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씨

유명한 사람을 우리끼리 지칭할때, 김모 이모 이렇게 이름을 부르지, 누구 누구씨 하면서 존칭으로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지요? 인경씨는 서른이 넘은 프로골퍼예요. 전에 세계에서 유일한 도마 (뜀틀) 기술인 ‘양1’을 창조했다고 소개했던 체조선수 양학선 선수처럼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 늘 ‘인경씨’라고 불러요. 아내도 그 이유를 잘 알고 또 그녀를 좋아한답니다.

인경씨는 키도 작고 얼굴도 평범하며 또 나이도 많은 축에 속하는 골퍼예요. 온갖 스폰서들의 이름이 붙은 옷을 잘 차려입고서 섹시하게 배꼽을 드러내며 스윙을 날리는 상품성(?) 있는 골퍼는 아니랍니다. 인경씨 보면, 다른 골퍼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한복을 잘 차려 입은 북조선 미녀를 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인경씨는 언제나 열심히 스스로 훈련을 하는 골퍼였고 또 재능도 있었어요. 그래서 한 5년쯤 전에 미국에서 열린 아주 큰 경기에서 (‘매이저’라고 해요)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어요. 얼마나 가까이 두고 있었던가 하면 30센티 앞에 두고 있었어요. 이것을 굴려서 넣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못 넣었답니다. 결과적으로 연장전이 벌어졌고, 그렇게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어떻게 잘 칠 수가 있었겠어요? 졌답니다. 유튜브에, 골프 최악의 순간, 비운의 골퍼 이런 종류의 영상에 나오게 되는 치욕과 수모를 당하게 되었어요. 다시 마음을 추스려 잘 해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다음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우승은 커녕 상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점점 잊혀졌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그 30센티 퍼팅을 실패한 직후의 모습입니다. 차마 인경씨 얼굴을 보기가 어렵내요.
인경씨는 순례여행도 홀로 다녀 보고 또 법륜스님이 계시는 정토회에도 나가서 수행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그때 그 고통을 딪고 일어나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칠흑같이 깜깜한 절망의 밤이 아마도 한 3-4년은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포기했지 싶어요. 그렇지만 인경씨는 포기하지 않고, 그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아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계속 했대요.

30센티 퍼팅을 실패했던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났어요. 인경씨는 영국에서 벌어진, 가장 권위있다는 브리티쉬오픈에서 (‘매이저’ 입니다) 우승을 하게 됩니다. 참 잘했어요. 그야말로 골퍼의 해탈 열반이 아니겠어요? 부활한 인경씨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훨훨 날고 있군요 🙂
오늘 이곳 신문에, 한때 박인비선수를 밀어내고 여자골프 세계1위를 2년간 차지 했었던 한국계 뉴질랜드 골퍼 ‘리디아고’에 대한 기사가 났었어요. 그 기사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인경씨 생각에 이 글을 씁니다. 참 기사 내용은, 옛날 리디아고의 코치였던 데이비드 리더베터라는 세계적인 코치가, 리디아고의 ‘극히 무지한 부모’가 리디아고 침몰의 원인이라고 힐난하는 내용이예요. 이런 이야기들과 또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숨길수 없는 일들이 지난 몇년간 이곳에서 있었어요. 이 ‘극히 무지한 부모’와 그들의 ‘순종적인 딸’의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해요.

인경씨는 이제 서른이 갓 넘었는데요. 앞으로도 오래 선수생활을 하길 바라지만 또 장차 은퇴를 하더라도 참 행복하게 살지 싶어요. 한 훌륭한 인간으로, 좋은 배우자 좋은 엄마 노릇을 하며, 인생의 많은 행복을 누릴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녀가 벌어들인 돈때문이 물론 아니예요.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어떤 사람도 대신 찾아 줄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을, 행복의 열쇄를, 인경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찾은 것 같은 느낌이 그녀를 볼때면 들어요. 그 길고 절망적이었던 어둠을 인내와 노력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빛으로 다시 채운 인경씨. 한 인간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무르익고 여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참 훌륭하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나는, 이나라 여자 챔피언 골퍼와도 일대일 라운드를 2-3번 했던 적이 있었어요. 줄리엔과 골프장에서 스쳐 지나갈때 한국 사탕을 손에 몇개씩 쥐어 주곤 했었는데, 나중에 챔피언골퍼가 되고나서 우연히 마주쳤을때 ‘한번 같이 칠까요?’ 했더니 ‘그래요’ 하면서 핸드폰 전화번호를 주길래 시간을 정해서 둘이 쳤었어요. 1번 홀에서 많은 골퍼들이 다 보고 있는데 (물론 사람들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요) 줄리엔과 둘이서 티샷을 하면서 기분이 참 좋았어요. 저 동양인 남자는 누구 🙂 옛날에 읽은 피천득선생 수필에 나오는 ‘반사적 광영’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 순간이었지요. 줄리엔은 미국에서 골프유학중인데 조만간 졸업을 하면 아마도 LPGA 투어에 나오지 싶어요. 만약 인경씨와 붙으면 누굴 응원하지? 그래도 사탕보다는 핏줄을…

잠시 이야기가 샛는데요. 누가 내게 ‘어떤 프로선수와 한라운드를 함께 해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섹시한 미녀골퍼도 또 300미터 티샷 날리는 괴물골퍼도 아니고, 물론 인경씨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겠지요. 이제와서 사탕 줄 사이도 아니고 또 이미 세계적으로 성공한 골퍼이니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인경씨와 한 라운드를 함께 한다면, 그녀가 부러진 날개로 더 높이 나르게 된 그 힘들고 외로웠던 과정을, 그리고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는 그녀의 품위 있는 삶을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인경씨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지 싶네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 ‘더 로즈’ 베티 미들러가 불러요. 그리고 나름대로 번역을 덧붙였어요.

The Ros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

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

And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어떤 이는,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익사 시키는 강물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이 그대의 영혼을 피흘리게 하는 면도날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랑이 끝없이 아픈 갈망이며 굶주림이라고도 말하는데
나는, 사랑은 꽃이며 당신은 그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상처 받기 두려워 하는 마음이 결코 춤을 새로 배우지 못하게 막고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무언가를 결코 시도하지 못하게 막아요.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베풀지 못하는 법이며
죽는것을 두려워 하는 영혼은 정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요.

밤이 너무 외롭고 또 갈 길은 너무 멀 때
사랑이란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성공한 사람들만의 것인가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한겨울 차가운 눈 아래 묻혀 있는 그 씨앗이
봄이 오면 따스한 햇님의 사랑으로 장미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잃어버린 우산, 잃어버린 지갑

비오네… ‘잃어버린 우산’ 생각나네. 일단 우순실님 노래 한번 듣고 나서… 그때 대학가요제에서 불렀던 그 노래를, 30년도 더 지나서 부르는데 멋있게 부르네.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나? ‘잃어버린 지갑’ 되돌려 받았었나? 그런 실험을 좀 대규모로 해봤는데 결과 도표는 아래에 있고 왕서방들이 좀 광분했다고 하네 🙂

도표를 보는 법은, 각 나라별로 노란색 점과 빨간색 점으로 표시된 것이, 각각 돈이 들어 있지 않았던 지갑과 돈이 들어 있었던 지갑이 회수된 비율일세. 예를 들자면, 맨 위에 보이는 스위스에서는, 돈이 들어 있지 않았던 지갑은 약 75% 그리고 돈이 들었던 지갑은 약 80% 회수 되었다는 것이네. 이 대규모의 실험은 (40개국 355개 도시에서 17,303개의 지갑으로 실험) 단순히 지갑을 길에 떨어트리는 것이 아니었고, 은행, 극장, 박물관, 우체국, 호텔 그리고 경찰서의 리셉션 데스크에 가서, 미리 준비한 ‘진짜로 잃어버린 듯이 정교하게 준비한 지갑을 (연락처가 이매일로 적혀 있는)’ 주면서 ‘방금 모통이에서 주웠는데, 난 지금 바쁘니 대신 좀 주인 찾아 주세요’ 하고는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방법으로 진행했다고 하네. 그리고 아래의 도표는 100일 이후에 이매일 연락이 오는가 하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고.

이 실험은, 미국의 권위있는 잡지 ‘사이언스’에 게제된, 대학교수 3인이 (미시간대학교, 유타대학교, 쥐리히대학교) 발표한 논문일세. 그냥 재미 삼아 누가 해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아래 도표를 보고 느낀 바는, 일단 쌀독에서 인심나고 (매우 부유하면 상당히 정직한 경향이 있고 또 반대로도 그런 것 같고), 적당한 부유함과 종교가 잘 공존하는 나라들도 정직하고, 가난한데 종교만으로는 정직하기 어렵고, 가난한데 종교조차도 없으면… 🙂 그리고 어떤 벼락부자들은 (Dawlat al-ʾImārāt al-ʿArabīyyah al-Muttaḥidah) 제 주머니에 잔뜩 들어 있어도 정직이 무었인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고, 또 다른 가난한데 종교조차 없는 나라에서는 안 돌려주었다가는 혹시 КГБ에 끌려가서 작살날까봐… 🙂

Earn Respect

영어 표현에 ‘Earn respect’ 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단어는 아니지만 ‘존중을 얻다’ 정도로 기계적으로 번역하기에는 좀 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earn’ 이라는 말도 또 ‘respect’ 라는 말도, 그 뜻을 좀 더 정확히 이해 하려면 영어권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싶다. 이 두 단어를, 영어권 문화에서는 한국문화에서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근래에 들어 넷플릭스를 통하여 좋은 한국 영화 드라마를 서너개 보았다. ‘자체발광 오피스’ 라는 코메디가 내용도 연기도 너무 좋아서, 그 긴 시리즈를 두 번을 반복해서 아내와 함께 보았다. 어제는 우연히 읽고 있는 책에서, 이순재 선생이, 주연 배우인 스카렛 요한슨의 연기력이 좋다고 칭찬을 하던 영화 ‘The Other Boleyn Girl’ 이라는 좋은 영화를 보았다.

시대도 배경도 주제도 전혀 다른 이 두개의 작품에서, 두 사람의 여자 주인공을 통하여 아내와 내가 보았고 또 깊이 감동했던 것은, ‘earn respect’ 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부부 가족 친구 직장동료등 우리는 다양하고 많은 관계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나 혹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요소나 가치들이 각 사회마다 시대마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나 시대를 초월하여 공통적이고 또 가장 중요한 하나만 뽑으라면 나는 ‘earn respect’ 를 주저없이 선택할 것이다.

그 드라마 영화 한 번씩 보시지 🙂

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3

큰 돈이 걸린 투견을 위해 싸움개를 전문으로 기르는 자들이, 장차 돈을 벌어 줄 미래의 챔피언 싸움개를 양성하는데 사용하는 기술을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족보가 좋은 새끼개를 골라서 은퇴한 늙은 싸움개와 장난반 연습반 싸움을 붙이면서 훈련을 시키는데, 잘 지켜 보면서 새끼개가 은퇴한 개로부터 기술은 배우되 절대 진다는 느낌이 들때까지는 놓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런 훈련을 많이 한 다음 큰 돈이 걸린 진짜 투견 대회에 참가 시키는데, 이렇게 체계적으로 훈련된 그 개는 두려움이 무었인지를 모른다고 한다. 단 한 번도 패해본 적이 없으니. 전혀 겁을 내거나 위축되지 않는 상태에서 싸움에 임한다더라. 이게 무슨 뜻일까?

미셸 오바마 여사가 자서전에서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인종차별의 ‘최대 최악의 원인이자 결과’가 미국흑인들로 하여금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미 두렵고 무서워서 정신적으로 패하도록’ 미국사회가 온갖 방법으로 그들에게 패배의식 혹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얼마나 무섭고 나쁜 이야기인 줄,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 대부분은 경험 해본 적이 없을테고 또 나아가 미국의 영부인까지 왜 이런 이야기를 자서전에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가장 큰 주제로 다루고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지난번 글에 ‘남의 나라의 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감추는 중년 남자’ 언급을 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면 좀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블로그에 등장했던 그 보살원장은 나의 아내다. 나는 그녀를 통하여 뉴질랜드 유치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난 십여년간 많이 듣고 또 알게 되었다. 다양한 장르에서 서당개 노릇하느라 내가 좀 바쁘다 🙂 이를 통하여, 이 나라의 국가 1절이 왜 원주민말인 마오리어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왜 국가의 가사에 내가 이전에 말했던 그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게 되었다.

이 나라의 공립 유치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몇 주전에 아내의 유치원이 속해 있는 지역협회에서도 90주년 기념일을 크게 축하 하였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학습의 내용은 물론이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교육철학적인 측면도 정부와(문교부) 유치원협회들이 함께 개발하고, 실행하며 또 모니터링 한다. 원장이나 선생들 마음대로 (시끄럽다고 보드카를 몰래 먹여 ‘곤히’ 재우거나 하면서) 아무것이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의 의사를 유치원 교육 내용에 반영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뉴질랜드 국민 다수가, 아빠 엄마의 입장에서 우리 아가에게 무었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그 원하는 내용들을, 합의된 교과와 방식 그리고 절차에 따라서 유치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아내가 유아교육과 학생으로 유아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시절부터 십수 년이 지나 큰 공립유치원 원장으로 일하는 지금까지, 유치원 교육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또 아무것도 모르던 나 같은 사람도, 이 나라의 유치원 교육에서 원주민 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를 얼마나 체계적이고 제도적으로 아이들에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정성들여 가르치는지, 때때로 이것 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서너살된 어린 아가들에게, 일찍부터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을 알게하고 또 자신과 이질적인 문화를 대할때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마치 밥 먹을 때마다 테이블매너를 가르치듯이 지속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장차 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버스에서 들리는 외국어 소리, 식당에서 나는 이질적인 음식냄새 그리고 함께 사회 구성원으로 생활하면서 느끼는 문화의 차이를 ‘삶의 당연한 일부’로 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 새끼 싸움개가 패배나 두려움이 무었인지 모르면서 큰 싸움개로 자랐듯이. 비록 목적은 극단적으로 다르나 그 방법은 지혜로우며 또 결과는 같지 않을까?

그냥 개인적으로 내 생각과 비위에 맞지 않다는 것과, 저것들이, 저 인종들이, 저 무리들이 하는 짓이니 혐오스럽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지난날 나는 사소하고 어리석은 이유들로 때로 상사나 동료들과 언쟁을 벌였던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건데 한 번도 ‘인종간의 어떤 문제’가 원인이 되었던 기억은 없다. ‘인간간의 어떤 문제로’ 부딪혔었지. 이 두가지가 매우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셸 오바마 여사는 아마 잘 이해하고 공감 하실 것이다.

나는 이 착하고 훌륭한 국민들, 약자를 보살피고, 쉽게 믿고 또 인간적인 동정을 베풀며, 있다고 별로 거만하지 않고 또 없다고 별로 기죽어 하지 않는 이 사람들이, 피부색 언어 그리고 문화가 다른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화목과 조화를 위하여, 그 좋은 머리와 세금을 아낌없이 쓰고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감동을 느낀다. 서로에 대한 존경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고 구성원 상호간의 유대와 지원은 이런 과정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이렇게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돈으로 살 수 없고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조차도 이나라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구성원이 되고 싶게끔 만든다. 그래서 이나라 국가를 부를때면 내가 늘 눈물을 몰래 훔치게 되는 것이다.

영어 속담에 이런말이 있다. A great man shows his greatness by the way he treats little men (Thomas Carlyle 18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개인은 물론이려니와, 사회도 나라도 그의 위대함을 약자와 소수를 대접하는 태도와 방법에서 보이지 않을까?

그대가 속해 있는 그 조직, 그 사회와 나라는 어떤 식으로 약자와 소수를 대접하는가? 당신은 그것에서 위대함을 느끼는가?

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2

영어에 ‘dignity’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으로는 ‘존엄’ 정도로 번역되는 듯 한데 좀 부족한 느낌이다. 어떤 사전에는 ‘위엄, 존엄, 관록, 품위, 체면, 위신’ 이렇게 잔뜩 대응되는 단어들을 늘어 놓았던데 어쩌면 이것을 전부 다 합쳐도 실제로 dignity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렵지 싶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왜 이런 dignity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을까? 아프리카 스와힐리어에는 에스키모의 언어에서만큼 ‘눈'(snow)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들에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일까.

오바마여사의 자서전 전반을 통하여 내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dignity라고 하겠기에 서론이 좀 길었다. 무슨 어떤 dignity인지를 오바마여사의 자서전을 통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무었이 dignity가 아닌지를 오바마 대통령 부부를 이어 지금 그 크고 흰 집에 살고 있는 부부를 통해서 먼저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새로 영부인이 된 그 여자는 일찍부터 빼어난 몸을 밑천으로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아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돈이나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 즐기며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 소위 말해 궁합이 잘 맞는 부부라고나 할까. 이 여자가,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싼 옷을 입고, 한국여자가 신으면 키가 졸지에 2배로 커질 하이힐을 신고, 머리에는 FLOTUS (미국영부인) 라고 크게 쓰인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그 모습에 dignity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큰 집에 들어가기 이전에, 무었을 위해 그리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 왔고, 어떤 비젼과 희망을 지금 POTUS (미국대통령)가 된 배우자와 나누며 함께 이루려고 하는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 속에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들의 삶 속에 dignity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이런 사진들이 하이라이트인 삶을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고 있을때, 오바마 여사는 시카고 외곽 흙수저 가정에서, 오직 부모의 헌신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고의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5대 로펌에서 그리고 시카고의 사회단체들과 시립병원등에서 일했었다. 한 인간이, 과거 한때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가지고 마치 인간은 결코 변치 않는 존재인양 폄하하거나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한쪽 길을 오래 걷게 되면 그 길과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좀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똥물속에 잠수를 너무 오래하고 나면 그 물이 장차 샘물로 바뀌고 나서도 이미 대가리 속에 든 똥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

오바마 여사는 그녀의 자서전, 지난 2주 동안에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한 (발매 첫 주에만 140만귄이 팔렸다고 한다) 그 책을 통하여, 미국영부인을 포함한 이 세상 누구에게도 dignity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개인적이고 은밀하며 어쩌면 치부로도 보일 수 있는 내면의 갈등과 인간적인 괴로움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과정등을 가감없이 솔찍하게 말하였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 놓듯이. 이것이 dignity요, 오직 평생을 통하여 진실하게 dignity가 있는 삶을 살아 왔던 그녀이기에 또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살’ (Bodhisattva)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을 터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이 시대를 사는 보살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녀의 dignity로써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FLOTUS로서 지혜와 용기 그리고 힘과 능력으로 미국을, 어쩌면 세상을 바꾼 그 큰 업적들 때문이기도 하다.

내 카르마를 따라 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시대의 보살은, 수 백년 전 혹은 수 천년 전 사람들이 그 당시의 지적 수준과 세계관으로 붓다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님긴 책들을 평생 붙들고 씨름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이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지 싶다. 바로 그녀처럼, 바로 이 시대 이 현실속에서, 지금 닥친 난관과 좌절을 극복하며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찾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 있지 않을까? 올해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과학자 혼조 다스쿠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네이쳐나 사이언스같은 세계적인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의 90%는 10년만 지나도 거짓말로 밝혀진다’면서 자신은, 기존의 이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연구를 계속하기 보다는 일일이 스스로 확인하여 납득할 수 있을 때에만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하물며 현대 인터넷 시대의 첨단 과학 이론들이 이지경인데, 천 년 혹은 이천 년 전 옛날 사람들이 그 당시 수준으로 써서 남긴 이론들은? 손기정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이 위대한 것은 그때 그 당시 최고의 기록으로 올림픽을 제패했었기 때문이지, 그분의 2시간 29분이라는 올림픽 기록이 절대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기록으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아마츄어 마라토너들은 지금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당시 그 상황에서 훌륭하셨다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이고 변치 않는 기록을 (진리를) 남기신 것을 액면 그대로 대대손손 기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미국인들에게 그녀는 ‘유인원’ ‘늘 성난 뇬’ ‘엉덩이가 산만한 뇬’뿐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그런 모욕과 좌절 그리고 차별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사는 소수들을 위하여 (여자라서, 백인이 아니라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태어난 곳이 후져서, 부모가 흙수저라서) 용기를 주고 빛을 밝히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와 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그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소수들을 대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그들이 아니면 자기 자신이 그 더럽고 힘든 일들을 직접해야 한다는 ‘게으름’, 그들과 나누면 내것이 줄어든다는 ‘욕심’, 우리 증조부가 탈출한 흑인노예 잡으러 다니던 보안관이었는데 내 딸이 어떻게 흑인과 (장차 영부인이 되건 말건 알게 뭐냐) 기숙사에서 한 방을 사용할 수가 있는가를 미려한 언어와 배우자의 힘으로 대학에 관철시켜 딸의 기숙사 방을 바꾸었던, 그 부모의 ‘무지와 증오’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 싶다.

자신이 살아온 그 작은 세계, 그 가정, 그 지역, 그 대학, 그 회사, 그 나라가 마치 우주의 유일한 중심이며, 원래부터 늘 그랬던 그 무었이라 믿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바마여사가 그녀의 자서전을 통하여 조용하고 품위있지만 힘있게 전달하려는 매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들 이전에 ‘눈'(snow)은 이미 늘 언제나 존재해 왔고, 세상에는 나의 이 작은 세계 (그리고 이 제한된 시간) 이외에도 수 없이 다양한 다른 세계들이 존재하며,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더 좋겠다’라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노력하자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직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의 발로 서고 괴로운 과정을 극복하여 성취를 이루어 본 그녀 같은 사람들만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위에, 타인들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을 함께 개선 하려는 사심없는 노력을 할 수 있지 싶다.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을 읽으며 인간의 참된 품위와 가치 그리고 dignity를 배우며 또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