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마차

일전에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일부 보았었다. 그날 내용은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아내를, 남편이 잘 보살피며 그 아내가 오랬동안 원해 온 외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당나귀를 두마리 사서 마차 끄는 훈련을 무려 2년을 해서 결국은 그 꿈을 이룬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마비라서 자동차를 극도로 두려워한다던가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사람들의 외모와 언행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집을 보니, 단지 가난한 시골집이어서 뿐만이 아니라, 잡동사니를 온 천지에 쌓아 놓은 모습, 무질서 그리고 이런 저런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꼴을 보면서, 일단은 거부감이 먼저 드는 것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부인은 정말 슈렉을 닮았기에 일단 그 상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보다는 우스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미안하게도.

방아깨비처럼 바싹 마른 남편이 슈렉처럼 크고 뚱뚱한 아내를 극진히 보살핀다. 그리고 참으로 위해주며 조금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힘들어 하지 않는다.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보건데 대소변을 모두 받아주며 사는 것 같다. 참으로 대단한 부부애 인간애가 아닐 수가 없다. 내가 아내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나도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또 아내를 사랑하지만, 내가 이 사람과 동일하게 과연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좀 황당하게 보였지만 이 사람은 결국 그 당나귀들을 훈련시켜, 아내가 그토록 바랬던 그 바닷가에 함께 당나귀 마차를 타고 가더라. 리포터의 눈에 살짝 맺히는 눈물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주루룩 떨어졌다. 아! 이사람 정말 해탈한 사람인가보다. 세상에 무었이 그로 하여금 이런 깊이의 끝없는 사랑과 헌신이 가능케 했을까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그 리포터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록 이런 엄청난 사랑과 헌신에 감동은 하지만, 그 슈렉부인의 자리를, 그리고 그녀를 24시간 간병해야 하는 그 남편의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싶다.

우리 부부를 생각해 보자면, 나 보다 아내가 그렇게 배우자에게 해 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내가 어쩌면 몇권 더 읽었고 몇자 더 안다고, 아내보다 도가 더 튼 사람이라고 결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각보다 흔하고 또 누구도 자신이 예외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고고한 인생철학도 탁월한 수행도, 따뜻한 밥 한그릇먹고 괴롭지 않게 배설하고서 좀 편히 하루를 지내는 그런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 또한 우리삶의 적나라한 일면인 것이며, 이것들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겟지만, 동시에 이것들을 우습게 여기고 도외시하면서 건방 떨며 살다가는 장차 크게 부메랑을 얻어 맞지 싶다. 그리고 그때는 결코 아무런 처방도 대책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부족하고 짧으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기를 두려워하고 또 그 남편처럼 할 자신이 없는 내 자신을 싫어하고 부끄러워할 뿐이지만, 장차 세월이 흐르며 나도 조금씩 발전하노라면, 두려움도 줄고 또 싫어함과 부끄러움도 줄어들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두번째 이야기

해마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대학은 한동안 온갖 행사등으로 왁자지껄 활기를 띠게 되요. 서양여자들이 10대 후반에 활짝 꽃 핀 모습을 실제로 많이 본 적이 없지요? 나는 이곳에 살아서 뿐만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 대학이고 또 사무실이 중앙도서관에 위치한 이유로 아주 많이 보았어요. 값싼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쳤지만 어떤 여학생들의 외향적인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넋을 잃게 하는 신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때가 많아요. Dirty old man?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많은 경우에 자연스러운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그 스케일이나 수준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압도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예요.

기분이 좀 나빠졌을지도 모를 당신을 위해 덧붙이자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여성이 일생을 통해서 누리는 아름다움의 양은 어쩌면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마치 코스모스와 장미를 비교하는 것처럼, 이런 서양여성들의 아름다움은 장미처럼 활짝 피었다가 금세 시들어서, 이르면 20대 후반 혹은 30대만 되어도 급격히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흔한 것 같아요. 유전적인 면도 있을 것이고 또 육식을 바탕으로 하는 그들의 식생활과도 관계가 있지 싶네요 🙂

‘있는 그대로 이미 충분히 아름다우며 인공미를 덧붙이는 것이 그 아름다움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많은 경우에 치명적이다’ 라는 나의 생각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시킬 수 있지 싶은데요. 요새는 하도 성형기술이 발달을 해서 성형을 했는지 않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만큼 자연스럽게 성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어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테고 또 그중에는 (개인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는 이유들도 있을꺼예요. 하지만 ‘미용성형천국’이라는 이 표현이 내게는 ‘참되지 않다’ 그리고 ‘속이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영어표현에 ‘out of proportion’ 이라는 말이 있어요. (큰 그림에서 볼때 각각 요소들의) ‘비율이 서로 맞지 않는다’ 이렇게 번역되겠지만, 어쩌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라는 우리표현에 더 잘 대응하지 싶네요. 참된 아름다움, 큰 힘등 세상의 가치있고 좋은 것들은 ‘앞뒤가 맞는’ 경우가 많지 싶네요. 내 자신만 돌이켜 보아도 ‘out of proportion’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았을때’ 여러가지 어려움과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고, 때때로 proportion이 좀 적절해지고 앞뒤가 더 맞았을때 평안했던 것 같아요.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인터넷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안중근의사 어머니의 편지’라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여러가지 조사를 통해서 이 글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께서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가 아님이 밝혀졌어요.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지어낸 이 글이, 어쩌면 안중근의사의 뜻을 더욱 기리고 그 가족의 훌륭함을 세상에 알리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만들어낸 가짜가, 사람들의 입에 이리저리 오르내리다가 어느듯 신문방송에 까지도 인용되는 ‘사실’이 되어버렸던 것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안의사와 안의사의 어머니를 크게 모욕하는 나쁜짓이며 사기인데요, 어쩌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뭐 어때서’ ‘안중근 의사는 위대하니까 이정도야’ 이렇게 생각하지 싶어요. 없는 것을 가짜로 만들어 있다고 속이는 것은 거짓이며 사기입니다. 만들어 내는 사람의 어리석음 욕심과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 사람도 또 그 대상도 (이런 거짓을 통하여) 결코 더 나아지거나 의미있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바로 이런 짓들을 저지르는 정신상태가, 미용성형천국의 예로 표현했던 ‘참되지 않고 속이 비어 있음’ ‘out of proportion’ ‘앞뒤가 맞지 않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어리석음이 지속되는 것은 첫째로는 그것이 어리석음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둘째로는 비난을 당하면 그 좋은 머리와 정력을 동원해서 극렬하게 반발하며 온갖 변명들을 찾아내기 때문이지 싶어요. 그래서 바뀌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겠지요.

이책에서 이영훈박사께서, 위안부문제와 그 전면에 나서 있는 정치단체인 ‘정대협’에 (지금은 단체 이름이 바뀌었어요) 대하여 가지는 생각에 나도 많이 공감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고 또 참되지 않고 속이 비어 있으면, 잠시 반짝할지는 모르지만, 정말 힘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참된 힘은 자연스러움 그리고 진실함에서만 비롯된다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이런 정치단체의 거창한 구호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업적들 보다도, 그 이면에 가려지고만 사람들의 진실된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많아요. ‘정치행위’는 일종의 ‘허구’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어떤 에너지입니다. 마치 자기장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지지 않나요? 하지만 그 정치행위의 대상이 되었던, 예를 들자면 그 위안부 여성들의 삶은 허구가 아닙니다. 현실이었고 실재였지요.

한국에서 두번째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혔던 문할머니. 일흔 전후해서 돌아가신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분이 친구분을 통해서 책으로 남긴 진실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 속에서 행복을 맛보기도 했었다던 그 다사다난 했던 삶이, 이분이 위안부였던 몇년 그리고 정치적인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에 좋다’고 이리저리 끄집어 내서 세상에 까발린 어떤 것들 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고 (듣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고 또 감동적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대가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 일본 사람의 이름 ‘치바 도이치’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글을 마무리할까 해요. 그는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로 있었던, 그 악명 높았다던 일본군 헌병이었어요. 정말 무서운 넘들이었겠지요.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자기들의 영웅을 (이토오 히로부미는 일본 지폐에 등장할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살해한 테러범 안중근을 다루었을까요. 상상만 하여도 몸서리쳐질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젊은 일본넘이 이순신장군을 암살한 후에 한국 감옥에 갖혀 있는 경우라고 하겠지요. 안중근의사는 훌륭한 어머니의 (그리고 아버지의) 교육을 받은 아주 훌륭한 인격자셨고 또 글에도 뛰어난 분이었어요. 치바 도이치는 차차 대화를 통해 (내가 감옥 안팎에 있어 봐서 좀 아는데요 -오잉?- 이야기 나눌 시간이 참 많아요. 쌍방이 할 일이 거의 없는데 뭘 하겠어요?) 인간 안중근을 존경하게 되고, 또한 서로의 입장은 다르지만 안의사가 왜 자기들의 영웅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 이것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안의사께서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셨기 때문이지만, 이 사람 치바 도이치 또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지 싶어요. 안의사께서 대략 서른 그리고 치바 도이치는 이십대 중반이었다고 하는군요.

안의사께서 사형당하던 그날, 문득 치바 도이치가 ‘글을 하나 남겨 달라’고 이전에 부탁했었던 것을 기억하시고 써 주신 것을, 장차 치바 도이치는 가보로 간직하며 매일 안의사의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차차 마을에도 알려져서, 마을 절에도 안의사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고 또 기념석도 세웠다고 해요. 비유하자면, 이순신 장군을 암살한 어떤 일본 젊은이의 위패를 한국의 사찰에서 모시고 또 비석을 세워서 그 정신을 기린 것인데요. 이것 감동적이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무서운 힘을 느끼게 되요. 바로 이런 인간의 진심과 진실이 일본의 힘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동의하기가 그래도 무척 어렵겠지요? 왜냐하면 ‘그깟 왜넘들’이니까요. 한쪽에서는 가짜 편지나 만들어서 반짝 ‘lip service’ 하는 동안에, 다른쪽에서는 매일 그분의 명복을 대를 이어 빌어 드리고 또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분을 기리고 있어요… 진심의 힘 그리고 진실의 힘.


치바 도이치 선생의 후손들이 한국정부에 기증하여,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국보로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안의사께서, 마음에 큰 괴로움을 가지게 된 그 일본 헌병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이 글귀에 담겨 있네요. 안의사께서는 참으로 크고 훌륭한 분이셨지요?

혹시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인간 삶의 진실 그리고 참된 힘은 무었일까요?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모두들 평화를 추구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한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고의로 그렇게 되지 못하게 안팎으로 못살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이 ‘정말 가난한 꼴’이 아니면 도대체 무었일까요?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에서 개탄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일본 대림사입구에 설치된, 안중근의사와 치바도이치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 라고 씌어 있어요.

기념 –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내가 자주 방문한다고 말했던 식물원에는 플라그(기념동판) 붙은 장소나 벤치가 많다. 그중에는 매우 오래된 플라그도 있는데, 몇개가 기억이 난다. ‘에니가 앉던 곳’ (Annie’s Seat) 이라는 플라그가 붙은 벤치는, 지금부터 백년도 훨씬 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조경사의 아내가, 식물원에서 일하던 남편을 이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곤 했었다고 동판에 기록되어 있다. 경치가 아름다운 장소다.

130년쯤 전에, 물에 빠진 동생을 구출하려다가 익사한 10살 형을 기리는 동판이 박힌 벤치도 있다. 아름답고 좋은 장소에 있어서, 나도 그 벤치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 주변에 위치해 있어서 출퇴근때 자주 지나치는데 ‘아우는 잘 살다가 죽었을까?’ ‘자기를 구하려다가 죽은 형에 대한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했었을까?’ 그런 생각이 뜬금없이 떠오르곤 했었다.

옛날에, 조선시대 종교 박해에 관한 책자를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믿지 말라는 종교를 믿는다고 신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얼마나 나쁘게하고 또 심하게 고문을 했었던지 그 묘사들을 읽으면서 진절머리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가지 지금도 자주 생각나는 이야기는, 힘이 장사이던 좀 무식한 시골청년 신자가, 때리고 주리를 트는 악랄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겠노라고 잘 버티고선 감방으로 되돌아 와서 많은 신도들에게 귀감도 되고 또 칭찬을 받았었다고 하는데, 이 젊은이는 ‘때리는 것은 참겠는데 배고픈 것은 정말 참기가 어렵다’면서 감옥 바닥에 깔아 놓은 그 더럽고 오래된 가마니를 (짚으로 만든) 뜯어서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죽고 없는 먹새 버둑이 (레브레도리트리버 종) 녀석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지금도 퍼먹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 ‘정말 배고프면 죽는 것보다 괴롭구나’ 이해가 된다.

오늘 우연히 신문에서 ‘절두산성지’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그 책자를 읽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목을 자르던 산. 150여년 전에 병인박해라는 종교 탄압 시기에, 약 8,000명의 어떤 종교의 신도들이 참수를 당했었다고 한다. 옛날 이야기 들으면, 그때는 정말 무식하고 무시무시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자주 있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종교를 믿었었네. 참고로, 무조건 잡아다가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종교를 버리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고문을 견디다가 결국은 목이 잘리는 것을 기꺼이 ‘선택’했던 신도들의 숫자가 그렇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렇게 다른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또 종교나 신념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 알지만, 이런 실화들은 늘 우리 가슴에 무언가 뭉글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인간이 원래부터 이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사회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어떤 부산물적인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들을 붓다께 정확하게 설명해 드리고 어떤 가르침을 주십사 한다면 과연 어떤 가르침을 주실까? 오늘, 내가 가끔 언급하는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가르치는 녹음된 설법을 한두개 들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자신을 포함한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이, 수행에 정진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자신이 진전을 이루고 또 어떤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때, 바로 거기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정작 수행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이것 참 어려운 이야기 아니냐?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을 하나하나 죽기 살기로 이루어 나가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가 무척 어렵지 않겠나 싶은데, 목표나 과정에 정력을 쏟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리니… 그럼 어떻게 그 목표에 도달합니까?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수행은 삶 자체요 과정이지, 그것으로 도달할 목표도 결과적으로 획득할 대상도 사실은 없다’ 이 비슷한 (계속 모호한) 대답을 듣게 되지 싶다.

한 이십여년 전에, 어떤 종교의 수장을 (말그대로, 한국에서는 그 종교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이곳에서 며칠 모시면서 가까이에서 보았던 적이 있었다. 이분이 그 연세에도 여러모로 열리고 또 깨인 분이라는 것을 자주 옅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 이분이 떠나기 전에, 여기에 있는 한국대사가 이분을 위해서 만찬을 열었었다. 나도 참석 했었다. 만찬이 끝나고 잠시 오락(?) 시간이 있었다. 마침 어떤 젊은 여성 공무원도 우연히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이 연세 높은 어떤 종교의 수장께서 가라오케를 하시며, 이 젊은 여성의 팔과 어깨등의 신체부위를 성추행으로 보일만큼 이리저리  만져대는 것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내가 좀 충격을 많이 받았었다. 지금이면 아무도 그렇게 못하고, 만약 그랬다가는 성추행으로 고발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한 특정인의 인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그 종교 전체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또한 그런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와 나 그리고 당신, 우리 모두는 한계가 많은 ‘다 같은’ 인간이기에…

요새처럼 일본과 어르렁거릴 때, 만약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순신장군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좀 많지 싶다. 그런데 그분과 앉아서 대일본관, 해군작전, 군민협동 등의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면 현대의 한국 그리고 한국해군에도 도움이 될 훌륭한 말씀들을 듣게 되지 싶다. 하지만, 그분과 여성관, 가족관, 평등한사회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나눈다면, 내 짐작에 거의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듣게 되지 싶다. 이순신장군을 폄하하는 이야기 아니다.

그대에게 종교란 무었인가? 무었을 기대하며 또 무었을 얻고자 하는가? 어떤 변치 않는 가치나 도전 받지 않는 절대적인 무었이 거기에 있고, 또 그것을 배워 자신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건 구현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왜?’ 라는 질문에서 붓다의 구도가 시작 되었고, 그 질문에 대한 최고의 대답이 붓다의 가르침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직업삼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과 또한 그들을 추종하는 ‘좀 무지한’ 사람들이 떼지어 하는 짓이 그 가르침을 ‘종교’로 만들었던 것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만들었겠지.

잘 해보세요. 나는 관심 없어요 🙂

괜히 비건 갈굼

일전에 좀 특이한 도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그때 나왔던 어떤 장면이 충격적이라 요즘도 때때로 생각이 난다. 그 일본사람들이 만든 도큐멘터리는 세계 여러나라의 ‘특이한 환경이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무었을 어떻게 먹는가?’ 그런 주제였다. 예를들면 미국의 갱들은 무었을 어떻게 먹는가? 남미에서 반정부 운동하는 게릴라들은 무었을 어떻게 먹는가? 이렇게 좀 황당하긴 해도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는 내용이었다. 결론은 ‘뭐 그냥 이것 저것 먹더라’ 🙂

‘아프리카에 사는 에이즈 걸린 사람들은 무었을 어떻게 먹는가’도 직접 찾아 가서 사람을 만나서 촬영을 했는데 내가 그것 보고서 좀 충격을 받았다. 물론 결론은 ‘식당에서 밥 사먹는다’. 그런데 그 밥을 사게 되는 과정, 밥을 파는 환경, 무었으로 만든 어떤 밥인지, 그리고 전반적인 상황을 그 도큐멘터리를 통해서 보게 되있는데…

나도 옛날에 군대에서 보초를 서다가, 먹는 것에 대한 ‘갈애’를 (눈먼 목마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잠시 돌아서 (단지 못먹어서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여도 우리 동료 군인들이 안먹고 버리는 쌀밥이 매일 돼지사료로 처분되던 가난하지 않은 군대였다) 같은 기지에 근무하는 미군들이 사용하는 빈 버스안에 들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먹다 버린 핫도그를 ‘찾아내서’ 먹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잠시 정신이 돈다는 것, 눈이 휘리릭 돈다는 것 좀 무섭다. 깨긴 하더라만. 사람이 그럴만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우습게 그리고 쉽게 미치기도 하는가 보더라. 나 혼자만 그런가 🙂

그런데 이정도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 같은 상황이더라. 그 아프리카라는 곳이 그리고 그넘의 가난이. 에이즈에 감염 되었어도 치료는 커녕, 그 성치 못한 몸으로 하루벌어 하루먹어야 하는데, 그 척박한 땅 그 가난한 나라에서, 가진것 없고 병든 여자가 무었을 해서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있을까? 그 병들고 꼬질꼬질 마른 몸을 ‘그래도’ 사러오는 남자들에게 작은 돈을 받고 팔더라. 그 몇 푼 몸 팔아 받은 돈으로 깜깜한 밤길을 걸어 (사람들이 많은 시내인데 가로등이 없어요) 식당에 밥을 사먹으러 가더라. 밥 사먹고 돈이 조금 남으면 마약 살 예정. 촬영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래도 내가 벌어서 먹는다’고 말하는데 그 표정을 보면서 도대체 인간이 뭐고 삶이 뭔가 싶더라. 같은 시대에 같은 지구에서 태어나 살면서… 어쨋던 오래 걸어서 식당에 갔는데, 무슨 식당이 아무런 불빛이 없어서 칠흑처럼 깜깜해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밥을 먹고 있더라만. 카메라 조명으로 비춰보니, 아마도 무슨 험한 쌀처럼 보이는 곡물을 쪄서 접시 위에 많이 담았고 무슨 채소나 식물뿌리를 갈아 양념한 것을 그냥 좀 얹어 비벼 손으로 먹더라. 하루에 한끼밖에 못먹는다며 그 큰 접시에 가득찬 밥을 다 먹더라. 그 일본넘들 내가 좀 존경스럽던데, 그 여자가 먹던 중간에 ‘너도 한번 먹어볼래?’ 권하니까 덥석 떠서 같이 먹더라. 센 넘.

내가 직장생활 하면서 비건을 (vegan, 완전한 채식주의자) 몇넘 만났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인데, 다 자기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고 또 일리가 있더라. 그런데 내가, 몸 팔아서 하루에 한끼, 불도 없는 깜깜한 식당에서 겨우 먹고 연명하는 그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왜 그 비건넘들의 상판이 떠올랐을까?

니가 빨간색 바지가 좋다는데 내가 뭐라겠나? 니 취향을 누가 뭐라나? 혼자서 샛빨갛게 하고 사세요. 그런데 슬그머니 빨간색이 ‘더’ 좋다고 이야기를 해대더니 나중에는 ‘원래’ 빨간색이었어야 한다는 투로 멍멍이 소리를 하니… 그 아프리카 나라에 가서, 불도 없이 깜깜한 식당에 앉아서 하루에 한끼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 한 동안 살아 봐라. 그래도 비건 타령이 나오는지. 그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다르지 않다. 우연히 주어진 환경이 다를 뿐이지 사람은 똑 같다.

빨강이니 파랑이니 하는 것은 물감 살 돈 있는 넘들이 다 만들어 낸거여. 비건 타령도 마찬가지고 🙂

그곳에 왜 올라갔냐고?

원래 제목을 ‘그곳에 왜 올라갔냐고? 지금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데?’ 이렇게 붙였는데 너무 길어서 줄였다.

마리나와 클라우디아는 스페인 카탈로니아에 사는 7살 귀엽고 발랄한 소녀. 너무 이뻐요. 나도 그런 딸 있었으면 좋겠네 🙂 그곳에서는 매년 ‘사람탑쌓아올리기’ 대회가 열리는데, 두 소녀도 한 팀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선수들이시다. 가장 겁나지만 또 가장 쿨한 임무를 맡았다. 아저씨들을 밟고 타고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 이것 보면 좋은 사진 많이 있으니 더 이해가 될 듯. 그리고 귀여운 클라우디아와 마리나는 여기에서 볼 수 있어요. 사실 나도 그 소녀들을 ‘One Strange Rock’ 이라는 National Geographic 도큐멘터리에서 만났다. 전에 블로그에 몇 차례 언급했던 그 도큐멘터리. 꼭 한번 보기를 그리고 또 보게 되기를… 당신의 삶이 바뀔 수 있다. Overview Effect 라는 현상이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보는 눈이 아마 달라지지 싶다. 왜 마리나와 클라우디아 나오는 사람탑쌓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간이 인간의 두뇌를 써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컬러풀한 스넵샷’을 그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아래에 두 번째 예를 들어 더 이야기 하고 있으니 계속 읽어 보자.

Dawn Wall이라는 도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두 미국인이 요새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의 1,000미터 높이의 수직 암벽을 맨손으로, 수 년을 준비하여 19일에 걸쳐서 오른 인간 드라마다. 이것도 좋은 도큐멘터리다. 나는 우연히 한밤중에 빤스바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박수를 치면서 보다가 결국은 눈물을 (빤스에)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또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위험 천만한 암벽등반을 하는 미친넘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과 내가 직면하는 우리 삶의 실체를 그 본질을, 이 두사람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상대하는지 보여주는 ‘드라마’다.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인 2시간짜리 주말 드라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이 돈들이고 힘들여 촬영하고 편집해다가, 나 같은 사람이 코딱지 후비면서 집에서 편안하게 보게 해 준 것을 나는 매우 감사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즘 같은 세상에는 3년 수행하면 해탈해야 한다고 했지 싶다 🙂

암벽등반을 잘 모르는 우리들은 이 두사람이 이룬 성취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 성취의 크기로 그들의 크기와 깊이를 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좀 감이라도 있으면 좋지 싶어서 예를 들어본다. 이들이 수 년의 준비로 그 19일 동안 이룬 성취는, 보통 등산으로 치자면 아마도,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 14좌를 무산소 등정한 것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14좌를 성공적으로 등정한 사람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십여개국에 이십여명 있다고 들었지만, 무산소등반은 아무도 해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상상이지 싶다 (확인결과 있었음. 틀린 비유지만 그래도 의미는 전달 됬을 듯) 그것을 했다니까 이 두 미친 사람들이 🙂 상세한 내용과 감동은 그대 스스로의 손에 맡기고 나는 이제 본론으로.

다시 말하건데 나는 어떤 어려운 성취를 이룬 인간승리를 주제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대단한 성취를, 등반가 토미도 케빈도 그리고 이쁘고 씩씩한 클라우디아와 마리나도 이루었지만.

두 암벽 등반가는 그 역사적인 등반 이후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사가 되어 수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한 미국의 대담 프로였던가 아니면 뉴스프로였던가에서 어떤 방송하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슬쩍 던진 멘트가 있었다. ‘너무 멋지고 너무 훌륭하고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그 사람들 그곳에 왜 올라갔다지…’ 내 귀에 딱 꽃혔는데, 그때 본능적으로 내게 떠올랐던 대답이 있었다. 물론 지금 기억에도, 그 멘트가 대답을 요구했던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보통 사람들이 궁금해 할 수도 있는 그런 의문’을 좀 가볍게 던진 ‘약간은 빈정대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내 대답이 ‘지금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데?’였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미 나는 그 멘트가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또 악의적으로 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멘트에 깔려 있는 숨길 수 없는 의미를, 이 세상이 가치를 두는 바로 그 의미를, 나는 순간적으로 간파 했었다. ‘엄청난 돈을 쓰고 장비를 들여 올라 갔지만 결국은 내려 와야 하지 않았는가?’ 아마 이런 의미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 대답은 이렇다.

10부작인 ‘One Strange Rock’에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 하는 어떤 상황에 클라우디아와 마리나가 (다시말해 ‘결국 무너지는 사람탑을 왜 그 난리를 치며 쌓는데요?’ 물을 수도 있는 그런 장면이) 등장했었을까? 바로 인간의 인간 됨. 즉 인간의 두뇌, 창조성, 협동과 같은 인간의 참된 힘에 대해서 말하는 에피소드에 한 예로써 등장했던 것이다. ‘인간의 인간 됨’ ‘인간의 참된 힘’. 더 벌고 더 쓰고 더 폼 잡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다시말해 더 인기있는 티비프로그램을 만들고 더 인기 있는 인터뷰를 해서 더 이름을 날리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무너질 줄 뻔히 알며, 쌓아 올려본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는 사람탑을, 매년 돈과 정력을 엄청나게 들여 다치고 싸우고 지랄을 하면서도 쌓아 올리며 울고 불고 사진찍고 뽀뽀하고 생난리를 치고, 그넘의 돌댕이에 기어 올라가 보려고 수 년 동안 수십 수백번을 찾아 가서 (밧줄 타고 꼭대기에서) 이리 내려오고 저리 내려오면서 어디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면 다음 스텝이 나오는가, 손의 한 움직임 발의 한 스텝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또 시도하기를 수백 수천번. 그 짓을 손가락이 찢어지고 온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삶이 정지하도록 했던 결과로, 그넘의 돌댕이에 결국은 기어 올라가서, 좀 있다가 다시 기어내려 오는, 바로 그것에 ‘인간의 인간 됨’ ‘인간의 참된 힘’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왜 사람들이 미국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지 생각 해본 적이 있나? 잘 만들기 어려운 인공위성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른 나라들을 몰래 훔쳐보고 또 제 이익을 위해서 과학기술로 야비한 짓을 하는 넘들이 그곳에 득실 거리는데도? 내 생각에, 그런 인공위성 같은 것들을 만들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자기가 좋아서’ 하는거라. 그리고 이 미국이란 나라가, 자기가 좋아서 하는 별의 별짓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거라. 왜냐하면 인간의 위대한 성취나 거대한 진보는 이렇게 자기 좋아서 하는 미친넘들로 말미암아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이것을 알아주고 이해 해주고 박수 쳐주고 대접 해주고 또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나라. 그 나라가 미국이란 말일세.

희망컨데, 이글을 읽고 난 그대가, 언젠가 이런 도큐멘터리들을 보게 되었을때, 그때 그 멘트했던 방송사 사람처럼 ‘뭐야 이거?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저럴 시간있고 여유있으면 무언가 생산적인 것을 하지’ 그런 말 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넘들 (그넘들이 하는 그런 종류의 짓들) 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유인원에서 벗어나 문명인으로 사는 최대 최고의 원인(이유)이자 결과(증거)이며, 또 크고 길게 볼때 온 인류가 발전하게 하는 ‘진짜’ 돈을 벌어주고 밥을 나오게 해주는, 최고로 생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우리 모두가 차차 더 이해하고 깨닫게 되길 바란다. 붓다가 아니라도 좋고 불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 의미를 이해하여 우리들의 삶에서 나름데로 구현하며 살게 될 때 어쩌면 우리들은 해탈 열반에 그리고 천국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