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ception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를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대를 기쁘게 해줄(?) 독설이 너무 많이 들어 있네요. 좀 묵혀 두었다가 잊혀질만 하면 다시 봐요 🙂

오늘은 대신에 ‘Perception’에 관한 이야기를 ‘티라다모 큰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좀 해볼까 해요. 한자로는 ‘지각’(知覺)이라는 단어와 대응하는 것 같군요. 좀 어려운 말 같은데요?

불교적 시각에서 영어로 하는 설명은 ‘Perception (Pāli – saññā, Chinese – 想蘊) is sensory and mental process that registers, recognises and labels, for instance, the shape of a tree, color green, emotion of fear’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Perception은 기록하고 인지하며 표식을 붙이는 (표를 다는), 감각 및 정신의 작용. 예를 들자면, 나무모양, 초록색, 공포감등이 perception이라 할 수 있어요’. 참고로 (perception으로 영역된) 팔리 원어 ‘saññā’는 ‘관련된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associated knowledge’라고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perception에 대응하는 태국어 단어는 그 의미가 ‘기억’ (memory) 이라고 하네요.

어떤 한국어 불교사전에서는 ‘6가지 감각기관의 접촉과 동시에 생기는 것이다’ 라고해요 (간접적인 설명이지만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어봐요). 우리가 모두 아는 오감에다가 ‘마음’을 더해서 6감인데요. 붓다께서는 마음도, 보는 것이나 감촉하는 것과 동일하게, 감각의 한 종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이 6가지의 감각기관에, 외부적인 접촉이 가해질때 발생하게 되는 것이 perception 즉 지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카레는 맛과 향은 좋지만 그 모양으로 말미암아 영국여왕의 만찬에 오르기는 어렵겠다’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말속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의 perception이 드러나겠지요. ‘짱께들은 다꾸앙들보다 더럽고 시끄럽고 무질서하다’ 이렇게 누가 말을 한다고 하면 또한 어떤 사람의 perception들이 그 말속에 들어 있겠네요.

자 이제 perception이 무었인지 좀 감을 잡았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가 궁금하지요? 혹시 기억을 할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에 이 글에서 The Five Aggregates를 간략하게 언급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다섯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perception입니다. 그 당시에는 cognition으로 번역했었던 책을 참조 했었네요.

이 perception은 ‘나’ (자신,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요소 중 하나로써, 우리의 일상 삶에도 (현실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칠뿐만 아니라, 그대와 내가 장차 수행을 해서 해탈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수행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들 모두, 오늘 하루 동안에, 수많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perception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었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하루를 보냈을 꺼예요. 그리고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그 세번째 글 안에 들어 있다는 ‘독설’들도 또한 나의 perception이 많이 드러나고 표현된 것들이지요.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모든 사람들이 perception을 가지고 있다. 지혜란, perception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perception을 자각하고, 나아가 그것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때로 그것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perception과 자유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 또한 변화하며 영속하지 않고 또한 당신이 아니다.’ 좋은 말씀이지요? 그래서 내가 쓴 세번째 글을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블로그에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

내 생각에, 그대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들은 무슨 크고 거창한 사건 사고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perception이 사람들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견해의 차이, 시각의 차이, 생각의 차이 그리고 느낌의 차이에서 비롯된 알력과 충돌이 아닌가 싶어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이라는 ‘아상’과 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perception도, 위에서 언급한 다른 The Five Aggregates들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생각이나 견해 혹은 느낌이 바뀌었던 적이 많지 않았나요? 바뀌기 전에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어떤 것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그리고 다른 경험이 쌓임으로써 변하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perception에서 비롯된 견해나 생각 혹은 느낌을 가지고 타인들과 언쟁을 벌이며 충돌할때, 혹은 말 못할 괴로움에 빠질때, 그대와 나는 바로 이러한 perception의 참 모습을 기억하도록 노력해요. 우리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지혜를 얻고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길 바래요.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 첫번째 이야기

한 일년 쯤 전에 피디수첩에서 큰 승려단체 대빵할배가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고 까발렸던 적이 있었다. 무려 두번이나. 그때 이 할배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동시에 깨졌던 승려가 있었는데 ‘현응’이라고 했다. 그 주변에서 왔다갔다 하려면 이 승려도 보통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지. 중과 계급장. 대머리와 함께 모두 번쩍번쩍 🙂

이 승려는 좋은 책을 썼던 사람으로서 나도 그 책을 좋아하며 읽었었는데, 피디수첩을 상세히 보고 난 이후에 그만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어느 정도 가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비리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고 노는 수준이 너무 하수라, 그런 책이 어디서 어떻게 나올 수가 있었던지 몹시 의아했으며 또한 그런 출처불명의 책을 한때 좋아했고 그 저자를 존경했던 것에 낙심했었다.

미국의 한 대학교 철학과에 재직중인 한국인 교수 부부가, 바로 이 현응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서 출판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이들의 교분은 여러가지 자료를 볼때 상당히 두터웠던 것으로 알았던 바,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 한국인 교수부부, 특히 외부로 더 알려진 남편 되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일지 나는 한편으로 궁금했었다. 한참 지나서 우연히 그 남편 교수되는 사람이 기고한 글을 보게 되었다. 한국사람이라면 흔히 말했을 ‘이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만약 사실로 밝혀지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또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같은 수준의 내용이 아니더라. 일견 예상했던 바요 그리고 다행이었다.

이야기 잠시 옆길로 빠져요. 손에 장을 지지느니 큰소리 칠때 조심하세요. 내가 우연히 만났던 이곳 사람은 직업이 신문 스포츠란에 논평을 기고하는 것이었는데, 옛날에 이곳에 스타디움을 새로 지으며 건설비용에 관한 많은 언쟁이 있었을때 ‘그 비용으로 누가 지으면 내가 전화번호부를 뜯어 먹겠다’고 논평에 썼었더란다. 그 당시 이곳 전화번호부는 2권이었고 또 매우 두꺼웠었다. 한 두해가 지나서 실제로 그 비용으로 스타디움 건설을 마쳤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전화번호부를 물에 불려서 뜯어 먹었던 것’은 아니고, 공개 사과를 하는 개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 🙂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계기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아직 서로를 모르거나 의식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연히 목격하게 된 상대방의 어떤 좋은 언행이, 마음을 사로잡고 또 마음을 열게하는 경우도 많지 싶다. 그 남편이라는 미국교수는 홍창성박사인데, 그분 이야기인즉 ‘옛날에 내가 현응스님을 한국에서 만났던 적이 몇차례 있었다. 한번은 귀국 선물로 내게 책을 한권 사주었는데, 그때 자신을 위해서 (아마 업무에 관계된) 책을 몇권 동시에 구입하더라. 계산하는 곳에서, 내게 선물하는 그 책은 자신의 카드로 결재하고 나머지는 업무용 카드로 결재를 하더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고 또 책 한권쯤 끼워 넣어서 업무용 카드로 결재한들 누가 뭐라겠나만 그는 구태여 그렇게 하더라’ 이런 내용이었다. 그 박사에 그 스님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고, 비록 그 피디수첩 방영 내용이 전부 날조된 것일 수는 없겠지만 또한 동시에 상당한 오해나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곤경에 처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짐작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밝히자면, 이후에 벌어진 재판에서, 피디수첩의 방영 내용에 근거가 없거나 과장된 내용이 많은 쪽으로 판결이 나서 현응스님이 승소하였다. 진실은 흑백으로 나누기가 어려울 때가 있겠지만, 어떤 색깔쪽으로 더 가깝거나 멀다는 것을 밝힐 수는 있지 않겠나. 쓰레기통에서 책을 다시 꺼내서 잘 말려 놓았다. 비유로. 요새 모두들 전자책 읽지 않나요?

서론이 무척 길었다. 항상 사서 드시는 그대는 모르겠지만, 원래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은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내가 만들어 본 경험은 없지만, 많이 기다려 본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 한 술 더 뜨자. 홍창성박사가 옛날에 쓴 어떤 수필 비슷한데서 읽었던 것 같은데, 이 양반이 수행에 눈을 뜬 것이, 맞벌이 부부인 부인이 첫 아이를 낳고서 (무슨 이유에서인가 바쁘게 되는 바람에) 이 양반이 한 일년간 매일 기저귀 갈면서 아기를 힘들게 돌 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 솔찍하며 인간적이요 또한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 그때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자 이제 쥐꼬리만한 본론을 말할 차례가 왔다. 궁극적으로 내 자랑이 되겠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책과 관련하여 저자가 밝힌 수행의 단계는 아래와 같다.

[저자의 단계별 정리]
1. 수행자가 고해에서 벗어나고자 깨달으려는 강한 욕구와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2. 깨닫기 위해 경전 공부와 참선에 집념을 갖고 용맹정진한다.
3. 오랜 정진으로 심신이 자연스레 공부와 수행의 습관이 밴다.
4. 깨닫겠다는 의식적 욕구는 점점 줄어들어 아무런 집착 없이 공부와 수행을 계속한다.
5. 심신에 밴 공부와 수행은 자연스레 수행자를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내가 보기에, 외딴섬에서 나 홀로 떠들어대는 바로 그 이야기를 이 양반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학벌 좋고 똑똑하신 교수님께서, 오랜 세월 공부와 연구를 한 결과로 하시는 우아하고 수준있는 이야기를 나도 이 블로그에서 짓어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우하하하 멍멍멍…

다음에 더 이야기 하자. 기대하시라. 이렇게 올라 갔으니 다음번에는 내려갈 차례 아니겠어요 🙂

담배 연기 자욱한 노름판

불과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한국은 인구의 다수가 농사를 지어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농업국이었다. 태국이나 베트남처럼 이모작 삼모작을 할 수 있는 기후여건이 되지 못하니,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나면 소위 농한기라는 것이 몇 달간 지속되었다. 너무 추워서 아무런 농사일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나마 조금 남은 것을 가지고 근근히 넘기던 그 기간에, 우리 선대들께서는 군불 땐 뜨거운 방에 모여 앉아서 화투등 노름을 하시며 소일하는 경우도 많았다더라.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하지. 그런데 술 자주 많이 마셔 봤나?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는, 장난이 아닌 상황으로 급변한다. 지난 여름내내 힘들게 농사지어, 가족들과 먹으려고 모아 놓았던 그 곡식, 내년에 모심기 할때 쓸려고 남겨 두었던 종자 할것없이 모조리 노름판에 판돈으로 걸게 된다. 그 다음은 집문서 논문서 그런 순서로. 그 담배 연기 자욱했던 노름판, 며칠씩 자지도 먹지도 않고 시뻘건 눈으로 밤을 세던 그 열기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면, 남은것은 훨씬 더 춥고 긴 겨울. 몇몇 아비들은 죄책감과 후회에 떡이 되도록 빚술을 마시고는 왼손 검지 손가락을 낫으로 잘랐단다. 다시는 화투장을 그 손가락으로 쪼이지 못하게. 지옥이 따로 없다. 그리고 그때 또 대를 잇는 비극들이 얼마나 많이 잉태되었을까…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니, 지금 고층 아파트에서 살며, 쌀은 동네 슈퍼에서 생산되는 줄 알며 사는 우리들의 DNA에 아직 남아 있을껄 🙂

그 왼손 검지 짤랐던 아비들, 손가락이 아물때 쯤이면 다시 농한기가 찾아오고, 그 아비들 대부분은 왼손 ‘중지’로 화투장을 쪼이고 앉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고. 아마 왼손목을 자른 사람들도 있었다지. 그러면 나중에는 왼팔을 왼쪽 가슴에 붙여서 화투장을 쪼이며 노름을 했다더만… 그렇게 그 사람들은 괴로움의 바다를 헤매다가 죽고 또 그들 때문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던 부인들과 가족들도 다 죽고 또 뿔뿔이 흩어졌겠지. 암진단을 받도 나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이 50%가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일전에 신문에 좋은 글 쓰는 분이,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아마 음주와 관련된 암)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싶어해서, 결국은 서로 평화를 찾고 (술사다 드리고) 좋다고 웃는 얼굴 보고서 나중에 임종을 했다고 쓴 글도 읽었다. 나 역시 이런면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을 한다.

아주 많이 도를 닦은 승려나 다른 종교인들을, 만약에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노름하던 그 담배 연기 자욱한 방, 그 상황, 그 입장에 처하게 만든다면 그들은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 생각에는 아니올시다. 맛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거나 하는 짓이 좀 덜 극단적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그들과 똑같은 언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었일까? 소위 말하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었일까? 아무 소용 없지 않은가 결국 똑 같은 짓을 하게 된다면?

최근에 니르바나 이야기를 하면서, 붓다께서도 강조하셨고 또 스스로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실천 하셨던 것처럼, 매일 매순간 그렇게 수행을 하는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어쩌면 니르바나의 또 다른 본질이 아닐까 말했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수행이란 그리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알고 깨달아, 담배연기 자욱한 노름판에 앉아 있는 자신을 장차 발견하지 않도록, 미리 매순간 깨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마 ‘뻥치기 좋아하는 왕서방과 남의 이야기 좋아하는 김서방’이 만나서 만들어 낸 엉터리 이야기들이지 싶은데, 인간의 생물학적 물리적 정신적 한계를 무슨 신비한 능력을 얻어서 극복한 어떤 상상속의 모습을 마치 수행의 이상 (혹은 도인의 진면목) 처럼 그려낸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많지 않았던가? 어쩌면 좀 스토리는 달라졌고 더 세련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아직도 주변에 그런 황당무계한 발상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내가 잘 알고 존경하는 스님들 그리고 성직자들 중에서, 돈을 쫓는 (명예 등을 포함한 ‘세상의 가치’라는 의미) 분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중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를 솔찍하고 적나라하게 (적절한 이유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드러내지 않는 분도 없었다. 신비한 능력? 인간이 무르익고 성숙해진 결과로,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어떤 저의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과 기꺼이 공존하게 된 이것이야말로 신비한 능력 아닌가?

‘섹스엔시티’라는 시트콤이 (연재드라마) 있었는데 나도 옛날에 가끔 보았다. 뉴욕에 사는 돈많고 예쁜뇬들의 허리띠 아래 잡담을 소재로 하는 코매디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는데, 사만다라는 여자가 (약간 덜 평범한 섹스를 좋아하던 케랙터?) 어떤 나이 많은 남자와 사귀게 된 상황이었다. 사만다는 이 남자의 중후한 멋 그리고 원숙한 매력에 이끌려, 자기보다 나이가 두배 혹은 그 이상이 되는 남자와 섹스를 원하게 되었다. 아마 이 부유한 늙은이의 크고 화려한 침실이었겠지. 이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화장실로 걸어가는 뒷 모습을 사만다가 우연히 보게 된 거라. 그 중후하고 원숙한 매력과 대비되는 쭈글쭈글하고 축 쳐진 늙은 영감의 엉덩이를. 그 순간 사만다의 환상은 깨지고 급격하게(?) 정신을 차린 사만다는, 그 남자가 아직 화장실에 있는 틈을 타서 그 방을 몰래 빠져나와 줄행랑을 쳤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섹스는 무슨 🙂

아! 나이가 들면 스큇을 해서 엉덩이를 최대한 빵빵하게… 그런 개 풀 뜯어 먹는 이야기가 아니라, 방금 말했던 ‘인간의 생물학적 물리적 정신적 한계를’ 알고 깨닫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 위에서 (환상이 아닌) 현실의 집을 지어야 자신도 주변도 모두들 행복하리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잘 사는 길, 행복을 찾는 길, 그리고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수리처럼 보려면 독수리의 두뇌를 가져야 한다

좋은 이야기가 자주 ‘One Strange Rock’ 도큐멘터리에서 나오는 것 같네요 🙂 몽고에서는 독수리를 훈련시켜, 말타고 거대한 평원에 데리고 나가서 여우 사냥을 하는 풍습이 오래 내려 온다고 해요. 그 도큐멘터리에도 실제 사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 기억에 그 context는 (스토리의 주제는) ‘3킬로 떨어진 여우를 즉각적으로 볼 수 있는 독수리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독수리의 눈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독수리의 두뇌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었던가 하면, 인간만이 가진 유일하고 독창적인 능력들도 모두 인간의 발달된 ‘두뇌’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예요.

어제 니르바나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이야기를 했었어요. 내가 했던 이야기에 따르면,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위 ‘불을 끄고 목마름을 없애는’ 꾸준한 과정이 필요하며 (붓다께서 가르치신 8가지 훌륭한 길을 따라서), 그 과정이 흡사 태권도처럼 여러 단계가 있을 수 있지, 흑과 백의 이분법 처럼 ‘끄진 사람과 끄지지 않은 사람’ 이렇게 단순히 나눌 수가 없다고 했었어요. 불과 목마름을 줄여가는 수행의 과정이라는 관점에서는 지당한 말이지 싶고 또 여러분도 동의하지 싶어요.

하지만 ‘불이 50% 꺼지면, 50점 짜리 니르바나를 경험한다’ 이런식으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붓다와 훌륭한 제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니르바나는 오직 스스로 realise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시기 때문이예요. 이 ‘realise’라는 말에 정말 정확히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는 아마 없지 싶어요. ‘Tommy’s realised his life-long dream’ 이런식으로 사용하는데, 이 뜻은 대략 ‘토미가 평생을 꿈꾸던 그것을 (구태여 말로 설명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혹은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이) 스스로 이루어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좀 이런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내가 왜 처음에 독수리 눈과 두뇌 이야기를 했을까요? 만약 당신에게 어떤 괴이한 기적이 일어나서 독수리의 눈과 독수리의 두뇌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독수리처럼 ‘보게’ (사실은 ‘독수리처럼 두뇌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독수리의 눈도 또 독수리의 두뇌도 없는데 말이예요? 오직 그 사람만이, 다만 그렇게 그저 체험하며 살 뿐이지 싶이요.

이야기가 조금 빗나가는데요, 니르바나가 어떤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것 혹은 어떤 상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머리 깍고 단 하루만이라도 승려로서 수행하는 것이 일반 대중으로 평생을 수행하는 것 보다 더 낫다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도 했어요. 종교를 업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며 밥 벌어 먹고 산다’는 이들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건방떠는 것과 돈벌이 하는 것’이예요. 왜냐하면 이 두가지 만큼, 가르치려는 자가 가르칠 자격이 없는 넘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것은 없다고 나는 확신하거든요.

우리는 이 정도만 니르바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지 싶어요. 우주 끝에는 뭐가 있나요? 니르바나 다음에는 어떤 상태가 있나요? 이런 질문들에는 붓다께서 결코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또한 니르바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자주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하지 않으셨고, 단지 몇 차례 간접적인 비유를 들거나, 혹은 이러저러한 것은 니르바나가 아니다 이런식으로 말씀을 하신 경우는 있다고 하는군요. 참 그리고 붓다께서 ‘(수백명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니르바나를 reslise 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대요. 기분 좋지요 🙂

우리 모두 기억해요. 지금 우리에게는 니르바나가 흡사 독수리의 눈과 그 보는 능력처럼 다만 이야기 거리요 상상일 뿐이지만, 우리들 중에서 누군가는 언젠가 니르바나를 realise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예요.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의 학벌, 피부색, 성별 그리고 머리 카락의 길이는 결코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말이예요.

두카에서 벗어나는 8개의 훌륭한 길 – 네번째 이야기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방법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난번에 이야기 했지요.

‘지혜’ (머리로 하는 앎), ‘덕행’ (몸으로 하는 실천) 그리고 ‘집중’ (마음으로 하는 수행) 이렇게 3개의 그룹으로 나누며, ‘머리’ ‘몸’ 그리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고’ ‘실천하며’ ‘수행하라’고 붓다께서 가르치셨어요.

맨 아래에, 이렇게 나뉘어진 3개의 그룹이 적혀 있지요? 이미 세가지 정도는 이야기 나누었는데, 나머지는 (특히 ‘덕행’에 관련된 것들은) 특별한 설명이 따로 필요가 없을 듯 해요. 어쩌면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집중’에 관계된 3가지 길은 조금 더 이야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더 읽고 배워서 다시 이야기해요.

이렇게 수행하여 얻고자 하고 또 얻을수 있는 결과가 ‘니르바나’입니다. 영어로 Nirvana라고 쓰며, 팔리어로는 nibbana 혹은 nibbāna로, 그리고 한자로는 열반(涅槃)으로 씁니다. 붓다께서는 니르바나를 ‘불이 꺼진 상태’ 그리고 ‘목마름이 사라진 상태’라고도 표현하셨어요. 이렇게 ‘마음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경지’를 인간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계셔요. 열반은 나이 많은 스님이 죽어서 드시는 (가시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대와 나 우리 누구나,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따라서 노력하면, 살아 있을때, 각자의 능력과 그릇에 따라서 증득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 혹은 상태가 ‘니르바나’입니다. 너무 좋지요 🙂 아닌가? 혹시 무었인가 엄청난(?) 한방을(?) 기대했다가 실망 했나요? 그 엄청난 한방이 그리고 또 그런 한방을 찾는 그 마음이 바로 ‘불 타는 상태’ 그리고 ‘목 마른 상태’라고 내가 말한다면, 다만 말장난이라고 하겠어요?

태권도가 9급도 있고 9단도 있지만 그 중간에 또 많은 급과 단이 있듯이, 그리고 또한 설령 5단이었었다고 하더라도 수련하지 않고 술퍼먹고 놀다가는 5급에게도 대련하면 얻어 터질 수가 있듯이, 니르바나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 그렇게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 좀 더 꺼진 사람 혹은 목마름이 좀 더 사라진 사람처럼 다양한 수준이 (차원이 혹은 레벨이) 있겠지요. 또 분명한 것은, 한번 획득하면 그 사람에게 철썩 들러 붙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붓다께서도 매일 몸소 실천 하셨듯이, 죽는날까지 수행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수행을 할 수 있는 그 ‘습관’을 참으로 기르게 되는 것이 또한 니르바나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Wisdom (Paññā) ‘The head’
Right Understanding
Right Aspiration

Morality (Sīla) ‘The body’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Concentration (Samādhi) ‘The min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Right Concent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