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

어렸을 적에, 동네 공터에서 공연도 하고 약도 파는 ‘차력 + 마술 + 약장수’들을 보았던 적이 한 두번 있었다. 신기한 마술이나 차력을 보여주고 나면 박카스병처럼 생긴 것에 넣은 ‘만병통치약’을 팔았었다. 지금이라면 아마 사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공연할 공터도 또 데리고 다닐 원숭이도 구하기 어렵고 🙂

어제 니르바나에 (열반)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니르바나를 경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리고 니르바나가 무슨 신비한 것도 또 보통 사람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대상도 아니라, 니르바나를 자주 오래 유지하며 사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었다.

왜 나는 니르바나가 그런 것인 줄 예전엔 몰랐을까? 나는 왜 그것이 어떤 특별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특수하고 비범한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가 있고 또 한 번 얻고 나면 그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며 살았을까? 물론 내가 무지하고 무식해서 그랬었겠지만, 그 이전에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이런 엉터리 약장수 짓을 오래 그리고 광범위하게 해 왔던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왜 사법고시만 통과하면 인간사의 극히 복잡하고 (또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그 자리에 앉아서 검은 옷 입고 전부 이해하고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 옷 입은 사람들도 왜 정말 그런듯 꾸며 댓을까? 왜 어떤 자격증만 따면 또 어떤 계급장만 붙이면, 차원이 다른 능력이 생기고, 또 한 번 그렇게 달라진 사람들은 영원히 그렇게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살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을까? 흡사 그때 그 박카스병에 든 가짜약을 팔던 사람들 그리고 앞다투어 샀던 사람들처럼…

가짜약을 샀던 그나마 ‘돈이 좀 있는’ 사람들 중에서, ‘머리도 좀 있어서’ 자신이 샀던 것이 가짜약이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엉터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가, 특히 가난한 곳에서는 (다시말해, 서로를 지나치게 비교하고 자기 성공과 행복의 척도를 다른 사람들로 부터 찾는 경향이 심한 곳에서는), ‘내가 샀던 약이 엉터리니 사지 마시오. 내가 좀 쪽팔리지만 알려 드려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보다는, 침묵을 지키거나 아니면 ‘너희들도 똑같이 고생 좀 해봐라. 내가 못한 것을 감히 너희들이 해?’ 혹은 질이 좀 나쁜 넘들인 경우에는 ‘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더 정교한 가짜를 만들어 나도 벌어야겠다’ 이런 태도들이 더 보편적이지 않을까?

연예인들이 결혼할때 가끔 기사에 등장하는 표현이 ‘일반인’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연예인들은 무슨 특수인? 특별인?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가난의 (부족함=모자람) 소치인 것이다. 만약 누가 나보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박카스병에 든 가짜약을 사고 있는가. 당신 바보 아닌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몹시 기분 상해하고 또 성을 낼테지만,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자. 정말 약장수에게 아직도 속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그리고 혹시 그 시스템을 힘을 합쳐 같이 유지하면서 생기는 이득을, 삶의 어떤 최고 최선의 목표인양, 그 넘들과 더불어 사수하고 견고히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 비슷하게 어울려 사는데 굳이 그게 아니라고 밝혀서 뭐하냐고? 인류가 ‘유인원’에서, 그대와 나도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문명인’이 되었던 이유가 가짜약을 사고 판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내 주변에 늘려 있는 가짜 ‘불교’ ‘철학’ 약장수들 중에서 내가 좀 씹고 싶은 넘들도 꽤 있는데, 지금은 정신이 너무 맑아서 안되겠고, 언젠가 술기운에 떠들때까지 좀 기다리셔야겠다 🙂

말은 험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말은 험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지금도 많이 본다. 나도 고국의 물과 공기를 마시며 살던 그 시절에는 어쩌면 그렇게 자주 말했었을 것이다.

선친과 함께 주말 명화극장을 (더빙한 미국영화들) 티비에서 보던 그 옛날, 어버지는 자주 말씀하셨다. ‘저 서양넘들은 매일 서로 보는데도 사랑한다고 시도때도 없이 말하고, 차문 열어주며 신사숙녀처럼 굴지만, 얼마 못가 이혼하는 이상한 넘들이다.’ 그때는 내눈에도 그렇게 보이더라.

하지만 그 서양넘들의 세상에서 자식 낳아 기르고 직장 다니며 사반세기 넘어 살고 보니 이제는 보이는 것이 다르더라.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으면 정말 좋은데, 굳이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지금 좋은 것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일이라는 개념없이 오늘을 아무렇게나 사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세상살이가 어제 오늘 내일 한결같이 살기 쉽지 않음을 공감하며,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못한다고 지나치게 나무래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감정에 솔찍하고 오늘 내 자신에 정직하며, 그것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나누며 또한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것 말은 쉽지, 가방끈 길고 돈 많고 힘 세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숙한 인간이어야만 가능한 어떤 특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모재벌 회장이 집으로 창녀들을 불러들인 것이 찍힌 영상이 퍼진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아내와 이런말을 서로 주고 받으며 공감했었다. ‘그 넘 차라리 정말 괜찮은 여자와 인간 대 인간으로 한번 화끈하게 사랑에 빠지지’ 그리고 나중에 들통나서 마누라에게 또 매스컴에서 깨질때, 마누라 앞에 무릎꿇고 ‘그때 나는 그녀와 사랑했었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 이렇게 할 수준이 되는 자가 등장 인물들 중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창녀들 신체검사는 용의주도하게 미리 했었을 것이다. 그것이 능력이고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사는데 어쩌겠나…

그리고 ‘지금 내 감정에 솔찍하고 오늘 내 자신에 정직하며, 그것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나누며 또한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는 데에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으로 그 마음을 표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입은 험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다. 성숙하고 품위 있는 마음에서는 험한 말과 함부로 하는 행동이 나오기 어렵다. 치약통이 찟어지면 ‘이미 들어 있던’ 내용물이 밖으로 삐져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