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당연한 것들

당신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들은 무었인가?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한번이라도 따로 생각해 본적조차 아마 없었을테니까. 그래야 또 정말 당연한 것인거고. 이번 기회에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지.

당신 개인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가족에게도 또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따로 생각조차 한번도 해보지 않은 그야말로 당연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당신이 자라나서 몸담은 사회나 혹은 나라에서도 너무나 당연해서 논의는 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수십년전 내가 잠시 몸담았던 회사에서, 몇해전부터 우연히 일하게 된 우리아이는 종종 회사주변 바닷가를 점심시간에 달린다고 한다. 지난날 나도 수백번은 족히 달렸던 그 아름다운 바닷가를. 한번도 보여준 적도 이야기를 한적도 없었지 싶은데, 이십년 세월이 흘러 아빠의 족적이 가득한 그곳에 아들의 족적이 겹쳐지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가 자라날때 우리가족에게 당연했던 것들은 과연 무었이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때 나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를 매년 그리고 오래 참가했었다. 항상 가족과 함께 갔었다. 그때 아기였던 아이의 눈에 아빠가 산천을 달리며 연습을 하고 또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 멀리 갔다가 한참만에 다시 나타나는 모습들이 반복되어 각인되었지 싶다. 한번은 마라톤을 완주하던 마지막 구간을, 결승선 근처에서 엄마와 함께 나를 기다리던 아이를 불러내 손을 잡고 같이 결승선을 통과했던 적도 있었다. 일부러 무었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자연스레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우리집에서는, 그래서 이 아이에게는, 짧은 빤스를 입고 비슷하게 차려입은 다른 무리들과 산천을 그리고 도시의 아름다운 길들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이 ‘그야말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장성하고나서, 아빠가 했던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그것을 자기도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친구분 딸에게 조언을 했던 적이 있다. 키도 크고 눈도 큰 사람들이 (내가) 말도 못 알아듣는 상황에서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처음에는 위압감을 느낄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과 맞짱을 뜰 자격과 능력이 되기에 그자리에 있다는 것을 잊지말고 항상 맞짱을 뜨고 맞먹는다는 마음을 가져라.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맞짱을 뜨고 맞먹게 될테고 그때는 맞짱을 뜬다 맞먹는다 그런 생각조차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런 수준이 되어야 ‘정말로’ 맞짱을 뜰수가 있다. 이런 비슷한 말이었지 싶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았던 그 공부 잘한다던 젊은이는 지금 그넘들과 맞짱을 ‘정말’ 뜨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졸리는 눈까풀이라던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은 무었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것은 ‘자기를 정확히 보고 아는 것’도 그중 하나지 싶다.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등 집단속에서 배우며 성장한 구성원이, 그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것들을 넘어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고 또 안다는 것은 극히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학교공부나 머리로만 이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상당한 경험으로 여러차례 확인 하였다. 골프를 쳐보면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난다지? 나는 어쩌다 괜찮은 골프장 회원이 되어, 오선의원 + 장관 + 박사 한꺼번에 한 사람, 육참총장, 국제기업 사장, 의사나 박사는 수도 없이 (은퇴한 사람들 포함) 같이 라운드를 해보고선 깨달은 것이 많다. 후진 삶을 살면서 카르마가 쌓인 넘도 보았지만, 동시에 수십년 지역에 의료봉사를 했던 의사가 그렇게 좋은 일은 하고서도 카르마를 쌓은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세상을 그리고 상대하는 사람들을 시도때도 없이 자기 병원에 찾아온 환자 취급하는 버릇에 인이 밖혔더란 말이다 🙂 그 카르마와 이고로 말미암아 장차 노년에 괴로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이 되더라.

골프를 치면서, 지위고하 성공여부를 막론하고 적어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때로 어리석고 쪼잔한 중년들과 노인들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되더라. 그리고 아주 지능적으로 속이는 정말 나쁘고 위험한 넘도 보았다. 아빠 따라온 어린 인디언 소년과 클럽에서 주최한 매치플레이를 하는데, 우연을 가장하여 최악의 벙커 라이를 멀쩡하게 개선한 뒤에 벙커샷을 하여 그 홀을 이기고선 결국은 매치플레이에서도 승리하는 꼴을 감명깊게 보면서 인간과 인생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존 지사장이라는 그넘에게는 무었이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게는 또 무었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가? 또 당신에게는?

심사숙고할 주제가 아닐 수가 없다.

쪼르륵 소리 억울한 마음

지구의 자전시간이 늘 24시간은 아니었고 또 앞으로도 변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배워서 일게 되었다. 지구가 탄생했던 아주 오래 전에는 하루가 5시간 정도였었고 (자전주기가 5시간) 그만큼 시간이 더 흐른 먼 미래에는 하루가 1천 시간이 넘을 것이라고 하더라. 우리의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가 🙂

한국어와 영어가 다른 줄이야 누구나 알겠지만 혹시 생각해 본적이 있나 한국어에 있고 또 흔히 사용되는 어떤 단어가 영어에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말고 어떤 상황이나 느낌 혹은 생각을 지칭하는 단어중에서 말이다 (다시말해 그 언어의 배경인 문화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골프를 치다보면 2가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번째야 물론 자신이 좋은 샷을 쳤을때 느끼는 즐거움이겠고, 두번째는 동반자가 나쁜 샷을 쳣을때 ‘은근히 느끼는 일종의’ 즐거움 혹은 기쁨이 있다. 이런 두번째 상황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한마디로 정확히 표현하는 한국어 단어는 없지 싶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있다. Schadenfreude 라는 단어가 정확히 그런 (야비한) 즐거움과 기쁨을 의미한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혹은 영어 표현을 찾아보려고 가장 많이 애를 써보았던 한국어가 ‘억울하다’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다못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아이에게까지 (아빠 닮아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나왔다) 상세하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상황 예까지 들면서 설명을 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리다가 우리도 아는 일반적인 영어 단어를 나열하지, 위에서 예로 들었던 독일어 Schadenfreude 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억울함’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나 표현은 말하지 못하더라. 아마 없지 싶다.

살 좀 덜 찌고 더 건강 장수 하려면 배에서 나는 ‘쪼로록’ 소리와 가까워지면 된다고 많은 유식한 사람들이 말하더라. 평온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억울한’ 마음과 가까워지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까워진다는 의미는, 부드럽게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내치거나 난폭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억울함은 반드시 풀어야만 (상대에게 표현하고 전달하여 내가 아닌 그를 바꿈으로써) 속이 시원해지고 그래야만 결과적으로 내게 행복이나 이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에 ‘억울함’을 표현하는 단어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근거없이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착각 아닐까?

영어에는, 한국어처럼 문장 끝을 변형시켜 같은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존대 하대를 실어서 표현하는 것이 없다. 예의 바른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한테 ‘헬로’ 라고 하지 ‘헬로까’ 혹은 ‘헬로세요’ 하지 않는다 🙂 ‘억울함’에는 ‘당했다’는 일종의 수동적인 태도와 ‘상하관계’에서 자신이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내게 무언가 잘못을 해도 나는 ‘기분이 나쁘고 성이나지’ (영어 표현에 모두 있다) 아이에게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싶다. 아니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들도록 내 마음에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지 싶다.

영어를 모국어로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우리 아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도대체 그 의미조차도 모르는, 하지만 한국인인 그대와 내게는 고무신에 붙은 껌처럼 철썩 붙어 있는, 이 ‘억울함’ 이라는 마음. 그런 기분이나 감정이 들때 한번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 무의식 중에 자기 스스로를 ‘당하는 입장’ 그리고 ‘아래인 입장’으로 항상 저절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유사한 결과나 상황에 처해져서 기분이 나쁘고 성이 나도, 내가 ‘주는 입장’이었다면 (‘저지른’ 입장이었다면) 그리고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었다면 억울한 마음은 없지 않을까? 언어와 문화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구성원들의 생각을 규정 짓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스스로를, 자기도 모르게 구속하고 규정 짓는지도 모른다.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도 위험하고 좋지 않은 카르마를 잉태할 가능성이 있지만, ‘억울한’ 감정이 개입될때 그것이 불러올 위험과 카르마는 아마도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mindfulness 란 어쩌면 이런 것들을 좀 깨닫고 생각해보고 또 조금이나마 자신의 삶에 실천으로 옮겨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해탈이 뭐 별거겠나?

부치지 않은 편지

링컨대통령의 부치지 않은 편지 이야기를 들어보셨어요? 미국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지휘를 맡았던 최고사령관이, 남군을 요절내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전쟁을 끝낼 절호의 기회를 수긍할만한 이유없이 미루고 또 이해할수 없는 이유로 회피하다가 그만 놓치고 난 이후에, 극도로 화가났던 링컨대통령께서 (자신의 지휘를 받던) 그 장군에게 쓴 편지인데요, 대통령께서 사망한 이후에 서재에서 부치지 않은채로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나도 읽어 보았어요. 영미문화권에서는 비록 상하관계가 명백한 경우라 하더라도 심한말로 나무래는 경우를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거의 보지 못했는데요, 상대방의 위치나 권위등을 존중해 주려는 배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욕이나 심한말의 인플레이션이 적은 곳에서는 조금만 억양이나 톤을 바꾸어 말해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되기 때문에 굳이 쌍욕이나 상대방을 모욕하는 나쁜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링컨대통령께서 쓰신 그 편지는 이런 문화적차이를 이해하고 읽기에도, 비록 자제하며 말하고는 있지만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드러내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해요. 대통령께서는 이 편지를 쓰기 전에도 쓸 때에도 그리고 쓰고 나서도 몹시 괴로워했을것임을 저는 짐작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서랍에 넣어 두고 일부러 부치치 않으신것 같다고 해요. 물론 역사속에서 그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 북군은 이미 무능한 사령관들을 수도 없이 교체하며 어려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사람도 이전 사령관들이 갔던 길을 따라 갔겠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북군이 승리했고 노예는 해방되었으며 링컨대통령은 미국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남을 훌륭한 위인으로 남게 되신것이지요.

그대도 쓰고 부치지 않은 편지들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링컨대통령처럼 종이에 잉크를 묻힌 펜으로 쓴 편지는 아니고, 비록 컴퓨터에 저장된 워드파일로된 편지들이지만 본질은 같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대통령께 배운 면도 있겠지만, 제 자신이 가끔씩 글로 저의 폭발하는 감정을 쓰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 제가 쓴 부치치 않은 편지들은, 어쩌면 처음부터 부칠 의사가 거의 없던 편지들로서 그 취지가 약간은 변색된 면이 있겠네요.

어쨋던 저는 그 편지들을 시간이 지난후에 다시 읽어봐요. 짧게는 몇주 길게는 몇달 혹은 몇년이 지나서 읽어보는 저의 부치지 않은 편지들은 제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부끄러움입니다. 놀라셨나요? 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장 많이 느꼈어요. 내가 그 당시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수준의 편지를 썼던가? 무었이 나로 하여금 지금 보기에는 내가 쓴 것이라고 차마 믿기 어려운 내용과 수준, 그리고 나아가 그 편지의 발단이 되었을 사건이나 상황을 극히 유치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러한 글들을 쓰게 만들었던가 자문하게 됩니다. 부치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만약 부쳤더라면 내쪽에서 문제를 훨씬 크게 확대하고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았을것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저는 제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내가 격정에 사로잡혀 있을때 얼마나 더 어리석게 되고 눈이 더 멀게 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의 횟수가 거듭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치지 않은 편지를 통한 저의 깨달음은 어쩌면 제 자신에게, 설령 제가 이런 상황속에 빠져 있을때라고 할지라도 바로 이런 기억을 불러와, 저로 하여금 이전에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했었을 그런 언행들에 커다란 의문을 던지며, 저의 잘못된 확신을 무너트리고 제 입을 다물게 하며 저의 사나운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싶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다른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고, 보통사람은 자기자신을 통해서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것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래도 보통사람들 끝에라도,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좀 끼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괴로운 그대, 오늘밤 부치지 않을 편지를 한번 써보시지 않으렵니까?

블로그 2년

‘내 선택의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이 블로그를 써온지도 이제 2년이 되었네요. 2018년초 블로그를 시작할때 한해의 theme으로 ‘선택’을 선택했었는데, 그해에 정말 좋은 선택을 많이 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예요. ‘왜 기억을 못해요?’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삶에 의미가 있고 영향을 끼치는 그런 선택들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같은 선택과는 달리, 그 결과나 영향이 오랜 시간을 두고서 서서히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잘 알수 없는 것이지요.

이전 theme들중에서 기억나는 것들로는, ‘나는 내가 많이하고 자주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가 있었고요, ‘매일 읽고 써라. 그러면 내 삶이 그쪽으로 가게 된다’도 있었네요. 올해의 theme은 ‘갈등을 줄여 에너지를 내 삶에 집중하라’였는데요, 돌이켜 보건데 약간의 성과는 있었던것 같네요.

새해의 theme은 ‘거룩한 반복’으로 정할까 생각하고 있는데요, 일전에 제 블로그 글에서도 언급했었고 또 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책들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꾸 반복해서 듣게 되요. 온갖 좋은 생각과 이론 그리고 종교와 철학들이, 나와 주변사람들의 삶에 실제로 의미있는 도움을 주는가 하는것으로 궁극적인 결판이 난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는데요, 그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거룩한 반복’으로 이루어낸 ‘습관’이라고 확신합니다.

얼마전, 시내에서 일하는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오랜기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아이를 위로한답시고 했던 말이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입과 항문이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였는데요 (아이가 얼마나 impressed됬겠어요?) 차차 나이를 먹으면서 간경화가 생기는지 (간뎅이가 붓는지), 사람 사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그렇게 ‘이것이 좋다’ ‘저것을 해야한다’ ‘요것은 꼭’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이, 물론 현재의 삶이 그 시절의 결과임은 부정하지 않지만, 과연 우리 인간의 본성이며 우리가 마땅해 가야만 하는 유일한 길이었던가에는 상당한 의구심과 회의가 들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소위 ‘독고다이’인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의구심과 회의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도 들어요. ‘인생은 들판에 핀 풀꽃과 같다’는 한 유명한 스님의 말씀을, 년전에는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 이렇게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2년동안 이 블로그에, ‘잘난체 한수 가르치려는 글’을 쓴 적도 있었고, ‘강한 주관적인 생각이 담긴 글’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한때 100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썼던 적도 있었네요. 1000일을 희망했었는데 내공이 부족했어요. 저는 이렇게 블로그를 쓰고 읽으면서 내 자신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것 같아요. 결국은 제 좋자고 하는 일이지요 🙂

이곳은 큰 휴가를 앞둔 조용한 시기입니다. 블로그에 올렸던 지난 글들을 다시 되돌아 보며 정리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한해에 ‘거록한 반복’을 잘 쓰고 읽을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남은 2019년을 잘 마무리하고 좋은 2020년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