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2

영어에 ‘dignity’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으로는 ‘존엄’ 정도로 번역되는 듯 한데 좀 부족한 느낌이다. 어떤 사전에는 ‘위엄, 존엄, 관록, 품위, 체면, 위신’ 이렇게 잔뜩 대응되는 단어들을 늘어 놓았던데 어쩌면 이것을 전부 다 합쳐도 실제로 dignity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렵지 싶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왜 이런 dignity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을까? 아프리카 스와힐리어에는 에스키모의 언어에서만큼 ‘눈'(snow)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들에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일까.

오바마여사의 자서전 전반을 통하여 내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dignity라고 하겠기에 서론이 좀 길었다. 무슨 어떤 dignity인지를 오바마여사의 자서전을 통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무었이 dignity가 아닌지를 오바마 대통령 부부를 이어 지금 그 크고 흰 집에 살고 있는 부부를 통해서 먼저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새로 영부인이 된 그 여자는 일찍부터 빼어난 몸을 밑천으로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아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돈이나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 즐기며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 소위 말해 궁합이 잘 맞는 부부라고나 할까. 이 여자가,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싼 옷을 입고, 한국여자가 신으면 키가 졸지에 2배로 커질 하이힐을 신고, 머리에는 FLOTUS (미국영부인) 라고 크게 쓰인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그 모습에 dignity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큰 집에 들어가기 이전에, 무었을 위해 그리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 왔고, 어떤 비젼과 희망을 지금 POTUS (미국대통령)가 된 배우자와 나누며 함께 이루려고 하는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 속에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들의 삶 속에 dignity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이런 사진들이 하이라이트인 삶을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고 있을때, 오바마 여사는 시카고 외곽 흙수저 가정에서, 오직 부모의 헌신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고의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5대 로펌에서 그리고 시카고의 사회단체들과 시립병원등에서 일했었다. 한 인간이, 과거 한때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가지고 마치 인간은 결코 변치 않는 존재인양 폄하하거나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한쪽 길을 오래 걷게 되면 그 길과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좀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똥물속에 잠수를 너무 오래하고 나면 그 물이 장차 샘물로 바뀌고 나서도 이미 대가리 속에 든 똥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

오바마 여사는 그녀의 자서전, 지난 2주 동안에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한 (발매 첫 주에만 140만귄이 팔렸다고 한다) 그 책을 통하여, 미국영부인을 포함한 이 세상 누구에게도 dignity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개인적이고 은밀하며 어쩌면 치부로도 보일 수 있는 내면의 갈등과 인간적인 괴로움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과정등을 가감없이 솔찍하게 말하였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 놓듯이. 이것이 dignity요, 오직 평생을 통하여 진실하게 dignity가 있는 삶을 살아 왔던 그녀이기에 또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살’ (Bodhisattva)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을 터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이 시대를 사는 보살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녀의 dignity로써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FLOTUS로서 지혜와 용기 그리고 힘과 능력으로 미국을, 어쩌면 세상을 바꾼 그 큰 업적들 때문이기도 하다.

내 카르마를 따라 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시대의 보살은, 수 백년 전 혹은 수 천년 전 사람들이 그 당시의 지적 수준과 세계관으로 붓다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님긴 책들을 평생 붙들고 씨름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이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지 싶다. 바로 그녀처럼, 바로 이 시대 이 현실속에서, 지금 닥친 난관과 좌절을 극복하며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찾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 있지 않을까? 올해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과학자 혼조 다스쿠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네이쳐나 사이언스같은 세계적인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의 90%는 10년만 지나도 거짓말로 밝혀진다’면서 자신은, 기존의 이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연구를 계속하기 보다는 일일이 스스로 확인하여 납득할 수 있을 때에만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하물며 현대 인터넷 시대의 첨단 과학 이론들이 이지경인데, 천 년 혹은 이천 년 전 옛날 사람들이 그 당시 수준으로 써서 남긴 이론들은? 손기정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이 위대한 것은 그때 그 당시 최고의 기록으로 올림픽을 제패했었기 때문이지, 그분의 2시간 29분이라는 올림픽 기록이 절대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기록으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아마츄어 마라토너들은 지금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당시 그 상황에서 훌륭하셨다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이고 변치 않는 기록을 (진리를) 남기신 것을 액면 그대로 대대손손 기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미국인들에게 그녀는 ‘유인원’ ‘늘 성난 뇬’ ‘엉덩이가 산만한 뇬’뿐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그런 모욕과 좌절 그리고 차별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사는 소수들을 위하여 (여자라서, 백인이 아니라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태어난 곳이 후져서, 부모가 흙수저라서) 용기를 주고 빛을 밝히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와 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그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소수들을 대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그들이 아니면 자기 자신이 그 더럽고 힘든 일들을 직접해야 한다는 ‘게으름’, 그들과 나누면 내것이 줄어든다는 ‘욕심’, 우리 증조부가 탈출한 흑인노예 잡으러 다니던 보안관이었는데 내 딸이 어떻게 흑인과 (장차 영부인이 되건 말건 알게 뭐냐) 기숙사에서 한 방을 사용할 수가 있는가를 미려한 언어와 배우자의 힘으로 대학에 관철시켜 딸의 기숙사 방을 바꾸었던, 그 부모의 ‘무지와 증오’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 싶다.

자신이 살아온 그 작은 세계, 그 가정, 그 지역, 그 대학, 그 회사, 그 나라가 마치 우주의 유일한 중심이며, 원래부터 늘 그랬던 그 무었이라 믿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바마여사가 그녀의 자서전을 통하여 조용하고 품위있지만 힘있게 전달하려는 매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들 이전에 ‘눈'(snow)은 이미 늘 언제나 존재해 왔고, 세상에는 나의 이 작은 세계 (그리고 이 제한된 시간) 이외에도 수 없이 다양한 다른 세계들이 존재하며,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더 좋겠다’라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노력하자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직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의 발로 서고 괴로운 과정을 극복하여 성취를 이루어 본 그녀 같은 사람들만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위에, 타인들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을 함께 개선 하려는 사심없는 노력을 할 수 있지 싶다.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을 읽으며 인간의 참된 품위와 가치 그리고 dignity를 배우며 또 생각한다.

교통사고의 어떤 결말

양로원 앞에서 길을 건너던 할머니를 치여 숨지게 한 트럭 운전자가 5천불의 배상금을 물다.

트럭에 치여 숨진 그 할머니의 유가족들은 그 운전자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을 나서서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알프레드 프라이스’라는 그 트럭 운전자는, 어쨋던, 자기 트럭에 치인 마가렛 스튜어트 할머니가 뉴질랜드 해밀턴시의 한 도로에서 사망하던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트레일러가 달린 큰 트럭을 운전하여 배달장소에 도착한 후에 입구를 찾는 중에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91세의 스튜어트 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정신을 차려 횡단보도를 보았을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할머니는 트럭에 치인 후였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지난 목요일 해밀턴법원에서 과실치사에 대한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케시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에게, 할머니 유족들에게 5천불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언도 했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의 변호사가 제출한, 운전면허 유지를 위한 청원서를 받아 들여 허가 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에 일어났던 이 사고는 그 트럭 전방에 설치된 카메라에 녹화되었습니다. 그 영상에 따르면 프라이스씨는 시속 약 30킬로미터로 서행하고 있었으며, 또한 경찰도 밝히기를, 초록색 신호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트럭을 운전했었던 것으로 영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라이스씨와 그의 부인은, 지난 5월, 법무부가 마련한 만남의 장소에서,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의 가족들과 만났습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주저없이 돌아가신 분과 나의 자리를 바꾸겠다’고 하며 사죄하였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써 온 편지를 돌아가신 할머니의 조카딸이, 할머니의 오빠, 즉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읽어 주었습니다.

경찰은 운전면허취소를 하지 않겠다면 징역형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법원에 권고하였지만, 윌슨판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윌슨판사는, 운전자 프라이스씨의 무과실 운전경력, 사람들이 증언하는 그의 인간됨, 그가 처음부터 유죄를 주저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지난 5월에 있었던 스튜어트 할머니 유가족과의 만남의 결과를 모두 고려하였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는 면허정지 처벌을 받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사고로 크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가족은 물론 유가족까지도 당신을 돕고 싶어 합니다. 어쩔수 없는 사고였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사고는 그 62세의 트럭운전자에게 처음있는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 가족들과 프라이스씨 가족이 서로 알게 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족들은 법정에 나란히 앉아서 판사의 선고를 기다렸습니다. 유가족들은 (할머니의 오빠, 시누이 그리고 두 조카) 판사에게 운전자 프라이스씨가 운전면허를 정지 당하거나 감옥에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법정을 빠져 나오니, 프라이스씨가 밖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에서 가족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유가족들도 기꺼이 동의했다고 합니다.

‘우린 그를 용서했어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한 조카가 말합니다. ‘그가 잘못했던 것이 아니예요. 내가 바로 지금 차를 주차하다가도 이런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또 다른 조카의 말입니다. ‘할머니는 체구가 조그만, 우리에게는 소중한 분이었어요.’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는 미혼에 자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늙은 부친을 돌아가실 때까지 뒷바라지 했었던 딸이었다고 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을 가지고도, 그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했었고 또한 그들은, 돌아가신 할머니도 기꺼이 받아 들이실 훌륭한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그런식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물론 않으셨겠지만, 어쩌면 사랑하는 남은 가족들과 또한 다른 한 가족의 가장이기도 할 그 가해자가,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받아들이고 잘 마무리 하기를 바라셨으리라 짐작해요.

그 할머니의 바램을, 남은 사람들이 (피해자, 가해자, 그 가족들, 법원 그리고 경찰까지도) 훌륭한 방식으로 실행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었더라면 무슨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이미 지나버린 그리고 아무도 되돌릴 수 없는 그 과거의 일에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의 무덤을 찾을때마다 사람들은 원망과 비통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겠지요. 자주 찾기도 어려워질 것이고요. 그리고 감옥을 나온 그 운전자는 더 이상 직장을 구할 수도 없고, 어쩌면 흠뻑 뒤집어 썻던 그 차가운 원망과 비난의 소나기 속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뒤늦게 이혼 당하고 쓸쓸히 병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할머니가 기뻐했을까요?

그 벌금으로 유가족들은 아마도 할머니의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드렸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자주 찾아가서 꽃을 놓으며 할머니의 예뻣던 과거의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떠올리며 ‘아! 그 운전자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싶어요. 이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또 조금만 지나면 까맣게 잊혀질 이 사람들이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있지 싶어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우리가 익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어쩌면 지난 과거에 어떤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 않겠어요?

오늘 그대와 나는 어떤 선택의 상황에 놓여질까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 운전자가 그리고 유가족들이, 그 사고 전에, 아무렇게나 트럭을 몰며 또 서로 함부로 다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이었었다면, 그 할머니의 바램을, 듣지도 또 실행할 힘도 능력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오늘,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 선택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이미 쌓여 있는 과거의 카르마를 조금이라도 줄일 선택을 하세요. 그래야 가볍게 왔다가 가볍게 갈 수가 있을꺼예요. 길가에 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처럼…

쉬운 일, 어려운 일, 위험한 일 그리고

말을 잘하고 또 자기의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듣거나 읽고 그 내용에 공감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며 또 자주 그 내용과 저자를 동일시하여 ‘아!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가보다’ 부러운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와 가까운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자신의 작은 노력을 포장으로 부풀려 실제 보다 더 비싸게 팔며 세상을 쉽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것 같다. 특히 자기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 댓가를 노리며 사는 사람들 중에서. 여기에는 인쇄를 받는다는 직접적이고 금전적인 댓가도 있지만, 간접적인 댓가로 명예나 지위 혹은 영향력을 추구하는 자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자기 것이건 자기 것이 아니건, 어떤 생각을 말로 혹은 글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약간의 기술이 생기고 경험이 좀 쌓이면 식은죽 먹기보다 쉽다. 그러니 들은 말과 그 말을 한 사람, 읽은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을 섣불리 동일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설령 당신이 그 말과 글에 감동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동일시’에서 이자들이 바라는 ‘댓가’가 발생하는 것이다.

베를린필하모니 실황연주를 앞자리에 앉아서 한 번 들으려면 돈을 많이 줘야 하는 줄 누구나 안다. 하지만 거의 완벽하게 그 연주를 재생하고 또 내가 원하면 수십 수백번을 들을 수 있는 그 음반은 왜 상대적으로 훨씬 쌀까? 옛날에 아내가 돌봐주던 아기의 엄마가 (시향 첼로 연주자였다) 아내에게 첼로 연주를 코 앞에서 한 번 해 준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소리와 진동이 (연주자의 ‘기’?) 온 몸에 전달되는 것이 음반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고 하더라만… 혹은 미스월드하고 댄스파티 한 번 같이 가는 것과 그녀의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혼자서 춤추는 차이? 남자 버젼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요 투자가인 워렌 버펫과 점심 한끼 같이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 한 두시간 나누는데 수억을 낸다는데 (2018년 점심은 35억에 낙찰 되었다. 몰론 좋은 곳에 기부한다고 한다) 그 사람 사진을 잡지에서 찢어다가 밥상위에 붙여 놓고 식은밥 먹으면서 혼자 대화하는 수준?

한 인간이, 자기가 실제로 노력해서 성취하고 또한 그 결과를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삶에서 안팎으로 증명한 이야기만이, 베를린필하모니의 실황 연주나 워렌 버핏과의 대화처럼 ‘내게’ 참된 가치가 있는 말이고 글인 것이지, 그 이외는, 그녀의 사진을 붙여 놓고 혼자 추는 춤이나, 그의 사진을 잡지에서 찢어다가 밥상 머리에 놓고 혼자 먹는 밥 정도의 차원이고 그 정도의 가치밖에는 내게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쉬운 일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어려운 일 이야기를 해보자. 이미 짐작했겠지만, 자신이 말하고 쓴대로 ‘상당 기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어려운 일이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쓰고 나서도 그것을 실천하며 살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남들의 생각을 줏어다가 짜집기 하여 말하거나 쓰고 나서,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동네 언덕에도 잘 올라 가지 않는 사람이 당장 에베레스트산을 무산소 단독 등정한다는 말 만큼, 현실성이 없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 아닐까?

자 이제 위험한 일 이야기.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인 양 말하고 쓰는 행위’ 만큼 위험하고 유해한 일은 별로 없지 싶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 카르마가 반드시 따른다. 우리 모두 조심하자! 카르마는 종종 시차가 있다. 그래서 기억력이 부족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넘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 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은 실제로는 거의 없다. 좋지 않게 얻은 댓가에는 반드시 또 다른 댓가가 따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대와 내가 하면 좋을 일. 자신의 삶으로, 소리없이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으로, 보이지 않는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 바로 당신 자신은, 이 모든 것을 듣고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 그 실황연주에, 그 댄스파티에, 그 점심에 서로를 좀 끼워 주기도 하면서…

쉬운 일, 어려운 일, 위험한 일 그리고 하면 좋을 일이 있다.

To Sir, with Love

데이비드 비서로 부터 이메일 초대가 왔다. 그가 6월 중순에 은퇴한다는 것이다. 그 은퇴식에 초대를 받았다. 지난 한 두해 동안 서로 소식이 좀 뜸했었다. 다시 연락하여 은퇴식 전에 차 한잔 마실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25년전 그와 우리내외는, 비유하자면, 연세대 한국어학당의 젊은 주임교수와 방금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한국어에) 벙어리 젊은 학생부부로, 이곳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만났다. 나는 제버릇 개 못준다고, 게으르고 이상한 자존심만 있는 문제(?) 학생이었고, 아내는 당연히 모범생. 데이비드는 나를 포함한 우리들 학생 모두를, ‘영어를 애처럼 하는, 어른 모습을 한 이상한 애들’로서가 아니라, ‘영어는 지금 비록 잘 못하지만, 자존심 있고 교육받은 정상적인 성인들’로 대접해 주었다.

나같은 농땡이 학생도,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느낌을 잘 기억한다. 그리고 그러한 ‘존중과 받아들여 줌’이 나를 포함한 그 새로 이민 온 학생들에게 미쳤던 긍정적인 효과와, 그가 말없는 행동으로 우리에게 주었던 용기는, 데이비드의 상상을 초월한 영향을 많은 사람들에게 미쳤을 것이라, 내 경험을 통해서 감히 이야기 한다.

내가 빅토리아대학교 전산부로 옮겨 오고 나서 얼마 후, 사내 신문을 통하여 그가 교육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자신을 소개하며 연락을 하여 우리는 2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선생과 학생이 아닌 직원으로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나를 어렴풋이 기억한다고 하였다. 그의 핸섬했던 얼굴은 이십년 세월속에 주름이 잡혔지만 그의 멋있는 저음 목소리와, 100% 표준 영어 그리고 좋은 매너는 변치 않았다. 그는 우리의 만남을 참으로 기뻐하며 우리 내외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이후에 데이비드 내외가 나의 생일 파티에도 와서 우리가 함께 ‘익어감’을(?) 한잔 술을 나누며 축하 해주기도 하였다.

오늘 아침에는 그가 커피를 샀다. 한 잔의 커피를 마주하며 최근 남북한 정세, 은퇴계획, 결혼생활 그리고 자식 이야기등을 나누었다 – 부부농사는 약간 실패하여 새 파트너와 살지만, 자식농사는 성공하여 딸이 의사다. 아직 10명 가까운 박사과정 학생들이 학위를 마칠때까지 주임교수로서 그들을 돌봐야 하고 또 그간 집필했던 언어학 관련 서적을 마무리 하여 출판할 계획으로 당분간 바쁠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많은 친구들이 유럽에 있어, 두 차례 정도 유럽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코펜하겐에도 친구가 있어서, 내가 최근 다녀 온 스웨덴 이야기를 했더니, 어쩌면 스톡홀름에 잠시 갈 수도 있겠다고 하였다. 옛날에 핀란드를 두번 갔었는데 그렇게 평화롭고 좋더라고 하였다.

문득, 내가 최근 스톡홀름 KTH 대학교를 방문했을때 가졌던 느낌과 감정을 이야기 했더니, 100% 알아 듣고, 자기도 그런 경우가 50-60십대에 접어 들면서 있었다고 하면서 (내가 다 알아 듣지 못하는 유려한 영어로) 그 느낌을 공감해 주었다. 20-30대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줄 생각하면서 살았었는데, 막상 50-60대가 되고 나면 오직 하나의 길을 걸을 수 밖에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그런 감정, 약간의 슬픔 그리고 노스텔지어가 섞인, 그런 느낌이라고 그가 말했던 것 같다. 참, 우리말 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수준이 있겠지요? ‘그 대학에 갔더니 기분이 꿀꿀하더라’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고 ‘그 대학에 가서 과거를 회상하며 상념에 잠겼더니,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도 생각이 나고, 인생의 윤회가 새삼스럽더라’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겠지요? 누가 전자고 누가 후자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헤어지기 전에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은퇴 파티에서 못볼지도 모르니 지금 이 말을 해야겠어요. 당신은 선생으로 지난 수십 년간 단지 영어만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요. 25년 전 당신이 말없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우리 같이 하찮은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격려가, 우리 내외를 포함한 그 학생들 그 이민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었을지 당신은 잘 모를 것이예요. 하지만 나는 압니다. 기억하세요. 그대는 참 스승이었음을.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하였다. ‘참으로 감사하오.’

보살은 인간 세상 어디에나 있다.

룰루가 부르는 To Sir, with Love

보살 원장 vs 프로페셔널 원장

주말아침 가족과 함께 동네카페에 왔다. 커피를 주문해 놓고 창밖을 바라본다.
인도인 부부가 어린딸을 데리고 와서 바깥 테이블에 앉는다. 체육복 바지에 슬리퍼 질질. 의자를 이리저리 옮기고 휴지는 널부러지고 설탕하나 제대로 커피잔에 넣지 못하고 상위에 줄줄 흘리고 치울 줄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또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만드는 이 사회는 장차 어떤 모습일까…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다.

그 공립 유치원에도 최근 들어 인도나 중국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이민온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거의 오분의 일이나 된다고 한다. 자식은 부모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우며, 그 부모는 그들의 부모들과 그들이 이전에 속했던 그 사회의 수준을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나는 다양하고 오랜 경험을 통해 보아왔다. 도대체 몇 세대가 지나야 자연스러운 구성원이 될 수 있는지,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아니 그런 것이 도대체 무었을 의미하는지…

보기 드문 어쩌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동양인 원장이니, 말도 잘 안통하고 이 새로운 사회의 물정도 잘 모르는 그 부모들이 대부분 의지하고 싶어 한다. 어떤 부모들에게는 이 유치원을 선택했던 이유였기도 하고.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디 누군들 다르랴. 이런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면서도 그 동양인 원장은 자주 뒷골이 땡긴다고 했다. 대다수의 다른 학부모들 눈에는 이전에 본 적도 없고 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쩌면 원치도 않는 이질적인 장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금발의 이전 원장은 프로페셔널한 태도와 능력으로 수십 년간 너무도 잘 알려졌던 사람이었다. 내가 묻는다.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것 같은가? 프로페셔널하게 대해 주었을 것이다. 다른 부모들이나 원생들과 똑같이. 하지만 아마도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지는 못했을 것이고, 당신이 지금 창밖의 인도인 가족을 보며 느끼는 그런 감정을 숨기며 이런 부모들과 아이들을 대하지 않았을까 싶다… 십년 넘도록 같이 일했었으니 맞는 말일 것이다.

이 동양인 원장은 지금 이순간 그리고 오늘을 사는 보살이다. 물론 프로페셔널하다. 충분히 배웠고 모두들 인정하는 경험도 있다. 하지만 음식을 한 그릇 만들어 팔아도 마음이 들어가고 혼이 베어난다고 하는 세상인데, 이 소중한 어린 사람들을 가르쳐 어쩌면 평생을 좌우할 몸과 마음의 습관을 만들어 주는데 단지 프로페셔널 하다고 될까? 모든 관계는 서로의 기를 나누는 행위이며 이 어린 것들도 귀신처럼 알아챈다고 하더만…

이 동양인 원장이 그 어린것들을, 때로 측은한 마음을 숨기면서 스스럼없이 안아주고 또 지나가며 엉클어진 대가리라도 한번 더 만져 주고, 그 버벅거리는 영어하는 부모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조언 해주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며, 그 결과로 이 아이들은 내가 오늘 조롱하는 그런 짱께나 카레로만 남지 않을 어떤 기회를 장차 조금이라도 더 가지게 되리라. 보살행은 때로 은밀하며 자주 어려움을 부른다. 다른 길을 선택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며 또한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살은 선택하지 않는 듯 선택한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 이런 사람들을 *처럼 보며 피해 왔고 또 이런 사람들 때문에 뒷골 땡기는 것은 더욱 더 싫다. 이 보살원장은 말이 없고 나는 말이 많다. 중생은 선택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인가…

목련을 좋아 한다는 이 보살원장께, 그 모자라고 힘없고 후진 부모들을 대신하여 올리는 감사의 노래다. 소프라노 김주연님이 그 아가들과 함께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