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ve Aggregates

지난번에 예고했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Five Aggregates’라고 번역되며 한자로는 ‘오온 (五蘊)’ 그리고 붓다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언어인 팔리어로는 ‘Khandha’로 표현되는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내용의 하나라고 합니다.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한글로 다시 번역한 설명들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는데, 마침 티라다모스님의 좋은 설명이 있어서 여러차례 반복하여 들어보고 의역할 작정인데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그 다섯가지 입니다. 일단 중요하니 써놓고 시작합니다.

Material Form (형태, 몸)
Feelings (느낌, 기분)
Cognition (인식, 알아챔)
Volition (의지, 선택)
Consciousness (의식, 생각함, 깨어있음)

우리가 옛날에 길렀던 버둑이 녀석이 팔팔했던 어린 시절에 (안락사한지 몇년이 지났네요) 하도 말을 듣지 않고 개구장이 짓을 하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주말에 개훈련을 함께 시키는 곳에 데려갔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떤 영감이 우리가 버둑이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도와준답시고 자기가 데리고 가서 힘으로 버둑이를 제압하려 했던 적이 있었어요. 우리는 멀찌감치에서 보고 있는데, 그 영감은 우리개의 목줄을 단단히 잡고서 자기가 명령하는데로 걷게 만들려고 했어요. 버릇을 고쳐주려는 것이었지요.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처럼 쩔쩔매는 것이 아니라, 목줄을 죄면서 무릎으로 사정없이 버둑이의 머리와 몸을 쥐어박으면서 말을 듣게 만들려고 했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기는 고마웠지만 통하지도 않을 엉터리 방법으로 버둑이만 괴롭혔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때 아내와 나는 우리 버둑이 녀석이 ‘아이고 아저씨 아줌마 좀 구해주세요. 이넘이 못살게 하는데요’ 눈으로 호소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예요. 정말 눈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었어요. 그때 이후로 과연 다른 영장류나 개, 소나 말처럼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정말 어떤 ‘생각’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게 되었어요. 좀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그런 말을 눈으로 할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지 싶은데요, 예를들면,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할테고, 또 눈길을 보내는 상대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해줄 가능성이 있는 대상이라는 판단이 필요하지 싶네요. 다시말하자면 어떤 개는 단지 반사적으로 그 영감을 물거나 혹은 그냥 깨갱거리면서 끌려다니거나 했지 싶네요. 우리 버둑이는 장난을 좋아했었는데요, 좀 야비하고 엄하게 구는 제게는 장난을 잘 걸지 않다가, 아내가 밖에서 무었을 하고 있을때면 늘 가까이와서 무었을 물고 도망가면서 뒤돌아보고선 ‘나 잡아 봐라’ 혹은 ‘놀~자’ 이렇게 몸짓과 눈으로 말하곤 했어요. 상대를 가려가면서 하고 또 어떻게 하면 우리를 약 올려서 자기를 따라다니게 만들어서 함께 놀수 있는지도 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글을 시작할때 말했던 그 다섯가지 중에서 어쩌면 한두가지는 버둑이도 아마 조금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네요.

갓난 아기에게 주사를 놓으면 앙~~ 크게 우는데요, 과연 아기가 그때 우리 버둑이처럼 ‘아이고 아파라. 엄마 좀 말려 주세요’ 그런 ‘의식’이나 ‘판단’이 있어서 우는것일까요. 아니겠지요. 아주 갓난 아기는 잘 보이지도 않고 또 두세살인가 되어야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이 된다고 하네요. 어쨋던 우리는 갓난 아기를 벗어나면서 ‘자기’라는 생각이 형성되고 또 발전되면서 점점 ‘자기’ 혹은 ‘자아’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으며 굳어지는 것인데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어떤 구체적이고 혹은 변치않는 무었이 개개인 사람안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고 하지요. 또 그것을 직접 간접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많은 시도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사람이 죽기 전후에 무게를 재기도 했고, 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니 병원의 아주 높은 천정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그림을 몰래 그려 놓고서 죽다가 살아 왔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았는가 따져 보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 얼마나 다른 많은 시도들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어서 신체가 완전히 생명활동을 중지하고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정말 다시 살아나서 세상에 되돌아온 사례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물론 이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갖가지 색다른 증거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참으로 잘 살아보려고 진정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확인되고 반복적으로 검증된 훌륭한 것들 조차도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또 이 짧은 인생에 굳이 그런 것들로 다투며 인생을 낭비할 이유는 없지 싶어요.

Five Aggregates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왜 붓다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그리고 왜 이 Five Aggregates에 대한 참된 이해와 실천이 우리를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길이라고 강조하셨는지 먼저 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해요.

위에서 말한 버둑이를 통해서도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직접 경험했었지만, 아내가 몰던 작은차의 시작과 끝도 또 직접 경험했어요. 자동차의 시작과 끝이라니 좀 의아한 생각도 들겠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십년쯤 전에 마침 세일하던 작은 차를 아내 출퇴근을 위해서 좀 융자를 내서 샀었어요. 계기판에 6킬로인가 찍힌 새차를 처음 집으로 데려오던(?) 그 신나던 운전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요, 이후로 그 차는 ‘풍댕이차’라고 불리며 아내에게 10년 가까이 잘 봉사를 했었답니다. 어느날 그만 추돌사고가 나는 바람에 랙카차에 끌려가서 폐차되면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데요, 그 이후로 집에 남아있던 그 차의 두번째 열쇄를 볼때마다 이름모를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상에 태어난 한 물건이 폐차장을 통해 분해되어 차차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이 세상에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마찬가지로, 붓다께서는 이 Five Aggregates를 가르치시며,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개인은 이러한 다섯가지의 과정이 (process) 조화롭게 지속되고 반복되는 어떤 집합체이지 (마치 그 풍뎅이 자동차가 한때 수천개 부품의 조합으로 잘 움직였듯이) 그 안에 나를 나로 규정하는 절대적이고 변치않고 영속하는 어떤 것이 (Atman)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나’ 혹은 ‘자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그 강하디 강한 ‘집착’과 ‘갈애(욕망)’로 부터 자유를 찾고 장차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진정 편안하고 좋은 삶을 살다가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되며 저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연하자면, 아내의 차가 그 부품들이 조화롭게 작동하며 씽씽 달릴때 ‘풍댕이차’라는 또 다른 실체가 그 차에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말해 지금은 사라진 아내의 차가 그 부품이 조화를 이루어 지속적으로 작동될때 ‘풍댕이차’라는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처럼 취급을 받긴 했었지만, 사실상 그 당시에도 그리고 부품들이 부서지고 또 분해되고 난 지금도, 그런 ‘하나의 독립된 어떤 것’은 실제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뒤로 더 되돌아가서 따져보자면, 그 자동차의 부품들도 결국은 흙에서 (혹은 지구에서) 왔었던 것이었고 이제 서서히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우연히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고 할수 있네요.

버둑이도 마찬가지였지요. 안락사 시킨 버둑이를 집에 싣고와 잘싸서 미리 파두었던 뒷산에 묻으면서 우리 모두는 징징 짯어요. 이후로 가끔씩 무덤에 꽃을 올려 놓거나 찾아 가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잘 가지 않게 되네요. 그리고 차차 잘 깨닫게 되었어요. 버둑이도 그 어미개 아비개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이, 어떤 조건속에서 흙으로부터 와서, 조화롭게 반복되는 생명체의 과정으로 (process), 우리와 장난도 치고 돼지처럼 먹고 드렁드렁 코골면서 자다가, 암이라는 변화로 조화가 깨어지고 또 그 깨진 것을 땜질하여 겨우 이어붙여 한두해를 더 살다가 결국은 완전히 무너지면서 흙으로 되돌아 간것이라는 것을요. 버둑이의 사진과 비데오는 남아 있지만 그 사진 주인공의 실체는 이제 어디에도 없지요.

이런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너무나 어두운 느낌이 들고 어렵고 또 모욕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언제나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따져 보지도 않고서, 다만 죽은 버둑이를 묻으면서 ‘안녕 또 만나’ 하는 감정으로 엉엉 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잊기도 하고 또 주변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행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사람들과 더불어 흘러가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죽음 뒤에 또 다른 생이 있으며 (영생) 그리고 그때도 지금 ‘나’와 동일한 그 무었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환생) 믿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붓다의 가르침을 굳이 종교라고 이름 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어쩌면 유일하게 그러한 영생이나 환생을 주장하지도 또 가르치지도 않는 특이한 종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기복신앙 비슷하게 타락한 괴상한 불교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에 포함되지 않아요 🙂 오늘은 여기까지인데요, 다음번에는 그 유명한 이길녀선생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랍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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