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첫번째 이야기

어떤넘이 어두운 골목에서 강도짓을 목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뒷머리를 벽돌로 내려쳤다고 하자. 그런데 맞은 사람이 격투기 선수였거나 강력계 형사였던 바람에 곧바로 반격을 당해서 강도짓을 하려던 그넘이 오히려 코뼈가 부러지고 떡실신 되어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자. 단지 위협해서 돈을 빼았으려 했던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뒷머리를 벽돌로 가격한 경우’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넘이 퇴원하고 나서 나중에 ‘폭력은 나쁘고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이렇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복잡해지는데, 만약에 당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그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그 강도의 하수인으로 골목 끝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당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였었다면, 폭력은 나쁘고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며 ‘평화’를 외치는, 그 강도넘의 자식 손주들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눈치챗지? 일본과 한국의 과거사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사는 그대와 내게 끼치고 있는 영향을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카르마와 그 엄청난 에너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히로시마 핵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늘 ‘평화’를 기리고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즐겨 찾는다던 이곳의 아름다운 그 식물원, 그곳 한켠에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평화’의 불꽃과 히로시마에서 가져온 기념석이 있다. 오래전, 아름답게 단장된 이구역에 우연히 발을 들였다가 플라그에 (설명판) 씌여진 ‘히로시마’ ‘평화’ 이런 내용을 보고서 마음에 파장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그래도 들어보기라도 해본 사람들이니, ‘perception은 육감의 경험에서 비롯되나, 설령 그 경험이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사람마다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서 상이한 perception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내가 하는 이야기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대와 내가 ‘해탈을 증득하고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지, 어떤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책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를 강하게 표현하거나 혹은 그것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전서울대교수 이영훈선생과 다른 다섯분의 학자들이 쓴 책이다. 그대도 혹시 들어 보았거나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영훈선생 말씀처럼, 여태껏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출판된 적이 역사상 없었다. 또한 이토록 충격적으로 우리모두를 발가벗기는 책도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리고 팩트에 근거하여 직설적으로 하는 책도 없었다.

한 개인이, 해탈 열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또 괴로움을 참으며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회도 껍질을 깨고 나와서 병아리가 되고 또 장차 훨훨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할 수 없고 미룰 수도 없다. ‘이런 책을 왜 썼어요?’라는 질문에, 이영훈선생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가 크게 망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하였다.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책을 이미 읽었거나 혹은 읽을 예정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도움이 될 좋은 인터뷰이니 한번 보길 권한다.

우스운 나라?

국회의장이, 동료의원의 아기를, 회의를 주재하는 동안 잠시 맡아서 젖먹이며 재우고 있어요 🙂

이 사람들이 있는 곳은 뉴질랜드의 국회의사당이예요. 아주 옛날에는 관광객으로, 그 다음에는, 정부기관에서 일할때 먹이사슬 최상부에 있던 부처장관에게 (국회의원이기도 했지요) 직원들과 함께 인사를 하러 들렀었고, 마지막으로는, 한국계 국회의원과 차 한잔 마시러 들렀던 곳이기요 해요. 이것 좀 헤프닝이었는데요 다음에 이야기 하지요. 아마 사진에서 보았을, 그 벌집처럼 생긴 국회의사당 건물을, 출퇴근때 늘 지나다니고 또 자주 이런 사람들도 주변에서 보는데요, 물론 비밀경찰이나 경호같은 것은 없어요.

리디아 고

일전에 ‘인경씨’이야기 하면서 한국계 뉴질랜드 교포골퍼 ‘리디아 고’ 이야기를 하기로 했었다.

리디아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때 뉴질랜드로 이민온, 지금은 이십대 초반이 된, 뉴질랜드인 프로골퍼다. 불과 일이년전만 하여도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고수했던 그야말로 세계최고의 여자 골퍼였다. 아내와 나도 LPGA골프 중계를 종종 보았었는데, 아내는 리디아의 팬이었다.

리디아의 아버지가 뛰어난 아마추어 골퍼인 연유로 어릴때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장타자는 아니지만 정확한 샷들과 좋은 숏게임으로 매이져를 비롯한 수많은 LPGA챔피언쉽에서 우승을 하였다. 스물이 덜 된 나이에 아마 백억은 벌었지 싶다.

뉴질랜드에서는 ‘우리의 리디아’ 하면서 누구나 그녀를 좋아하고 (플레이하는 태도도 좋고 또 티비에 인터뷰할때도 어른스럽고 튀지 않아서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았다) 그녀의 추락을 모두들 안타까워 한다.

나는 그녀의 경이로운 성공을 놀라워하면서도, 티비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볼때면, 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완벽하고 성숙한 대답’을 늘 ‘비슷한 내용과 톤’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같은 한국인으로서 무언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 아내는 괜히 샘내고 깍아 내린다고 하더라마는 🙂

한번은 티비에서 좀 특집으로 ‘리디아 고’에 대한 도큐멘터리 같은 것을 방영했던 적이 있었다. 수많은 훌륭한 성취와 몇 차례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중에서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참고로, 그녀는 14세 되는 시절에 LPGA 캐나다오픈을 우승하면서 세계 무대에 등장하여, 17세에 세계랭킹 1위 그리고 18세에 매이저 챔피언쉽에 우승하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교 시절이 그녀의 ‘프로골프’ 전성기였던 셈이다. 인터뷰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뭐 특별히 좋아 하는 음식이나 잘 먹는 것이 있니?’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없고 해주시는 것 다 잘먹어요. 그런데 한달에 한번 아이스크림 한 개를 먹을 수 있는데요 좋아해요. 하지만 어떤 달은 안먹고 그냥 넘어가는 달도 있어요’.

내가 이말을 듣는 순간에 ‘오잉 이게 무슨 말이냐?’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넌 무슨 기계 아니면 수도승 할아버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부모와 가까운 친척등이 소위 ‘리디아 군단’을 조직해서 (사실상 작은 회사와 같지 않나? 그 수익이) 그녀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단지 골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서 ‘관리’하신다고 하더라. 그런 ‘관리’의 결과로 그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저 리디아 하고 싶은데로 놓아두었었더라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가 없었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 이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순종적이고 착한 한국소녀’ 리디아에게 지긋이 붙어 있는 캐디가 없는거라. 그야말로 캐디 갈아치우기를 밥 먹듯이 하더라. 그 다음에는 코치 갈아치우기. 이 기사를 쓴 데이비드 리더베트라는 코치는, 내 기억에 타이거 우즈 같은 사람도 코치한 세계적인 코치인데, 이 사람을 갈아치우는 것은 물론이요 그 뒤로도 수 많은 세계적인 그리고 또 듣도보도 못한 코치들이 왔다가 가는거라. 이상하지 않나? 리디아의 어두운 뒷면? 아니지. 리디아 뒤에서 누군가가 하는 짓이었지. 캐디, 코치 바꾸기를 밥먹듯이 하고난 다음에는 장비 바꾸기에 돌입.

나의 아내, 자칭 ‘나를 알고 또 내 수준에 맞는 유일하고 무료인 골프 코치’께서도 이야기 하기를 ‘골프는 일관성의 운동이니 제발 이랫다 저랫다 쥐랄을 좀 하지말고 지긋이 해보라’는 골프 최고의 진리를 힘주어 여러번 말씀하셨다. 핸디도 없는 내 아내도 아는 진리를 리디아 뒤에 있는 그 사람들은 왜 ‘더 이상’ 모르는 것일까? 이전에는 ‘아이스크림 한달에 한개’처럼 극단적으로 일관성을 추구 하더만.

리디아 성공의 요인이, ‘리디아가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는 그 과정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제 리디아 실패의 요인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순종적인 ‘아이’ 리디아. 스물이 넘었는데도,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허락하지도 않고 또 도와주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 왜요? 눈이 잘 안보여요 🙂 내가 사이비 도인으로 리디아의 추락을 보면서 딱 한마디 했었다. ‘그녀가 이제 girl에서 woman으로 바뀌고 있는데, 이 세상 그 무었도 이 과정을 세우거나 변화 시킬 수가 없다’.

이 기사에서, 세계적인 코치라는 데이비드 리더베터는, 그녀의 부모를 비난하며 ‘그 무지함이 실로 상상하기 어렵다’고 표현했었다. 영어권에서는 정말 심한 비난이다. 물론 전에 코치하다가 잘렸으니 사심도 좀 있겠지, 하지만 데이비드 리더베터의 표현에 따르면 ‘부모의 무지가 리디아를 세계최고의 골퍼에서 이제는 평범한 골퍼로 추락시킨 요인’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리디아를 관리하여 큰 성공을 이루어 냈던 그 똑똑한 사람들이 한가지 못하는 것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내려 오는가’ ‘어떻게 놓아 주는가’ ‘어떻게 그녀가 행복하게 살게 도와 주는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 아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알려고 한 적도 없지 싶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것들에 대한 해답은, 그런 ‘관리 잘하는 사람들’로부터 결코 나올 수가 없다. 바로 이게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한 인간이 두가지 상반된 것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 누군가를 ‘관리’하면서 오래 살다보면 세상을 ‘관리의 시각’으로 보게 되고 흡사 인간의 삶이 ‘관리의 대상’으로 착각하여 보이게 되는 것이다.

‘관리’하면 떠오르는, ‘스카이 케슬’이라는 드라마를 한두편 본 적이 있다. 인기도 좋고 또 열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며? 훌륭하십니다. 계속 그렇게 사세요… 그런 사람들이 들으면, 내 행색을 아래위로 흩어 보면서, 콧웃음을 치거나 펄쩍 뛰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게 다 가난을 면치 못한 꼴이다. 부유함이 무었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110원 가지면 100원 가진 것보다 부유하다고 일차원적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 가난인 줄 깨닫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인의 카르마인가 싶다. 카르마에 좌지우지 되고 있을때는 당사자가 그 카르마를 자각하기가 정말 힘들다.

리디아가 인터뷰하는 말을 들으며 이 나라 사람들은 ‘어린 것이 참 성숙하다’ 좋게 생각했었을 것이다. 같은 한국인인 내가 그때 느끼기에는 ‘저것 누가 써 준 것을 외워서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말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녀 뒤에 있는, 그녀를 관리하는 그 자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던 것이라 짐작했었다. 어리버리한 리디아. 아니 어리버리하게 만들어진 리디아. 정말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녀도 예외없이 겪어야 하는데, 그 뒤에 있는 ‘취한’ (술만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요) 부모와 관리전문가들 덕분에 그 과정이 험난해 보인다.

‘마이 해뭇다 아이가? 가가 고마 대학 가서 연애도 하고 술도 퍼묵고 공부에도 시달리고 하면서 정상적으로 커구로 이제라도 좀 나조라.’ 이것 지금 안하면 장차 그 백억을 다 써도 행복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결국은 행복하자고 모두들 이런 쥐랄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행복이 또 다시 트로피를 ‘당장’ 들어 올리는데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카르마가 카르마인 것은,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때 그 당사자가 그것이 카르마인 줄을 깨닫기가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지만, 만약 깨닫는다면, 그 순간부터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팔자 바꾸는 법

궁금하지요? 나도 궁금합니다. 바꿀 수 있을까요? 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1. 지천명 혹은 주제파악 (스승)
2. 적선
3. 명상 (기도)
4. 독서
5. 풍수 (명당)

옛날부터 구전되는 5가지 팔자 바꾸는 법입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풍수 혹은 명당’은 조상의 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심신이 평온하게 살면 팔자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겠네요. 다섯가지 모두 맞는 말씀 같군요.

지난번에, 붓다께서는 그분이 깨달은 ‘세상이 돌아가는 Dhamma’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이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당신과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This is the way it is.’ 우리 이것 잘 기억하면서 계속 읽어 봐요. 참,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쓰는 글은 오늘 달리는 중에 깨달은 것이예요. 읽고 나거든, 과연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두뇌를 해치며 달리기를 하는지 각자 판단해 봐요 🙂

대학전산팀에 직원도 적지 않고 또 전체 교직원은 몇 천명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뛰어 갔다 온 그 풍력발전기가 있는 작은 산에는, 교직원은 커녕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거의 없어요. 조건은 같지 않나요? 그곳의 위치, 대학의 근무 여건, 날씨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고.

오늘 그곳에서 달리면서, 같은 조건을 현재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었보다도 먼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가 설령 (우연히) 같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만으로는 동일한 결과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가 현실과 딱 부딪치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뜻이예요).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현재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경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예요. 그 사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경험을 어떤 강도로 해보았는가, 즉 경험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 그 사람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아름다운 날씨에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곳에 오늘 한 번 뛰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점심시간에 뛰어 올라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왜냐하면, 그것과 관련한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조건은 같지만 원하지도 않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담배 끊는 이야기를 해봐요. 어떤 흡연자는 끊을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그러면 다만 흡연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더불어 사는 것 뿐이지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많은 흡연자는 아마도 담배를 끊고 싶어 할꺼예요. 그리고 ‘자유의지’로 결정은 하지만 (스스로 원하고 마음은 먹지만) 대부분은 며칠 혹은 몇주 이내에 실패해요. 왜냐하면 담배를 끊는다는 어떤 행위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끊게 되지요.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인 그 ‘총체적 경험’이 담배를 끊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양과 질에서 임계점을 돌파했기 때문에 담배를 결국은 끊게 되지 싶어요. 금연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무었이 생겨 났나요? 금연에 대한 ‘총체적 경험’ 그 양과 질이 늘어난 것이지요. 우리 이것 잘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총제적 경험’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거나 늘일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 내가 산에서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삶은 담배를 끊는 그런 종류의 행동 혹은 시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고, 또 나아가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찾아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버켓리스트를 만들어) 죽기전에 ‘일등석 타고 북구에 가서 오로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들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단지 그렇게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다고 또 뭐가 달라지나요? 그런 일회성이고 간헐적인 ‘경험을 위한 경험’은, 의미있는 ‘총체적 경험’으로 쌓이지 않으며, 따라서 인생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었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경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들을 허락해서, 내 ‘총체적 경험’의 양과 질을 늘이게 할까요? ‘총체적 경험’의 주인은 우습게도, (두뇌가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쓰는 습관’ ‘마음을 쓰는 습관’ ‘무었을 하는 습관’ 그리고 ‘무었을 하지 않는 습관’ 바로 이 습관들이 결국은 그대와 나의 ‘총제적 경험’을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렇게 모여진 유의미한 총체적 경험이, 당신과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오늘 실현하게 허락하는 것이지요.

중3때 담임이셨던 키작고 눈매 무섭던 선생님은 자주 몽둥이를 드셨어요. 목재소에서 맞춤 주문한 사랑의 매. 늘 교탁 아래 잘 준비 되어 있었어요.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일들이 있을때면, 나를 포함한 급우들은 늘 그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드려 맞곤했어요. 허벅지 같은데를 그런 굵은 몽둥이로 수차례 맞으면 피멍이 크게 드는데, 한번은 부모님도 보셨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을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데요. 참 잘했어요 🙂 그런 폭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쳤는가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 주제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었어요. 급우들은 모두 떠들썩하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에서 왁짜지껄 소란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모두들 내려와서 강당으로 가라고 한두번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학급 전체에 말했어요. 우리는 그래도 계속 떠들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 왔어요. 그리고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다행히 오늘은 몽둥이는 없었지만) 우리 급우들 모두에게 차가운 복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기를 시켰어요. 이제 한두시간 후면 졸업할 제자들인데요… 그때 나는 고작 열댓살 먹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지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의 매를 드시다가 이제 스스로 변하고 말았구나. 이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줄담배 때문에 일찌기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시작되었던 그 몽둥이를 상습적으로 드는 ‘습관’이 선생님의 ‘총체적 경험’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게 되었었던 것 같아요.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선생님의 ‘자유의지’는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습관이 만든 총체적 경험의 종이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 그날 선생님도 댁에 가셔서, 늘 피우시던 독한 한산도인가 하는 담배를 태우시며 자신에 대한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웠지만 존경했던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무지하게 얻어 맞았던 허벅지도 대가리도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은혜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니 요점 정리를 해야겠지요? 먼저, 붓다께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삶의 조건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요.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좌지우지 (결정)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이 만드는, 바로 이 ‘자유의지가 우리 자신의 팔자를 바꾼다’고 나는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결정론을 아주 반대하셨던 (이건 내가 알아요) 붓다께서도, 아마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으로 짐작해요. 차차 더 알아보고 확인해서 이야기 할께요.

누군가를 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산길에서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비슷해야겠지요. 동료 직원이든지 근처 동네에 살던지. 나이도 이십대 🙂 그리고 그 사람도 달리기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습관이 있어야 하고, 그 오랜 습관의 결과로 나와 비슷한 ‘총체적 경험’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느 아름다운 겨울 오후에 그 사람과 나는 그 산길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요…

달리기 하고 싶어졌어요? 팔자 바꿀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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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irth=스르럭뽕’ 이제 좀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무었을 어쩌란 말이냐?

많은 대답들이 있을 것이고 또 장차 이야기 하겠지만, 지금 딱 떠오르는 대답은, ‘우리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야구공이 아니고 부머랭이다.’

그것도 보통 부머랭이 아니고, 강력 고무줄로 각자의 몸에 단단히 연결된 부머랭을, 우리 모두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함부로 마구잡이로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rebirth’를 통해서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Rebirth를 통해 자신에게로 되돌아 올 줄 확실히 알면 함부로 던지겠나? Rebirth의 순리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되돌아 갈 줄 알면 아무렇게나 던지겠나? Rebirth로 부모님이 내 손에 쥐어 주신것인 줄 알면 그리고 rebirth로 장차 내 자식들 손에 쥐어 줄것인 줄 알면 아무 생각없이 던지겠나?

더 생각하고 던지겠지. 그리고 조심해서 더 잘 던질려고 노력하겠지 안그래? 그것이 다음 자동차를 고르는 일이건, 조상을 모시는 방법이건, 내 심신을 돌보는 일이건, 마음에 안드는 넘들을 상대하는 방법이건, 공부 안하는 자식을 혼내는 일이건, 내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건 그리고 하다못해 오늘 저녁거리를 장만하는 것이건 주말여행을 계획하는 것이건 간에 말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과정이 소위 말하는 ‘mindfulness=마음챙김’이지 싶은데.

One Strange Rock 도큐멘터리에 나오는 그 8명의 우주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여러번 이야기 했고 또 아마도 가장 힘주어 했던 말은 무었일까? ‘We are interrelated. Everything (on the earth) is interwoven.’ 그리고 과학자들이 밝혀 냈다면서 덧 붙이더라. ‘우리 모두는 하나에서 나왔고 다시 하나로 되돌아 간다.’ (literally=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액면 그대로).

이거 전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