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질 습관 그리고 운명

어떤 산부의과 의사의 말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직후에 의사들이 아기 입을 벌려 이물질을 제거하는 절차가 있는데 이때 어떤 아기는 입을 좀 눌러서 벌려도 그냥 아~ 쉽게 벌려주면서 멀뚱멀뚱한(?) 아기도 있고 또 어떤 아기는 자지러질듯이 울고불고 하는 아기도 있다고 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어떤 외부적인 영향도 없는데 이렇듯 반응이 다른 것을 보고서 그 의사는, 아마도 이것은 아기들이 부모들로부터 유전적으로 받아서 가지고 태어나는 어떤 기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했어요.

몇달 전에 유치원을 시작한 한국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가 했어요. 오랜 세월 유치원에 재직하면서 수천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아 왔지만 한국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라고 해요. 서로 말이 통한다는 잇점을 지혜롭게 이용하여 아내가 어떻게 이 아이의 유치원 생활과 적응 과정을 표내지 않고 잘 도와주는지 나는 전부터 들어와 알고 있어요. 그 부모는 어쩌면 ‘아! 한국인 원장이라 다행이다’ 그 이상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처음 겪어보는 일이잖아요. 이 아이는 공부를 많이하고 능력이 있는 부모가 이곳 회사에 파견을 오는 바람에 함께 와서 몇년을 지내게 되었다고 해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당연하겠지요) 3살이 조금 넘은 이 사내 아이는 처음에는 아침에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곤 했었지만, 지난 몇달간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이제는 울지도 않고 점점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과도 더 어울리며 잘 놀게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영어는 아직도 한마디도 못해요. 아니 ‘결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 유치원에는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 아이도 한명이 있다는데요, 이 두아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영어를 알아 듣긴 해도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들은 둘 다 매우 영특한 편이라고 해요. 그리고 뚜렷한 개성 혹은 자아가 있어 보인다고 하네요 (유치원 다른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이 아이들은 ‘잘 하지 못할까봐’ 혹은 어쩌면 ‘잘 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의식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생각한다고 해요. 타고난 기질일까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이런 특이한 상황에서 얻게 된 어떤 습관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기질이 이런 상황에서 그런 습관으로 드러난 것일까요?

중요하지 않아요. 이 아이들도… 언젠가 아내가 말해 주었던 그 수줍은 이나라 아이. 그렇게 좋아하는 소방차가 유치원에 왔는데도 너무 부끄럽고 무서워서 친구들처럼 차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먹였다던 그 아이. 아내가 제안을 하면서 약속을 했다고 해요. ‘네가 스스로 올라가면 나는 네 뒤에 꼭 서 있겠다’. 아이는 자신의 결정으로 올라갔고 참 기쁘고 좋아했다고 해요. 그 기뻐하는 아이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아이들의 습관을 바꾸어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돌려주는 아내의 직업이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때 유치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또 이런 프로페셔널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믿어요)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저를 길러주신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없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성인이 되고 나서 깨달은 자신의 기질 그리고 습관과의 힘겨루기가 만만치 않은 경우도 있어요.

다시 ‘결코 말하지 않는 그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아내와 다른 훌륭한 선생님들과 또 이곳의 좋은 교육 시스템의 도움으로 입을 열게 될꺼예요. 그리고 신나게 떠들고 싸우고 울고 불다가 만 5살이 되면,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씨앗처럼 자기의 인연을 따라서 멀리 떠나갈 꺼예요. 좀 웃기는 이야기는, 이렇게 떠나간 아이들이 장차 부모가 되어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이 유치원에 되돌아 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고 해요. 자기를 돌보아 주셨던, 자기의 모든 것을 보았던 그 선생님들이 아직 있어요 하하하 🙂

때대로 나는 아내에게 ‘당신은 제자없는 스승이다’ 이렇게 놀리는 말을 할때가 있는데요, 진심으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자들이 감사해 하고 또 가슴에 달아주는 카네이션도 물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아내의 손을 거쳐 지나간 아이들이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지혜와 사랑으로, 어쩌면 성인이 된 자신의 인생을 어둡게 하고 또 망칠지도 모를 습관들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세상에 나간다면, 이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베푸는 참으로 큰 적선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요. 이런 종류의 괴로움을 직면하여 발버둥을 쳐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공감하지 싶네요.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가격을 매기거나 사고 팔수가 없지 싶어요. 참으로 큰 적선은 준 사람도 모르고 받은 사람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고 작다’는 것도 없고 ‘주고 받았다’는 것도 없지만 그 실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나는 봅니다. 어쩌면 이미 성인이 된 인간들의 구원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닫고 의식하는 바탕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마치 어른이 되어 배우는 골프는, 어릴때 아무 생각없이 아빠 따라가서 놀면서 저절로 익힌 골프와는 그 과정도 차원도 다를수 밖에 없듯이 말이예요.

세살 아기들도 이렇게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아 (ego).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할 무거운 등짐 혹은 두꺼운 외투처럼,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고 또 내게 이익이 되라고 자연의 섭리로 주어졌지만, 마치 양날의 칼처럼, 이토록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조차도 짐과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 ‘나’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까? 붓다께서 해탈 열반을 만드셨나요?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마치 나이든 배뿔뚝이 중년에게 골프를 가르치듯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바로 이 자아가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단지 기질과 습관의 덩어리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자아를 만들고 또 강화하는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줄이고 또 지우면서 열반을 (니르바나) 향해 노력하며 살다가 가면 좋다 말씀하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소방차 위를 스스로의 결정으로 올랐던  그 아기는 장차 어른이 되면, 소방차를 아직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이고, 자신이 어릴때부터 존중 받았듯이 타인을 자연스레 존중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또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힘이 센 사람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요? 아니면 주변 사람들 모두 맹목적으로 쫓는 것들 중에서 더 비싸고 더 크고 더 멋져 보이는 것들을 획득하여, 이차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노병들의 군복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들처럼 ‘여기 봐요. 나 좀 봐요’ 하다가 나중에는 플라스틱 줄이나 주렁주렁 매달고선 졸지에 허무하게 떠나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나요? 어떤 어린 시절을 통해 어떤 몸과 마음의 습관을 길러 오늘을 살고 있나요?

부치지 않은 편지

링컨대통령의 부치지 않은 편지 이야기를 들어보셨어요? 미국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지휘를 맡았던 최고사령관이, 남군을 요절내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전쟁을 끝낼 절호의 기회를 수긍할만한 이유없이 미루고 또 이해할수 없는 이유로 회피하다가 그만 놓치고 난 이후에, 극도로 화가났던 링컨대통령께서 (자신의 지휘를 받던) 그 장군에게 쓴 편지인데요, 대통령께서 사망한 이후에 서재에서 부치지 않은채로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나도 읽어 보았어요. 영미문화권에서는 비록 상하관계가 명백한 경우라 하더라도 심한말로 나무래는 경우를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거의 보지 못했는데요, 상대방의 위치나 권위등을 존중해 주려는 배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욕이나 심한말의 인플레이션이 적은 곳에서는 조금만 억양이나 톤을 바꾸어 말해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되기 때문에 굳이 쌍욕이나 상대방을 모욕하는 나쁜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링컨대통령께서 쓰신 그 편지는 이런 문화적차이를 이해하고 읽기에도, 비록 자제하며 말하고는 있지만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드러내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해요. 대통령께서는 이 편지를 쓰기 전에도 쓸 때에도 그리고 쓰고 나서도 몹시 괴로워했을것임을 저는 짐작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서랍에 넣어 두고 일부러 부치치 않으신것 같다고 해요. 물론 역사속에서 그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 북군은 이미 무능한 사령관들을 수도 없이 교체하며 어려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사람도 이전 사령관들이 갔던 길을 따라 갔겠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북군이 승리했고 노예는 해방되었으며 링컨대통령은 미국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남을 훌륭한 위인으로 남게 되신것이지요.

그대도 쓰고 부치지 않은 편지들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링컨대통령처럼 종이에 잉크를 묻힌 펜으로 쓴 편지는 아니고, 비록 컴퓨터에 저장된 워드파일로된 편지들이지만 본질은 같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대통령께 배운 면도 있겠지만, 제 자신이 가끔씩 글로 저의 폭발하는 감정을 쓰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 제가 쓴 부치치 않은 편지들은, 어쩌면 처음부터 부칠 의사가 거의 없던 편지들로서 그 취지가 약간은 변색된 면이 있겠네요.

어쨋던 저는 그 편지들을 시간이 지난후에 다시 읽어봐요. 짧게는 몇주 길게는 몇달 혹은 몇년이 지나서 읽어보는 저의 부치지 않은 편지들은 제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부끄러움입니다. 놀라셨나요? 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장 많이 느꼈어요. 내가 그 당시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수준의 편지를 썼던가? 무었이 나로 하여금 지금 보기에는 내가 쓴 것이라고 차마 믿기 어려운 내용과 수준, 그리고 나아가 그 편지의 발단이 되었을 사건이나 상황을 극히 유치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러한 글들을 쓰게 만들었던가 자문하게 됩니다. 부치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만약 부쳤더라면 내쪽에서 문제를 훨씬 크게 확대하고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았을것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저는 제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내가 격정에 사로잡혀 있을때 얼마나 더 어리석게 되고 눈이 더 멀게 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의 횟수가 거듭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치지 않은 편지를 통한 저의 깨달음은 어쩌면 제 자신에게, 설령 제가 이런 상황속에 빠져 있을때라고 할지라도 바로 이런 기억을 불러와, 저로 하여금 이전에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했었을 그런 언행들에 커다란 의문을 던지며, 저의 잘못된 확신을 무너트리고 제 입을 다물게 하며 저의 사나운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싶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다른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고, 보통사람은 자기자신을 통해서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것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래도 보통사람들 끝에라도,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좀 끼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괴로운 그대, 오늘밤 부치지 않을 편지를 한번 써보시지 않으렵니까?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네번째

궁극적인 메타 수행은, 주로 자기 자신의 물리적 정신적 한계와 씨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때 마음도 또한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굳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사실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나, 자신 혹은 ego’가 무의식중에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속에 아무 생각없이 빠져서 저항하고 다투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그리고 또한 나쁘다 좋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대신에, 다만 그것이 존재함을 그리고 내가 현재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receive), ‘내가’ 이러니 저러니 따지며 ‘분별하는’ 그런 자기중심성(ego)에서 벗어나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괴롭히는 좋지 않고 괴로운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다른 다양한 수행의 방법들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러가지 상황이나 사람을 인정하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하노라면,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던 그런 상황들이나 사람들이 돌덩어리 같이 변치않는 그 무었이 아니라, 차차 모퉁이도 떨어져 나가고 조금씩 덜 딱딱한 것으로 변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상이 변화하면 당신 자신도 또한 동시에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요, 아상의(ego) 지배를 덜 받게 되는 것이요 또한 ‘나의 세상(대상)이 부드러워지면 나 또한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런 대상들은 불쾌하고 싫은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며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그들이라는 이원적이며 이분법적인 마음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대상이나 상대는 (세상만물과 같이) 변화하고 있었겠지만 지나간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놓지 않으려던 당신의 마음이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면도 있습니다. 만약 메타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열고 그 변화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대상과 더불어 당신 자신 또한 변화할 것입니다.

내가 영국에 있을때 가끔 북아일랜드에 가서 설법을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너무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 했었을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 메타의 실천을 권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다시 그곳을 찾았을때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듣게 되었고 그 이후에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싫어하던 그 사람이 결국은 회사를 옮겼다더군요. 하하하.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상대도 (상황도) 변한다는 것은 맞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오해나 섣부른 짐작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정확한 perception을 주고 그 결과로 실재하지 않은 환상을 오직 당신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풀리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녹듯 사라져버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에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실재하고 있었던가요? 열린 마음은 가벼운 마음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자기 스스로를, 어떤 이유로든지 좋게 대접하지 않고 또 자주 힐난해 왔다면, 이런 메타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자신을 잘 대해줘도 괜찮다. 힐난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차차 부드럽게 상대하다가 보면,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때 자기 스스로에게 ‘또 그러네 친구야’ 하면서 좀 웃으며 가볍게 대할 때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하거나 액면 그대로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함’ 혹은 ‘호의’라는 의미로 내가 사용하는 ‘friendliness’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친하고 호의적인 사람은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때, 따지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편이 되어 좋은 말을 해주며 힘을 주려고 할것입니다. 여태껏 메타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마음을 먹는 습관 그리고 생각을 하는 습관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메타를 실천하는 것도 또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에 생겨나는 불쾌감, 혐오감, 싫어하는 마음을 당신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면 당신 마음속에 다른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 여전히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메타를 실천한다면 점차 그 실체를 점점 명확히 보게 되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대상에게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강제하려고 시도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고 가까워지며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상대에게서도 또한 나 자신에게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와 마음챙김이 더불어 적용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네요.

다시말하지만 메타 수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입니다. 메타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눈은 멀며 몸은 굳어집니다.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며 보지 못하게 되며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내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의 well-being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메타를 통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순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나은 well-being의 추구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명상수행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 위에 명상을 덧붙여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과정을 통하여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여 더 잘 명상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바깥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먼저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보물을 찾아내서 활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차차 익숙해지면 이러한 메타 수행을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눈을 가리던 혼란함과 마음을 한계짓던 ego를 벗어나는 해방을 맛보고,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에 관한 티라다모 큰스님의 설법이었습니다. 끝.

메타에 관한 가르침 – 세번째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는 나쁘고 악한면들이 존재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고 또 정당하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열어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좁은 식견을 (perception)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수준에서 (realistic) 그것들과 좀 더 발전되고 기술적인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에 우리가 좁은 식견이었을때 깨닫지 못했던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흔히 성을 내고 혐오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스스로의 well-being을 헤칩니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잘 대해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메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런 설법을 듣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논리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 깊이 받아 들이고 스스로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도 메타 수행을 태국에서 처음할때 이런 과정을 시행착오를 통해서 경험하며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이상적으로 세상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메타를 설천하려고 했었는데 (예를 들어) 막상 더운지방에 많은 개미들이 내 몸에 마구 기어올라 올때, 머리로 생각하는 메타의 한계와 현실적인 실천의 차이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내가 영국의 사찰에 있을때 주변에 토끼가 많았는데 늘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고 가꾸는 꽃들을 먹어치우는 것 등을 싫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토끼는 그저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토끼로써 해야 할 것들을 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부터는 더 이상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는 것에 내 마음이 따라서 어지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메타는 자기자신의 well-being에서 (평온과 안정) 시작되고 또 그것으로 되돌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순환이 반복되면 점점 자신의 well-being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전파되고 전달되겠지요. 결국에는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상대에게도,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나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약 볼 수가 있다면, 아마 내가 이전에 (그 상대에게) 했었던 판단이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결함이 없다고 흔히 생각하지 않나요?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됨.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두번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같이 화를 내면서 ‘저런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다 감옥에 쳐넣어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메타’는 훈련을 통해 증득되고 또 발전합니다. 이 과정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싫다 이런 것이 싫다’ 하는 생각을 반복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나’ ‘자신’이라는 의식을 점점 강화하는 가운데 나이가 들면 당연히 짜증 많이 내는 고약한 성격의 늙은이가 되겠지요.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메타’를 수행을 통해 개발하고 증득한다면, 자신과 관계 맺음 혹은 자신을 규정함에 있어서 큰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물론 쉽게 그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메타’를 어떻게 규정할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쪽으로 기울어 세상만사 모두가 오케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꼬치꼬지 따져며 아무것도 오케이가 아니라고 해서는 곤란하겠지요. 현실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들이 엄연히 섞여서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얼마나 기술적으로 그것들과 관계를 잘 맺는가 하는 것입니다. 뉴스를 듣고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소식에,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나쁘며 멍멍이 같은 일이라고 흥분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그런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광분을 하니 어떻게 심신에 병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응징이나 보복의 욕구 같은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기 보다는 용서나 연민의 감정을 앞세운다면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메타’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어떤 이상적이고 고귀한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이것은 틀리고 저것은 나쁘고 이것은 싫고 저것은 이래야하고 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어, 장차 더 높은 차원의 ‘메타’ 수행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인정하는 (receive everything) 단계입니다. 나는 인정한다 (receive) 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accept) 필요도 없고 또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세상 모든것들이 훌륭하며 사랑스러울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실제하는 나쁜면들과 악한면들을 (그 존재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렵고 힘들게 살게 되겠지요. 화를 내거나 반발하고 분개하며 점점 무의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됨.


최근에 쓴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두번째 이야기’ 이야기 말미에 몇장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는데요, 그중에서 ‘일본 대림사입구에 설치된, 안중근의사와 치바도이치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라고 씌어 있어요.’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었어요. 그 추모비에 치바도이치선생은 ‘정애의 지사’라고 씌어 있어요. 우리가 ‘애정’이라고 할때 사용하는 그 한자들이지 싶은데요, 여러가지 정황을 볼때 어쩌면 그 의미가 ‘메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언급하며 확대한 추모비 사진을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