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ve Aggregates

오늘부터는, 전에 한차례 간략히 언급했던 ‘Five Aggregates’라는 붓다의 중요한 가르침을 가지고,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을 번역해서 나누어 보고자 해요.

그때는 ‘자아의식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조건’이라고 내가 표현했었는데요, 앞으로 함께 배워보면서 더 적당한 표현과 또 좋은 이해를 함께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팔리어로는 ‘pañca khandha’라고 한다고 하며, Five Aggregates 다섯가지는 body, feelings, cognition, volition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입니다.

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네번째

궁극적인 메타 수행은, 주로 자기 자신의 물리적 정신적 한계와 씨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때 마음도 또한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굳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사실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나, 자신 혹은 ego’가 무의식중에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속에 아무 생각없이 빠져서 저항하고 다투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그리고 또한 나쁘다 좋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대신에, 다만 그것이 존재함을 그리고 내가 현재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receive), ‘내가’ 이러니 저러니 따지며 ‘분별하는’ 그런 자기중심성(ego)에서 벗어나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괴롭히는 좋지 않고 괴로운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다른 다양한 수행의 방법들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러가지 상황이나 사람을 인정하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하노라면,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던 그런 상황들이나 사람들이 돌덩어리 같이 변치않는 그 무었이 아니라, 차차 모퉁이도 떨어져 나가고 조금씩 덜 딱딱한 것으로 변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상이 변화하면 당신 자신도 또한 동시에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요, 아상의(ego) 지배를 덜 받게 되는 것이요 또한 ‘나의 세상(대상)이 부드러워지면 나 또한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런 대상들은 불쾌하고 싫은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며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그들이라는 이원적이며 이분법적인 마음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대상이나 상대는 (세상만물과 같이) 변화하고 있었겠지만 지나간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놓지 않으려던 당신의 마음이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면도 있습니다. 만약 메타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열고 그 변화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대상과 더불어 당신 자신 또한 변화할 것입니다.

내가 영국에 있을때 가끔 북아일랜드에 가서 설법을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너무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 했었을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 메타의 실천을 권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다시 그곳을 찾았을때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듣게 되었고 그 이후에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싫어하던 그 사람이 결국은 회사를 옮겼다더군요. 하하하.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상대도 (상황도) 변한다는 것은 맞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오해나 섣부른 짐작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정확한 perception을 주고 그 결과로 실재하지 않은 환상을 오직 당신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풀리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녹듯 사라져버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에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실재하고 있었던가요? 열린 마음은 가벼운 마음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자기 스스로를, 어떤 이유로든지 좋게 대접하지 않고 또 자주 힐난해 왔다면, 이런 메타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자신을 잘 대해줘도 괜찮다. 힐난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차차 부드럽게 상대하다가 보면,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때 자기 스스로에게 ‘또 그러네 친구야’ 하면서 좀 웃으며 가볍게 대할 때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하거나 액면 그대로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함’ 혹은 ‘호의’라는 의미로 내가 사용하는 ‘friendliness’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친하고 호의적인 사람은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때, 따지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편이 되어 좋은 말을 해주며 힘을 주려고 할것입니다. 여태껏 메타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마음을 먹는 습관 그리고 생각을 하는 습관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메타를 실천하는 것도 또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에 생겨나는 불쾌감, 혐오감, 싫어하는 마음을 당신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면 당신 마음속에 다른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 여전히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메타를 실천한다면 점차 그 실체를 점점 명확히 보게 되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대상에게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강제하려고 시도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고 가까워지며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상대에게서도 또한 나 자신에게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와 마음챙김이 더불어 적용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네요.

다시말하지만 메타 수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입니다. 메타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눈은 멀며 몸은 굳어집니다.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며 보지 못하게 되며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내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의 well-being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메타를 통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순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나은 well-being의 추구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명상수행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 위에 명상을 덧붙여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과정을 통하여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여 더 잘 명상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바깥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먼저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보물을 찾아내서 활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차차 익숙해지면 이러한 메타 수행을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눈을 가리던 혼란함과 마음을 한계짓던 ego를 벗어나는 해방을 맛보고,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에 관한 티라다모 큰스님의 설법이었습니다. 끝.

메타에 관한 가르침 – 세번째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는 나쁘고 악한면들이 존재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고 또 정당하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열어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좁은 식견을 (perception)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수준에서 (realistic) 그것들과 좀 더 발전되고 기술적인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에 우리가 좁은 식견이었을때 깨닫지 못했던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흔히 성을 내고 혐오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스스로의 well-being을 헤칩니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잘 대해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메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런 설법을 듣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논리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 깊이 받아 들이고 스스로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도 메타 수행을 태국에서 처음할때 이런 과정을 시행착오를 통해서 경험하며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이상적으로 세상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메타를 설천하려고 했었는데 (예를 들어) 막상 더운지방에 많은 개미들이 내 몸에 마구 기어올라 올때, 머리로 생각하는 메타의 한계와 현실적인 실천의 차이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내가 영국의 사찰에 있을때 주변에 토끼가 많았는데 늘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고 가꾸는 꽃들을 먹어치우는 것 등을 싫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토끼는 그저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토끼로써 해야 할 것들을 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부터는 더 이상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는 것에 내 마음이 따라서 어지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메타는 자기자신의 well-being에서 (평온과 안정) 시작되고 또 그것으로 되돌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순환이 반복되면 점점 자신의 well-being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전파되고 전달되겠지요. 결국에는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상대에게도,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나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다는 상대가 (반대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이전에 했던 판단이나 느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은 결함이 없다고 흔히 생각하지 않나요? 그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됨.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두번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같이 화를 내면서 ‘저런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다 감옥에 쳐넣어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메타’는 훈련을 통해 증득되고 또 발전합니다. 이 과정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싫다 이런 것이 싫다’ 하는 생각을 반복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나’ ‘자신’이라는 의식을 점점 강화하는 가운데 나이가 들면 당연히 짜증 많이 내는 고약한 성격의 늙은이가 되겠지요.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메타’를 수행을 통해 개발하고 증득한다면, 자신과 관계 맺음 혹은 자신을 규정함에 있어서 큰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물론 쉽게 그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메타’를 어떻게 규정할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쪽으로 기울어 세상만사 모두가 오케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꼬치꼬지 따져며 아무것도 오케이가 아니라고 해서는 곤란하겠지요. 현실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들이 엄연히 섞여서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얼마나 기술적으로 그것들과 관계를 잘 맺는가 하는 것입니다. 뉴스를 듣고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소식에,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나쁘며 멍멍이 같은 일이라고 흥분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그런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광분을 하니 어떻게 심신에 병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응징이나 보복의 욕구 같은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기 보다는 용서나 연민의 감정을 앞세운다면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메타’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어떤 이상적이고 고귀한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이것은 틀리고 저것은 나쁘고 이것은 싫고 저것은 이래야하고 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어, 장차 더 높은 차원의 ‘메타’ 수행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인정하는 (receive everything) 단계입니다. 나는 인정한다 (receive) 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accept) 필요도 없고 또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세상의 모든들이 훌륭하며 사랑스러울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실제하는 나쁜면들과 악한면들을 (그 존재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렵고 힘들게 살게 되겠지요. 화를 내거나 반발하고 분개하며 점점 무의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됨.


최근에 쓴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두번째 이야기’ 이야기 말미에 몇장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는데요, 그중에서 ‘일본 대림사입구에 설치된, 안중근의사와 치바도이치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라고 씌어 있어요.’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었어요. 그 추모비에 치바도이치선생은 ‘정애의 지사’라고 씌어 있어요. 우리가 ‘애정’이라고 할때 사용하는 그 한자들이지 싶은데요, 여러가지 정황을 볼때 어쩌면 그 의미가 ‘메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언급하며 확대한 추모비 사진을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