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 그리고 인생무상

한국을 떠나와 이곳에서 산지도 이제 무척 오래 되었다. 물과 공기처럼 일상에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다가, 친구들이나 인터넷 매체등을 통하여 ‘한국’이라는 실체를 가끔 부닥치게 되면 새롭고 몹시 놀랄때가 있다. 특히 겉으로 쉽게 드러나며 변화하는 한국어를 통하여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수십년 만에 만난 친구가 서스럼없이 사용하던 ‘소확행’이라는 새로 만들어진 단어도 놀라웠지만, 예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단어, 예를들면 개를 ‘댕댕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을 보면서, 문득 만년설이나 빙하에 갖혀있던 맘모스가 깨어난 느낌이랄까(?) 혹은 혹성탈출 한참 후에 지구로 되돌아온 듯한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며 움직이는 지구를 인간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사는 것과 유사한가?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를 포함한 인간세상 그 모든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직접 체감하니, 이민와서 사는 어려움에 상응하는 어떤 철학적인 고찰의 기회를 홀로 누리는듯 기분이 좋기도 하다.

인터넷으로 본 신문에, 어떤 젊은이가 쓴 서울대 대학원 석사 논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이야 나와 관계가 없지만, 문득 그 논문 속에 사용된 어떤 단어에 눈길이 닿았다. 내가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한국어, 새로운 조어 ‘존버’라는 말이 논문에 사용되어 신문에 버젓이 나와 있었다. ‘소확행’과 마찬가지로, ‘존버’도 ‘존나게 버틴다’는 말의 첫짜를 따서 만든 신조어라고 한다. 젊은 세대들이 별생각없이 마치 옛날부터 존재하던 한국어의 일부인듯 꺼리낌없이 사용하는 이 ‘존나게’라는 말은, 조금만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즉시 알아차릴, 남자의 ‘성기가 튀어 나온’ 상태를 지칭하는 비속어, 욕이다. ‘너무 힘이 들거나 고생을 하다보니 마치 성기가 저절로 빠져 버린 듯하다’라는 뜻이라고 굳이 내가 설명해야겠니 🙂

하지만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에 따르면, 그런 상태에서는 그것이 반대로 쪼그라 들거나 안으로 들어가지 밖으로 돌출되지는 않는 듯 하던데… 고 김근태 선생. 지독한 고문의 결과로, 짐승으로 전락후 폭력 앞에 완전히 항복을 하고 그에 뒤따른 악마의 그림자 같은 자기파괴와 혐오를 불사조처럼 딛고 일어선 그 위대한 인간께서 진솔하게 해주신 말씀에 따르면, 그때 그 고문하던 나쁜넘들이, 나체상태로 물고문을 당하며 처절하게 망가진 자신의 모습 특히 쪼그라든 성기를 놀리면서 ‘민주화운동 하는 넘들은 성기 크기가 그것 밖에는 되지 않는가’ 놀렸다더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들이 옳고그름을 극렬히 따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며 또한 시대와 환경의 소산인 상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말년에 고문의 휴유증이 거의 확실한 파킨슨병등을 앓으시다가 64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그분에게, 말그대로 그분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위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는 분명한 사실을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새삼 밝혀 드리고 싶다. 파킨슨병에 걸리신 것도 모르고, 저분 국회의원 되시더니 목에 너무 힘을 주고 뻣뻣해졌다고 경솔히 생각했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며, 김근태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베풀어 준 소수는 목숨을 바쳤지만, 받은 다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고 그 흔적조차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요 또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한다. 인생무상이다.

다시 ‘존버’로 돌아와서. 우리세대 정도면 누구나 사용했었을 숫자 10혹은 18이 들어간 욕은, 그 10 이라는 한글 글짜의 기원이 여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 욕이라는 것을 나도 최근에 알았다. 물론 그 단어 자체가 비속어, 욕인줄이야 일찌기 알았었고 한때 즐겨 사용했었었지만 🙂 영어에도 유사한 것들이 있다. 당신도 들어보았을 그 F-word. 이곳에서도 일상에서 흔히 듣는다.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또 들을 수도 없다. 우리가 그 10자 들어가는 욕을 사무실에서 거의 하지 않듯이. 하지만 영어 단어에 fricking이라는 것이 있는데 가끔 들린다. 누구나 이말이 그 쌍욕을 애둘러 표현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서 쓰고 또 듣는다. 그리고 철자를 살짝 바꾼 fcuking이라는 단어도 있다. 모두들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데 보기에는 (기술적으로는) 그 쌍욕은 아니니 약간 이상하지만 애교로 봐주는 정도.

어쨋던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대학에서 출판된 석사논문에 ‘존버’같은 단어가, 옆에 친절한 해석까지 (‘매우 버틴다’는 뜻이라고 해석이 붙어 있더라) 달고서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서, 그 젊은이의 경솔함도 문제지만, 그 논문을 지도하고 승인한 교수는 도대체 어떤 자인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서울대학교 교수 정도 되려면 나이가 좀 있어야 할테고 그렇다면 이런 말을 척 보는 순간에 알아채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세상에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도 없고 또 언어나 문화를 포함하여 인간이 만들어 내거나 인간 주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도 변치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런 계기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니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을 밖에서 바라보고 또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참으로 대단한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속에서 각자각자 구성원들이 무슨생각을 어떻게 하면서 어떻게 살건 간에, 밖에서 오랜 시간 바라보면, 그 구성원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가 찍어낸 붕어빵과 다를바가 없는 언행을 하면서, 주어진 어떤 범위안에서, 자신은 개성있다는 일종의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우연히 두개의 매우 다른 붕어빵 기계를 거치면서 어쩌면 나쁘게 말하자면 좀 기형적이고 좋게 말하자면 좀 혜안 비슷한 것이 약간 생기지 않았나 싶다. 한 인간은, 평범하지 않은 방법과 노력 혹은 어떤 큰 우연에 의해서 이런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지 않고서는, 군집을 이루어 사는 한마리 개미나 한마리 벌과 궁극적으로 별반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다가 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면 무었이 달라질까? 글쎄 먹고 자고 싸는 일상이 뭐 달라질까만.

오늘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자신이 수년간 저질렀던 성추행 사실이 드러날 상황에, 스스로 쌓아 올렸던 어떤 상이 (이미지) 치명적으로 망가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상황을 영원히 피하는 일종의 선택을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실체가 없는 그 어떤 상을 (이미지) 가지고서 비서와 다른 사람들을 성추행 했었겠지. 그 여자들이 얼마나 배우고 똑똑한 여자들인데, 지나가는 ‘아무’ 중년 남자가 엉덩이를 슬쩍 스치기만 해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사람들이 수년을 침묵하며 괴로워 했었다더만. 그리고 또한 실체가 없는 자신이 만든 상을 (이미지) 지키느라 결국은 목숨을 바친 꼴이 아닌가. 그래서 지켜졌나? 그 상이 실체도 없지만 또 드러난 것을 보고서만 말하자면 어떤 것이었었던가? 아무런 상도 (이미지) 없는 보통 잡넘들은 지나가는 여자 엉덩이 만지고서 경찰서 잡혀가 혼나고 감옥에 간다고 쪽팔려서 미리 자살하지는 않지 않나?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상으로 (이미지) 세상을 (잘)살다가 바로 그 상에 의해 살해 당한 꼴이다. 그 자의 성추행을 고발했던 여성은 도리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지나 않으려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당신의 고발이 그자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자가 스스로 저질렀던 나쁜 짓과 그자 스스로 쌓아 올렸던 실체가 없는 상이 그자를 죽인 것이라니까.

오거돈이나 안희정이니 하는 사람들이 같은 패턴으로 정치 커리어나 인생을 종치는 것을 보면서, 그넘들 마누라들은 새대가리들인가 혹은 친구들은 전부 잡넘들인가 왜 어찌 한사람도 ‘젊은 여비서 혹은 이혼녀 여비서를 가까이 두며 출장 등을 함께 다니다가 잘못하면 ‘존’ 🙂 되니 남자나 할머니 비서로 당장 바꾸라’고 강력하게 강권하지 못했었던가 의아하다. 비서하려는 남자나 할머니가 아무도 없나? 한국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그 지랄하다가 종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전에는 호주 최고 대학교의 어떤 학장이 직원 여교수에게 음란문자등을 지속적으로 보내며 성추행을 하다가 (처음에는 서로 좋다고 같이 지랄을 하다가 나중에 여자가 그만하라는데도 계속하다가) 결국은 물러났다는 기사가 났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박사들이고 (여자는 무슨 심리학박사였던가 우하하하) 남자는 아카데믹세계 밖에서도 센넘들과 어울리던 명망있던(?) 늙은이였다. 유통기간이 지나 잘 작동도 되지 않는 ‘존’을 가지고 왜 그 지랄들인지 나로서는 정말 궁금하고 또 일종의 자괴감도 든다. 내 ‘존’만 유독이 유통기간이 지났나 싶어서 🙂

일전에 잘 모르면서 괜히 아는체 언급했었던 Five Aggregates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과 한번 나눠볼 희망으로 지금 티라다모스님의 설명을 십회 이상 듣고 있다 (1시간 정도 분량의 설법). 왜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분 설명 거의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Five Aggregates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고 해탈을 하고 열반을 성취한다고 five aggregates가 그 사람에게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명백하게 그것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고 또 종노릇 하지도 않는다.’ 위에서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면 무었이 달라질까?’ 했던 것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무상이다. 아무것도, 붕어빵도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이야기도, 영원하고 변치않는 것은 없다. 박원순도 안희정도 그 호주 학장도 또 성도착증 클린턴도 (그 유명한 아내에게 백악관에서 책으로 맞아서 코피를 질질 흘리고 또 쫒겨나서 서재에서 몇달씩 잤다더만) 결국은 그 어떤 것도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러하므로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중요한 이야기는 요 다음에.

낙엽은 지는데

마른잎 굴러 바람에 흩날릴때
생각나는 그사람 오늘도 기다리네

왜 이다지 그리워 하면서
왜 이렇게 잊어야 하나요

낙엽이지면 다시 온다던 당신
어이해서 못오나 낙엽은 지는데.

지금도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왜 이렇게 잊어야 하나요

낙엽이지면 다시 온다던 당신
어이해서 못오나 낙엽은 지는데.

백호빈

시간에 대한 단상

이곳에 와서 내가 처음으로 얻었던 직장의 상사가, 권고사직후 이삼년 지나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 도시니 그 사람이 생전에 몰고 다니던 차가 (가족들이 계속 몰았으니)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쇼핑센터나 시내길에 주차된 것을 몇차례 내가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다. 보통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차나 물건들이 왔다가 가는데, 그 경우에는 반대였던 좀 특이한 경우라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사람 생전에 그 차 몰고 다닐때, 자기가 죽고나서 그가 몰던 차는 여전히 거리를 오가는 상상을 해보았을까…

미국에는 플린스톤스라는 우리에게도 알려졌던 만화때문에 인간과 공룡이 공존했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아마 한국에서도 물어보면 긴가민가 할것이다. 공룡은 실존했었기에 당연히 화석은 물론 잘 보존된 뼈도 발굴이 되어 왔다. 현재까지 발굴된 공룡의 뼈로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것은 1990년 미국에서 발굴된 ‘수(Sue)’라고 이름지어진 공룡이라고 한다. 90% 정도 완전한 골격이 그대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 공룡이 생존했던 시기를 포함한 많은 자료들이 연구발표 되었다.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나서 이야기를 계속하자 – 위 링크에 가서 우측상단의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수 있다.

방금 그대와 내가 인터넷으로 본, 실제로 지구상에 6,700만년 전에 돌아다녔던 이 공룡 수(Sue)의 유골은, 우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전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6,000만년 이상의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밖으로 나왔으며, 현대문명을 이룬 인간에 의해서 그 실체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현대 문명을 이루고 산 기간을 200년이라고 가정하여 이것을 24시간 시계로 비유하자면, 이 공룡이 죽어서 묻혀있던 시간은 23시간59분59초 이상이고, 그 실체를 밝혀낸 현대문명은 약 0.3초 정도의 시간이라 할수 있다. 예수의 탄생부터를 현대문명으로 쳐준다고 해도 약3초 정도의 시간이 되겠다.

이글을 시작할때 죽은 매니져가 몰던 차가 돌아다니더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실존했던 공룡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할 꿈도 꾸지 못했던 까마득한 먼 옛날에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이제사 인간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관련된 시간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 – 20만년 전에 현인류가 (지금인류의 직계조상) 지구상에 탄생했는데, 이 시간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100번 반복한 시간이 되겠다.
  • – 500만년 전에 인류가 침팬지등으로 부터 분리되었다고 하는데 (인류와 유사한 조상의 시초), 이 시간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2,500번 반복한 시간이다.
  • – 6,700만년 전에 이 공룡 ‘수(Sue)’가 살았었는데, 이 공룡이 죽은 이후,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30,000번 이상 반복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위에서 언급한) 침팬지와 인류가 분리되고 인류와 유사한 조상이 지구상에 등장했었던 것이다.
  • – 그리고 현재 인류의 조상이 지구에 등장한 것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이때로부터 또 다시 3,000번 이상을 더 반복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나? 인간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나? 나도 그런 기분이 좀 든다. 또 어떤 생각이 드나? 인간의 역사도 또 한 인간의 삶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짧고 허무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나? 어떤 과학서적에서 이런 글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천체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로 평생을 보내고 나서 깨달은 (인간과 과학의 한계에 대한) 내생각을 비유로 표현하자면, 100층짜리 마천루 빌딩의 지하층에 우연히 들어간 바퀴벌레가 지하실 천정을 보면서 벌레의 능력으로 마천루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것 같다는 것이다.”

건방떨며 정신없이 살기보다는, 겸손히 한계를 받아들여 조용히 살아야 할 이유들이 내 생각에는 훨씬 더 많지 싶다. 종교니 과학이니 이념이니 투쟁이니 역사니 발전이니 하는, 우리 인간 삶의 실체를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방금 위에서 말했던 그 바퀴벌레 운운하던 과학자, 내 생각에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직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바퀴벌레이면서도 또한 결코 바퀴벌레로 남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과학자도 자신의 글을 아마 그런 말로 끝맺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무심코 베켜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대 그리고 나. 정신 차리고 살자.

블로그 2년

‘내 선택의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이 블로그를 써온지도 이제 2년이 되었네요. 2018년초 블로그를 시작할때 한해의 theme으로 ‘선택’을 선택했었는데, 그해에 정말 좋은 선택을 많이 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예요. ‘왜 기억을 못해요?’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삶에 의미가 있고 영향을 끼치는 그런 선택들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같은 선택과는 달리, 그 결과나 영향이 오랜 시간을 두고서 서서히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잘 알수 없는 것이지요.

이전 theme들중에서 기억나는 것들로는, ‘나는 내가 많이하고 자주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가 있었고요, ‘매일 읽고 써라. 그러면 내 삶이 그쪽으로 가게 된다’도 있었네요. 올해의 theme은 ‘갈등을 줄여 에너지를 내 삶에 집중하라’였는데요, 돌이켜 보건데 약간의 성과는 있었던것 같네요.

새해의 theme은 ‘거룩한 반복’으로 정할까 생각하고 있는데요, 일전에 제 블로그 글에서도 언급했었고 또 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책들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꾸 반복해서 듣게 되요. 온갖 좋은 생각과 이론 그리고 종교와 철학들이, 나와 주변사람들의 삶에 실제로 의미있는 도움을 주는가 하는것으로 궁극적인 결판이 난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는데요, 그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거룩한 반복’으로 이루어낸 ‘습관’이라고 확신합니다.

얼마전, 시내에서 일하는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오랜기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아이를 위로한답시고 했던 말이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입과 항문이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였는데요 (아이가 얼마나 impressed됬겠어요?) 차차 나이를 먹으면서 간경화가 생기는지 (간뎅이가 붓는지), 사람 사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그렇게 ‘이것이 좋다’ ‘저것을 해야한다’ ‘요것은 꼭’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이, 물론 현재의 삶이 그 시절의 결과임은 부정하지 않지만, 과연 우리 인간의 본성이며 우리가 마땅해 가야만 하는 유일한 길이었던가에는 상당한 의구심과 회의가 들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소위 ‘독고다이’인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의구심과 회의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도 들어요. ‘인생은 들판에 핀 풀꽃과 같다’는 한 유명한 스님의 말씀을, 년전에는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 이렇게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2년동안 이 블로그에, ‘잘난체 한수 가르치려는 글’을 쓴 적도 있었고, ‘강한 주관적인 생각이 담긴 글’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한때 100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썼던 적도 있었네요. 1000일을 희망했었는데 내공이 부족했어요. 저는 이렇게 블로그를 쓰고 읽으면서 내 자신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것 같아요. 결국은 제 좋자고 하는 일이지요 🙂

이곳은 큰 휴가를 앞둔 조용한 시기입니다. 블로그에 올렸던 지난 글들을 다시 되돌아 보며 정리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한해에 ‘거록한 반복’을 잘 쓰고 읽을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남은 2019년을 잘 마무리하고 좋은 2020년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인연

일전에 공원을 지나다가 우연히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벗꽃나무를 발견했어요. 이제 봄도 다가오고 하니 장차 벗꽃이 피면 아름답겠구나 싶어서 가보았어요.

키가 이미터 좀 넘을것 같고 나무 몸체도 별로 굵지 않아서 그리 오래전에 심은 나무는 아니겠다 생각하며 가까이 가보았더니 이곳에서 흔한 플라그가 나무 밑둥지에 설치되어 있었어요.

‘일본수상 하야토이케다 기념식수 1963년’ 이렇게 씌어 있네요.

이 사람 어떤 사람이었을까 혹시 아직 살아 있을까? 잠시 인터넷으로 찾아 보니, 이곳을 방문하여 바로 이 나무를 심은 그 다음해 쯤에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군요.

세월이 이미 반세기도 넘게 지났으니 이 사람이 잠시 머물렀던 이 공원 그리고 그때 많은 사람들과 좀 떠들썩하게 심었을지도 모를 이 나무를 기억하는 하는 사람은 어쩌면 세상에 아무도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벗꽃나무는, 이렇게 한쪽 구석에서 그 오랜 세월을 계절을 따라 꽃을 피우며 조용히 살고 있었네요. 그리고 그 일본 수상과 아무런 인연도 없던 내가, 이렇게 세월이 흐른 오늘, 이 나무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박인희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에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이런 가사가 문득 떠오르는군요. 사람들은 오고 가지만 사람들이 남긴 카르마는 죽은 이후에도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도 쉽게 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어요. 같은 자리에 서서, 앞서 왔다가 먼저 가버린 이 사람의 흔적을 보면서, 나도 내가 왔던 흔적 그리고 장차 내가 가고나서 남을 흔적을 생각해 보게 되네요.

다음번에 이곳을 지날때면 봄 기운이 더욱 완연하여 아마 벗꽃이 피겠지요. 그때는 다만 그 순간을 즐기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