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is everything

‘원근법’이니 그런 소리 아니고, ‘견해 혹은 시각이 극히 중요하다’ 라는 뜻이 되겠다. 어제 소개한 One Strange Rock에 나오는, 명언중의 명언이다.

견해나 시각은, 여러개 있는 중에서 (구두나 자동차처럼) 고르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지는 것일까? 당신이 만약 골프를 쳐 본적이 없고 골프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실제로 해본 것이 없다고 치자. 그러면 골프에 대해서 (골프라는 운동 자체) 당신이 견해나 시각이 있을 수 있나? 당연히 없다. 자연훼손이나 농약 그런 이야기들은 골프 ‘관련’이지 골프 ‘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골프에 관한 견해나 시각은 골프를 치면서 생기고 또 발전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인간에게는 6개의 감각이 있다고 가르치셨다고 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감에 더해서 ‘마음’을 6번째 감각기관 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이 ‘마음’이 저기서 말하는 ‘perspective’와 아주 관계가 깊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감이 받아들인 것을 뇌가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듯이, 세상만사 모든 것들과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perspective’에 따라서 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이 ‘견해’ 혹은  ‘시각’이 인간을 규정하고 그의 삶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왜 perspective를 그렇게 강조해서 이야기 하는가 하면, 내 생각에는, 첫째로 대기권 위에서 오랫동안 수없이 (하루에 열두번도 더 지구 주위를 돌면서 세상을 본다), 지구의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과 디테일로 본다는 것이, 그 우주인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한 견해 혹은 시각의 변화를, 단지 지구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전체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왔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과학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던 (너무 거대한 스케일 이거나 혹은 극히 작은 스케일의) 자연 현상들을 밝혀 내어 우리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견해 혹은 시각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에,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써, 아마 우주에서 보았던, 엄청난 규모의 연어 (salmon) 이동과 산란 그리고 죽음 (산란후 자연사). 그 집단적인 죽음 뒤에 실로 엄청난 규모의 질소 (nitrogen) 이동이 있고, 그렇게 이동된 질소가 다시 거대한 규모의 숲을 만들어 내는, 자연의 어마어마하며 또 정교한 ‘rebirth’의 과정을, NASA와 과학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무덤 위에 심은 사과나무 이야기 기억하지? 바로 그 이야기를 붓다가 하셨던 것이고 또 수천년 지나서 NASA와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NASA의 우주인들이 그들의 특별한 경험을 통하여 깨닫은 그 어떤 perspective를, 붓다께서는 수천년전에 이미 밝혀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시다. 그 가르침을 어리석음에 휩쓸리지 않고 밝고 정확히 배워 조금씩이라도 실천한다면, 당신도 나도, NASA의 우주복을 입지 않고서도 그들과 다름없는 perspective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더 많은 삶의 진실과 해답을 붓다에게서 찾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Perspective is everything.

윤회냐 스르럭뽕이냐? 두번째 이야기

‘Rebirth=스르럭뽕’ 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었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들이 끝없이 돌고 도는 것, 또 하나는 비물질적인 것들이 (정신적인) 끝없이 변화하는 것. 이번에는 세번째 rebirth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최근에 ‘One Strange Rock’ 이라는 네셔널지오그래픽 도큐맨터리를 보았다. 8명의 NASA출신의 우주인들이 도합 1,000일 이상 지구밖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꼈던 것을, 과학적인 근거로 해석하고 또 이야기 나누는 ‘지구 이야기 10편’인데 내게는 그야말로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엄청난 사건’이라고 할 만한 최고의 도큐멘터리였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하겠다. 각설하고.

카르마 혹은 업 (業 업보 )이라는 말 들어 봤겠지? ‘무언가 나쁜 짓을 하면 그 댓가를 언젠가 어떤식으로든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런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싶은데, 틀린말은 아니지만 불충분하다.

붓다께서는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 로부터 카르마가 생겨 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카르마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죽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던 남아 그들의 삶에 영향을 계속 미친다. ‘카르마가 돌고 돈다’는 말이다. Karma rebirth.

이순신 장군은 돌아가신지가 오래 되었지만 한국사람이면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그분의 영향으로 (그분이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했던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민족의 역사와 삶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순신이라는 한 개인의 카르마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이 블로그를 지금 내가 일본어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었이 좋고 나쁘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도 그분의 영향으로 해군사관학교 갔던 군인들도 많지 않겠나? 명량해전도 없었고 이순신장군도 몰랐었더라면, 요리사나 농부가 되었을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군함을 타는 해군이 되었다면, 그 해군이 된 사람들의 삶 속에 이순신 장군께서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영향으로든지) 존재하고 계신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말이 아니지 싶은데? 그 해군의 자식 손주들이 선대를 따라서 또 해군이 될 지도 모른다. 이것이 카르마가 끝없이 돌고 돌며 ‘rebirth’ 하는 하나의 예인데, 그런 엄청나고 역사적인 삶이 아닌, 그대와 나 우리들의 평범한 삶에도, 당연히 카르마가 생기고 또 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은 (rebirth)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던, One Strange Rock 이라는 도큐멘터리에 나오는 8명의 우주인 중에 한 사람인 Jerry Linenger. 이사람은 미해군 장교요 의사요 박사인 동시에 우주인이었는데, 이 사람이 도큐멘터리에 나와서 했던 말을 이곳에 적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지구 상공 수백킬로 위에 떠 있는 인공위성 안에 있었을때,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자주 떠올렸다. 이 순간 내가 이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일생을 통해 내게 미친 그의 영향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오늘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장성한 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되돌아보건데) 나는 크디 큰 수많은 인연들의 결과로 이시간 이장소에 태어나, 나의 아내를 만났고, 이 새로운 생명들을 세상에 오게 했으며, 그들에게, 나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이어) 내게 했었던 것과 똑 같은 영향을 미치고 좋은 삶을 주었다.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왔던 의미가 대부분 이루어졌으니 나는 언제 떠나도 여한이 없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카르마도 인연을 따라 돌고 도는 것이다. 이 우주인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 또한 거대한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로써, 그의 인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어떤 카르마를 따라 오고 가며 돌고 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붓다께서는 우주선도 허블망원경도 NASA도 없었던 2,600년 전에, 이런 진실를 알아 내셨고 또 그것을 지금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다.

윤회냐 스르럭뽕이냐? 첫번째 이야기

불교나 붓다는 몰라도 ‘윤회’는 들어 봤을테고 또 궁금하지?

옛날에 전쟁터에도 먹을 것 가지고 와서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더라.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고, 큰 수요가 있고 돈벌이가 되는 곳에 공급 과잉이 있기 마련이며, 그런 상황이 되면 불법과 사기가 또한 판치게 되는 것이 인간사 아닌가? 한 번 보고는 다시 안 볼 손님들에게 어떻게 음식을 팔까? 사려는 상대방이, 자신이 사려는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 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파는 장사꾼이 이미 알고 있다면 얼마나 정직한 거래를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윤회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 하고 있는지 머리가 돌 지경이더라. 좀 배우면 배운대로, 무식한 자는 무식한대로, 사기꾼들은 사기꾼들대로. 그들의 말을 하나 하나 따지며 들어 보다가는 그야말로 내가 몇 생을 윤회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겠다 싶어서 중지 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존경하고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고승 몇 분의 설명을 되풀이 하여 들어 보았다. 아래는 내가 현재까지 얻은 결론이다. 더 배우고 알게 되면 향상할 소지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해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붓다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본인도 결코 하지 않으셨던 것이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모르는 것을 짐작으로 말하거나 혹은 아는체 하는 것’이었다. 붓다께서는 ‘오직 자신이 직접 경험할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만 말씀하셨고 가르치셨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예들 들자면 우주의 크기나 끝 그런 질문들에는 침묵하셨고, 또 때로는 먼저 몸에 박힌 화살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2,600전에 살았던 붓다께서도 물리적 생리적 역사적 제약을 받는 인간이셨기에, 지금은 우리에게 상식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던, 예를들어 세균감염 의한 전염병이나 지구 달 태양의 자전 공전등에 대해서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매우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 누군가 그것을 물었었다면, 그리고 만약 붓다께서 대답을 주셨다면, 지금 우리가 들어도 틀리지 않을 대답을 하셨을 것이다. 물론 ‘모른다’라는 대답을 포함해서. 모른다라는 대답은 결코 틀린 대답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할 시간에 밭갈고 수행하라’고 좋게 말씀하셨다면 이것도 또한 틀린 대답이 아닐뿐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리고 지금은 더욱) 매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대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얏나무 (자두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참외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슨뜻인지 알겠지? 만약 내가 정말 잘 아는 분이 우연히 그러다가 과수원 주인에게 오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나 같으면 일단은 사실에 근거해서, 나는 이런 저런 사람이고 이분을 잘 아는데 아무것도 훔치는 분이 아니고 이전에 그런적도 없었다. 이분은 자두 엘러지가 있어서 자두를 먹으면 큰 병이 나는 것을 본인도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분은 상당한 부자이다. 이런 근거로 볼때 이분이 당신의 자두나무에서 자두를 몰래 땃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상에는 온갖 사람들도 많으니 어떤 자는 ‘비데오 분석 결과, 손의 각도나 갓의 위치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자두를 의도적으로 따고서 감추는 정황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자는 ‘그 사람의 엘러지는 어떤 타입인가? 그 엘러지가 실제로 그 훔치려던 종의 자두에서도 발견된 기록이 있는가?’ 이런 말을 하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자는 ‘결코 알 수 없다. 아마 본인도 모를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이 어디 있나’ 이런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싶다. 첫째는 시야가 좁고 세상을 협소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 심한 경우요, 둘째는 무언가를 그럴싸하게 말함으로써 어떤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우가 되겠다. 그 과수원 주인에게 이런 이유들이 없었다면 내 설명을 듣고나서, ‘아! 그래요. 알겠네. 이만 가보게.’ 하지 않았을까? 이게 사람의 상식이고 이런 대화들이 보통인 곳이 살기 좋은 곳이다. 붓다께서 궁극적으로 가르치려고 하셨던 지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른 훌륭한 수행을 한다고 내가 상당한 근거로 말할 수 있는 고승들께서 말씀하셨다. 붓다께서 의미하셨던 윤회는 ‘rebirth’ 이지 ‘reincarnation’ 이 아니라고. 왠 영어? 그분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분이거나 혹은 제3의 언어를 영어로 번역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말로는? 붓다께서 가르치신 혹은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개념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현재 없다. ‘윤회’는 중국어이며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뜻이 아니다. 왕서방이 제멋대로 지어내고 떠들어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소위 유식한 사람들이 얼씨구나 얻어다가 퍼트린 것이다. 왜? 이미 두가지 이유를 말했다.

이런 한국말 못 들어 봤지 ‘스르럭뽕’ 그리고 ‘사부작쏭’? 내가 방금 만들어 낸 ‘rebirth’ 와 ‘reincarnation’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최초의 순수 우리말이다 🙂 ‘윤회=사부작쏭=reincarnation’ 은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당신이 흔히 들었던 바로 그것인데, 내 생각에 그런것 없고 또 붓다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틀린 것을 내가 왜 굳이 설명하리오?

그러면 ‘스르럭뽕=rebirth’ 는 도대체 무었인가? 그 영어 단어 자체를 따지기 보다는 그 불교적 의미를, 우리가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그 질문의 (그 단어 ‘윤회’ 지금부터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틀 혹은 context안에서 알아보자.

지구상의 물은 전체로 보면, 줄지도 늘지도 사라지지도 또 새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방금 내가 마신 물 안에 우리 1000대 조상께서 마셨던 물이 들어 있겠나? 있다. 내가 30년 전에 쉬했던 것은? 그것도 극미량이겠지만 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뒷뜰에 묻어주고 너희들이 좋아하는 과일나무를 그 위에 심어달라고 유언하셨다고 치자. 그래서 가족들이 울면서 유언대로 사과나무를 10그루 심었다고 치자. 장차 그 사과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면, 할아버지 화장해서 묻었던 그 어떤 일부가 극미량이라도 사과에 들어 있지 않겠나? 그렇겠지. 할아버지께서 좀 맛있는 사과의 일부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다시 태어나셨다고 말할 수도 있겠나? 굳이 말하자면 꼭 틀린 말은 아니겠지? 할아버지 대소변도 사라지지 않고 그 전체 물 속에 아직 있다면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드셨던 물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어떤 형태로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그때 드셨던 그 물도 그 당시 새로 생겨난 물이 아니었었다.

감이 오나? ‘돌고 돈다’는 말이다. 이것이 물질의 ‘rebirth’ 가 되겠다. 이런 저런 물질들이 어떤 시간에 모여서 어떤 것으로 존재하다가, 그 생명을 다하면 다시 분해되어 장차 다른 시간 다른 어떤 것으로 다시 나타나고… 이런 과정이 ‘거의’ 영원히 지속되는 것. 그래서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 보면서,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너 안에 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 헛말이 아닌 것이다 🙂 사람도 이 물질 ‘rebirth’ 일부며 예외가 아니다.

이제 두번째, 비물질적인 ‘rebirth’. ‘비물질적인’이라는 말대신에 ‘정신적인’ 이라고도 쓸 수가 있었겠지만 혹시 오류가 있을까봐 굳이 그렇게 썼으니 이해하라. 돌쇠는 혈기 왕성한 20살인데, 지나가는 예쁜 여자 뒷모습을 보면 늘 음란한 생각에 사로 잡히곤 했었다. 얼마전 아랫마을 먹쇠가 우물가에서 꽃비씨 손을 잡고 입을 맞추려 하다가 붙들려서 오지게 박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는, 보통 들던 그 음란한 생각에 이어서 ‘조심해야지 함부로 굴다가 인생 막장으로 간다. 빨리 좋은 여자 찾아서 결혼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의 돌쇠와 들은 이후의 돌쇠는 같은 사람이지만 또한 같은 사람이 아니다. 돌쇠가 ‘rebirth’ 했단 말이다.

매일 회식에 접대에 술을 달고 사는 박과장이 어떤 계기로 ‘이러다가 내 명대로 못살겠다. 죽기전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최소한 ‘술에 대한 박과장의 의식 혹은 생각’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박과장이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이다. ‘스스럭뽕’한 것이다. ‘Rebirth’ 즉 새로 태어났다. 박과장이 그날 이후에 헬스장 회원권을 끊고 열심히 운동도 하며 업무상 술도 먹다가, 차차 직급도 올라가고 또 생각도 많이 변하면서 술과 멀어지게 되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건강한 심신의 소유자가 되면 그것도 ‘rebirth’ 하지만 좀 더 큰 ‘rebirth’가 되겠지. 이 큰 ‘rebirth’는 다시 유사한 종류의 ‘rebirth’ 를 잉태하고 또 삶에서 구현할 계기가 되겠지. ‘Rebirth’.

내가 존경한다는 그 고승들이 어떻게 오늘날 그런 고승들이 되셨을까? 박과장이 거치고 있는 바로 그 ‘rebirth’의 과정을, 어떤 특정 목표 혹은 특정 대상을 향해서 오랜 기간 꾸준히 시도하고 실천하신, 그 ‘rebirth’의 과정으로 오늘 그런 고승들이 되신 것이다. 그 분들은 이 ‘rebirth’의 과정이 멈췄나? 그 분들 중의 한 분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전에 보았는데, 자신도 예외 없이 지금도 ‘rebirth’의 과정에 있다고 하시더라.

오늘은 이만 🙂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팬, 그대에게 미안하다.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배우고 알게 될수록, 쓰고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일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요, 장차 원래 계획했었던 것들을 포함하여, 더 낫고 좋은 원을 가지고 되돌아 올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나눌까 한다. 그대들에게는 어쩌면 처음 듣는 좀 놀라운 이야기 일수도 있고, 내게는 눈물 나는 이야기니 기대하시라 🙂

‘불교가 종교인가 철학인가?’ 하는 논쟁에 맞물려 자주 등장하는 것이, ‘붓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혹은 인간으로 왔었지만 신이 되었던 존재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신이었고 지금도 신으로 남아 있는 존재인가?’하는 질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어떤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가지를 먼저 밝힌다. 첫째는,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약 150년 전에 그리고 일본에서는 약 80년 전에 번역되어 누구나 구입해서 볼 수 있다. 많은 분량의 책들이기도 하고 또 독자가 한정적이니 책값이 좀 비싸다고 하더라. 한국에서는 약 20여년 전부터 훌륭한 분들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일한 문헌이 영어와 일어로 이미 번역이 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가 흔히 들어 이름이라도 익숙한, 무슨 x장경이니 y강경 z심경 등은 이 원본 불경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전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쓰던 후대의 지식층 인도인들이 ‘자체 제작’ 했던 것들을, 그 짜장면 원조국에서 천년 세월 자기네 문화와 언어에 녹여 ‘다시 제작’ 하여 우리들에게 전파했던 것들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처음에는,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으로 보고 혐오했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에게 어떤 사회문화적 혹은 종교인류학적인 이유들이 있어서,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이런 모습의 불교를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장차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아래에 적은 이야기는, 내가 존경하는 두분의 세계적인 불교 학자들의 저서에서 발췌하였다. 한 분은, 스리랑카 출신의 학자이자 스님이신 ‘왈폴라 라훌라’ (Walpola Rahula Thero)라는 분인데, 위에 언급한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과 그에 사용된 고대 언어에 정통했던 학자요 스님으로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이분 이전에는 승려가 영어권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참고로 ‘라훌라’라는 예쁜 이름은, 붓다께서 출가하시기 이전에 낳은 아들의 이름이다 (그럼 붓다께서 섹스를? 물론이쥐 🙂 부인 이름은? ‘야쇼다라’. 둘다 실존했던 사람들로서, 아빠와 남편의 길을 따라 해탈 열반을 성취 했다고 전해진다 – 훌륭한 전례가 있으니 나도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정생활에 힘쓰고 있다). 이 분께서 쓰신 ‘What The Buddha Taught’라는 책을 참조하였다. 아름다운 책이니 기회가 되면 읽어 보시라. 한국어 번역도 있을 것이다. 이분은 1997년에 90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두번째 분은,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라는 일본의 불교학자시다. 선생의 ‘아함경 이야기 – 지혜와 사랑의 말씀’ 이라는 한국어 번역서를 참조하였다. 매우 아름다운 책이니 이 또한 추천한다. 왜 아름답다는 표현을 되풀이해서 사용하는지,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좀 공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 불교는, 1800년대에 이미 학승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을 배우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문헌들을 일본어로 1930년대에 완역함으로써 ‘제2의 불교전래’ 라고도 할만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마스타니 후미오 선생은, 도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서 ‘일본종교학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이다. 아빠가 스님. 오잉? 🙂 이분의 저서 ‘아함경 이야기’는 붓다의 일생과 가르침을, 종교학자로서의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한 책으로써, 저자 본인께서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 그 부제에 많은 독자들이 동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1900년대 초에 출생하였으니 아마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그 당시의 기록들이 영어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붓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붓다께서 80세 고령에 이르러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돌아가시는 생생한 모습이 경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게 와닿은 세 개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첫째, 어떤 열렬 극성팬이, 아파서 돌아가시는 와중인데도 꼭 좀 만나서 말씀을 나누어 보고 싶다고 졸랐다. 하도 조르니 제자들이 어렵게 말씀을 드려 붓다께서 허락하셨고, 너무 아프고 돌아가시기 직전임에도 붓다께서는 이자의 장광설을 모두 들어 주시고, 이은 가르침으로 그를 깨닫게 하여 마지막 제자로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식중독을 일으킨 음식을 제공한 그자를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심히 비난함에도, 붓다께서는, 내게 처음으로 공양을 한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의 복을 빌었듯이, 내게 마지막 공양을 한 이 사람에게도 감사하며 또한 복을 빈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스승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나의 가르침에 관계 되어 확실하지 않거나 혹시 물어 볼 것이 있는가’ 물으셨다. ‘없습니다’ 라는 거듭된 대답에 마지막으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 ‘너희들이 혹시 스승이 아파서 죽어가는 마당에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질문할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혹시 원하거든 너희들 친구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 물어 보게 하거라’.


‘매일 먹고 싸야 살수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한계와, 매순간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인생의 본질’ 바로 이것들 위에 붓다의 가르침이 있고, 그 분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수행과 해탈을 통하여 증득한 ‘그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시면서 큰 가르침을 주시며 돌아가신 것이다.

가식 없고 진실한 가르침을 주신 붓다의 말씀은, 그 돌아가시던 장면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원본 불경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가, 혹시 미안한 마음에 돈 더 달라고 말 못하겠거든, 옆집 돌쇠한테 부탁해서 좀 더 달라고 대신 말하게 해도 된단다’. 고통속에서 돌아가시는 마당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면, 흡사 남겨 두고 떠나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미 아비의 마음과 같이 한없이 큰 사랑과 자비가 느껴진다. 하물며 가식이나 욕심 권위 혹은 우월감이 어디에 있을손가! 신? 나이키 아디다스 말인가?

비록 몸에서는 대소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위대한 정신과 자비의 마음은 조금의 흐트짐도 없이 오히려 이런 극도의 고통과 최악의 상황에서 그 빛과 아름다움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다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으며, 오직 수행 정진으로 매일 매순간 스스로를 닦아 살아서도 그리고 죽을때도 빛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똥오줌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것이 우리를 더럽히고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오물들이야말로 참으로 더럽고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인 줄을 그대와 내가 깨달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닦아 낼 수 있도록 형편이 되는데로 부지런히 걸레를 빨아대며 우물가를 들락날락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분의 위대함은, 무슨 뜬구름 잡는 도술이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신비함, 혹은 주인 자리 빼앗아 아랫목 차지한 그 난해한 경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와 나, 오늘 마음이 아프고 몸이 괴로운, 이것 저것 닥치는데로 잡아 먹고는 쪼글쪼글한 구멍으로 한 두 덩어리 똥을 밀어 내고서는 또 다시 쪼르르 달려가 같은 짓을 반복하며 한 평생을 살다가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삶의 본질을 참으로 이해 하시고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갈 수 있는 훌륭한 지혜와 방법들을 우리들 같이 눈멀고 귀먼 똥대가리들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상세히 가르쳐 주시는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마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