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슬러와 재키

‘허슬러’라는 미국의 유명 퇴폐잡지 창간인 ‘래리 플린트’가 며칠 전에 늙어 죽었다. ‘플레이보이’라는 더 유명한(?) 퇴폐잡지의 창간인도 연전에 늙어 죽었다.

인생무상 아닌가? 그 잡지를 그리고 그 맨션을 가득 채우는 뇬들은 그대로인데 (이름만 다르지 거의 무한대로 돌고 도는데), 그 잡지 그 맨션의 주인은 시들어 가는 좌쥐를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그것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말이다 🙂

레리 플린트의 듣보잡 퇴폐잡지가 성공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떤 파파라치 넘이 (케네디 전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오나시스가 나체로 일광욕하는 사진을 여러장 찍은 것을 거금을 주고 사다가 자기 잡지에 대대적으로 실어 완전히 대박을 쳤기 때문이란다. 이 여자의 성이 바뀐 이유는, 남편이 암살 당한 후에 돈 많은 그리스 늙은이와 재혼했기 때문인데, 남편이 암살당하는 순간 이 여자가 외친 ‘Oh no!’라는 비명을, 이 여자가 돈에 팔려 갈때 미국인들이 ‘Oh no!’라면서 다시 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의 5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요샌 하도 세상이 좋아서(?) 인터넷으로 그 사진들을 누구나 볼 수가 있다. 나도 봤다 🙂 무었이 보이던가? 사람들이 환상으로 만들어낸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 유명한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먹고 싸고 아프다가 늙어 사라지는 인간 삶의 감출 수 없는 진실이 그녀의 나체보다도 내게는 더 선명하게 보이더라. 그야말로 ‘(전에도) 아무것도 없었고 또 (후에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우리 인간 존재의 실상이 잠시나마 보이더라. 탱큐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대도 나도 속으면서 산다. 허상에 속고 만들어낸 이미지를 진짜인줄 착각하고 또 그것들을 믿고 퍼트리고 때로 강화하기도 하면서…

하지만, 세상이 오직 보이는 그것뿐 인줄만 알고 사는 것과, 비록 내가 속고 휘둘리며 살긴 하지만 보이는 수많은 것들은 허상이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만들어낸 이미지며, 그 뒤에는 죽은 재키가 50년 전에 남긴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어떤 의미도 없는) 나체사진과 같은 진실이, 그저 왔다가는 인간 존재의 진면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서 사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뭐가 어떻게 다른가 그대가 따져 물으면 딱히 대답을 할 능력은 없다 🙂

아는 것 하는 것?

지난번 블로그 글을 읽고 난 아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훈계조의 글로써 쓴 사람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라는 혹평을 하였어요. 밥상을 뒤엎으며 대판 싸우려다가 (요샌 스스로 차려서 바닥에 놓고 먹기도 하니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고) ‘그렇게 보여질 소지가 있으며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한 내 한계’라고 쿨하게 말을 하고선 내 방으로 꺼져서 혼자 한잔 하면서 울분을 삭였어요. 나이가 들면서 가정의 헤게모니도 생체 호르몬 구성비의 역전과 더불어 반전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요 🙂

오늘은 새해맞이 시리즈로, 지난 글에 이어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지만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말투도 좀 덜 건방지게 써보려고 해요. 잠시라도 그대들께 즐거움을 주기를 바래요.

우리가 어릴때 말을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 혹은 버버리라고 불렀어요. 그들은 왜 말을 못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소리를 내는 입이나 성대에 문제가 있어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에 말을 못하게 된 주된 이유는 (청각기능의 문제로)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흉내를 낼 수가 없고 또 소리를 어떻게 낸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들을 수가 없으니 자신이 내는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해요. 마치 태어나면서 장님인 사람이 색깔을 전혀 상상할 방법이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닥치게 되어 생각을 하게 되면, 예를 들면 ‘지금 그녀에게 고백을 할까 말까’ ‘저 떠나려는 버스에 지금 뛰어가면 놓치고 괜히 망신만 당할까 아니면 탈 수 있을까’ ‘앞에 고약한 호수가 공 내놓아라 하면서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데 다음 샷을 어떻게 칠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머리속으로 생각을 하는데요,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국어로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하게 되지요 (내면의 대화). ‘지금 고백했다가 망신만 당하고 괜히 잘 되고 있는 관계를 망칠지도 몰라 그만 두자’ ‘지난번에 버스 세워서 잘 탓는데 뛰어가 보자’ ‘힘을 빼면 된다던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말이에요. 나는 물론 한국어로 내면의 말을 하고 꿈도 한국어로 꾸는데요, 드물게 영어로 꿈을 꿀 때도 있어요. 꿈속에서 영어로 말을 술술 잘하고 또 어려운 단어를 쓰는 꿈을 꾸다가 내 자신이 (그것에) 놀라서 이게 왠일 하면서 꿈꾸는 자신을 놀라워하는 꿈을 꾸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는) 일도 있었어요. 자기가 꿈속에서 사용하는 영어단어들을 자기가 이해를 못하는 웃기는 경우지요. 이민와서 힘들게 살다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

옛날에는 의사 과학자들이 벙어리들에게 (소리내어) 말을 하게 교육을 시킨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좋은 뜻이었겠지요. 자신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목이나 혀의 감각등 만을 (센세이션) 기억하면서 내야하는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수화를 (손으로 말하는 사인렝귀지) 덜 배웠거나 안 배웠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의사와 과학자들이 차차 깨닫게 된 것이 있어요. 어떤 이유로던지 수화를 배웠던 사람들보다 이렇게 말을 했던 벙어리들이 지능이 더 낮고 사회생활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요. 왜 그랬을까요?

입으로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벙어리지만 수화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만약에 골프를 치면서 앞에 물이 딱 버티고 있는 고약한 상황에 부딪치면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할까요? (어떤 내면의 말을 할까요) 수화를 통해서, 우리가 음성언어로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내면의 말을 ‘저넘의 물에 안빠지려면 왼쪽으로 힘을 좀 빼고 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할 수가 있다고 해요. 꿈도 수화로 꾸며, 약간 중국어처럼 한 글자에 많은 의미가 주어진 그런 방식으로 꿈을 꾸기도 하고 또 상황극 비슷하게도 꿈을 꾼다고 연구한 사람들이 말하네요. 그런데 수화를 전혀 모르면서 다만 보통 사람의 음성 언어를 흉내낸 사람들은 이렇게 하기가 훨씬 힘들거나 할 수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지능발달도 더디고 또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고 하네요.

왜 이런 벙어리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나는 전산기술자로 오래 일을 해왔는데요, 내가 전문적으로 일해 온 분야는 ‘utilising management infrastructure such as Microsoft Configuration Manager to centrally manage large scale Standard Operating Environment’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것을 한국어로 잘 옮겨서 한국에 있는 (전산을 전혀 모르는) 나이든 친척분들에게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아주 풀어서 말을 많이 하면서 장시간 설명을 하면 대략 머리속에서 이 비슷한 일을 하는가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학창시절 수학을 아주 못했는데요 물론 머리가 나쁜 것도 큰 이유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습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시작 부분에 나오는 개념들을 (수학적 약속들) 이해하지도 또 외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론들을 점점 발전시켜나가는 중반 이후에 가면 무슨 외국어인 듯 단어의 소리 그 자체는 들리는데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괴이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선생님들로 하여금 낙심한 마음에 주변에 우연히 놓여 있던 몽둥이를 손에 들게 만들었던 나쁜 학생이 되었던 것이지요. 비록 학창시절 수학의 언어를 익히는데는 실패했지만, 나는 부모님께서 주신 능력을 다른쪽에는 사용하여, 예를 들자면 전산의 언어를 스스로 익히는데는 실패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내 자랑 이야기가 아닌 줄 알지요?

사람이 왜 나이가 들면 수학 영어 말고 다른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명상등을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또 내면의 대화를 자주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내가 조금이나마 배우고 깨달은 것을 여러분들께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내면의 소리에는 두 종류가 있지 싶어요. 사자가 팀웤을 통해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사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냥 로보트처럼 초원에 지나가는 아무 작은 동물이나 앞발로 퍽쳐서 이빨로 물어 띁어 잡아 먹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도 (비록 본능에 기인한 것이지만) ‘일종의’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하며 서로 신호를 보내서 공동의 목표를 협업을 통해서 달성합니다. 이때 사자의 머리속에 어떤 ‘내면의 언어’가 존재하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어쩌면 위에서 말했던 (벙어리 꿈꾸는 예에서) 어떤 상황이나 이미지는 떠오르지 싶어요. 물소때를 혼자 쫒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위험을 감지하면, 어쩌면 지난날 겪었거나 보았던 어떤 상황에 대한 기억으로 말미암아) 몇번 해보다가 뒤돌아 섭니다. 잘못하다가 죽는 줄 알아요.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서 좀 미안한데요 (좀 씹혀도 싸다는 생각도 약간은 있네요) 그 전 서울 시장이 젊은 비서에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냄새를 맡고 싶다’ 이런 종류의 성추행의 말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짐작컨데 아마 사자처럼 ‘본능을 따르는’ (그런쪽으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그런 생각을 했었을 꺼에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접근을 하고 시도를 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가 있을까’ 바로 이러한 사자가 사냥할 때와 유사한 내면의 대화를 자신과 (사자와는 다른 고도의 인간 언어를 이용하여) 했었겠지요. 육신을 가지고 욕망의 지배를 죽는날까지 받는 그대들과 나는 이런 것들에서 결코 (아마 죽는 그날까지)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 ‘수학 영어 말고 어른이 되어서 하는 다른 공부’를 통해서, 그것과는 수준이 좀 다른 ‘내면의 대화를 나눌 능력 또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소위 도를 많이 닦으면, 사람 육신으로 말미암은 (정상적인) 욕망이나 욕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해요. 만약 늙은 승려나 성직자 혹은 철학자가 그런말을 하면 나이가 들어서 밥맛도 좀 없고 또 그곳이 작동이 잘 안되는 것을 어쩌면 득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세상에 알려진 반증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도를 많이 닦는다는 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좀 다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인간과 삶에 대한 연구 / 공부를 하고 (수학 물리등과 마찬가지로 그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또 관련된 내면의 대화를 (reflection) 좀 많이 해 보았다’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이것을 많이 하면 무슨일이 생길까요? 내가 배운 바로는 ‘생각의 기술 그리고 삶의 기술’이 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뭐요?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인간의 육신에 기인한 원초적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요 그런데 뭐가 나아진다는 것일까요? (상대적으로) 그것들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는 있지는 않을까요? 먹고 마시고 그리고 으음… 뭐하고 등등에 ‘덜 집중하고 덜 휘둘리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을 좀 더 지혜롭게 매니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더 많이 먹고 더 비싼 것들을 마시고 더 많은 이성과… 이런 궁리만 사자처럼 만날천날 하면서 사는 대신에, 자기에게 길게 보아 더 나은 선택들을 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학교때 배웠던, 청각장애를 (아마 시각장애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 극복하고 훌륭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미국인 헬렌 켈러를 기억하세요? 그분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남긴 이야기에 ‘나는 나이들어 수화를 (아마 점자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기 이전에는, 사람으로서 의식은 있었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말해 그 당시에 나는 (사람으로 누구나 가지는) 의식은 있었으되 아무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사자와 같이)’ 라는 말이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수학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우리가,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것들이 차원을 달리하는 어떤 것으로 진화 발전하여, 자신의 현재 삶을 그리고 다가올 죽음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산중에서 수행을 오래하여 득도했다는 사람에게 시장에 가서 한 두해 생선장사를 하면서 그 득도 수행의 효과를 한번 증명해 보라고 하면 생선장수로서의 성공이 별다른 노력없이 저절로 가능할까요? 수십년 성직자 노릇을 한 사람에게 한 일년 룸싸롱 매니저로 일하면서, 오래 닦은 도를 그 현실에서 한번 직접 적용하고 활용해 보라고 하면 과연 별 어려움이 없이 잘 될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한때 수학에 능했었고, 어떤 시험에 합격했었고 다만 어떤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해왔을 뿐이지 싶어요. 그것들이 우리가 나이들어 자신의 삶을 잘 경영하며 행복한 중년 노년을 누리다가 흙으로 (혹은 천국으로) 잘 되돌아 가는데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도나 수행을 몇십년 해도 삶의 현실에 직면하면 (육체적 욕망 감각 고통, 정신적 고뇌, 관계속에서의 이해의 충돌등)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 싶은데요?

지난 글에 골프 이야기를 좀 했었는데요, 그것 골프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줄 알고 있었지요? 그래도 조금만 더 할까봐요 🙂 위 항공사진에 보이는 파5는 내가 회원인 골프장의 소위 시그너쳐 홀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또 사람들이 훌륭하게 설계했다고 생각하는 홀). 드라이버를 200미터 이상 날리면 작은 개천을 건너 점 두개가 찍힌 장소에서 세컨 샷을 하게 됩니다 (점 세개를 향하여) 혹은 아이언으로 짧게 끊어쳐서 점 한개가 찍힌 장소에서 셋컨 샷을 하기도 합니다. 드라이버의 난조와 더불어 전술골프를 시도하는 요새는 주로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여 점이 한개 찍힌 장소에서 (비교적 자신있어 하는) 우드로 세컨샷을 점 세개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개의 점이 찍힌 장소에서 앞 개울까지는 몇십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너서 멀리 있는 두번째 벙커와 큰 호수까지는 거리와 방향도 넉넉하여 거의 문제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수차례 그것도 연속적으로 공의 대가리를 까면서 (탑핑) 세컨샷을 개울에 쳐박았습니다. 아무도 내 샷을 방해하지도 않았고 또 라이도 좋았으며 (또 내게는 너무나 놀랍고 또 억울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내가 그자리에서 세켠샷을 어드레스 하면서 100% 모든 상황을 명백히 의식하고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찬찬히 생각하고 나서 (내면의 대화 후에 충분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서) 샷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울로 풍덩 빠지는 꼴을 연속적으로 당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절망했어요. 그리고 무슨 대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마치 그 작은 개울이 악마처럼 두려워졌습니다. 해답이 없는 기분이었어요. 지난 글에 골프를 잘 치지 못하는 내게도 한가지 강점이 있다고 했지요? 바로 이런샷을 치고도 성을 별로 내지 않는 것이지요. 물론 마음에 (이고에) 상처를 받긴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깨닫게 되었어요.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잘 하려면 생선을 팔면서 (그와 관련된 희노애락에 시달리면서) 배우는 수 밖에 없지 다른 방법은 없으며, 100% 상황을 의식할 능력이 있고 또 충분한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 된다고 기대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때때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라는 내게는 중요한 교훈이었어요. 아무리 정신을 바싹 차리고 최선을 다해서 가진 능력을 전부 발휘해도 (결과적으로는) 생각대로 안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생이 아닌가 다시금 깨닫게 되었어요. 궁금하지요? 어떻게 끝이 났는지 무슨 발전이 있었는지 🙂

우드클럽을 잘 다루어 160-200미터를 직선으로 쳐내던 ‘어제가’ 항상 지금의 내 실력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마치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초보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에요. ‘그 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나의 우드 실력은 50미터 앞 개울에 연속적으로 쳐박는 수준’이라는 것을 아픔과 혼란을 겪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다시 그 자리에 몇차례 서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목표를 바꾸어 마치 초보 생선장수처럼 (이윤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몇 마리 팔고보자는 심정처럼) ‘무조건 공을 띄우기만 하겠다. 저 50미터 앞 개천 주변에 있는 우거진 잡풀을 넘기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공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나는 성공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진심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이것 속이다가는 심하게 혼나게 된다고 지난번에 말했지요?

그때부터 작은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 세켠샷이 개울에 빠지지 않고 멀리 멀리 하염없이 날아가는 모습을 요새는 자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요. 내가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프의 여신은 뒤돌아서 나를 보게 될 것이며, 내 공은 (마치 마술과 같이) 다시 그 개천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요. 이 웃기는 골프가 나를 겸손하게 하네요. 탁구나 마라톤을 빌어 이야기 했었어도 전달하려는 내용은 다를 바가 없었을꺼예요. 혹시 골프 이야기를 자꾸 한다고 기분이 언짢았었다면 미안합니다. 이곳에선 누구나 하는 평범한 스포츠일 뿐이에요. 다른사람 말의 본질을 잘 이해 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이때 발생하는 자신의 반응을 자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은 기술이라는 생각인데요 🙂

아는 것과 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과 또 우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오늘은 이만 줄여요. 또 만나요.

인간말종 변호사

혹시 이사람 누군지 아세요? 루디 줄리아니라는 미국변호사인데요 뭐하는 사진일까요?

이 사람은 일전에 말한 그 인간말종의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선거소송들을 대리하는 미국에서는 매우 알려진 변호사랍니다. 얼마전에 언론들을 모아놓고 부정선거소송에 관한 모종의 중대발표를 한답시고 인터뷰를 자처했었는데요, 그 물에 그 밥이라고, 그 인간말종과 똑같이 아무런 내용도 없는 황당한 인터뷰였다고 하네요. 아마 그때 머리에 발랐던 염색약이 땀에 흘러내리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별로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닌데 더욱 괴이한 모습이 되었군요 🙂

그저께는 하원의원들이 모인 어떤 청문회에 답변을 하러 갔는데, 생방송 중에 2차례에 걸쳐 방귀를 끼는 소리가 생생히 전파를 탓다는 소식도 있군요. 참 가지가지 하네요 그리고 말년에 도대체 왜 저렇게 살까 싶지요?

그런데 혹시 아세요 이 사람 루디 줄리아니는 오래전 뉴욕시장이었어요. 그때 9.11 이라고 미국이 큰 테러 공격을 당했을때 이 사람은 시장으로서 아주 훌륭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당시에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중 한명이었다고 해요. 어느정도였었나 하면, 이 사람이 뉴욕의 식당에 식사를 하러 들어가면 사람들의 기립박수가 멈추지를 않았었다고 해요. 상상이 됩니까?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큰 명예를 아마도 이 사람은 그 당시에 정당하게 획득해서 누렸던 것이 아니었던가 해요. 멋진 사람이었지요?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왜 그 인간말종이나 대변하며 이런 개망신을 당하면서 다니는 것일까요? 두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가 있네요.

이 사람은 뉴욕시장 이후에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해요. 미국 상원의원은 정말 엄청난 명예와 권력의 자리입니다. 숫자도 몇명 안되요. 자기의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루디 줄리아니는 그 인간말종 편에 섰어요.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나이를 먹어 노망이 난 것이지요. 더 이상 가지 말아야 할 곳과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이제는 구분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과거의 영광이 그립겠지요. 하지만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기립박수가 멈추지를 않았던’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간 오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관심사를 따라 이미 이리저리 오고 갔습니다. 오직 자신의 마음에만 그때 그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한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겠지요. 그렇기에 내려오지를 못하겠지요. 그래서 오늘도 그 인간말종 편에 서서, 어쩌면 4년 후에 다시 한번 올지도 모를 기회를 위해서 미친 짓을 하고 있지 싶네요. 4년 후에 그 인간말종은 감옥에 있지 않으면 다행이지 싶은데요.

여담이지만, 영미권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또 깊이 있는 이해가 없는 한국의 식자들과 언론들이 (미국서 힘들게 따오신 박사학위? 이방면에는 별 소용 없지 싶은데요…) 그 인간말종의 황당무계한 부정선거 발언에 마치 무슨 진실이 담겨 있거나 혹은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보고선 실망과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어요. 그곳에서 무슨 일들이 ‘정말’ 일어나고 있는지 자발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저 미국 신문 잡지 이곳 저곳에 난 선정적인 기사들을 옮기는 수준인 듯한 모습을 보면서, 몇년 전에 그 인간말종과 김정은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서로를 협박하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 났어요. 당시 나는 한국방문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주류 언론뿐만 아니라, 그 주류언론에 의견과 정보를 제공하는 한반도 전문가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매일 읽으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했었어요. 미국에도 한반도 정세에 매우 정통한 교수들이나 소수 언론 매체들이 있어요. 그때도 그저 미국 주류 언론에 난 선정적인 기사들을 이것 저것 뽑아 번역하거나 인용하는 수준의 한국 언론들을 보면서 ‘정말 이렇게 인재가 없고 자원이 없나’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차차 깨닫게 되었어요 ‘어떤 종류의 정보나 분석은, 그야말로 오래오래 그속에 살아서 그들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들도 있다’는 것을요. 나 잘났다 소리처럼 들린다고요? 그런 의사는 없었지만 그렇게 들렸다면 쏘리 🙂

두어가지 덧붙이는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 합니다.

첫번째는, 나이가 들면 균형을 잃기 쉽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한발을 들고서 양말을 신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니까요. 중요한 순간에 스스로 ‘혹시 내가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봐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대답이 불분명하면 일단 중지 하는 것이 좋겠지요. 유명한 재벌이나, 정치가 혹은 스타 변호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해당되고 말고요. 최근 사망한 유명한 재벌, 일전에 블로그에도 한두차례 비극적으로 등장했던 그 사람도 자신이 가졌던 그 엄청난 돈으로 ‘내가 내 스스로의 삶에 균형을 더 잡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필요한 시간이나 공간을 사면서) 살고 있는가’ 자문할 능력이 참으로 있었다면, 어쩌면 더 멋지고 존경받는 모습으로 아직도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두번째는, 우리 아이가 어릴때 쓰던 표현에 따르면 ‘올라간 모든 것은 내려 온다’는 것입니다 🙂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으뜸인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결코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어쩌면 루디 줄리아니도 그저 모든것을 내려놓고 좋은 곳에 가서 올리브 농사나 지으며 평온하게 살다 죽게 될지도 모르지 싶네요. 누가 알아요 젊은뇬들 중에서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어서, 나이든 영감에게 끌리는 것들도 있지 않겠어요 🙂 건데요, 인간이 이게 안되요.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안된다니까요.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몬시뇰’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지금은 죽은, 그 수퍼맨이 (Christopher Reeve) 주연했던 멋진 영화입니다. 언젠가 이 영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네요. 어쨋던, 죽음을 앞둔 마피아 두목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연입니다) 오랜 ‘합법적’ 사업파트너였던 주인공 추기경에게 죽기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부탁합니다. 주인공 추기경은 어렵게 허락을 해요. 이 마피아 두목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짓을 했었던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최근 두 사람의 사업에 엄청난 손해를 끼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잠적한 추기경의 부랄친구를 찾아내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서 승락을 합니다. 그때 death bed에서 그 마피아 두목은 추기경의 눈을 마주보며 (이 사람은 눈을 마주보고 했던 모든 약속을, 설령 엄청난 손해가 있었더라도 여태껏 전부 지켰어요) 십자가에 맹세를 합니다. 친구를 죽이지 않겠다고요 그리고는 고백성사를 해요. 장면이 살짝 바뀌면서 이제는 말기암으로 잘 걷지도 못하는 그 마피아 두목이, 죽기전 마피아 패밀리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손에 피를 묻히며 배신자를 응징하는 일을) 다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추기경의 친구는 조직원들에 의해서 이미 발각되어 호텔 구석에 몰려 있어요. 그는 추기경과 했던 약속을 되풀이하며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 마피아 두목이 소음권총을 머리에 발사하면서 말합니다 ‘그래 너도 나도 이제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겠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인간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이런 평범한 인간들의 한계와 고통을 (그 속에서 허덕이다가 가는 중생들의 삶을) 그렇게 안타까워 하신 것이겠지요. 오늘은 이만.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이길녀선생. 선각자요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며 교육사업가(?) 그리고 90세가 되도록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대단한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여자 정주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하네요. 얼마전에 로타리클럽에서 주는 봉사상을 받으셨는데, 구순의 나이에 마치 오육십대의 중년여자분처럼 꼳꼳하고 바른 몸매로 단상에 걸어올라 감사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길녀선생이 도대체 어떤 비결로 그런 ‘건강한 장수’를 누리고 계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것 같네요. 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아마도 젊은 학생들과 늘 함께 지내며 공감하고 일을 하면서 그들의 좋은 기를 많이 받아서 그렇지 않겠나’ 하시더만요. 오늘 이분을 언급하면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전 블로그에서 언습했던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길녀선생의 인터뷰나 기사를 접하면서 여러번 놀라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최근에 나를 깜짝놀라게 만들었던 말이 어떤 인터뷰에서 나왔어요. ‘지난 9일 연휴동안에 나는 매일 골프를 쳤다. 젊은 시절 쳐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바로 이 말입니다. 참고로 이분은 일찌기 일본 미국 유학을 하셨던 선각자세요. 골프를 몰랐겠어요 아니면 칠 돈이 없었겠어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문화나 사고방식대로 해석하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승과 대승’으로 불교를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방법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다투어온 것이라 할수 있어요. 붓다의 가르침에는 소승도 대승도 그런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이런 허망된 판단, 나눔 그리고 다툼이 덧없으니 하지 말라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참 우리 인간이 이런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요?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사람들 각자가 속한 환경과 가치 그리고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 이러한 일이 어쩔수없이 발생한 것이겠지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화 시키다보니 어떤 세력 혹은 이익 집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면 밥그릇 싸움을 하면서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로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어떤 종교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만 그분의 가르침을 훌륭한 분들을 통해 배울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람들은 일단 먼저 자신을 돌보고 그 이후에 여력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기에, 아마 소승불교에 가깝다고 할수 있겠네요. 같은 맥락에서, 비록 그 결과나 효과는 세상에 도움이 될지라도,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함께 모여 조직적으로 타인들을 돕고 가르치고 또 그들의 삶을 향상시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 하는 그런 시도를 저는 선듯 동의하기도 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은 예외없이 얕고 이기적이며 오감의 지배를 받는, 때로는 어처구니 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저는 제 자신을 통해서 늘 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주 상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이 있고 내 뱃속이 편안할때 주변에 굶주린 사람에게 내가 가진 일부를 내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어쩌면 일부 동물들조차도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그것이 그냥 저절로 되거나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모습이나 상상하는 이상을, 타인들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도움으로써 획득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행동은, 비록 그 상대방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상당한 부작용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전에 적선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한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여러가지 증거로 볼때 이러한 부작용을 잘 피하며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적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어요. 그래서 크게 존경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런 정말 똑똑한 부자들의 공통점은 배우자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무것도 몰라도 거대한 성공을 극도의 노력으로 성취하고 나면 아마도 인간의 한계와 행복의 진정한 비결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모습이 엄청난 문화와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붓다의 가르침과 별반 다를바가 없음을 보면서 저는 정말 놀라게 됩니다.

붓다께서도, 그 위대한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이전에 무척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일단 사람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살다가 가실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나 고민을 오래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그랬을것 같네요. 붓다께서 결국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로 결심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일단 자신이 먼저 가졌기에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베품으로써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나 발상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주고 받고 의도하는 그런 차원 위에 존재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박원순 전서울시장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업적이 있겠지만, 결국은 자기자신의 어처구니 없도록 앞뒤가 맞지 않는 삶 그리고 인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어리석고 교만하며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물론 지켜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지킬 명예가 과연 있었던가 싶기도 해요, 상황이 이꼴이 되고 나니) 부인과 자식 친구들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해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어쩌라고요? 그 성추행 대상이었던 여자분은 어쩌고요? 자살도 일종의 살인 아닌가요?

다시 이길녀선생의 9일 연휴 골프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일전에 블로그에 적었듯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되면 세상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때문에 길게 보아 인간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며 감사드렸던 고 김근태선생도 또 사람들이 존경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사실상 그분들이 아니었더라고 하더라도 길게보면 오늘날의 한국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우연히 역사의 수래바퀴에 딱 끼였던 인연으로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며 칭송하고 또 이곳에도 언급할 뿐이겠지요. 좀 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전에 언급했던 ‘적선을 베푸는 것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짐작하듯이), 동물에게 베푸는 적선은 10배로 되돌아 오고, 사람에게 베푸는 적선은 100배, 수행자에게 베푸는 적선은… 사찰을 지어주는 적선은… 이렇게 죽 계속되다가 거의 끝에 가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적선의 은혜에는 0000000배’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최고의 가성비를 (return on investment) 자랑하는 적선은,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한 순간이라도 붓다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묵상하는 행위’라고 하네요. 어때요 놀랍지 않나요? 붓다께서는 결국에는 인간의 모든 행과 불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듯 한데요?

다시 말하자면, 민주화운동도 좋고 나라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무었보다 먼저 자신을 잘 돌보고 배우자와 가족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한다면 비약인가요? 그것 먼저 하고 나서 민주화운동도 하고 서울시정도 돌보고 또 다른 야망도 가꿔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 같은데요? 그리고 두가지가 충돌할때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쪽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만약 그랬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 필요한 지혜를 얻은 사람이었다면, 시장이 되고나서 가장먼저 밀실 침대를 없애고, 사무실과 주변의 벽을 유리로 갈아치우고 비서들을 적절한 사람들로 바꾸는 일을 아무 소리 소문없이 했었겠지요. 이미 말했듯이 자연의 지배를 받는 몸을 가진 우리 인간은 자주 어처구니없이 앞뒤가 맞지 않고 지극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상황에 (오래) 빠지게 되면 특출하게 심신이 반응하는 사람들은 전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혜롭고 훌륭한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미리 알고서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에게 참으로 유리한 상황들을 계속 만들고 유지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황진이가 옷 벗고 유혹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큰소리 칠 수 있나요? 만약 그랫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길게 보아 나중에 더 큰 이익을 취하려고 잠시 참았던 수준이겠지요.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능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황진이가 자신에게 다가올 이유도 원인도 애초에 제공하지 않는 것이, 그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정도 되고나면, 황진이도 없고 뭐 보호하고 잣이고 할 아무것도 결국은 없는 상황이 되겠지요. 아마 이것을 붓다께서는 ‘불이 모두 꺼져버린 상태’ 즉 ‘니르바나’ 혹은 ‘열반’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열반은 고승들만 죽어야 들어가는 무슨 거룩한 천당 극락이 아니라 그대와 내가 이러한 배움과 실천의 결과로, 살아서 누리는 조화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곳과 비교하면 한국은 참으로 살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밥을 못먹거나 스마트폰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에서 서로에게 간섭하고 참견하고 좋지 않은 영향을 심하게 끼치는 것이 흔하고 일반적인 곳이라, 어떤 도인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최소한 2시간 이상의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해야 살아 남을수 있을까 말까한 곳이라고 하네요. 공감합니다. 어떤이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네요.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추함위에서만 존재하거나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그렇게 상대성과 가성비를 따지며 살지는 않아요. 자신 내면의 은밀하지만 진실한 아름다움은, 주변의 추함이나 서로 드러내어 계산하며 비교하는 상대적인 아름다움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추한 주변과 가짜 아름다움을 멀리해야만 존재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Five Aggregates 이야기로 다음 글부터 되돌아 갑니다.

Five Aggregates

지난번에 예고했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Five Aggregates’라고 번역되며 한자로는 ‘오온 (五蘊)’ 그리고 붓다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언어인 팔리어로는 ‘Khandha’로 표현되는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내용의 하나라고 합니다.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한글로 다시 번역한 설명들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는데, 마침 티라다모스님의 좋은 설명이 있어서 여러차례 반복하여 들어보고 의역할 작정인데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그 다섯가지 입니다. 일단 중요하니 써놓고 시작합니다.

Material Form (형태, 몸)
Feelings (느낌, 기분)
Cognition (인식, 알아챔)
Volition (의지, 선택)
Consciousness (의식, 생각함, 깨어있음)

우리가 옛날에 길렀던 버둑이 녀석이 팔팔했던 어린 시절에 (안락사한지 몇년이 지났네요) 하도 말을 듣지 않고 개구장이 짓을 하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주말에 개훈련을 함께 시키는 곳에 데려갔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떤 영감이 우리가 버둑이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도와준답시고 자기가 데리고 가서 힘으로 버둑이를 제압하려 했던 적이 있었어요. 우리는 멀찌감치에서 보고 있는데, 그 영감은 우리개의 목줄을 단단히 잡고서 자기가 명령하는데로 걷게 만들려고 했어요. 버릇을 고쳐주려는 것이었지요.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처럼 쩔쩔매는 것이 아니라, 목줄을 죄면서 무릎으로 사정없이 버둑이의 머리와 몸을 쥐어박으면서 말을 듣게 만들려고 했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기는 고마웠지만 통하지도 않을 엉터리 방법으로 버둑이만 괴롭혔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때 아내와 나는 우리 버둑이 녀석이 ‘아이고 아저씨 아줌마 좀 구해주세요. 이넘이 못살게 하는데요’ 눈으로 호소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예요. 정말 눈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었어요. 그때 이후로 과연 다른 영장류나 개, 소나 말처럼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정말 어떤 ‘생각’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게 되었어요. 좀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그런 말을 눈으로 할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지 싶은데요, 예를들면,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할테고, 또 눈길을 보내는 상대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해줄 가능성이 있는 대상이라는 판단이 필요하지 싶네요. 다시말하자면 어떤 개는 단지 반사적으로 그 영감을 물거나 혹은 그냥 깨갱거리면서 끌려다니거나 했지 싶네요. 우리 버둑이는 장난을 좋아했었는데요, 좀 야비하고 엄하게 구는 제게는 장난을 잘 걸지 않다가, 아내가 밖에서 무었을 하고 있을때면 늘 가까이와서 무었을 물고 도망가면서 뒤돌아보고선 ‘나 잡아 봐라’ 혹은 ‘놀~자’ 이렇게 몸짓과 눈으로 말하곤 했어요. 상대를 가려가면서 하고 또 어떻게 하면 우리를 약 올려서 자기를 따라다니게 만들어서 함께 놀수 있는지도 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글을 시작할때 말했던 그 다섯가지 중에서 어쩌면 한두가지는 버둑이도 아마 조금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네요.

갓난 아기에게 주사를 놓으면 앙~~ 크게 우는데요, 과연 아기가 그때 우리 버둑이처럼 ‘아이고 아파라. 엄마 좀 말려 주세요’ 그런 ‘의식’이나 ‘판단’이 있어서 우는것일까요. 아니겠지요. 아주 갓난 아기는 잘 보이지도 않고 또 두세살인가 되어야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이 된다고 하네요. 어쨋던 우리는 갓난 아기를 벗어나면서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되고 또 발전되면서 점점 ‘자기’ 혹은 ‘자아’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으며 굳어지는 것인데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어떤 구체적이고 혹은 변치않는 무었이 개개인 사람안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고 하지요. 또 그것을 직접 간접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많은 시도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사람이 죽기 전후에 무게를 재기도 했고, 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니 병원의 아주 높은 천정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그림을 몰래 그려 놓고서 죽다가 살아 왔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았는가 따져 보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 얼마나 다른 많은 시도들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어서 신체가 완전히 생명활동을 중지하고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정말 다시 살아나서 세상에 되돌아온 사례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물론 이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갖가지 색다른 증거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참으로 잘 살아보려고 진정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확인되고 반복적으로 검증된 훌륭한 것들 조차도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또 이 짧은 인생에 굳이 그런 것들로 다투며 인생을 낭비할 이유는 없지 싶어요.

Five Aggregates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왜 붓다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그리고 왜 이 Five Aggregates에 대한 참된 이해와 실천이 우리를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길이라고 강조하셨는지 먼저 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해요.

위에서 말한 버둑이를 통해서도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직접 경험했었지만, 아내가 몰던 작은차의 시작과 끝도 또 직접 경험했어요. 자동차의 시작과 끝이라니 좀 의아한 생각도 들겠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십년쯤 전에 마침 세일하던 작은 차를 아내 출퇴근을 위해서 좀 융자를 내서 샀었어요. 계기판에 6킬로인가 찍힌 새차를 처음 집으로 데려오던(?) 그 신나던 운전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요, 이후로 그 차는 ‘풍댕이차’라고 불리며 아내에게 10년 가까이 잘 봉사를 했었답니다. 어느날 그만 추돌사고가 나는 바람에 랙카차에 끌려가서 폐차되면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데요, 그 이후로 집에 남아있던 그 차의 두번째 열쇄를 볼때마다 이름모를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상에 태어난 한 물건이 폐차장을 통해 분해되어 차차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이 세상에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마찬가지로, 붓다께서는 이 Five Aggregates를 가르치시며,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개인은 이러한 다섯가지의 과정이 (process) 조화롭게 지속되고 반복되는 어떤 집합체이지 (마치 그 풍뎅이 자동차가 한때 수천개 부품의 조합으로 잘 움직였듯이) 그 안에 나를 나로 규정하는 절대적이고 변치않고 영속하는 어떤 것이 (Atman)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나’ 혹은 ‘자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그 강하디 강한 ‘집착’과 ‘갈애(욕망)’로 부터 자유를 찾고 장차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진정 편안하고 좋은 삶을 살다가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되며 저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연하자면, 아내의 차가 그 부품들이 조화롭게 작동하며 씽씽 달릴때 ‘풍댕이차’라는 또 다른 실체가 그 차에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말해 지금은 사라진 아내의 차가 그 부품이 조화를 이루어 지속적으로 작동될때 ‘풍댕이차’라는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처럼 취급을 받긴 했었지만, 사실상 그 당시에도 그리고 부품들이 부서지고 또 분해되고 난 지금도, 그런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은 실제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뒤로 더 되돌아가서 따져보자면, 그 자동차의 부품들도 결국은 흙에서 (혹은 지구에서) 왔었던 것이었고 이제 서서히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우연히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고 할수 있네요.

버둑이도 마찬가지였지요. 안락사 시킨 버둑이를 집에 싣고와 잘싸서 미리 파두었던 뒷산에 묻으면서 우리 모두는 징징 짯어요. 이후로 가끔씩 무덤에 꽃을 올려 놓거나 찾아 가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잘 가지 않게 되네요. 그리고 차차 잘 깨닫게 되었어요. 버둑이도 그 어미개 아비개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이, 어떤 조건속에서 흙으로부터 와서, 조화롭게 반복되는 생명체의 과정으로 (process), 우리와 장난도 치고 돼지처럼 먹고 드렁드렁 코골면서 자다가, 암이라는 변화로 조화가 깨어지고 또 그 깨진 것을 땜질하여 겨우 이어붙여 한두해를 더 살다가 결국은 완전히 무너지면서 흙으로 되돌아 간것이라는 것을요. 버둑이의 사진과 비데오는 남아 있지만 그 사진 주인공의 실체는 이제 어디에도 없지요.

이런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너무나 어두운 느낌이 들고 어렵고 또 모욕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언제나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따져 보지도 않고서, 다만 죽은 버둑이를 묻으면서 ‘안녕 또 만나’ 하는 감정으로 엉엉 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잊기도 하고 또 주변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행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사람들과 더불어 흘러가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죽음 뒤에 또 다른 생이 있으며 (영생) 그리고 그때도 지금 ‘나’와 동일한 그 무었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환생) 믿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붓다의 가르침을 굳이 종교라고 이름 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어쩌면 유일하게 그러한 영생이나 환생을 주장하지도 또 가르치지도 않는 특이한 종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기복신앙 비슷하게 타락한 괴상한 불교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에 포함되지 않아요 🙂 오늘은 여기까지인데요, 다음번에는 그 유명한 이길녀선생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랍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