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에 관한 가르침 – 네번째

궁극적인 메타 수행은, 주로 자기 자신의 물리적 정신적 한계와 씨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때 마음도 또한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굳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사실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나, 자신 혹은 ego’가 무의식중에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속에 아무 생각없이 빠져서 저항하고 다투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그리고 또한 나쁘다 좋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대신에, 다만 그것이 존재함을 그리고 내가 현재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receive), ‘내가’ 이러니 저러니 따지며 ‘분별하는’ 그런 자기중심성(ego)에서 벗어나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괴롭히는 좋지 않고 괴로운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다른 다양한 수행의 방법들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러가지 상황이나 사람을 인정하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하노라면,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던 그런 상황들이나 사람들이 돌덩어리 같이 변치않는 그 무었이 아니라, 차차 모퉁이도 떨어져 나가고 조금씩 덜 딱딱한 것으로 변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상이 변화하면 당신 자신도 또한 동시에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요, 아상의(ego) 지배를 덜 받게 되는 것이요 또한 ‘나의 세상(대상)이 부드러워지면 나 또한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런 대상들은 불쾌하고 싫은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며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그들이라는 이원적이며 이분법적인 마음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대상이나 상대는 (세상만물과 같이) 변화하고 있었겠지만 지나간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놓지 않으려던 당신의 마음이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면도 있습니다. 만약 메타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열고 그 변화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대상과 더불어 당신 자신 또한 변화할 것입니다.

내가 영국에 있을때 가끔 북아일랜드에 가서 설법을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너무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 했었을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 메타의 실천을 권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다시 그곳을 찾았을때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듣게 되었고 그 이후에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싫어하던 그 사람이 결국은 회사를 옮겼다더군요. 하하하.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상대도 (상황도) 변한다는 것은 맞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오해나 섣부른 짐작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정확한 perception을 주고 그 결과로 실재하지 않은 환상을 오직 당신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풀리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녹듯 사라져버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에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실재하고 있었던가요? 열린 마음은 가벼운 마음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자기 스스로를, 어떤 이유로든지 좋게 대접하지 않고 또 자주 힐난해 왔다면, 이런 메타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자신을 잘 대해줘도 괜찮다. 힐난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차차 부드럽게 상대하다가 보면,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때 자기 스스로에게 ‘또 그러네 친구야’ 하면서 좀 웃으며 가볍게 대할 때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하거나 액면 그대로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함’ 혹은 ‘호의’라는 의미로 내가 사용하는 ‘friendliness’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친하고 호의적인 사람은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때, 따지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편이 되어 좋은 말을 해주며 힘을 주려고 할것입니다. 여태껏 메타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마음을 먹는 습관 그리고 생각을 하는 습관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메타를 실천하는 것도 또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에 생겨나는 불쾌감, 혐오감, 싫어하는 마음을 당신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면 당신 마음속에 다른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 여전히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메타를 실천한다면 점차 그 실체를 점점 명확히 보게 되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대상에게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강제하려고 시도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고 가까워지며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상대에게서도 또한 나 자신에게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와 마음챙김이 더불어 적용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네요.

다시말하지만 메타 수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입니다. 메타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눈은 멀며 몸은 굳어집니다.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며 보지 못하게 되며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내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의 well-being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메타를 통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순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나은 well-being의 추구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명상수행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 위에 명상을 덧붙여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과정을 통하여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여 더 잘 명상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바깥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먼저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보물을 찾아내서 활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차차 익숙해지면 이러한 메타 수행을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눈을 가리던 혼란함과 마음을 한계짓던 ego를 벗어나는 해방을 맛보고,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에 관한 티라다모 큰스님의 설법이었습니다. 끝.

메타에 관한 가르침 – 세번째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는 나쁘고 악한면들이 존재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고 또 정당하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열어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좁은 식견을 (perception)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수준에서 (realistic) 그것들과 좀 더 발전되고 기술적인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에 우리가 좁은 식견이었을때 깨닫지 못했던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흔히 성을 내고 혐오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스스로의 well-being을 헤칩니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잘 대해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메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런 설법을 듣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논리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 깊이 받아 들이고 스스로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도 메타 수행을 태국에서 처음할때 이런 과정을 시행착오를 통해서 경험하며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이상적으로 세상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메타를 설천하려고 했었는데 (예를 들어) 막상 더운지방에 많은 개미들이 내 몸에 마구 기어올라 올때, 머리로 생각하는 메타의 한계와 현실적인 실천의 차이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내가 영국의 사찰에 있을때 주변에 토끼가 많았는데 늘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고 가꾸는 꽃들을 먹어치우는 것 등을 싫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토끼는 그저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토끼로써 해야 할 것들을 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부터는 더 이상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는 것에 내 마음이 따라서 어지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메타는 자기자신의 well-being에서 (평온과 안정) 시작되고 또 그것으로 되돌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순환이 반복되면 점점 자신의 well-being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전파되고 전달되겠지요. 결국에는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상대에게도,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나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다는 상대가 (반대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이전에 했던 판단이나 느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은 결함이 없다고 흔히 생각하지 않나요? 그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됨.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두번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같이 화를 내면서 ‘저런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다 감옥에 쳐넣어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메타’는 훈련을 통해 증득되고 또 발전합니다. 이 과정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싫다 이런 것이 싫다’ 하는 생각을 반복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나’ ‘자신’이라는 의식을 점점 강화하는 가운데 나이가 들면 당연히 짜증 많이 내는 고약한 성격의 늙은이가 되겠지요.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메타’를 수행을 통해 개발하고 증득한다면, 자신과 관계 맺음 혹은 자신을 규정함에 있어서 큰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물론 쉽게 그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메타’를 어떻게 규정할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쪽으로 기울어 세상만사 모두가 오케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꼬치꼬지 따져며 아무것도 오케이가 아니라고 해서는 곤란하겠지요. 현실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들이 엄연히 섞여서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얼마나 기술적으로 그것들과 관계를 잘 맺는가 하는 것입니다. 뉴스를 듣고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소식에,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나쁘며 멍멍이 같은 일이라고 흥분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그런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광분을 하니 어떻게 심신에 병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응징이나 보복의 욕구 같은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기 보다는 용서나 연민의 감정을 앞세운다면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메타’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어떤 이상적이고 고귀한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이것은 틀리고 저것은 나쁘고 이것은 싫고 저것은 이래야하고 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어, 장차 더 높은 차원의 ‘메타’ 수행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인정하는 (receive everything) 단계입니다. 나는 인정한다 (receive) 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accept) 필요도 없고 또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세상의 모든들이 훌륭하며 사랑스러울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실제하는 나쁜면들과 악한면들을 (그 존재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렵고 힘들게 살게 되겠지요. 화를 내거나 반발하고 분개하며 점점 무의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됨.


최근에 쓴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두번째 이야기’ 이야기 말미에 몇장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는데요, 그중에서 ‘일본 대림사입구에 설치된, 안중근의사와 치바도이치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라고 씌어 있어요.’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었어요. 그 추모비에 치바도이치선생은 ‘정애의 지사’라고 씌어 있어요. 우리가 ‘애정’이라고 할때 사용하는 그 한자들이지 싶은데요, 여러가지 정황을 볼때 어쩌면 그 의미가 ‘메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언급하며 확대한 추모비 사진을 첨부합니다.

메타에 관한 가르침 – 첫번째

붓다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 ‘메타’에 관한 티라다모 큰스님의 설법입니다. 스님께서는 ‘friendliness’를 ‘메타’에 대응하는 말로 선택하셨네요.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스님의 설법을 블로그에 실을 예정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메타입니다. 우리 테라바다불교에서는 호흡을 이용한 명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명상의 주제입니다. 많이 알려져 있고 또 인기있기도 합니다. 메타는 호의적 혹은 우호적 정도의 의미인데 나는 friendliness라는 단어와 잘 대응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많은 곳에서는 loving kindness라고 영역해 왔습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곤란한 (고약한) 상대를 나쁘지 않게 좋게 대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을 사랑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메타명상은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고, 또 우리가 호흡명상을 통해서 지혜를 깨달을 수 있듯이, (이 메타명상도) 아주 높은 경지에 다다를 가능성이 큰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메타명상을 통하여 우리는 일반적인 (생활의) 지혜와 궁극적인 지혜를 (해탈=자유)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붓다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메타명상도 (이 명상으로 배우고 깨달은 바를)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체험으로 증득하여야 하는 것이지, 머리속의 어떤 훌륭한 상상이나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메타를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제대로 적용하는 것으로 수행이 시작됩니다. 성경에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는데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서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메타를 실천하는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피며 잘 지내는 경험이 쌓이게 되면,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좋은 경험을 하면서 잘 지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차차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하다못해 미물들도 자기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원하고 또 가까이 하려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심신이 편안하고 안정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서구사회에서는 이렇게 스스로의 편안함과 안정을 (well being) 추구하는 것을 좀 꺼려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과거 행적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에 따르는 죄책감등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그런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때때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well being은 우리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우리 몸이 편안하고 느긋하면 마음도 또한 안정되고 평화롭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몸이 괴로우면 마음도 또한 그런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몸을 (건강하고 활력적으로 유지하여) 편안하고 느긋하게 유지하는 것이, 삶의 전반에도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폭력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신이 편안하고 안정되지를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