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에게

강원도 ‘정선’ 🙂 카지노 도큐멘터리를 우연히 보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듯이, 카지노 근처에는 전재산을 도박에 탕진하고 나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혹은 떠나지 않고) 수년을 노숙자 생활을 하며 터무니 없는 ‘미래의 한방’을 꿈꾸며 사는 ‘오늘의 폐인’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십년 가까이 소형자동차 안에서 숙식하며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도박을 연구하며 사는 어떤 남자가 기억이 난다. 그 좁고 불편한 차안에서 노구를 누이기 전에 그는 바이얼린을 조용히 연주하였다.

우리 인생의 부조리와 불완전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라 생각되어 내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도 한때는 괜찮은 사람,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자상한 아빠였을 것이다. 그 나이에 바이얼린을 켜려면 그리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아니 가능한 것은 그런 폐인의 삶을 지루하고 우울하게 지속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운명뿐이 아닌가 싶었다.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정면에서 걸어오는 초고도 비만의 젊은이를 지나쳤다. 순간적으로 두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제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운명을 바꾸기에 그가 지금 가진 카드는 (상황은) 너무나 좋지 않다. 그는 아마도 그의 운명을 바꾸지 못한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온갖 병고를 겪으며 고통스럽게 죽게 될 것이다. 내가 비교적 건강하다고 교만에서 비롯된 저주의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전에 했던 선택들이 장차 우리가 하게 될 선택들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며 또한 그런 것들이 모여 우리의 운명을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가의 이야기, 나아가 너와 나는 과연 이런 운명의 노예일뿐인가 잠시 너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이다.

그런 도큐멘트리를 티비에 보여주는 이유도 그리고 내가 아침에 스쳐지나간 초고도 비만의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들 자신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것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며 지금 살고 있는가?’ ‘내가 가진 (남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초고도 비만의 정체는 무었이며 그 실체는 어떤 것인가?’

어제 너에게, 그 아름답게 가꾼 멋있는 몸매를 가지고서 이제부터는 숨이 차고 땀을 흘리는 달리기나 빠르게 걷기를 하라고 권했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한결같이 달리기의 최대 수혜자는 (잘 돌아가는) 두뇌이며 (안정된) 마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승들도 ‘일단 몸과 마음이 편하고 안정이 되어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너는 남들에게 드러내고 자랑할 충분한 외향적인 아름다움을 이미 가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내면의 안정과 평안을 위한 운동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하길 권한다. 일단 심신이 안정이 되고 더 균형이 잡히게 되면 어떤 것에 빠져서 노예가 되기가 훨씬 어렵게 된다. 보약이며 백신인 것이다. 세상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네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평온한 것이니 이것을 지키고 향상시키는데에 가진 돈과 시간과 정력을 우선적으로 투자해라.

‘사람들이 다 배워서 하는 것’이라고 어제 말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은,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듣고 따라서 하는 것이고 또 누구에게선가 배워서 하는 것이다. 너도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일단 배워서 따라 하다가 습관이 되고 인이 밖히면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된다. 술을 마시는 것이건, 도박을 하는 것이건, 운동을 하는 것이건, 좋은 습관이건 나쁜 버릇이건 간에. 일단 노예로 전락하고 나면 그것에서 헤어나기가 너무나 어렵게 된다. 아침에 스쳐지나간 그 초고도 비만의 젊은이처럼. 그렇게까지 되기 이전에 막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좋은 운동을 통한) 보약과 백신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공급하면서 동시에 네가 정녕 바라지 않는 것에 노예가 되는 것을 막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 노력의 최대의 무기가 어제 말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쓴 검증된 좋은 책들을 꾸준히 많이 자주 읽는 것이다’. 인간은 습관의 산물이요 결국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운명의 노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제한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유용한) 자유 또한 가지고 있다. 마음이 괴롭고 혼란할때, 좋은 책을 펴는 것이다. 그 이상 무언가를 자신에게 요구하거나 강권하거나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어제 말했듯이, 어떤 한국최고의 골프코치가 발견했다던 ‘(아마추어들이) 골프를 잘치는 최고 최대의 비결은 오래 자주 치는 것’이라는 말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이다. 네 자신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네 자신에게 어둠과 대항할 힘과 무기를 ‘자꾸만 손에 쥐어 주면서 스스로를 응원’해야 한다. 그러면 서서히 그리고 언젠가는 변화된 너를 놀라며 발견하게 되리라. 그때 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요, 과거에 일어났던 동일한 일들에 대한 너의 해석과 생각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잊지마라. 세상에 무릇 좋은 것은 때가 와야 하고 무르익어야 하니 시간이 걸린다. 잊지 마라.

골프를 ‘오래 자주 치기’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현실적이지 않은 터무니 없는 기대를 스스로 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가 솔낏하여) 또한 이랬다 저랬다 마음을 바꾸면서 스스로 좌절하기 때문이다. 손에 물집이 생겨서도 아니고 시간이나 돈이 갑자기 없어져서가 아니다. 제 열정으로 화다닦 시작했다가 제 풀에 서서히 망하는 것이다. 어떤 지름길도 감추어진 기적의 비법도 없으니, ‘그저 좀 안되도 가고, 좀 실망해도 붙어 있고, 좀 시시해도 버리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동안에 마음의 회의와 업엔다운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만두면서 망하는 것’이다. 종국에는 초고도 비만 혹은 카지노 폐인으로 (문자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의미상으로) 인생을 종치게 된다.

그래도 뭐 그만이긴 하다. 결국은 모두 왔다가 가는데.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하더라. 늙었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잘 준비되지 못한 노화에 동반된 심신의 고통이 괴로운 것이라고. 어떻게 살아도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손에 든 카드가 그리 나쁘지 않은 너와 내가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당신은 이렇게 초고도 비만이 된 것이 아무렇지도 않나요? 댁은 이렇게 카지노 폐인으로 차에서 사는 삶이 어떤가요? 아마 그들은 한결같이 대답하지 싶다. 만약 시간을 돌릴수만 있다면 이런 비참한 꼴이 되기 훨씬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젊고 아름다운 촌닭. 아직 시간이 있을때, 아직 그렇게 끔찍하게 되돌리지 않으면 안될 현실에 직면하지 않았을때 우리 조금씩이라도 애써 보자.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안정과 평온이 장차 많이 생기고 나면, 그때는 머리를 분홍색으로 염색을 하건 삭발을 하건, 엄마에게 돈받아 등산 다니며 백수로 살건 투잡을 뛰건, 결혼을 하건 말건 더 이상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네 엄마는 네가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아시게 되고 나면, 네가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기꺼이 해주실 것이다. ‘자식의 참된 행복을 바라는 마음’ 부모의 바램은 이것뿐이다. 네가 엄마가 원하시는 것을 먼저 드린다면 엄마는 얼마나 네가 원하는 것들을 해주고 싶어 하시겠니? 밤에 부산 바닷가에서 하늘에 올라 별을 모두 따다 주실 것이다.

네 자신의 것이건 그 누구의 것이건 지나간 과거를 받아들이고 화해하도록 노력해라. 꾸준히 시도하고 넘어지고 패하면 다시 일어나 또 시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노력해 보거라.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은 어쩌면 그런 눈물로 피워내는 아름다운 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애쓰다가 보면 차차 그런쪽에 낭비될 네 삶의 에너지를 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오롯히 사용할 날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나도 뒤늦게 나마 그렇게 노력했고 또 일부는 성공한 듯이 보인다. 너도 노력하면,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도 그리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저씨가 🙂

자유로운 영혼들의 나라

‘자유로운 영혼들의 나라. 하지만 단결할줄 알고 책임을 지는 성숙한 구성원들의 나라.’라는 원래 제목이 너무 길어서 좀 줄였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한 달간 가택격리중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한 나라인데 이제는 온 세상이 그야말로 적막강산인 느낌이다.

만화에 나올법한 얼굴의 젊은 여자수상이, 한국으로 치면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서, 매일 티비에 나와서 국민들에게 직접 상황을 알리고 부탁을 하고 또 필요할 때에는 강경한 어조의 협박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낸 이 나라에 대한 새로운 면을 보게 된다.

오늘 전기회사에서 이매일이 왔다. 전기료를 4% 인하한다는 통보다. 비즈니스 제스쳐인줄은 알지만 요즘 세상에 내리는 것이 어디 있나? 신선한 충격이다. 물론 나중에 다시 올리겠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돌봐주고 위해준다는 기분이 든다.

소수의 절대 필요한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온 나라의 모든 일터가 문을 닫았다. 모든 상점들도 문을 닫았고 오직 대형 슈퍼마켓들만 생필품을 팔도록 허락 되었다. 정부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풀어 국민들의 봉급을 대신 주고 있는데, 사업주들이 정부에 신청해서 받아다가 원래주는 봉급처럼 계속 직원들에게 지불하는 형식이다. 어제 이곳 최대 슈퍼마켓 브랜드가 정부가 지불하는 ‘대신 내주는 봉급’을 신청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발표내용에 따르면, 이런 비상시국에 자기들만 문을 열게 허락 되는 바람에 평소보다 3배의 매출이 생기고 있으니, 다른지역 (문닫은) 지점들에서 발생하는 직원인건비와 관련된 손해를 정부의 지원없이 회사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회사는 비상시국에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하는 자기 (슈퍼마켓) 직원들의 봉급을 최근 인상해준 회사이기도 하다.

보건부장관이, 전국이 가택연금인 시기에 가족을 데리고 근교 바닷가에 잠시 다녀왔다. 그리고 동네 근처 산에 가서 산악자전거를 탔다. 정부가 하지 말라는 것들이다. 이 사람은 아이언맨 출신에 사이클을 선수처럼 타온 사람이라고 한다. 이 두가지 일들이 사람들에 의해서 언론에 고발되자말자, 수상은 보건부장관의 다른 직위들을 즉시 박탈하고 내각순위 꼴지로 좌천했을뿐 아니라, 이 비상시국이 끝나는 즉시 보건부장관직에서 파면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계엄령(?) 내용에 집세를 올리지 못하며 (설령 집세를 못내도) 세입자를 쫒아내지 못한다고 못을 밖았다. 전기나 인터넷등을, 설령 사용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정에도 이 시기에는 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뒤로 몰래 쫒아내고 끊을 수가 없는 나라다. 말하는데로 되고 시킨데로 한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된 정부의 결정과 방향을 압도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한다.

이 나라사람들은 참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들이다. 그런 사회에서 그런 부모들에 의해서 자라났으니 자신들은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떠나온 나라가 나라다 보니, 잘 보인다. 평소에는 그야말로 개판처럼 보인다 내눈에는. 한넘 한뇬 각각의 개성과 인권이 존중되어져야 하니 뭐하나 제대로 ‘빨리’ 되는 것이 없어 보인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나라의 다양한 측면들을 경험하고 나니 차차 깨닫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성숙함과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다시말해 성숙하지 못하고 책임감 없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단결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 어렵다는 것을.

동네 주변을 뛰거나 아내와 산책을 하면서 (서로 2미터 거리를 두고) 오가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며 격려를 해주고 인사를 나눈다. 나는 안다. 이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들은 만약 누군가가 부당하게 힘으로 어떤 구성원들을 억압하려 든다면, 그들을 자기들 등뒤로 감춰주며 일어나 항거 할것이다. 이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나를 못본척 그냥 내버려 두고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쓰러진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위기의 시간이 인간의 진면목을 나라의 맨낯을 드러내게 한다.

가야금과 고토 – Win Win

어제 코라 이야기를 했더니, 언젠가 보았던 한국 가야금과 일본 고토, 이 비슷한 두개의 전통악기에 관한 어떤 티비 도큐멘터리가 생각이 나네요. 나는 가야금과 거문고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인데요, 그때 내가 보고 감동했던 내용은 두 악기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또한 인간의 이야기기 때문에 오래 기억이 나요.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하고 또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들도 세상에 있으니, 가야금과 고토를 비교하면 어떤 악기가 더 우수한가 이런 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가 ‘politically correct’하자고 ‘세상 모든 문화는 다를뿐이지 우열은 없다’ 이렇게 겉으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다만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낫고 못한 우열이 있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이 솔찍한 심정이지 싶네요.

예를 들자면 나도 한국의 음식과 다른 아시아권 혹은 서구권 음식을 비교하면서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는 동남아시아 음식을 좋아한다’ 이런 말을 했을때, 나는 속으로 ‘그들이 음식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들이 (한국음식과 비교하면) 도대체 무었이 있는가’ 이따위로 생각을 했었다니까요 🙂 다른 방면에서도 그렇지만 음식을 통해서 보아도 한국인의 뛰어남이 음식에 그대로 베어 있다고 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동시에 그 음식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 혹은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음식에는 한국인의 번뜩이는 총명함과 재주가 베어있음과 동시에 다른 문화권에서는 광범위하게 다량으로 사용하지 않는, 강한 맛을 내는 향신료들을 자주 또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이것 우연도 아니고 또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지 싶네요.

좀 옆길로 셋는데요. 다시 가야금과 고토 그리고 win win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한국 최고 가야금 명인중의 한분이 일본에 갔어요. 그리고 일본 고토 최고 연주자와 함께 연주를 하고 또 대화를 하면서 가야금과 고토에 대해서 서로 배우고 또 좀 비교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두분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또 연세도 좀 있었던 것 같네요. 서로의 연주를 존경하며 예술가의 태도로 감상하고서 거의 마지막에 일본 고토의 명인이 말씀하세요 ‘나는 고토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고토를 위해서 일생을 바쳐왔어요. 오늘 한국의 가야금을 알게 되고 또 그 연주를 직접 듣게 되니, 나는 한국의 가야금이 (낼 수 있는 소리와 기교 그리고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의 광범위성등을 고려할때) 일본의 고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악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이었다고 나는 기억합니다. 이렇게 도큐멘터리는 끝이 났어요. 나는 악기 비교 연주도 감동적이었고 또 가야금을 연주했던 한국의 명인도 훌륭하셨지만, 자신의 솔찍한 감동을 밝힌 일본의 고토명인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게 되었어요.

세월이 지나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가야금이 더 나으냐 고토가 더 성능이 좋으냐 이런 이야기도 세상을 살면서 필요는 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정말 더 필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야금이나 고토를 가지고, 무었을 배워서 어떤 연주를 하며 어떻게 사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는, 어떤 장비 얼마나 좋은 무었을 ‘가지고’ 있는가가 인간의 행복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교훈을 나는 그 분을 통해서 배웠어요.

그 고토의 명인은, 그의 솔찍하고 훌륭한 태도로 말미암아 결국은 가야금도 훌륭하고 또 고토도 훌륭하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진심으로 동의하게 하는, 소위 말하는 win win을 만들어 내신 것이지요. ‘사자가 세냐 호랑이가 세냐’ 혹은 ‘재주 좋은 한국 음식이 무조건 튀기고 보는 짱게 음식보다 더 나으냐’ 하는 그런 수준보다 한두단계 위로 올라가신 것이지요. 그것이 정말 이기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는 결코 이기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일부러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위로 올려주고 또 자신도 더불어서 한두단계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간 것이지요. 이것 참 고수들이 만드는 win win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눈치 채셨나요? 일부러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에 바람을 잡았던 것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으니 하고 싶네요. 일본을 이기고 싶지요? 일본에게 존경받고 또 최소한 대등한 관계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지요? 그러려면 시장에서 다투는 잡상인들처럼, 우악스럽고 큰소리로 어거지를 써서 상대방의 입을 막고 내가 원하는 것을 힘으로 빼앗아 보려는 시도를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해야 해요. 서로가 상대방을 성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한 상대가 여태껏 내게 했던 것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순진한 이야기라고요? 교활한 상대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가는 당장 잡아먹힌다고요? 오십년전 백년전보다 세상은 훨씬 더 발전하였고 또 우리나라의 힘도 엄청나게 세졌어요. 누가 가야금을 가지고 있나요? 그러니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상대방과 발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지 싶어요.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특히 상대가 나보다 힘이 더 센 경우에는, 내가 ‘힘으로’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들’ 수는 결코 없어요. 언젠가 블로그에서 말했듯이 영어권에서는 ‘you earn respect’입니다. 인정과 존경은 ‘내가 무었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입니다. 어떤 힘으로도 그리고 아무리 악을 쓰고 발광을 해도 상대가 나를 참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외교란 ‘잘 치장된 방에서 잘 차려 입은 신사들이 매너있는 말을 나누고 있을때, 옆 방문을 슬그머니 열어서 그곳에 앉아 있는 사나운 불독개를 슬쩍 보여주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어요. 이렇게 싸워야 합니다. 당장 잘 차려 입은 신사에게 욕을 하고 구정물을 끼얹으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나중에 정말로 그넘의 불독에게 물려서 크게 다쳐요. 이것 알아채고, 상대방 불독이 지금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좀 조심해서 상대하면서, 우리도 불독을 기르고 또 살살 달래서 우리 불독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자꾸 상대를 해야 결국은 균형이 잡히게 되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커다란 불독으로 상대방이 우리에게 나쁜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면서도, 서로가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오가며 좀 국민들끼리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모두가 바라는 것 아닌가 싶네요. 그곳에도 좀 미친넘이 있고 그넘이 태평양 건너에 있는 더 미친넘과 한편이 되어 자기들의 이익을 함께 쫓는 꼴을 보면 우리는 불안하기도 하고 또 불쾌해요. 하지만 누구나 또 어떤 나라나 자기 능력껏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나무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길게 보면 이런 미친넘들은 그런 선진국 이런 현대사회에서 오래가는 주된 세력이 될 수는 없어요. 마치 우리나라에서 군사쿠데타가 더 이상 실제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세상은 돌아가는 어떤 방향과 수준이 있고 얼마 이상은 뒤로 혹은 아래로 되돌아 가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상대방까지 우리 가야금이 더 좋다는데도 우리가 너무 자신감 없이 행동해 온 것은 혹시 아닌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우리의 가야금에 대한 참된 자심감과 믿음을 스스로가 가질 수가 있을지 그래서 장차 우리도 일본의 고토가 매우 훌륭하다고 짐심으로 칭찬해 줄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 해야 되지 싶어요.

가야금을 연주하는 우리가 차차 고토를 연주하는 이웃과 대등하고 성숙한 관계로 서로의 음악을 평화롭고 진심으로 즐기게 되길 바래요. 인생은 싸우고 다투다가 가기에는 아깝고 또 한번 뿐이잖아요? 아이에게 늘 말해요 ‘자유롭게 살거라’ 물론 내가 저질렀던 과거사가 찔려서 또 내가 만들었던 카르마가 무서워서 하는 말인 것도 맞아요. 그래도 아이는 ‘응 아빠 알았어’ 합니다. 무심하고 진심인것 같아요. 그러면 되지 않나요? 우리 이렇게 좀 살아요 🙂

멋진 고토연주 그리고 이 아름다운 연주자가 고토에 맞춰서 부르는 우리의 아리랑을 함께 들어 봐요.

코라

코라(Kora)는 아프리카 전통 현악기예요. 감비아(Gambia)라는 아프리카대륙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전통악기로 알려져 있어요.

한 십여년 전인데요, 그때 코라와 연주자를 주제로 만든 도큐멘터리를 보기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닥불 주변에서 북이나 치면서 엉덩이나 흔드는 줄 상상했었어요.

그 도큐멘터리에 나왔던 연주자가 Toumani Diabaté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는데요, 무려 70대째 그 집안에서 코라만을 연주하면서 사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오십대 중반이 되서 좀 늙어 보이지만, 그때 도큐멘터리에 나왔을때는 얼마나 젊고 총명하게 생겼던지, 그리고 무었보다 그의 코라 연주를 듣고서는 정말 놀라고 또 충격을 받았었어요. 아! 사람은 다 똑 같구나, 지금 좀 가난하게 산다고 무슨 원시인 수준으로 착각했던 내가 무지하고 무식했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코라연주들을 녹음해서 가끔 듣게 되었는데요, 심금을 울리는 그런 소리가 아닌가 싶네요. 멋진 코라연주 한번 들어봐요 🙂

기념 –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내가 자주 방문한다고 말했던 식물원에는 플라그(기념동판) 붙은 장소나 벤치가 많다. 그중에는 매우 오래된 플라그도 있는데, 몇개가 기억이 난다. ‘에니가 앉던 곳’ (Annie’s Seat) 이라는 플라그가 붙은 벤치는, 지금부터 백년도 훨씬 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조경사의 아내가, 식물원에서 일하던 남편을 이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곤 했었다고 동판에 기록되어 있다. 경치가 아름다운 장소다.

130년쯤 전에, 물에 빠진 동생을 구출하려다가 익사한 10살 형을 기리는 동판이 박힌 벤치도 있다. 아름답고 좋은 장소에 있어서, 나도 그 벤치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 주변에 위치해 있어서 출퇴근때 자주 지나치는데 ‘아우는 잘 살다가 죽었을까?’ ‘자기를 구하려다가 죽은 형에 대한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했었을까?’ 그런 생각이 뜬금없이 떠오르곤 했었다.

옛날에, 조선시대 종교 박해에 관한 책자를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믿지 말라는 종교를 믿는다고 신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얼마나 나쁘게하고 또 심하게 고문을 했었던지 그 묘사들을 읽으면서 진절머리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가지 지금도 자주 생각나는 이야기는, 힘이 장사이던 좀 무식한 시골청년 신자가, 때리고 주리를 트는 악랄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겠노라고 잘 버티고선 감방으로 되돌아 와서 많은 신도들에게 귀감도 되고 또 칭찬을 받았었다고 하는데, 이 젊은이는 ‘때리는 것은 참겠는데 배고픈 것은 정말 참기가 어렵다’면서 감옥 바닥에 깔아 놓은 그 더럽고 오래된 가마니를 (짚으로 만든) 뜯어서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죽고 없는 먹새 버둑이 (레브레도리트리버 종) 녀석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지금도 퍼먹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 ‘정말 배고프면 죽는 것보다 괴롭구나’ 이해가 된다.

오늘 우연히 신문에서 ‘절두산성지’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그 책자를 읽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목을 자르던 산. 150여년 전에 병인박해라는 종교 탄압 시기에, 약 8,000명의 어떤 종교의 신도들이 참수를 당했었다고 한다. 옛날 이야기 들으면, 그때는 정말 무식하고 무시무시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자주 있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종교를 믿었었네. 참고로, 무조건 잡아다가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종교를 버리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고문을 견디다가 결국은 목이 잘리는 것을 기꺼이 ‘선택’했던 신도들의 숫자가 그렇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렇게 다른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또 종교나 신념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 알지만, 이런 실화들은 늘 우리 가슴에 무언가 뭉글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인간이 원래부터 이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사회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어떤 부산물적인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들을 붓다께 정확하게 설명해 드리고 어떤 가르침을 주십사 한다면 과연 어떤 가르침을 주실까? 오늘, 내가 가끔 언급하는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가르치는 녹음된 설법을 한두개 들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자신을 포함한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이, 수행에 정진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자신이 진전을 이루고 또 어떤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때, 바로 거기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정작 수행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이것 참 어려운 이야기 아니냐?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을 하나하나 죽기 살기로 이루어 나가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가 무척 어렵지 않겠나 싶은데, 목표나 과정에 정력을 쏟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리니… 그럼 어떻게 그 목표에 도달합니까?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수행은 삶 자체요 과정이지, 그것으로 도달할 목표도 결과적으로 획득할 대상도 사실은 없다’ 이 비슷한 (계속 모호한) 대답을 듣게 되지 싶다.

한 이십여년 전에, 어떤 종교의 수장을 (말그대로, 한국에서는 그 종교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이곳에서 며칠 모시면서 가까이에서 보았던 적이 있었다. 이분이 그 연세에도 여러모로 열리고 또 깨인 분이라는 것을 자주 옅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 이분이 떠나기 전에, 여기에 있는 한국대사가 이분을 위해서 만찬을 열었었다. 나도 참석 했었다. 만찬이 끝나고 잠시 오락(?) 시간이 있었다. 마침 어떤 젊은 여성 공무원도 우연히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이 연세 높은 어떤 종교의 수장께서 가라오케를 하시며, 이 젊은 여성의 팔과 어깨등의 신체부위를 성추행으로 보일만큼 이리저리  만져대는 것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내가 좀 충격을 많이 받았었다. 지금이면 아무도 그렇게 못하고, 만약 그랬다가는 성추행으로 고발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한 특정인의 인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그 종교 전체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또한 그런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와 나 그리고 당신, 우리 모두는 한계가 많은 ‘다 같은’ 인간이기에…

요새처럼 일본과 어르렁거릴 때, 만약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순신장군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좀 많지 싶다. 그런데 그분과 앉아서 대일본관, 해군작전, 군민협동 등의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면 현대의 한국 그리고 한국해군에도 도움이 될 훌륭한 말씀들을 듣게 되지 싶다. 하지만, 그분과 여성관, 가족관, 평등한사회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나눈다면, 내 짐작에 거의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듣게 되지 싶다. 이순신장군을 폄하하는 이야기 아니다.

그대에게 종교란 무었인가? 무었을 기대하며 또 무었을 얻고자 하는가? 어떤 변치 않는 가치나 도전 받지 않는 절대적인 무었이 거기에 있고, 또 그것을 배워 자신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건 구현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왜?’ 라는 질문에서 붓다의 구도가 시작 되었고, 그 질문에 대한 최고의 대답이 붓다의 가르침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직업삼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과 또한 그들을 추종하는 ‘좀 무지한’ 사람들이 떼지어 하는 짓이 그 가르침을 ‘종교’로 만들었던 것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만들었겠지. 잘 해보세요. 나는 관심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