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사트바 (보살) 이야기, 네번째

일전에 언급했던 그 암벽등반 도큐멘터리 Dawn Wall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한다. 당신이 직접 보는 즐거움을 빼았지 않을 만큼만 이야기 하겠다. 감동적인 장면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이 장면을 선택하지 싶다.

그 암벽 코스 중간쯤에, 백미터 정도의 거리를 옆으로 횡단해야하는 구간이 있었다. 그야말로 손톱도 들어갈 곳이 거의 없는, 흡사 맨손으로 수직 거울을 횡단하는 그런 구간이다. 연습때 수백번 시도했었지만 단 한차례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먼저 주인공 토미가 수차례의 시도 끝에 (한차례의 시도가 몹시 힘이 드니, 하루에 한 두번 정도 시도하고 또 중간에 하루 이틀씩 쉬기도 하면서 시도한다) 그 구간을 기적적으로 통과 하였다. 암벽들은 그 전체 혹은 부분들이 (Dawn Wall처럼 암벽이 엄청나게 큰 경우에는 수십개의 구간들 하나 하나가) 어떤 난이도로 표시 되는데, 내 기억에 바로 이 횡단 구간이 세상에 알려진 암벽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였다. 이제 토미의 지원을 받으며 케빈이 그 구간을 통과할 차례가 되었다. 일주일 이상을 머물며 수십회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손가락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미 암벽에 올라 온지 2주가 넘었고,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토미도 남은 구간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고 있다.

토미는 이제 혼자 올라가야만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보았던 케빈은, 함께 그토록 꿈꾸었던 정상 등반의 영광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줄 이제 깨달았다.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안다. 토미는 충분히 기다려 주었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케빈에게 해주었었다. 하지만 케빈은 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암벽 구간을 성공적으로 돌파하지 못했다.

이제 토미가 케빈의 지원을 받으며 홀로 암벽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준비했고 기다렸던 등반인가. 홀로 오른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고 또 결코 여기서 그만 둘 수도 없다. 토미가 몇개의 어려운 구간을 올라 이 거대한 암벽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는, 몸을 누일수 있는 작은 공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잠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거의 손아귀에 닿을듯 말듯 다가온, 평생을 꿈꾸던, 그 성취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쏟아 부었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땀과 희생을 기억하였다. 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또 원했던 순간이었던가…

그런데 벌떡 일어난 토미가 위로 계속 올라가지 않고 반대로 내려간다. 그리고 케빈에게 말한다. ‘친구여 그대를 남겨두고 나 홀로 갈 수가 없네. 그곳으로 함께 되돌아 가서, 자네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게나.’ 이게 무슨 의미인지 그 도큐멘터리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 작은 공간에 누워서 곧 다가올 엄청난 성공을 상상하던 토미는 그 순간 케빈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다. 내가 이런데 그는 또 얼마나 간절히 원할까… 그런 마음을 알아주고 또 그런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성공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토미는 알았고 또 실천한 것이다. 보살행을 할려면 (세상을) 알아야 하고 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않은가?

토미가 하는 말이 무었을 의미인지 케빈은 잘 안다. 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자기가 다시 몇차례 실패하면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언제 또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미 투자했던 시간, 돈, 희생이 너무나도 컷기에. 케빈의 마음을 편히 해주고 오로지 암벽 횡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토미는 그동안 미디어들과 정기적으로 통화를 했던 휴대전화를 ‘실수로’ 암벽 아래에 떨어트렸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는 자네와 함께 이곳에 몇날 몇주를 머물든지 상관이 없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였다. 여때까지는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였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저 아래에서 세상이 뭐라든, 이곳에서는 오직 두사람 뿐인 것이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파트너 두사람 뿐. 케빈은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재시도한다. 그리고 결국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그 횡단 코스를 성공적으로 돌파한다. 아! 감동이다. 두 위대한 인간이 만들어낸 인생 드라마…

하지만 산넘어 산이다. 정상을 동반 등정하기 위해서 케빈은, 토미가 이미 도달한 그 높이까지 최대한 빨리 (당연히) 자력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시간을 더 끌면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둘다 지쳐 쓰러진다. 이미 지쳐있다. 토미가 암벽등반가로서는 극히 드물게, 상당한 거리를 아래로 내려와 우회 통과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어려운 구간에 이제 케빈이 도달하였다. 토미와 동일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시간도 없고 또 암벽을 자유등반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기보다도 더 어렵다. 이 구간은 중간에 실제로 잡을 것이 전혀 없어서, 2-3미터를 점프해서 쥐꼬리만한 바위틈을 손가락 한두개로 움켜 쥐어야 하는 곳이다. 바로 이 점프때문에 토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우회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작은 바위타기에 능한 케빈은 점프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은 없고 무조건 점프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 기적과 같은 점프를, 토미도 하지 못했던 그 점프를, 케빈은 해낸다. 이런 드라마를 거치며 또 그런 희노애락속에서 울고 웃으며, 두 사람은 결국 정상에 선다. 이래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체력이 강해서 또 기술이 좋아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결정을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내리며 또 서로를 믿고 도왔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이 위대하고 또 그들의 성공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새들은 그곳을 그저 날아서 올라갈테고 어쩌면 훈련된 원숭이나 다른 동물들도 그곳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오늘 ‘보살행’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이것은 오직 인간들만이 가능하며, 또 토미와 케빈뿐만 아니라 우리도 자신의 삶속에서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계적인 암벽등반가가 아니어도 된다. 인터뷰도 없고 또 상금도 기네스기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룬 이것을 당신과 나도 이룰 수 있다. 그대와 나도,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보살’이 될 수 있다 🙂

보디사트바 (보살) 이야기, 세번째

나는 전에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아는 스웨덴의 단면들을 가끔 잘난체 이야기 하곤 했었다. 그중에는, 찬반이 극명히 엇갈리는 이민 정책, 너무 집중된 이민자 집단 거주지가 게토화 (getto) 된 것, 주민들이 너무 난폭하고 위험해서 경찰조차 들어가지 못한다는 수십 군데의 ‘No go zone’ (사실이 아닌것,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다양한 경로를 거쳐 배우고 깨닫게 되면서, 이러했던 나의 지난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한국에 그런 이슈들이 없고 그러한 많은 토론과 싸움이 없는 것은, 한국에 이런 문제 자체가 없기 때문이고, 또 한국에 이런 문제 자체가 없는 이유는, 애초에 난민을 그런 규모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흡사 한국이 스웨덴보다 더 큰 능력으로 그런 상황을 더 잘 매니지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 하는 사람들도 있듯이, 나도 어쩌면 ‘넌즈시 내려다 보는 태도’로 이 먼나라의 보살들을 주제 넘게 ‘아는 척’ 이야기 하여 왔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스웨덴에 온 피난민들을 (망명자들) 통해서 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어떤 병이 있다. Resignation Syndrome 이라고 한다. 5-12세 내외의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예를들어 자국에서 벌어진 전쟁, 피란민 수용소의 고초, 제3국으로의 탈출등) 스웨덴에 왔지만, 영구정착이 허용되는 난민심사 과정이 1-2년 걸리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되지 않으며 어쩌면 추방되어 자국으로 되돌아 가야만 될지도 모르는 상황등, 그들이 부모들과 함께 겪는 그 힘든 과정속에서 (비록 부모들이 그 사실을 일일이 말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느끼고 또 깨닫게 되는 어떤 ‘에너지 혹은 기운’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점점 식음을 전폐하고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단절시키다가 결국은 의식불명의 완전 식물인간이 되는 신종병이라고 최근에 밝혀졌다. 200-300명 정도의 어린이들에게 스웨덴에서만 발병한 것이 확인 되었고, 최근에는 호주의 피난민격리시설에서도 발병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에게는, 스웨덴이나 호주나, 그저 이런 병도 생기고 (피난민들을 많이 받아 들인다는 이야기 같으니까) 또 선망의 대상이 되는 선진국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 두나라가 이런 피난민이나 망명자들을 대접하는 실제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인 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언젠가 이웃 호주넘들의 실체를(?) 까발려 주마 🙂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 가자. 졸지에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그렇지 않아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돌보는 부모들에게, 스웨덴 극우주의자들은 일부러 꾸며서 하는 짓이니 아이들에게 약을 먹였느니 짖어 댔는데, 여러명의 대학병원 교수들이, 어떤 외부적인 영향이나 악의적인 개입이 없이 생긴 새로운 질병임을 밝혀 주었다. 다행히, 부모들에게 영구정착이 허락되고 또 직장을 가지게 되어 안정을 찾는 좋은 소식들이 생기고 나면, 몇 달 후에 거짓말처럼 아이들이 깨어나서 정상으로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큐멘터리에 등장했던 대여섯살 된 여자아기도, 자신이 6개월 이상 식물인간이었던 것을 전혀 기억 못하지만, 멀쩡하게 깨어나 자전거를 타고 랄랄라 돌아 다니는 것을 나도 보았다 (그 아기가 식물인간 시절에 의사들과 부모들이 어떻게 했었던가도 도큐멘터리에서 물론 보았고).

지금 눈에 안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이것 무시하고 살면 안 되지 싶다. ‘잘’ 삽시다들.

보디사트바 (보살) 이야기, 두번째

러시아가 강대국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 중국이 강대국임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강대국인 러시아나 중국을 아무도 선진국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왜 그럴까?

그 나라 사람들도 우리가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쓰고 인터넷하고 다한다. 중국도 해외 원조 엄청나게 많이 한다. 아프리카등 후진국에 중점적으로.

같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고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듯이, 같은 원조를 베푼다고 같은 수준의 나라들이 아니다. 보살 대인배와 무식 찌질이를 구분하는 차이는, 같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같은 인터넷을 통하여, 무었을 보고 배우고 ‘하는가’는 것이겠지. 골프채가 골퍼를 구분짓는 것이 아니고, 그 골프채로 골퍼가 무었을 어떻게 ‘하는가’로 구분되어 지겠지. 두 개의 상반된 것들을 동시에 쫓을 수는 없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왕서방이 베푸는 원조는, 스웨덴 사람들이 아프카니탄이나 시리아 난민들을 다수 받아 들여 온갖 괴로움과 문제를 겪으면서도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넘들, 그리고 이런 배은망덕한 넘들을 당장 쫓아 내자는 주인들 등등) 그 정책을 쉽게 바꾸지 않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왕서방은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국제 사회에서 입지를 굳이려는 (표를 사려는)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것 흡사 보살행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반대 되는 행위이다. 굳이 악행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행위 뒤에는 반드시 karma rebirth가 따른다. 뿌린데로 거두게 된다. 돈을 거두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돈 뒤에 감추었던 ‘의식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했던 자기 행동’의 열매를. 왕서방들 뿐만 아니라, 이런 짓하는 김서방 박서방도 예외없다고 붓다께서 가르치셨다.

스웨덴 사람들이 그 난민들 받아들이고 도와주어서 무었을 얻어오리까? 지난해 스웨덴 총선때 극우당이 (그 야만하고 배은망덕한 욘넘들을 당장 쫓아 내자는 주인들의 모임) 상당한 약진을 했다. 물론 그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한 당들도 더 많은 의석을 차지 했다. 중도파들이 주로 의석을 잃은 것 같고. 그 극우당에 투표했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스웨덴 사람들이었던가 인터넷에 상세한 자료가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최신 스마트폰 고가 골프채를 ‘주로’ 쫓으며 사는 ‘가난한’ (모자라는=부족한) 사람들이더라.

보살이 되려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하고 세상을 잘 사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에게도 단체에도 나라에도 모두 적용 된다.

보디사트바 (보살) 이야기, 첫번째

‘보살’이란 말이나 표현 들어 보았겠지?

보통 누구를 보살이라고 부를때, 성격 좋은 사람 혹은 대인배 이런 의미로 쓰일때가 많지 싶다. 그런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은 무었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함께 하자. 같이 가자’ 아닐까? ‘함께 하자. 같이 가자’ 할려면, 일단 자신과 상대를 알아야 하고 또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도 알아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이래도 좋고 저래도 그만인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보살이 되려면, 세상을 알아야 하고 또 세상을 사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 속담에 ‘물에 빠진 넘을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누가 내게, 내가 생각하는 보살은 무었인지 한마디로 정의 내려 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지 싶다. ‘상대가 그럴 넘인 줄 알면서도 내가 능력이 된다면 건져 주고, 또 보따리 내놓으라는 소리를 막상 듣게 되어도,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형편대로 몇푼 쥐어 주고선 조용히 내 갈길을 가는 사람.’

가수 하춘화씨 알지? 데뷔하신지 60년 가까이 되는 분인데, 연세가 이제 예순 조금 넘었다면 놀라겠지. 6살때 데뷔 하던 사진 참 예쁘네요 🙂 이분 알려진 보살이시다. 한참 인기 있던 시절, 무명이었던 못생긴 코메디언 한 사람을 우연히 발견해서는 (아마도 측은한 마음에) 자기 공연의 사회를 오래 고집 하였단다. 하춘화선생이, 1977년 이리시에서 공연을 하고 있던 그날 그때, 마침 한국화약에서 출고한 화약을 수십톤 적재한 열차가 이리역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수십명이 사망하는, 대지진에 버금가는 큰사고가 있었다. 공연장이 이리역에서 가까웠던지라, 극장이 무너지고 아비규환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와중에 하춘화선생도 무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는데, 그 못생긴 무명 코메디언이, 추락하는 건물 잔해에 자기 머리가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으면서도 하춘화박사를 (그 사건 이후에, 한국 가수 역사상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밖으로 업고 뛰어 나와 목숨을 구해 주었단다. 이 분은 ‘못생겨서 죄송하다’던 이주일씨. 아름다운 보살 이야기.

지난 몇 년 동안 유치원에 오는 아이들 중에서, 특별한 지도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의 (special needs children)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그들이 보이는 장애 혹은 문제의 (언어장애, 정서장애, 사회성장애) 강도 또한 이전보다 더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아내가 자주 말하였다. Me me me 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자라 부모가 되니 me me me x2 아이들이 생산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알코올이나 마약을 남용하는 부모들이 점점 늘어나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한다. 최근에, 이런 아이들 중에서 곧 초등학교로 옮겨갈 어떤 아이의 엄마와 미팅을 하면서, 그 아이의 문제를 설명하고 더 늦기 전에 문교부에서 지원하는 특수교육선생님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을 권고 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부모의 동의가 없이는 그 절차를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 부모가 지금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과거에 초래했던 어떤 문제가 (결손가정, 술 마약 중독, 가정폭력등) 아이들에게 이러한 장애를 초래했을 것이므로, 그 부모들이 이런 권고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좋게 따르는 경우는 드물고, ‘집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벽한 우리 아이가, 유치원에만 오면 그런 문제 언행을 하는 것 같으니, 우리 아이에게 문제가 있기 보다는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의 영향이거나 혹은 선생님들이 교육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혹은 알면서도 자신의 치부와 문제를 (간접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또 책임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이 아이의 엄마도, 어떤 문제로 인하여, 그녀의 엄마집에 얹혀 살면서 이 아이를 기른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서는, 스무살 넘은 성인 자식이 부모의 집에 얹혀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런 경우에는 실제로 그 성인 자식이 어떤 문제를 가진 경우가 많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지 않는 짓을 오래 할때는 어떤 감추어진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미팅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아이 엄마가 자기의 엄마와 (아이의 외할머니) 함께 유치원을 갑자기 찾아 왔다고 한다. 아내가 마침 밖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순번이라 (이곳에서는 원장도 필드에서 뛴다) 좋게 이유를 설명하고 한쪽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하던지 아니면 이 시간이 마치기를 좀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아이의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지금 당장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 하자고 강경하게 나오더란다. 다른 선생님들이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채고 교대를 해주어, 사무실에 그 엄마와 외할머니 그리고 원장인 아내가 함께 들어가 앉았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그 아이 엄마가 집에 가서 자기의 엄마에게 ‘원장이 자기와 아이를 차별하고 나쁘게 대한다’고 했었던 것 같았다.

전직 교사 출신이라는 그 외할머니는 심하게 아내에게 따지며 언쟁을 시작하였다. 경험이 있는 아내는 침착하게 응대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었던 것은 사과를 하면서도,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선생님으로서 해야 할 말을 양심과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고 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 그 외할머니되는 사람이 아내에게 슬그머니 윙크를 하길래 아내는 내심 놀라서 ‘뭐냐 이 할머니 지금?’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미팅이 끝날 무렵 아이를 데리러 엄마가 사무실을 잠시 나갔을때, 그 외할머니라는 사람이 아내에게 갑자기 ‘Thank you’ 라고 하더란다. 아내 입장에서는 미팅이 잘 마무리 되어 다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행동들이 놀랍기도 하고 또 그 고맙다는 말의 복잡 미묘한 의미를 짐작하게 되니 마음이 착찹하고 기운이 쑤욱 빠지더라고, 저녁을 먹으며 내게 토로 하더라. 내가 조용히 듣고 나서 말했다. ‘당신이 그 시간에 겪었던 마음의 고초와 인간적인 괴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할 말을 했던 것, 바로 그것이 선생으로서 당신이 그 아이와 가족을 위해 베푸는 보살행이 아니겠어요?’

스웨덴이란 나라 알지? 가서 살고 싶나? 왜? 내 경험과 짐작으로는, 헬조선이라고 만약에 그곳으로 뛰쳐 나간다고 해도, 십중팔구는 금새 헬헬헬 하면서 달달달 떨면서 집으로 되돌아 오지 싶은데 🙂

혹시 이 나라가, 전 세계에서 인구대비 피난민을 (혹은 망명자를) 가장 많이 받아 들이는 나라인 줄은 아나? 그런 것 생각해 본 적도 또 알고 싶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슈에 대한 나름대로의 강한 시각은 있나? 얼마전에 무슬램 피난민들이 제주도에 몇 백명인가 들어 왔는데, 혹시 난민 신청을 해서 눌러 앉게 되면 얼마나 문제가 많을까 사람들이 벌떼처럼 웽웽 거렸다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짐작으로는 아마 몇 십명 정도가 난민으로 나중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싶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3년, 한국이 550명의 난민을 받아들여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했을때, 스웨덴은 11만4천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7년의 경우, 한국이 2,200명 난민을 받아 들였는데 (무려 4배나 늘었네, 참 잘했어요), 스웨덴은 24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인구비율을 따져 계산하자면 (스웨덴 인구 900만), 한국이 2017년에 약 12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여,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켜주고 또 엄청난 수의 난민에게 영구 정착을 허용했던 것과 동일하다. 한국 몇 명? 그리고 제주도에 잠시 내렸다고 그 난리를?

보디사트바 (보살) 라는 개념이 붓다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은 아니다. 후세에 소위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좋지 않나? ‘함께 하자. 같이 가자.’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에 아마 한국이 세계 최대의 대승불교국가가 되었지 싶은데… 아닌가 스웨덴인가 🙂

보살, 그저 그렇게 왕서방이 했던 대로 큰소리로 떠들기만 한다고 되는 것인가? 세상을 알아야 하고 또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버디 오선이 그리고 머시쉽

개 좋아하세요? 사진속의 개 두마리가 닮았지요? 레브레도라는 종으로, 개들 중에서 영특하기도 하고 또 성격도 좋아서, 세계적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하네요.

뼈다귀를 옆에 두고 앉아 있는 개가 ‘버디’인데, 우리 아이가 어릴때 와서 오래 함께 지내다가 작년에 뽕~ 지구를 떠났고, 등에 가방을 매고 있는 개가 ‘오선이’인데, 이 신문 기사대로 어떤 미친넘이 납치하여 개소주로 만들어 먹고는, 지금 재판장에 끌려 다니며 곤욕을 치르고 있는 그런 상황이 되겠습니다.

죽은 개들이지만, 난 이 사진들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먼저 나와요. 귀엽기도 하고 또 지난 시절 기억이 나서 그렇겠지요.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이해가 될 듯… 오선이 개주인처럼, 개를 가족의 일부로 여기고 흡사 자식처럼 키우는 사람이 한국에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개를 무슨 아이니 하면서 극성을 떠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개가 개답게 살도록 사회적인 장치도 있고 또 사람들도 대부분 노력하지요.

‘머시쉽’ (Mercy Ships) 혹시 들어 보셨나요? 이전에도 보았었지만, 근래에 BBC도큐멘터리로 아프리카 머시쉽을 방영한 것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는 이곳 사람들은, 작고 외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원봉사자로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비로 모든 여행 및 승선경비 지불해야 함. 기간에 따라서 수백에서 수천만원) 이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한다고 합니다. 들어보면 정말 멋지고 또 가슴뭉클한 이야기들이 많아요.

짧은 비데오를 첨부했는데 혹시 영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우리가 어릴때는 종기가 흔하더니, 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이렇게 혹이 많이 나네요. 다 가난의 소치겠지요. 그 혹도 가난도 본인들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이렇게 훌륭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하건만, 스나미처럼 몰려드는 환자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나쁘고 독한 질병들에 비하면, 이 배에서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요 바다물을 양동이로 퍼올리는 모습이라는 것을 굳이 그 긴 줄, 아픈 사람들이 밤잠 자지 않고 먼길을 와서 마지막 희망으로 기다리건만 대부분은 돌아서야 하는, 그 긴 줄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알 수가 있겠지요. 한 의사가 말하고 있군요. ‘우리도 새발의 피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번에 한 사람씩 최선을 다한다.’ 이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엑스레이 기사들도 선장도 갑판원들도 또 전산지원자들도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인 줄 알지만, 나는 이들이 훌륭한 보살이라고도 표현하고 싶습니다. 보살은, 오늘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의심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덧없는 삶의 본질을 꽤뚫어 보기에, 최종적으로는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나는 무슨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이 사람들 인생을 바꿀 100불짜리 수술 보다는 내 입에 들어가는 100불짜리 고급 술이 더 중요한 사람이지만, 이런 것들을 보고 또 알고 나니 마음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나도 버디 개주인으로, 그 넘 눈 밑에 난 무슨 종양 수술을 하는데 상당한 돈을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스스럼 없이 썼었지만,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 평생을 이런 큰 혹이나 끔찍한 불구 또 여러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별 희망도 없이 온 가족이 힘들고 우울하게 살아야 하는 그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그 긴 줄을 보고 나니, 감히 ‘사람들’ 앞에서 ‘개’ 수술 이야기 따위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 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물론 개 수술도 하고 고급 술도 먹겠지요. 그리고 남의 개 훔쳐다가 개소주 해 먹은 넘을 잡아다 재판도… 하지만 사람의 도리가 무었인지, 나와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었인지, 내가 가진 것은 무었인지 또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었인지, 여러번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팔자를 고치고 싶으세요? 그 배에서 한 달만 자원봉사를… 들어 봤나요? 팔자 고치는 비법 중에 첫번째가 적선이라는 것을. 몸으로 때우건 돈으로 때우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