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람들

일본여행 해봤지? 많은 도시에, 중소도시는 물론이고 오사카나 쿄토같은 대도시에도, 자원봉사 여행가이드 조직이 있다는 이야기 혹시 들어 보았나?

전에 우리 내외가 일본을 방문했을때, 우리는 떠나기 전에 세사람의 자원봉자 여행가이드들을 바로 이 조직을 통하여 미리 알선해 놓고 갔었다. 연세가 지긋한 여자분들이 많고, 영어를 뒤늦게 배웠거나 (해외연수파 다수. 우리를 가이드 했던분들 중에서 한분은, 뉴질랜드에 영어 배우러 은퇴 후에 일년동안 연수를 왔었다고 했음) 혹은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해서 비교적 잘 하는 분들이었다. 내가 영어 좀 어떻게 해보라고 전에 권유 했었지 🙂

세사람이 각각 하루씩을 우리를 위해서 댓가없이 할애해 주셨고 또 성의껏 우리내외를 가이드하며, 자신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그 도시의 명소들을 함께 방문하며 우리가 하나라도 더 돌아보고 더 즐기기를 바랬었다. 한 분은 마치 아내처럼 성격이 좋은 은퇴한 노처녀였었고, 한분은 전업주부로 나처럼 좀 뽀족한 분이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우리는 감사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은 대학교수신데 연세도 있고 몸도 좀 불편한데도 하루를 우리를 위해 할애해 주신 고마운 분이었다. 이분이 헤어지기 전에 그러시더라 ‘우리 두 나라가 역사적으로는 서로 좋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이렇게 함께 보낸 시간처럼, 서로 만나고 또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면 장차 두 나라 사이의 관계도 개선되지 않겠는가.’ 훌륭한 분이셨다.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마음 한쪽에서 오가는 그 쉽지 않은 감정들을. 국립박물관에 갔을때 전시 되어 있던, 유서 깊은 사무라이 군복과 옆에 놓인 시퍼런 칼을 보면서 우리가 가질 수 밖에는 없는 그 감정을…

그분들과 며칠을 보내면서, 일본에 대해서 조금 더 배운 것도 있었겠지만 또한 그 사람들, 은퇴한 그분들이 무언가 조금이라도 사회의 일부로써 다른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해외영어연수를 일년씩 다녀온다든가 하면서까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 중에서 ‘쓸모없는 넘’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국에서는 별로 욕으로 사용하지는 않지 싶은데… 여기에서 그런 표현이 욕이 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나라 사람들의 의식속에는 ‘살아 있다는 것은 마땅히 어떤 용도가 있고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옛날 구한말에, 테니스를 치는 서양 선교사들을 보면서 긴 곰방대 문 양반 영감들이 ‘저렇게 힘든 것을 왜 하인들을 시키지 않는가’ 했었다는데, 혹시 당신도 겉보기만 ‘현대버젼’이고 안쪽은 아직 그런 버젼 아닌가? 앞에서는 그렇게 심하게 욕을 하고서는 뒤로는 알게 모르게 베키지 않았던 것이 드물었으니, 내가 짐작하건데, 향후 한 10년 지나고 나면, 한국에서도 은퇴한 사람들이, 우리가 만났던 그 일본 은퇴자들처럼 자원봉사니 뭐니 하면서 아마 난리를 칠 것이다. 이건 좀 베키는 것도 좋겠네 🙂

이렇게 노력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되어 옛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또 입에 올리지도 말고

이것, 어떤 대상을 상대하는 방법 중에서 때로는 효과가 높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엮이면 서로의 에너지가 (기가) 맞부딪히고 또 교환 된다. 꼭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설령 그것이 물건이거나 혹은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에너지를 가질 수 있지 싶다.

붓다께서는 사람에게 6가지 감각 기관이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오감에 더해서 ‘마음’을 여섯번째 감각기관이라고 말씀하셨다. 짧게 부연하자면, 오감으로 느끼게 된 어떤 감각이, 많은 경우에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해석되어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의 해석에 따라, 오감으로 ‘느꼈던 어떤 것이’이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되어지고 또 기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말하는 이 세가지가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외부를 받아들이고 또 소통하는 (엮이는) 대표적인 창들이 (window)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들 창들에서 그 대상을 좀 멀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마음’에게도 좀 자유와 공간을 더 줄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어떤 싫거나 힘든 대상이 있나? 그러면 최대한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또 입에 올리지도 않도록 하면서 좀 에너지를 덜 소모하면서 시간을 벌면 어떨까? 엮이면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고 또 이런 대상과는 자주 많이 낭비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이 내 마음의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게 된다.

엮이지 말고 좀 멀리하라. 그래서 시간을 벌고 좀 나중에, 혹시 다시 보이거나 들리거나 또 입에 올리게 되면 그때는 어쩌면 좀 덜 싫거나 덜 힘이 들지도 모르는 것 아닐까? 그 대상이 변했거나 아니면 내 ‘마음’이 변했거나?

내 삶의 적

당신 삶의 적은 누구인가? 무었이 그대 인생의 주된 적인가?
그뇬, 그넘? 뱃살? 미세먼지? 당신 자신? 아니면 자식이 원수냐?

‘다투는 마음’이 큰 적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나?

표현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어떤 대상이나 상대를 향해, 다투는 마음이 일단 생겨나고 나면, 그 결과 혹은 효과는 같다.
설령 당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단 엮이고 손바닥이 마주쳐 소리가 나면,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는 그 결과에 영향을 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당신에게 더 큰 다툼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다투는 마음이 생겨 나면, 마치 독한 제초제를 뿌린 밭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말라 죽는다. 사랑과 존경이, 화목과 평화가, 그 빛나던 지성과 존엄성이, 그리고 몸이. 그 대상 혹은 상대의 밭에서도 말라 죽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가장 소중한 당신, 그대 자신의 밭에서도 말라 죽는다. 상대에게서도 잃고 자신에게서도 잃으니 이중으로 크게 많이 잃는다.

‘다투는 마음’은 인간의 불행이 싹트고 자라 열매 맺는 최고 최대의 토양이다.

인간에게 가능한 ‘마음’ 중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발달된 것은 무었일까?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것은 무었일까?
측은히 여기는 마음 혹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공존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것은? 몰론 다투는 마음이겠지. 다툼은 본능에서 비록된 면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강요되어 점차 개인의 습관 혹은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면도 많다.


다투지 말게 그 누구하고도.
자신과 다투지 말고,
한 솥밥 먹는 사랑하는 이들과 다투지 말고,
인연이 되어 오고가는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말 못하는 미물이나 자연과도 다투지 말게.
왜냐하면 그 다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당신 자신이기 때문일세.

먼저 당신의 삶이 다툼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 하네.
오늘 하루를 당신이 그 다투는 마음, 화난 마음, 언짢은 마음, 섭섭한 마음에 매몰되어 눈뜬 장님으로 보내고 나면, 그것이 오늘로 끝나고 내일이면 청명한 새날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닐세.
당신이 허락했거나 혹은 아무 생각없이 보냈던 이 오늘의 결과로,
내일 당신은 더 쉽게 다투게 되고, 더 크게 화내게 되고, 더 사소한 일에 언짢게 되고, 더 자주 섭섭한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네.

당신의 소중한 인생을, 이 나쁜 적이 망치는 것을, 술취해서 혹은 징징 짜면서 보고만 있을 것인가?
누가 한 푼이라도 당신 지갑에서 빼았아 가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막을 당신이, 이 큰 도둑을, 이 어마어마한 적을 왜 넋놓고 바라 보고만 있는가?
손에 잡히는데로, 몽둥이가 없으면 하다못해 젓가락을 들고서라도, 무슨짓을 하던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묻지 마시게,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고,
바로 그 찾는 과정이 해답일세.
물어서 알아내고 또 대답해서 알려줄 그 무었은 없네.

인생에 참으로 중요한 것들 중에서 획득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네.
인생에 참으로 중요한 것들을 깨달아 오늘 하루를 그렇게 한 번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 나자빠지고 엎어지고 넘어져도, 삶의 본질을 꽤뚫어 보고 깊이 이해하여, 다시 털고 일어나서 또 해보는 것. 이것 이상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또 그 너머에 무슨 장미빛 행복이 감추어져 있지도 않네.

그대와 나의 행복을 기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