그리고 인생무상

한국을 떠나와 이곳에서 산지도 이제 무척 오래 되었다. 물과 공기처럼 일상에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다가, 친구들이나 인터넷 매체등을 통하여 ‘한국’이라는 실체를 가끔 부닥치게 되면 새롭고 몹시 놀랄때가 있다. 특히 겉으로 쉽게 드러나며 변화하는 한국어를 통하여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수십년 만에 만난 친구가 서스럼없이 사용하던 ‘소확행’이라는 새로 만들어진 단어도 놀라웠지만, 예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단어, 예를들면 개를 ‘댕댕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을 보면서, 문득 만년설이나 빙하에 갖혀있던 맘모스가 깨어난 느낌이랄까(?) 혹은 혹성탈출 한참 후에 지구로 되돌아온 듯한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며 움직이는 지구를 인간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사는 것과 유사한가?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를 포함한 인간세상 그 모든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직접 체감하니, 이민와서 사는 어려움에 상응하는 어떤 철학적인 고찰의 기회를 홀로 누리는듯 기분이 좋기도 하다.

인터넷으로 본 신문에, 어떤 젊은이가 쓴 서울대 대학원 석사 논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이야 나와 관계가 없지만, 문득 그 논문 속에 사용된 어떤 단어에 눈길이 닿았다. 내가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한국어, 새로운 조어 ‘존버’라는 말이 논문에 사용되어 신문에 버젓이 나와 있었다. ‘소확행’과 마찬가지로, ‘존버’도 ‘존나게 버틴다’는 말의 첫짜를 따서 만든 신조어라고 한다. 젊은 세대들이 별생각없이 마치 옛날부터 존재하던 한국어의 일부인듯 꺼리낌없이 사용하는 이 ‘존나게’라는 말은, 조금만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즉시 알아차릴, 남자의 ‘성기가 튀어 나온’ 상태를 지칭하는 비속어, 욕이다. ‘너무 힘이 들거나 고생을 하다보니 마치 성기가 저절로 빠져 버린 듯하다’라는 뜻이라고 굳이 내가 설명해야겠니 🙂

하지만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에 따르면, 그런 상태에서는 그것이 반대로 쪼그라 들거나 안으로 들어가지 밖으로 돌출되지는 않는 듯 하던데… 고 김근태 선생. 지독한 고문의 결과로, 짐승으로 전락후 폭력 앞에 완전히 항복을 하고 그에 뒤따른 악마의 그림자 같은 자기파괴와 혐오를 불사조처럼 딛고 일어선 그 위대한 인간께서 진솔하게 해주신 말씀에 따르면, 그때 그 고문하던 나쁜넘들이, 나체상태로 물고문을 당하며 처절하게 망가진 자신의 모습 특히 쪼그라든 성기를 놀리면서 ‘민주화운동 하는 넘들은 성기 크기가 그것 밖에는 되지 않는가’ 놀렸다더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들이 옳고그름을 극렬히 따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며 또한 시대와 환경의 소산인 상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말년에 고문의 휴유증이 거의 확실한 파킨슨병등을 앓으시다가 64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그분에게, 말그대로 그분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위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는 분명한 사실을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새삼 밝혀 드리고 싶다. 파킨슨병에 걸리신 것도 모르고, 저분 국회의원 되시더니 목에 너무 힘을 주고 뻣뻣해졌다고 경솔히 생각했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며, 김근태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베풀어 준 소수는 목숨을 바쳤지만, 받은 다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고 그 흔적조차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요 또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한다. 인생무상이다.

다시 ‘존버’로 돌아와서. 우리세대 정도면 누구나 사용했었을 숫자 10혹은 18이 들어간 욕은, 그 10 이라는 한글 글짜의 기원이 여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 욕이라는 것을 나도 최근에 알았다. 물론 그 단어 자체가 비속어, 욕인줄이야 일찌기 알았었고 한때 즐겨 사용했었었지만 🙂 영어에도 유사한 것들이 있다. 당신도 들어보았을 그 F-word. 이곳에서도 일상에서 흔히 듣는다.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또 들을 수도 없다. 우리가 그 10자 들어가는 욕을 사무실에서 거의 하지 않듯이. 하지만 영어 단어에 fricking이라는 것이 있는데 가끔 들린다. 누구나 이말이 그 쌍욕을 애둘러 표현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서 쓰고 또 듣는다. 그리고 철자를 살짝 바꾼 fcuking이라는 단어도 있다. 모두들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데 보기에는 (기술적으로는) 그 쌍욕은 아니니 약간 이상하지만 애교로 봐주는 정도.

어쨋던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대학에서 출판된 석사논문에 ‘존버’같은 단어가, 옆에 친절한 해석까지 (‘매우 버틴다’는 뜻이라고 해석이 붙어 있더라) 달고서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서, 그 젊은이의 경솔함도 문제지만, 그 논문을 지도하고 승인한 교수는 도대체 어떤 자인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서울대학교 교수 정도 되려면 나이가 좀 있어야 할테고 그렇다면 이런 말을 척 보는 순간에 알아채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세상에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도 없고 또 언어나 문화를 포함하여 인간이 만들어 내거나 인간 주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도 변치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런 계기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니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을 밖에서 바라보고 또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참으로 대단한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속에서 각자각자 구성원들이 무슨생각을 어떻게 하면서 어떻게 살건 간에, 밖에서 오랜 시간 바라보면, 그 구성원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가 찍어낸 붕어빵과 다를바가 없는 언행을 하면서, 주어진 어떤 범위안에서, 자신은 개성있다는 일종의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우연히 두개의 매우 다른 붕어빵 기계를 거치면서 어쩌면 나쁘게 말하자면 좀 기형적이고 좋게 말하자면 좀 혜안 비슷한 것이 약간 생기지 않았나 싶다. 한 인간은, 평범하지 않은 방법과 노력 혹은 어떤 큰 우연에 의해서 이런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지 않고서는, 군집을 이루어 사는 한마리 개미나 한마리 벌과 궁극적으로 별반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다가 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면 무었이 달라질까? 글쎄 먹고 자고 싸는 일상이 뭐 달라질까만.

오늘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자신이 수년간 저질렀던 성추행 사실이 드러날 상황에, 스스로 쌓아 올렸던 어떤 상이 (이미지) 치명적으로 망가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상황을 영원히 피하는 일종의 선택을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실체가 없는 그 어떤 상을 (이미지) 가지고서 비서와 다른 사람들을 성추행 했었겠지. 그 여자들이 얼마나 배우고 똑똑한 여자들인데, 지나가는 ‘아무’ 중년 남자가 엉덩이를 슬쩍 스치기만 해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사람들이 수년을 침묵하며 괴로워 했었다더만. 그리고 또한 실체가 없는 자신이 만든 상을 (이미지) 지키느라 결국은 목숨을 바친 꼴이 아닌가. 그래서 지켜졌나? 그 상이 실체도 없지만 또 드러난 것을 보고서만 말하자면 어떤 것이었었던가? 아무런 상도 (이미지) 없는 보통 잡넘들은 지나가는 여자 엉덩이 만지고서 경찰서 잡혀가 혼나고 감옥에 간다고 쪽팔려서 미리 자살하지는 않지 않나?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상으로 (이미지) 세상을 (잘)살다가 바로 그 상에 의해 살해 당한 꼴이다. 그 자의 성추행을 고발했던 여성은 도리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지나 않으려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당신의 고발이 그자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자가 스스로 저질렀던 나쁜 짓과 그자 스스로 쌓아 올렸던 실체가 없는 상이 그자를 죽인 것이라니까.

오거돈이나 안희정이니 하는 사람들이 같은 패턴으로 정치 커리어나 인생을 종치는 것을 보면서, 그넘들 마누라들은 새대가리들인가 혹은 친구들은 전부 잡넘들인가 왜 어찌 한사람도 ‘젊은 여비서 혹은 이혼녀 여비서를 가까이 두며 출장 등을 함께 다니다가 잘못하면 ‘존’ 🙂 되니 남자나 할머니 비서로 당장 바꾸라’고 강력하게 강권하지 못했었던가 의아하다. 비서하려는 남자나 할머니가 아무도 없나? 한국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그 지랄하다가 종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전에는 호주 최고 대학교의 어떤 학장이 직원 여교수에게 음란문자등을 지속적으로 보내며 성추행을 하다가 (처음에는 서로 좋다고 같이 지랄을 하다가 나중에 여자가 그만하라는데도 계속하다가) 결국은 물러났다는 기사가 났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박사들이고 (여자는 무슨 심리학박사였던가 우하하하) 남자는 아카데믹세계 밖에서도 센넘들과 어울리던 명망있던(?) 늙은이였다. 유통기간이 지나 잘 작동도 되지 않는 ‘존’을 가지고 왜 그 지랄들인지 나로서는 정말 궁금하고 또 일종의 자괴감도 든다. 내 ‘존’만 유독이 유통기간이 지났나 싶어서 🙂

일전에 잘 모르면서 괜히 아는체 언급했었던 Five Aggregates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과 한번 나눠볼 희망으로 지금 티라다모스님의 설명을 십회 이상 듣고 있다 (1시간 정도 분량의 설법). 왜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분 설명 거의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Five Aggregates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고 해탈을 하고 열반을 성취한다고 five aggregates가 그 사람에게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명백하게 그것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고 또 종노릇 하지도 않는다.’ 위에서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면 무었이 달라질까?’ 했던 것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무상이다. 아무것도, 붕어빵도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이야기도, 영원하고 변치않는 것은 없다. 박원순도 안희정도 그 호주 학장도 또 성도착증 클린턴도 (그 유명한 아내에게 백악관에서 책으로 맞아서 코피를 질질 흘리고 또 쫒겨나서 서재에서 몇달씩 잤다더만) 결국은 그 어떤 것도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러하므로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중요한 이야기는 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