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한 단상

이곳에 와서 내가 처음으로 얻었던 직장의 상사가, 권고사직후 이삼년 지나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 도시니 그 사람이 생전에 몰고 다니던 차가 (가족들이 계속 몰았으니)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쇼핑센터나 시내길에 주차된 것을 몇차례 내가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다. 보통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차나 물건들이 왔다가 가는데, 그 경우에는 반대였던 좀 특이한 경우라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사람 생전에 그 차 몰고 다닐때, 자기가 죽고나서 그가 몰던 차는 여전히 거리를 오가는 상상을 해보았을까…

미국에는 플린스톤스라는 우리에게도 알려졌던 만화때문에 인간과 공룡이 공존했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아마 한국에서도 물어보면 긴가민가 할것이다. 공룡은 실존했었기에 당연히 화석은 물론 잘 보존된 뼈도 발굴이 되어 왔다. 현재까지 발굴된 공룡의 뼈로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것은 1990년 미국에서 발굴된 ‘수(Sue)’라고 이름지어진 공룡이라고 한다. 90% 정도 완전한 골격이 그대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 공룡이 생존했던 시기를 포함한 많은 자료들이 연구발표 되었다.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나서 이야기를 계속하자 – 위 링크에 가서 우측상단의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수 있다.

방금 그대와 내가 인터넷으로 본, 실제로 지구상에 6,700만년 전에 돌아다녔던 이 공룡 수(Sue)의 유골은, 우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전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6,000만년 이상의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밖으로 나왔으며, 현대문명을 이룬 인간에 의해서 그 실체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현대 문명을 이루고 산 기간을 200년이라고 가정하여 이것을 24시간 시계로 비유하자면, 이 공룡이 죽어서 묻혀있던 시간은 23시간59분59초 이상이고, 그 실체를 밝혀낸 현대문명은 약 0.3초 정도의 시간이라 할수 있다. 예수의 탄생부터를 현대문명으로 쳐준다고 해도 약3초 정도의 시간이 되겠다.

이글을 시작할때 죽은 매니져가 몰던 차가 돌아다니더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실존했던 공룡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할 꿈도 꾸지 못했던 까마득한 먼 옛날에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이제사 인간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관련된 시간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 – 20만년 전에 현인류가 (지금인류의 직계조상) 지구상에 탄생했는데, 이 시간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100번 반복한 시간이 되겠다.
  • – 500만년 전에 인류가 침팬지등으로 부터 분리되었다고 하는데 (인류와 유사한 조상의 시초), 이 시간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2,500번 반복한 시간이다.
  • – 6,700만년 전에 이 공룡 ‘수(Sue)’가 살았었는데, 이 공룡이 죽은 이후,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30,000번 이상 반복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위에서 언급한) 침팬지와 인류가 분리되고 인류와 유사한 조상이 지구상에 등장했었던 것이다.
  • – 그리고 현재 인류의 조상이 지구에 등장한 것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이때로부터 또 다시 3,000번 이상을 더 반복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나? 인간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나? 나도 그런 기분이 좀 든다. 또 어떤 생각이 드나? 인간의 역사도 또 한 인간의 삶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짧고 허무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나? 어떤 과학서적에서 이런 글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천체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로 평생을 보내고 나서 깨달은 (인간과 과학의 한계에 대한) 내생각을 비유로 표현하자면, 100층짜리 마천루 빌딩의 지하층에 우연히 들어간 바퀴벌레가 지하실 천정을 보면서 벌레의 능력으로 마천루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것 같다는 것이다.”

건방떨며 정신없이 살기보다는, 겸손히 한계를 받아들여 조용히 살아야 할 이유들이 내 생각에는 훨씬 더 많지 싶다. 종교니 과학이니 이념이니 투쟁이니 역사니 발전이니 하는, 우리 인간 삶의 실체를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방금 위에서 말했던 그 바퀴벌레 운운하던 과학자, 내 생각에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직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바퀴벌레이면서도 또한 결코 바퀴벌레로 남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과학자도 자신의 글을 아마 그런 말로 끝맺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무심코 베켜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대 그리고 나. 정신 차리고 살자.

타이슨과 투이2

원래 이야기로 되돌아 옵니다. 이곳은 전세제도가 없는데요, 매 2주마다 내는 집세가 상당히 비쌉니다 (수입대비). 겨울동안 일거리가 많이 없었겠지요. 또 새로운 도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을 겁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한동안 일을 가지 않았어요. 트럭이 며칠씩 그냥 주차되어 있던것을 보았거든요. 우리 내외는 좀 염려가 되었어요. 하루벌어 하루사는데 어떻게 하려나… 한 이주쯤 전에 우연히 마주쳤을때 타이슨이 내게 말했어요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이사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 하겠어요.’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말에, 그리고 좋은 일이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을 할지 몰라서 다만 잘 알았다고만 말했어요.

그날 저녁 아내와 식사를 하면서 타이슨과 투이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어요. 나도 아내도 그 남자와 여자에게 앞으로 펼져질 삶을 짐작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오고가면서 오래 살았어요. 그래서 이 정도는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아내가 말합니다. 투이는 자신이 원하는데로 대학에서 심리학공부를 마치고 제대로된 직업을 구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녀는 여태껏 우리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그저 등뜨시고 배부르게 하루하루 사는 쪽으로 삶이 향하게 될 것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부부중 한명만 벌어서는 그저 현상유지만 하기도 급급한 실정입니다. 이 부부는 집세를 내고나면 아무것도 저축 할 수 없고 그저 사람도 트럭도 아이도 별 탈이 없기만을 바라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 체인을 벗어나 굴레를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아내도 이빨을 악물고 공부를 해서 직업을 찾아도 될까말까한 그런 상황입니다. 남자는 아마도 그들의 문화와 부모의 영향으로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던 사람일꺼예요. 좋은 성품과 정말 근면한 태도를 타고 났지만, 이 나라에서 오직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만을 팔아서는 가족 모두가 살기에 너무 힘이 듭니다. 앞으로도 달라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안타깝네요. 대학이 아니었더라도 배관이나 다른 어떤 기술을 배웠었어도 이나라에서는 자기 하기에 따라서 잘 살수 있습니다. 아무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코스를 다시 시작할 여력이 없어 보여요. 이미 아기도 태어났습니다. 아! 가족들이 좀 도와주면 좋을텐데요. 아기를 좀 돌봐주면서 아기 엄마가 대학을 가게 도와주고, 좀 얹혀살게 해주면서 남자가 기술을 배울 기회가 있다면 이 부부는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에 이런 상황을 알고 먼저 도움을 줄 가족도 없고 또 자신들도 이런 상황을 잘 자각하고 못하고 있지 싶어요. 그래서 변화와 발전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외부적인 도움을 작은 자본삼아 상당한 고통과 희생을 기꺼이 감당하는 수년의 과정이 없이는 어떤 의미있는 변화나 발전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내와 나는 다만 이 커플이 잘 살기만을 마음으로 기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령 내가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하고 싶어도 이런 조언을 이 나라에서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말을 한다고 무언가가 저절로 변화되는 것도 아니겠지요. 오직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또 열망해야 하겠지요. 남자는 머리가 있어요. 정직한 노력이 허무하게 자꾸만 끝이 나고, 자신도 모르는 과거의 카르마에 휘둘리며 살다가 크게 절망에 빠지면, 그는 좋지 않을 길로 접어들 가능성도 있지 싶습니다. 안타깝군요.

이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해야겠군요.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와 나는, 어쩌면 타이슨과 투이처럼 생계를 걱정할 입장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공통점이 있지 않나요? 지난 시절, 선대들이 그리고 자신이 멋모르고 했던 일들의 결과로 오늘날 내 삶을 짓누르게 된 카르마, 그리고 하루하루의 삶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나요? 나와 아내가, 타이슨과 투이 커플을 보면서 깨닫은 것을 내 자신의 카르마를 줄여 자유를 증득하고 또 나의 괴로움을 몰아내어 내 처지에 맞는 행복을 찾는데에 적용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내가 타이슨과 투이의 좋은 면과 강점을 보고 또 인정하듯이, 내 자신의 좋은 면과 강점을 알고 좋아하고 또 인정해 주렵니다.

타이슨과 투이는 떠났지만, 아직도 물청소로 깨끗한 드라이브웨이를 지나면서 그들을 떠올리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안녕과 성공을 기원합니다. 행복하시오…

타이슨과 투이1

무슨 권투선수나 새이름이 아니고, 연초에 앞집으로 세들어온 젊은 커플의 이름이예요. 두사람 모두 이나라 원주민과 백인의 피가 섞인, 이곳에선 마오리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일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는군요. 남자는 30대 중후반인데 성격이 밝고 붙임성도 있고 좋네요. 여자는 좀 어려보이는데 임신중이었다가 몇주전에 아기를 낳았어요.

남자는 작은 고물 트럭을 몰고 다니며 집이나 저층빌딩의 외부를 세척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가 꽤 되었는데 장차 대학에 진학해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요. 남자는 참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비록 세든 집이지만 늘 집 외부와 주변을 정말 깨끗하게 해놓고 살아요. 우리가 공유하는 드라이브웨이도 늘 물청소를 해서 깨끗합니다. 장차 우리집에 좀 해야할 일들이 있거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하는 사람을 찾으면 서스럼없이 추천해 줄만한 사람입니다.

두세번 부부가 큰소리로 (욕도 좀하면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한번은 대판 싸우는 것 같았어요. 며칠 지나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는 계면적게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괜찮고 이렇게 사과도 하는 태도가 참 훌륭하다고 말해줬어요. 짧게 덧붙였어요.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이 큰 변화의 시기에 가족 모두가 특히 부인이, 불안정하고 그래서 다툴수도 있다. 나도 그랬었다. 당신이 가족을 아끼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으니 앞으로 잘 풀릴 것이다’ 이렇게 좋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어요. 영어가 좀 정확하지 않았어도 그는 내 진심을 보았으리라 믿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빠지는데요. 이곳에서 수십년을 살면서 사람들이 큰소리로 다투고 싸우는 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내 자신이 그런 좋지 않은 짓을 했던 적은 옛날에 있었는데요, 술취한 내귀에는 별로 큰소리로 안들립디다. 지금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예요. 술을 먹지 않으면 나의 어리석음이 바깥으로 세나가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 그런데요 이곳에서 큰소리로 다투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마오리원주민 혹은 주변의 섬나라들에서 온 다혈질의 사람들입니다. 백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목격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어릴적에 (지금은 돌아가신지 오래된) 여행가 김찬삼님의 책을 즐겨 보았었는데요, 흥미있는 사진과 이야기도 많았겠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그분 말씀이 ‘나는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수없이 여행하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는데,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와이셔츠 찢으면서 싸우는 나라는 한국뿐이더라’는 말씀이었어요 (무슨 나쁜 뜻으로 악담하신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본데로 느낀데로 하신 말씀).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아닐수 없어요. 나는 아주 어릴때 이 글을 읽었는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이나라 백인들은 영국등 유럽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지만, 원주민들이나 태평양 여러 섬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큰 몸집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태평양 섬나라 문화가 반영된 아름다운 맬로디의 노래를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들으면 ‘정말 아름답다. 사람이 저렇게 먹고 마시고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본성이 아닐까’ 이렇게 좋은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인구대비로 감옥에 (다른 인종들에 비교해서) 몇배나 더 많이 가고 또 기업체나 회사에는 (특히 머리를 쓰거나 경영을 하는 자리에는) 거의 없습니다. 같이 일을 하려면 그들의 낙천적인 (좋게 말하자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자면 무책임하고 무감각한 후진적인) 태도 때문에 잘하기 어렵고 또 함께 좋은 성과를 내기도 어렵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야자수 아래에서 유클랠레를 치면서 알로하오에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대를 이은 습관’은 바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불과 몇십년전에, 길거리에서 와이셔츠를 찢으면서 싸우는 유일한 민족이라던 우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나도 어릴때는 이웃집이나 혹은 길거리에서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을 흔히 보면서 자랐어요. 개천부근에서 흙놀이를 하면서 살아서 그런가 🙂 술먹고 유클랠레를 치면서 노래하는 민족 그리고 술먹고 길거리에서 와이셔츠를 찢으며 난투극을 벌이는 민족! 하지만 두 민족 모두가 흥을 아는 멋진 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또한 알아요. 어쩌면 백인들은 싸우지도 않지만 또 화끈한 사랑이나 감정의 표현도 없는 좀 물같은 (가짜해탈?) 민족들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구요. 부부도 그저 물처럼, 서울내기들 표현에 따르면 대면대면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또 박터지게 싸우고 진하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결국은 제로섬(zero sum) 인가요 🙂

내일 마저 할께요.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두번째 이야기

옛날부터 흥얼거리던 노래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그리고 언젠가 이런 말도 했었다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 차리기가 무척 힘들다’. 오늘은 어제부터 시작한 ‘개인주의’ 이야기를 비교문화적인(?) 시각에서 좀 더 하고자 한다.

• 소속감 혹은 ‘자신을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일시 하는 어떤 경향’이 한국과 이 나라는 무척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팔았던 어떤 물건이 (서비스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반대로 잘되었을때, 한국에서는 흡사 자기 잘못인 듯한 태도로 사과를 하거나 혹은 기뻐하는데 반해서, 이곳에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하거나 일하는 집단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소비자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또 당연하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회사일을 가지고 자기의 일처럼 이리뛰고 저리뛰지도 않고 마음을 졸이지도 않으며, 그저 계약서에 써진 상식적인 수준 만큼만 자신의 삶과 에너지를 일터에서 사용한다. 다시말하건데, 반대편이나 혹은 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 앞서말한 태도와 관련이 있지 싶은데, 예를들자면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다고 (좋지 않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했거나 혹은 제공하는 방법에서 매끄럽지 못했다고) 그 개인을 직접적으로 나무래고 또 무릎을 꿇리며 사과하게 하는 짓 따위는 이곳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라면, 첫째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사람과 그가 속한 집단을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 댓가로 실질적인 이익을 취하는 주제를) 동일시 하지 않으므로 ‘무슨 이런 썩을 상점 / 회사 / 단체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지 (물론 ‘종업원 교육이 개판이구만, 이 회사 곧 망하겠네’ 이정도는 마음속으로 덧붙이겠지) 개인 차원으로는 잘 확대하지 않는다. 두번째로, 평등한 사회구조상 개인의 권리가 매우 존중된다. 위치고하를 막론하고 ‘좀 해달라’고 부탁하지, 돈을 줬고 당신 입장이 이러저러하니 네가 당연히 이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입고 있는 제복보다 그 사람 본연의 권리가 훨씬 더 크다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당연히 생각하므로, 제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그래서 ‘지나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이 이곳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학생때, 한 친구에게 ‘어디 들어가면서 누군가가 문 열어주기를 당연한 듯 기대하는 넘’과 ‘목욕탕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다른 사람의 힘으로 때미는 것이 당연한 넘’은 대가리가 근본적으로 좀 잘못됬다고 내가 말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지나친’ 서비스 업종은 이곳에 거의 없다. 인건비가 비싼 것도 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사려고 상상하는 사람들조차 없으니 당연히 팔고자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이 더 맞지 싶다. 어제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일을 자기 스스로 해내기를 서로가 기대한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나? 그리고 업종 자체의 존재유무만을 가지고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을 ‘한국에서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 이곳에서 대하는 경우와 그럴만한 업종이 잘 없다는 뜻이다.

•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들 말이, 영어는 존대어법이 없고, 같은 동양권에서라도 중국어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편이고, 일본어가 가장 존대어법이 많고 복잡하며 한국어는 그 중간쯤 된다고 하더라. 영어문화권에서는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 보다는 (구조적으로 제한이 있을터이니) ‘같은 말이라도 어떤 태도나 혹은 방식으로 전달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또 그런식으로 존대를 (존중을) 표현한다. 여담으로, 어제 어떤 국제적인 온라인 서비스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아마도 주말이라서 인도 어디에 있는 콜센터와 연결이 되었던 것 같다. 24x7x365 서비스를 제공하는 큰 회사들은 주말이나 야간에, 인도에 있는 콜센터로 서비스 번호를 되돌리는 경우가 많다. 영어가 좀 되고 또 시간에 관계없이 일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콜센터 비즈니스가 인도에서는 큰 산업이란다. 말끝 마다 ‘Sir sir’ 하면서 버벅대며 시간을 질질 끄는 것에 거부감이 많이 생기더라. 그런 ‘말’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고 숙련된 ‘태도’로 응대해주면 좋으련만 ‘문화적차이’ 때문에 그만큼까지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것을 나도 안다. 내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고 또 못된 면이 있어서 (무슨 삼위일체냐? 인생 쉽지 않았겠네?) 이런 경우에 통화를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경우가 이전에는 많았었는데, 어제는 그런 시도를 시작하다가 상대방이 어필하는 말을 좀 들어주고 더 시간을 주어서 좋게 잘 끝을 냈다. 밤에 누워서 문득, 이 여자 아마 중년의 인도여자 같은데, 그녀도 그 콜센터에서 퇴근하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되돌아 가고, 또 다른 어떤 어려움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터에서조차 괴롭지 않게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옛날에 이곳에서 콜센터를 지원하는 기술자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아는데, 이런 콜들을 매니져들이 모니터 하다가 고객을 잘 응대하지 못하고 콜을 놓치면 혼난다. 그리고 만약에 이런 곳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쫒겨나겠지. 죽을때까지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지만, 그녀가 하루를 잘 마치고 또 보수도 무사히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식사도 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기를 나는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내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더 버벅거리는 기술자였을때, 그 누군가도 어쩌면 내게 이렇게 해주었고 또 기원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철드네… 붓다의 가르침이 차가운 콘크리트를 뚫고 스며드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와 관련된 단순 호르몬 교란인가 🙂

• 일반화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선진국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다못해 다혈질이고 가족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조차도, 개인주의적 경향이 훨씬 큰 것을 볼 수 있다.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새로운 세대들은 어쩌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롭고, 영어권 문화에 오래 노출되고 또 인터넷사용등의 이유로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상대적으로 훨씬 크지 싶다. 동시에, 더불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전세대들의 영향으로 집단주의적인 경향도 함께 가지고 있는 (예를들어, 자신의 무지나 선대의 카르마에 기인한, 일본에 대한 지나치거나 이율배반적인 태도등) 어떻게 보자면 좀 복잡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한 두세대가 더 지나야 안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내가 존경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스승들은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 혹은 실제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 만으로도 (‘자각하는 것’ 만으로도) 큰 발전이며 장차 더 큰 변화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 의미있는 것이라고. 내가 전에 말했는데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때에는 그것이 카르마인줄 깨닫기가 무척 어렵지만, 만약 깨닫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께 이야기 해보는 것이다. 당신이 혹시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깨닫지 못한 당신의 자화상을, 숲밖에서 보는 숲속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어쩌면 훗날 어떤 실수를 저지른 백화점 종업원이 두려움 속에서 당신에게 혹시라도 무릎을 꿇을때,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당신 개인의 잘못만이 아니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좋은 태도로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한국도 그런 멍멍이 같은 일들이 그야말로 멍멍이 같은 일들로 모든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는 나라, ‘개인주의’가 잘 발달된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참된 해탈은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다. 니르바나는 어떻게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일 뿐이라더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가 모르겠지만 그래도 굳이 밝히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