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 깨달음에 이르는 길, 첫번째 이야기

최근에 집중명상과 소위 ‘삼매’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글의 마지막에 ‘그럼 뭐?’라는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은 (내가 보고 들은데로) 좀 해보려고 한다.

먼저 그 글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었다. 붓다께서도 집중명상의 (팔리언어로는 Samatha 혹은 Samadhi그리고 영어로는 calm meditation 혹은 concentration meditation으로 번역) 도사였으며 그것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을 남기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붓다께서 강조하신 집중명상은, 고요함 속에서 어떤 규칙적인 움직임에 (예를 들자면 자신의 호흡)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비우는 것이었지, 어떤 일이나 문제해결등에 몰입하는 행위를 의미하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과 관련된 집중명상은, 산업공학자가 반도체불량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오랜 기간 밤낮없이 몰입하는 것아니 바둑이나 만화 삼매경에 빼지는 것과는 다르고 직접적인 연관성은 적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발생한 어떤 복잡한 문제를 손쉽게 단 한번에 해결하는 ‘silver bullet’은 없다. 일전에 언급했지 싶은데,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한두줄의 식으로 혹은 한두마디 요약으로 설령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나 관련도 없고 또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싶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그것을 먼저 이해하고 그것으로, 예를들자면 GPS처럼, 보통사람들의 삶에 관련이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서 우리와 관련이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또 누군가가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면 우리가 그속에서 상대성원리를 발견하던지 느끼든지 그렇지도 못한다는데에 딜레마가 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쨋던.

그렇게 ‘한줄’ ‘단번에’ ‘당장’되는 해결책을 말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대도 나도 ‘때로는’ 이런 것을 추구하고 그리워하는 보통 사람들이기에 오늘은 그 비슷한 해결책을 한번 말해보려고 한다.

이전 글에서 말했던 ‘그럼 뭐?’에 대한 단 한줄의 대답은 ‘집중명상으로 고요해진 마음으로 위빠사나 명상을 하라’이다. 이게 무슨 말? ‘위빠사나 명상’은 지혜를 구하는 명상이라고 한다. 무슨 지혜를 어떻게 구하는데? 위빠사나 명상에 무슨 거창한 비밀이나 엄청난 방법이 감추어진 것이 아니고, ‘위빠사나 명상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생성과 소멸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또 지켜보는 마음의 훈련(수련)’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당신이 어제 산 번쩍이는 새 승용차도 당연히 들어 있고, 올해 승진한 당신의 직업, 지금 당신 머리속을 오가는 생각들 그리고 하다못해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달’ 이렇게 ‘그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물론 처음에는 이미 과거에 발생한 어떤 생성과 소멸을 떠올리며 생각하게 되겠지만, 차차 생방송으로 발전하여 바로 지금 당신 마음속에서 그리고 머리속에서 생멸하는 그 욕심 (혹은 욕망), 혐오 그리고 환상 (혹은 착각), 이 세가지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겠다. 이렇게 오래 잘하면 당신도 해탈하고 열반에 도달한다고 붓다께서 가르치셨으니, 이제 목표와 그에 도달하는 길이 한줄로 정리가 되셨나 🙂

이 직접적인 가르침은 한두해 전에 티라다모 스님께서 호주에서 하신 설법에 매우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목록 위에서 대여섯째 줄에 등장하는 ‘Calm meditation and observing greed hatred and delusion’이 바로 그 설법이 되겠다.


작년말에 탁구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동영상 몇개를 관심있어 하는 친구를 위해서 올렸었다. 탁구를 아마도 많이 해보지 않은 그 친구가 보기에는 로봇을 상대로 드라이브도 걸고 스매시도 하는 내 모습이 좀 괜찮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탁구를 좀 치는 사람들은 알지 (동네탁구 수준을 넘는 정도라면), 저렇게 로봇이 규칙적으로 보내주는 스피드와 구질과 낙하지점이 일정한 공을 신나게 치는 것과 실제 경기는 하늘과 땅차이며, 그렇게 로봇으로 연습한 내용을 실전에서는 아마 십분의 일 혹은 백분의 일도 사용하기 힘들다는 것을.

어제 신년들어 처음으로 클럽에 가서 나보다 한두수 위인 사람들 그리고 비슷한 사람들과 게임을 했었다. 최근들어 백핸드 스매싱을 꽤 연습했었다. 굳이 숫자로 표현하자면 수천번 백핸드 스매싱 그리고 어중간하게 뜬 커트볼에 대한 포핸드 스매싱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었다. 실전에서는 어떻게 쓰일까 약간의 기대는 있었는데 금세 그 대답을 들었다. 12-15 게임 정도를 4-5명의 다른 사람들과 붙었는데, 백핸드 스매싱을 단 한차례도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차례 어중간하게 뜬 커트볼 스매싱의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 실패하였다. 전부 넷트에 걸리고 말았다. 당신이 탁구를 좀 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참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스포츠 이야기.

MMA라고 들어봤나? Mixed Martial Arts의 머리글로 아마 ‘종합격투기’ 정도로 변역되지 싶다. 쉬샤오동이라는 중국인 종합격투기 선수가 있다. 나이가 마흔정도로 지긋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물론 실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중국 전통 무술의 실전성’에 대한 커다란 의문을 던지며 온몸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으로 중국은 물론 한국에도 상당히 잘 알려진 사람이다. 자기 잘난체 하거나 돈을 벌려는 것이 주된 목적은 아닌듯 하고, 중국인들에게 ‘엉터리 전통에 매달려 눈뜬 장님으로 21세기를 살지 말고, 현실을 자각하고 장차 실제로 더 부강한 중국 더 강한 중국 무술을 만들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상당히 의식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중국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물의를(?) 일으키는지 당신은 혹시 알았었나?

우리나라 태권도와 비슷한 혹은 더 큰 위상을 지닌 전통무술이 중국에는 많다고 한다. 그중에서 우리가 이소룡을 통해서 보게된, 빠른 팔놀림을 위주로 상대를 공격하는, 영춘권 그리고 타이치 라고 불리면서 무슨 요가처럼 서구에 퍼진 태극권등은 중국인들이 크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런 중국 전통 무술의 대가들과 이 사람이 수차례 대결을 벌렸는데 (물론 공식적인 시합들이었다) 모든 상대를 KO로 박살 냈다. 일단 그중에서 압권인 경기 하나를 감상하시겠다. 이 두사람이 우연히 갑자기 이렇게 붙게 된 것이 전혀 아니다. 압도적인 기득권층인 전통무술하는 사람들이 온갖 비난과 비방 그리고 ‘이런 종합격투기 한다는 넘은 순식간에 한방에 날려버린다’고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를 치고나서 성사된 경기라는 것을 알고 보시라.

압권인 장면은 코뼈가 부러지도록 얻어 터지고 KO패 당한 그 전통무술의 대가가 승부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주는 13분15초 부근의 장면이다. 그야말로 무술에서도 쓰레기요 인간으로서도 전혀 수양이 안된 말종이라는 것을 역력히 보여주는 명장면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붙였더라. (이 전통 무술의 고수라는) ‘맞는 선수도 실제로 자기가 고수일거라고 착각을 했을것임. 주위에서 하도 떠받들어 주고 실전이란걸 경험 못해봤으니.’ 참으로 예리한 분석이요 명언이라는 생각이다.

나의 소소한 탁구경험과 이 중국인 MMA 종합격투기 선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었나?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과 위빠사나 명상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럼 다음에 계속 🙂

미생, 삼매 그리고 몰입

드라마 ‘미생’을 여름휴가때 마다 본지가 몇해 되었다. 이번이 세번째 어쩌면 네번째. 25시간 내외가 걸리는 전체 20편을 연달아 모두 보려면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중노동이다. 물론 한방에 끝내기는 불가능하다. 며칠 걸리는데, 그 기간동안에는 일체의 일상적 활동이 중단되며, 그나마 최소한의 활동은 드라마를 더 잘 보는데 집중된다. 예를들면 음식준비나 식사시간을 최소화 하면서 중간 중간에 운동을 한다 🙂

신심 깊은 기독교신자가 휴가기간에 성경을 완독하거나, 열성 불교도가 경전들을 필사하는 것에 견줄만한, 우리 내외에게는 일종의 연례 행사라 하겠다. 내게는, 어떤 유명한 경전들보다도 훨씬 더 내 삶에 관련이 있는, 내게 와닿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지혜를 얻는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삼매경에 빠진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깨닫게 된것은, 해를 거듭하여 보면 볼수록 동일한 드라마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느끼는 장면들과 또 강하게 와닿는 내용들이 (배우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다.

방금 ‘삼매’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삼매의 의미가 아마 황농문박사께서 가르치고 있는 ‘몰입’과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할 것이라 생각이 된다. 그리고 드라마 미생에서도 ‘샤를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여, 한 결정적인 장면에 바로 이 ‘삼매’ 혹은 ‘몰입’을 (삶에 대한, 일상에 대한, 일에 대한)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시 전문을 아래에 실었다. 읽어보기 전에, 미생에서 이 시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바로 오늘을 지금 이순간을 사는 그런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직접 이 장면을 보고나서 읽으면 더욱 좋지만 아니라도 그만.


항상 취해있어야 한다.
모든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속으로 꼬부라지게하는 가증스런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세없이 취해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었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미덕이든 그 어느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쨋던 취해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위에서 혹은 당신방의 음울한 고독가운데서 당신은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이 몇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를 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라. 술이든 시든 미덕이든 그 어떤것이든 당신 마음대로.’
(샤를 보들레르)


일부 번역에서는 마지막 문장이 생략된 경우를 보았다. 드라마 미생에서 사용된 번역도 마지막 문장이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에서 끝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 휴가기간에 미생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오늘에 몰입해서 그 취함속에서 그 삼매경에 빠져서 살던지, 아니면 내일에 몰입해서 오늘 취하지 못하고 삼매에 빠지지 못하며 엉거주춤하게 살던지 둘중 하나지, 둘다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주고 받는 거래도 어쩌면 이런 불문율 속에서 대부분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미생의 오과장처럼 혹은 장그레처럼 뜨겁게 살면 그 하루 하루는 행복하겠지만 길게 보아서 소위 출세를 하긴 어렵고, 반대로 잔머리 굴리며 라인타고 줄서는데 정신빠져서 살면 어쩌면 장차 출세는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다음에 뒤돌아 보면 텅빈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을 살게되지 싶다는 말이다. ‘출세해서 돈이 남고 지위가 남지 않는가?’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면 내가 굳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회사를 떠나면? 밖에도 삶이 있고, 당신도 가족들도 밖에서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이것 지위나 돈보다 어쩌면 훨씬 더 심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신은 빼고 🙂

Est-ce que tu parles français? 나는 불어를 못하니 실제로 샤를 보들레르가 드라마 미생에서 인용된 바로 그 의미로 이 시를 썼던가 직접 그리고 확실히 알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어와 영어로 된 자료를 몇가지 보니 이 요절한 시인이 그야말로 술과 여자 마약 기타등등에 쩔어서 살다가 일찍 가버린 사람,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그의 시들이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상황인듯 하더라. 드라마 미생 만든 사람들이 적절하게 인용해서 나 같은 사람까지도 소름이 쫙 돋게 만들었지만, 어쩌면 ‘표본실에서 해부한 청개구리에서 김이 모락모락’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삼매에 대해서도 조금 아는체를 하자면, 이글에서 내가 말했던 Samatha 혹은 Samadhi를 (영어로는 calm meditation 혹은 concentration meditation) 중국인들이 한자로 옮긴것이 바로 ‘삼매(三昧)’인데, 붓다께서는 물론이고 내가 이전에 몇차례 언급했었던 티라다모 스님께서도 ‘그것으로 해탈 열반을 증득할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일부 사람들이 그야말로 ‘삼매 삼매경’에 빠져 (혹은 ‘명상 삼매경’에 빠져) 숨쉬는 느낌이건, 공학연구건, 무역프로젝트건간에 완전히 몰입하고 그것에 빠지는 것이 마치 삶의 궁극적인 해결책이양, 혹은 삶의 최고 최상의 경지인양 말하는 듯하지만 (명상이나 몰입이 훌륭하고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다시 말하건데, 붓다께서도 그리고 바로 이 삼매와 몰입을 평생 밥먹듯이 해오신 티라다모 스님께서도, 그 자체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인간이 다다를수 있는 최고 최상의 경지도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뭐?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우연히 바로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말했다 ‘흡사 운동화 끈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잘 매는 연습을 밤낮으로 오래하여 그것에 도사가 됨과 같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화 끈을 잘 매고 아름답게 매도 오직 그것만으로는 마라톤을 완주할 수 없다.’ 아내는 조용히 식사 계속 🙂

‘그럼 뭐?’에 대한 대답들을, 내가 듣고 보고 배운데로 블로그에 써왔는데 올해도 계속할 작정이다. 당신이 못찾으면 내 블로그가 개판이요, 찾아서 읽고나서도 무슨말인지 모르겠으면 내가 확실히 몰라서 그렇다. 둘다 차차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새해복 많이 받으시라.

Five Aggregates

오늘부터는, 전에 한차례 간략히 언급했던 ‘Five Aggregates’라는 붓다의 중요한 가르침을 가지고,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을 번역해서 나누어 보고자 해요.

그때는 ‘자아의식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조건’이라고 내가 표현했었는데요, 앞으로 함께 배워보면서 더 적당한 표현과 또 좋은 이해를 함께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팔리어로는 ‘pañca khandha’라고 한다고 하며, Five Aggregates 다섯가지는 body, feelings, cognition, volition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입니다.

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네번째

궁극적인 메타 수행은, 주로 자기 자신의 물리적 정신적 한계와 씨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때 마음도 또한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굳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사실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나, 자신 혹은 ego’가 무의식중에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속에 아무 생각없이 빠져서 저항하고 다투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그리고 또한 나쁘다 좋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대신에, 다만 그것이 존재함을 그리고 내가 현재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receive), ‘내가’ 이러니 저러니 따지며 ‘분별하는’ 그런 자기중심성(ego)에서 벗어나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괴롭히는 좋지 않고 괴로운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다른 다양한 수행의 방법들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러가지 상황이나 사람을 인정하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하노라면,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던 그런 상황들이나 사람들이 돌덩어리 같이 변치않는 그 무었이 아니라, 차차 모퉁이도 떨어져 나가고 조금씩 덜 딱딱한 것으로 변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상이 변화하면 당신 자신도 또한 동시에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요, 아상의(ego) 지배를 덜 받게 되는 것이요 또한 ‘나의 세상(대상)이 부드러워지면 나 또한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런 대상들은 불쾌하고 싫은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며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그들이라는 이원적이며 이분법적인 마음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대상이나 상대는 (세상만물과 같이) 변화하고 있었겠지만 지나간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놓지 않으려던 당신의 마음이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면도 있습니다. 만약 메타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열고 그 변화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대상과 더불어 당신 자신 또한 변화할 것입니다.

내가 영국에 있을때 가끔 북아일랜드에 가서 설법을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너무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 했었을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 메타의 실천을 권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다시 그곳을 찾았을때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듣게 되었고 그 이후에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싫어하던 그 사람이 결국은 회사를 옮겼다더군요. 하하하.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상대도 (상황도) 변한다는 것은 맞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오해나 섣부른 짐작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정확한 perception을 주고 그 결과로 실재하지 않은 환상을 오직 당신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풀리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녹듯 사라져버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에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실재하고 있었던가요? 열린 마음은 가벼운 마음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자기 스스로를, 어떤 이유로든지 좋게 대접하지 않고 또 자주 힐난해 왔다면, 이런 메타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자신을 잘 대해줘도 괜찮다. 힐난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차차 부드럽게 상대하다가 보면,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때 자기 스스로에게 ‘또 그러네 친구야’ 하면서 좀 웃으며 가볍게 대할 때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하거나 액면 그대로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함’ 혹은 ‘호의’라는 의미로 내가 사용하는 ‘friendliness’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친하고 호의적인 사람은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때, 따지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편이 되어 좋은 말을 해주며 힘을 주려고 할것입니다. 여태껏 메타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마음을 먹는 습관 그리고 생각을 하는 습관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메타를 실천하는 것도 또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에 생겨나는 불쾌감, 혐오감, 싫어하는 마음을 당신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면 당신 마음속에 다른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 여전히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메타를 실천한다면 점차 그 실체를 점점 명확히 보게 되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대상에게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강제하려고 시도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고 가까워지며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상대에게서도 또한 나 자신에게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와 마음챙김이 더불어 적용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네요.

다시말하지만 메타 수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입니다. 메타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눈은 멀며 몸은 굳어집니다.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며 보지 못하게 되며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내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의 well-being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메타를 통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순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나은 well-being의 추구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명상수행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 위에 명상을 덧붙여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과정을 통하여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여 더 잘 명상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바깥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먼저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보물을 찾아내서 활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차차 익숙해지면 이러한 메타 수행을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눈을 가리던 혼란함과 마음을 한계짓던 ego를 벗어나는 해방을 맛보고,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에 관한 티라다모 큰스님의 설법이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