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이길녀선생. 선각자요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며 교육사업가(?) 그리고 90세가 되도록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대단한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여자 정주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하네요. 얼마전에 로타리클럽에서 주는 봉사상을 받으셨는데, 구순의 나이에 마치 오육십대의 중년여자분처럼 꼳꼳하고 바른 몸매로 단상에 걸어올라 감사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길녀선생이 도대체 어떤 비결로 그런 ‘건강한 장수’를 누리고 계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것 같네요. 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아마도 젊은 학생들과 늘 함께 지내며 공감하고 일을 하면서 그들의 좋은 기를 많이 받아서 그렇지 않겠나’ 하시더만요. 오늘 이분을 언급하면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전 블로그에서 언습했던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길녀선생의 인터뷰나 기사를 접하면서 여러번 놀라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최근에 나를 깜짝놀라게 만들었던 말이 어떤 인터뷰에서 나왔어요. ‘지난 9일 연휴동안에 나는 매일 골프를 쳤다. 젊은 시절 쳐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바로 이 말입니다. 참고로 이분은 일찌기 일본 미국 유학을 하셨던 선각자세요. 골프를 몰랐겠어요 아니면 칠 돈이 없었겠어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문화나 사고방식대로 해석하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승과 대승’으로 불교를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방법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다투어온 것이라 할수 있어요. 붓다의 가르침에는 소승도 대승도 그런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이런 허망된 판단, 나눔 그리고 다툼이 덧없으니 하지 말라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참 우리 인간이 이런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요?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사람들 각자가 속한 환경과 가치 그리고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 이러한 일이 어쩔수없이 발생한 것이겠지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화 시키다보니 어떤 세력 혹은 이익 집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면 밥그릇 싸움을 하면서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로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어떤 종교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만 그분의 가르침을 훌륭한 분들을 통해 배울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람들은 일단 먼저 자신을 돌보고 그 이후에 여력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기에, 아마 소승불교에 가깝다고 할수 있겠네요. 같은 맥락에서, 비록 그 결과나 효과는 세상에 도움이 될지라도,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함께 모여 조직적으로 타인들을 돕고 가르치고 또 그들의 삶을 향상시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 하는 그런 시도를 저는 선듯 동의하기도 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은 예외없이 얕고 이기적이며 오감의 지배를 받는, 때로는 어처구니 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저는 제 자신을 통해서 늘 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주 상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이 있고 내 뱃속이 편안할때 주변에 굶주린 사람에게 내가 가진 일부를 내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어쩌면 일부 동물들조차도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그것이 그냥 저절로 되거나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모습이나 상상하는 이상을, 타인들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도움으로써 획득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행동은, 비록 그 상대방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상당한 부작용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전에 적선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한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여러가지 증거로 볼때 이러한 부작용을 잘 피하며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적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어요. 그래서 크게 존경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런 정말 똑똑한 부자들의 공통점은 배우자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무것도 몰라도 거대한 성공을 극도의 노력으로 성취하고 나면 아마도 인간의 한계와 행복의 진정한 비결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모습이 엄청난 문화와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붓다의 가르침과 별반 다를바가 없음을 보면서 저는 정말 놀라게 됩니다.

붓다께서도, 그 위대한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이전에 무척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일단 사람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살다가 가실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나 고민을 오래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그랬을것 같네요. 붓다께서 결국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로 결심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일단 자신이 먼저 가졌기에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베품으로써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나 발상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주고 받고 의도하는 그런 차원 위에 존재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박원순 전서울시장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업적이 있겠지만, 결국은 자기자신의 어처구니 없도록 앞뒤가 맞지 않는 삶 그리고 인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어리석고 교만하며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물론 지켜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지킬 명예가 과연 있었던가 싶기도 해요, 상황이 이꼴이 되고 나니) 부인과 자식 친구들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해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어쩌라고요? 그 성추행 대상이었던 여자분은 어쩌고요? 자살도 일종의 살인 아닌가요?

다시 이길녀선생의 9일 연휴 골프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일전에 블로그에 적었듯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되면 세상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때문에 길게 보아 인간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며 감사드렸던 고 김근태선생도 또 사람들이 존경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사실상 그분들이 아니었더라고 하더라도 길게보면 오늘날의 한국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우연히 역사의 수래바퀴에 딱 끼였던 인연으로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며 칭송하고 또 이곳에도 언급할 뿐이겠지요. 좀 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전에 언급했던 ‘적선을 베푸는 것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짐작하듯이), 동물에게 베푸는 적선은 10배로 되돌아 오고, 사람에게 베푸는 적선은 100배, 수행자에게 베푸는 적선은… 사찰을 지어주는 적선은… 이렇게 죽 계속되다가 거의 끝에 가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적선의 은혜에는 0000000배’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최고의 가성비를 (return on investment) 자랑하는 적선은,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한 순간이라도 붓다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묵상하는 행위’라고 하네요. 어때요 놀랍지 않나요? 붓다께서는 결국에는 인간의 모든 행과 불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듯 한데요?

다시 말하자면, 민주화운동도 좋고 나라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무었보다 먼저 자신을 잘 돌보고 배우자와 가족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한다면 비약인가요? 그것 먼저 하고 나서 민주화운동도 하고 서울시정도 돌보고 또 다른 야망도 가꿔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 같은데요? 그리고 두가지가 충돌할때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쪽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만약 그랬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 필요한 지혜를 얻은 사람이었다면, 시장이 되고나서 가장먼저 밀실 침대를 없애고, 사무실과 주변의 벽을 유리로 갈아치우고 비서들을 적절한 사람들로 바꾸는 일을 아무 소리 소문없이 했었겠지요. 이미 말했듯이 자연의 지배를 받는 몸을 가진 우리 인간은 자주 어처구니없이 앞뒤가 맞지 않고 지극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상황에 (오래) 빠지게 되면 특출하게 심신이 반응하는 사람들은 전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혜롭고 훌륭한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미리 알고서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에게 참으로 유리한 상황들을 계속 만들고 유지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황진이가 옷 벗고 유혹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큰소리 칠 수 있나요? 만약 그랫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길게 보아 나중에 더 큰 이익을 취하려고 잠시 참았던 수준이겠지요.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능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황진이가 자신에게 다가올 이유도 원인도 애초에 제공하지 않는 것이, 그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정도 되고나면, 황진이도 없고 뭐 보호하고 잣이고 할 아무것도 결국은 없는 상황이 되겠지요. 아마 이것을 붓다께서는 ‘불이 모두 꺼져버린 상태’ 즉 ‘니르바나’ 혹은 ‘열반’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열반은 고승들만 죽어야 들어가는 무슨 거룩한 천당 극락이 아니라 그대와 내가 이러한 배움과 실천의 결과로, 살아서 누리는 조화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곳과 비교하면 한국은 참으로 살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밥을 못먹거나 스마트폰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에서 서로에게 간섭하고 참견하고 좋지 않은 영향을 심하게 끼치는 것이 흔하고 일반적인 곳이라, 어떤 도인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최소한 2시간 이상의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해야 살아 남을수 있을까 말까한 곳이라고 하네요. 공감합니다. 어떤이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네요.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추함위에서만 존재하거나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그렇게 상대성과 가성비를 따지며 살지는 않아요. 자신 내면의 은밀하지만 진실한 아름다움은, 주변의 추함이나 서로 드러내어 계산하며 비교하는 상대적인 아름다움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추한 주변과 가짜 아름다움을 멀리해야만 존재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Five Aggregates 이야기로 다음 글부터 되돌아 갑니다.

Five Aggregates

지난번에 예고했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Five Aggregates’라고 번역되며 한자로는 ‘오온 (五蘊)’ 그리고 붓다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언어인 팔리어로는 ‘Khandha’로 표현되는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내용의 하나라고 합니다.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한글로 다시 번역한 설명들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는데, 마침 티라다모스님의 좋은 설명이 있어서 여러차례 반복하여 들어보고 의역할 작정인데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그 다섯가지 입니다. 일단 중요하니 써놓고 시작합니다.

Material Form (형태, 몸)
Feelings (느낌, 기분)
Cognition (인식, 알아챔)
Volition (의지, 선택)
Consciousness (의식, 생각함, 깨어있음)

우리가 옛날에 길렀던 버둑이 녀석이 팔팔했던 어린 시절에 (안락사한지 몇년이 지났네요) 하도 말을 듣지 않고 개구장이 짓을 하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주말에 개훈련을 함께 시키는 곳에 데려갔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떤 영감이 우리가 버둑이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도와준답시고 자기가 데리고 가서 힘으로 버둑이를 제압하려 했던 적이 있었어요. 우리는 멀찌감치에서 보고 있는데, 그 영감은 우리개의 목줄을 단단히 잡고서 자기가 명령하는데로 걷게 만들려고 했어요. 버릇을 고쳐주려는 것이었지요.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처럼 쩔쩔매는 것이 아니라, 목줄을 죄면서 무릎으로 사정없이 버둑이의 머리와 몸을 쥐어박으면서 말을 듣게 만들려고 했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기는 고마웠지만 통하지도 않을 엉터리 방법으로 버둑이만 괴롭혔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때 아내와 나는 우리 버둑이 녀석이 ‘아이고 아저씨 아줌마 좀 구해주세요. 이넘이 못살게 하는데요’ 눈으로 호소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예요. 정말 눈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었어요. 그때 이후로 과연 다른 영장류나 개, 소나 말처럼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정말 어떤 ‘생각’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게 되었어요. 좀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그런 말을 눈으로 할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지 싶은데요, 예를들면,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할테고, 또 눈길을 보내는 상대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해줄 가능성이 있는 대상이라는 판단이 필요하지 싶네요. 다시말하자면 어떤 개는 단지 반사적으로 그 영감을 물거나 혹은 그냥 깨갱거리면서 끌려다니거나 했지 싶네요. 우리 버둑이는 장난을 좋아했었는데요, 좀 야비하고 엄하게 구는 제게는 장난을 잘 걸지 않다가, 아내가 밖에서 무었을 하고 있을때면 늘 가까이와서 무었을 물고 도망가면서 뒤돌아보고선 ‘나 잡아 봐라’ 혹은 ‘놀~자’ 이렇게 몸짓과 눈으로 말하곤 했어요. 상대를 가려가면서 하고 또 어떻게 하면 우리를 약 올려서 자기를 따라다니게 만들어서 함께 놀수 있는지도 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글을 시작할때 말했던 그 다섯가지 중에서 어쩌면 한두가지는 버둑이도 아마 조금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네요.

갓난 아기에게 주사를 놓으면 앙~~ 크게 우는데요, 과연 아기가 그때 우리 버둑이처럼 ‘아이고 아파라. 엄마 좀 말려 주세요’ 그런 ‘의식’이나 ‘판단’이 있어서 우는것일까요. 아니겠지요. 아주 갓난 아기는 잘 보이지도 않고 또 두세살인가 되어야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이 된다고 하네요. 어쨋던 우리는 갓난 아기를 벗어나면서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되고 또 발전되면서 점점 ‘자기’ 혹은 ‘자아’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으며 굳어지는 것인데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어떤 구체적이고 혹은 변치않는 무었이 개개인 사람안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고 하지요. 또 그것을 직접 간접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많은 시도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사람이 죽기 전후에 무게를 재기도 했고, 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니 병원의 아주 높은 천정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그림을 몰래 그려 놓고서 죽다가 살아 왔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았는가 따져 보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 얼마나 다른 많은 시도들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어서 신체가 완전히 생명활동을 중지하고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정말 다시 살아나서 세상에 되돌아온 사례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물론 이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갖가지 색다른 증거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참으로 잘 살아보려고 진정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확인되고 반복적으로 검증된 훌륭한 것들 조차도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또 이 짧은 인생에 굳이 그런 것들로 다투며 인생을 낭비할 이유는 없지 싶어요.

Five Aggregates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왜 붓다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그리고 왜 이 Five Aggregates에 대한 참된 이해와 실천이 우리를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길이라고 강조하셨는지 먼저 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해요.

위에서 말한 버둑이를 통해서도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직접 경험했었지만, 아내가 몰던 작은차의 시작과 끝도 또 직접 경험했어요. 자동차의 시작과 끝이라니 좀 의아한 생각도 들겠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십년쯤 전에 마침 세일하던 작은 차를 아내 출퇴근을 위해서 좀 융자를 내서 샀었어요. 계기판에 6킬로인가 찍힌 새차를 처음 집으로 데려오던(?) 그 신나던 운전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요, 이후로 그 차는 ‘풍댕이차’라고 불리며 아내에게 10년 가까이 잘 봉사를 했었답니다. 어느날 그만 추돌사고가 나는 바람에 랙카차에 끌려가서 폐차되면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데요, 그 이후로 집에 남아있던 그 차의 두번째 열쇄를 볼때마다 이름모를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상에 태어난 한 물건이 폐차장을 통해 분해되어 차차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이 세상에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마찬가지로, 붓다께서는 이 Five Aggregates를 가르치시며,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개인은 이러한 다섯가지의 과정이 (process) 조화롭게 지속되고 반복되는 어떤 집합체이지 (마치 그 풍뎅이 자동차가 한때 수천개 부품의 조합으로 잘 움직였듯이) 그 안에 나를 나로 규정하는 절대적이고 변치않고 영속하는 어떤 것이 (Atman)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나’ 혹은 ‘자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그 강하디 강한 ‘집착’과 ‘갈애(욕망)’로 부터 자유를 찾고 장차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진정 편안하고 좋은 삶을 살다가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되며 저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연하자면, 아내의 차가 그 부품들이 조화롭게 작동하며 씽씽 달릴때 ‘풍댕이차’라는 또 다른 실체가 그 차에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말해 지금은 사라진 아내의 차가 그 부품이 조화를 이루어 지속적으로 작동될때 ‘풍댕이차’라는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처럼 취급을 받긴 했었지만, 사실상 그 당시에도 그리고 부품들이 부서지고 또 분해되고 난 지금도, 그런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은 실제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뒤로 더 되돌아가서 따져보자면, 그 자동차의 부품들도 결국은 흙에서 (혹은 지구에서) 왔었던 것이었고 이제 서서히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우연히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고 할수 있네요.

버둑이도 마찬가지였지요. 안락사 시킨 버둑이를 집에 싣고와 잘싸서 미리 파두었던 뒷산에 묻으면서 우리 모두는 징징 짯어요. 이후로 가끔씩 무덤에 꽃을 올려 놓거나 찾아 가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잘 가지 않게 되네요. 그리고 차차 잘 깨닫게 되었어요. 버둑이도 그 어미개 아비개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이, 어떤 조건속에서 흙으로부터 와서, 조화롭게 반복되는 생명체의 과정으로 (process), 우리와 장난도 치고 돼지처럼 먹고 드렁드렁 코골면서 자다가, 암이라는 변화로 조화가 깨어지고 또 그 깨진 것을 땜질하여 겨우 이어붙여 한두해를 더 살다가 결국은 완전히 무너지면서 흙으로 되돌아 간것이라는 것을요. 버둑이의 사진과 비데오는 남아 있지만 그 사진 주인공의 실체는 이제 어디에도 없지요.

이런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너무나 어두운 느낌이 들고 어렵고 또 모욕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언제나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따져 보지도 않고서, 다만 죽은 버둑이를 묻으면서 ‘안녕 또 만나’ 하는 감정으로 엉엉 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잊기도 하고 또 주변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행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사람들과 더불어 흘러가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죽음 뒤에 또 다른 생이 있으며 (영생) 그리고 그때도 지금 ‘나’와 동일한 그 무었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환생) 믿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붓다의 가르침을 굳이 종교라고 이름 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어쩌면 유일하게 그러한 영생이나 환생을 주장하지도 또 가르치지도 않는 특이한 종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기복신앙 비슷하게 타락한 괴상한 불교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에 포함되지 않아요 🙂 오늘은 여기까지인데요, 다음번에는 그 유명한 이길녀선생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랍니다. 그럼 이만.

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네번째

궁극적인 메타 수행은, 주로 자기 자신의 물리적 정신적 한계와 씨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때 마음도 또한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굳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사실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나, 자신 혹은 ego’가 무의식중에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속에 아무 생각없이 빠져서 저항하고 다투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그리고 또한 나쁘다 좋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대신에, 다만 그것이 존재함을 그리고 내가 현재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receive), ‘내가’ 이러니 저러니 따지며 ‘분별하는’ 그런 자기중심성(ego)에서 벗어나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괴롭히는 좋지 않고 괴로운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다른 다양한 수행의 방법들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러가지 상황이나 사람을 인정하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하노라면,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던 그런 상황들이나 사람들이 돌덩어리 같이 변치않는 그 무었이 아니라, 차차 모퉁이도 떨어져 나가고 조금씩 덜 딱딱한 것으로 변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상이 변화하면 당신 자신도 또한 동시에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요, 아상의(ego) 지배를 덜 받게 되는 것이요 또한 ‘나의 세상(대상)이 부드러워지면 나 또한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런 대상들은 불쾌하고 싫은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며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그들이라는 이원적이며 이분법적인 마음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대상이나 상대는 (세상만물과 같이) 변화하고 있었겠지만 지나간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놓지 않으려던 당신의 마음이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면도 있습니다. 만약 메타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열고 그 변화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대상과 더불어 당신 자신 또한 변화할 것입니다.

내가 영국에 있을때 가끔 북아일랜드에 가서 설법을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너무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 했었을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 메타의 실천을 권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다시 그곳을 찾았을때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듣게 되었고 그 이후에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싫어하던 그 사람이 결국은 회사를 옮겼다더군요. 하하하.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상대도 (상황도) 변한다는 것은 맞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오해나 섣부른 짐작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정확한 perception을 주고 그 결과로 실재하지 않은 환상을 오직 당신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풀리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녹듯 사라져버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에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실재하고 있었던가요? 열린 마음은 가벼운 마음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자기 스스로를, 어떤 이유로든지 좋게 대접하지 않고 또 자주 힐난해 왔다면, 이런 메타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자신을 잘 대해줘도 괜찮다. 힐난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차차 부드럽게 상대하다가 보면,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때 자기 스스로에게 ‘또 그러네 친구야’ 하면서 좀 웃으며 가볍게 대할 때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하거나 액면 그대로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함’ 혹은 ‘호의’라는 의미로 내가 사용하는 ‘friendliness’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친하고 호의적인 사람은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때, 따지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편이 되어 좋은 말을 해주며 힘을 주려고 할것입니다. 여태껏 메타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마음을 먹는 습관 그리고 생각을 하는 습관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메타를 실천하는 것도 또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에 생겨나는 불쾌감, 혐오감, 싫어하는 마음을 당신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면 당신 마음속에 다른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 여전히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메타를 실천한다면 점차 그 실체를 점점 명확히 보게 되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대상에게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강제하려고 시도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고 가까워지며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상대에게서도 또한 나 자신에게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와 마음챙김이 더불어 적용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네요.

다시말하지만 메타 수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입니다. 메타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눈은 멀며 몸은 굳어집니다.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며 보지 못하게 되며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내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의 well-being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메타를 통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순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나은 well-being의 추구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명상수행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 위에 명상을 덧붙여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과정을 통하여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여 더 잘 명상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바깥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먼저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보물을 찾아내서 활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차차 익숙해지면 이러한 메타 수행을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눈을 가리던 혼란함과 마음을 한계짓던 ego를 벗어나는 해방을 맛보고,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에 관한 티라다모 큰스님의 설법이었습니다. 끝.

메타에 관한 가르침 – 세번째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는 나쁘고 악한면들이 존재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고 또 정당하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열어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좁은 식견을 (perception)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수준에서 (realistic) 그것들과 좀 더 발전되고 기술적인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에 우리가 좁은 식견이었을때 깨닫지 못했던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흔히 성을 내고 혐오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스스로의 well-being을 헤칩니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잘 대해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메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런 설법을 듣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논리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 깊이 받아 들이고 스스로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도 메타 수행을 태국에서 처음할때 이런 과정을 시행착오를 통해서 경험하며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이상적으로 세상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메타를 설천하려고 했었는데 (예를 들어) 막상 더운지방에 많은 개미들이 내 몸에 마구 기어올라 올때, 머리로 생각하는 메타의 한계와 현실적인 실천의 차이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내가 영국의 사찰에 있을때 주변에 토끼가 많았는데 늘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고 가꾸는 꽃들을 먹어치우는 것 등을 싫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토끼는 그저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토끼로써 해야 할 것들을 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부터는 더 이상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는 것에 내 마음이 따라서 어지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메타는 자기자신의 well-being에서 (평온과 안정) 시작되고 또 그것으로 되돌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순환이 반복되면 점점 자신의 well-being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전파되고 전달되겠지요. 결국에는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상대에게도,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나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약 볼 수가 있다면, 아마 내가 이전에 (그 상대에게) 했었던 판단이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결함이 없다고 흔히 생각하지 않나요?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