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고향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
천리타향 낮선 거리 헤메는 발길
한잔 술에 설움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 하늘을 달려갑니다.

Win Win – 가야금과 고토

어제 코라 이야기를 했더니, 언젠가 보았던 한국 가야금과 일본 고토, 이 비슷한 두개의 전통악기에 관한 어떤 티비 도큐멘터리가 생각이 나네요. 나는 가야금과 거문고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인데요, 그때 내가 보고 감동했던 내용은 두 악기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또한 인간의 이야기기 때문에 오래 기억이 나요.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하고 또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들도 세상에 있으니, 가야금과 고토를 비교하면 어떤 악기가 더 우수한가 이런 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가 ‘politically correct’하자고 ‘세상 모든 문화는 다를뿐이지 우열은 없다’ 이렇게 겉으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다만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낫고 못한 우열이 있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이 솔찍한 심정이지 싶네요.

예를 들자면 나도 한국의 음식과 다른 아시아권 혹은 서구권 음식을 비교하면서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는 동남아시아 음식을 좋아한다’ 이런 말을 했을때, 나는 속으로 ‘그들이 음식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들이 (한국음식과 비교하면) 도대체 무었이 있는가’ 이따위로 생각을 했었다니까요 🙂 다른 방면에서도 그렇지만 음식을 통해서 보아도 한국인의 뛰어남이 음식에 그대로 베어 있다고 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동시에 그 음식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 혹은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음식에는 한국인의 번뜩이는 총명함과 재주가 베어있음과 동시에 다른 문화권에서는 광범위하게 다량으로 사용하지 않는, 강한 맛을 내는 향신료들을 자주 또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이것 우연도 아니고 또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지 싶네요.

좀 옆길로 셋는데요. 다시 가야금과 고토 그리고 win win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한국 최고 가야금 명인중의 한분이 일본에 갔어요. 그리고 일본 고토 최고 연주자와 함께 연주를 하고 또 대화를 하면서 가야금과 고토에 대해서 서로 배우고 또 좀 비교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두분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또 연세도 좀 있었던 것 같네요. 서로의 연주를 존경하며 예술가의 태도로 감상하고서 거의 마지막에 일본 고토의 명인이 말씀하세요 ‘나는 고토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고토를 위해서 일생을 바쳐왔어요. 오늘 한국의 가야금을 알게 되고 또 그 연주를 직접 듣게 되니, 나는 한국의 가야금이 (낼 수 있는 소리와 기교 그리고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의 광범위성등을 고려할때) 일본의 고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악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이었다고 나는 기억합니다. 이렇게 도큐멘터리는 끝이 났어요. 나는 악기 비교 연주도 감동적이었고 또 가야금을 연주했던 한국의 명인도 훌륭하셨지만, 자신의 솔찍한 감동을 밝힌 일본의 고토명인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게 되었어요.

세월이 지나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가야금이 더 나으냐 고토가 더 성능이 좋으냐 이런 이야기도 세상을 살면서 필요는 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정말 더 필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야금이나 고토를 가지고, 무었을 배워서 어떤 연주를 하며 어떻게 사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는, 어떤 장비 얼마나 좋은 무었을 ‘가지고’ 있는가가 인간의 행복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교훈을 나는 그 분을 통해서 배웠어요.

그 고토의 명인은, 그의 솔찍하고 훌륭한 태도로 말미암아 결국은 가야금도 훌륭하고 또 고토도 훌륭하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진심으로 동의하게 하는, 소위 말하는 win win을 만들어 내신 것이지요. ‘사자가 세냐 호랑이가 세냐’ 혹은 ‘재주 좋은 한국 음식이 무조건 튀기고 보는 짱게 음식보다 더 나으냐’ 하는 그런 수준보다 한두단계 위로 올라가신 것이지요. 그것이 정말 이기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는 결코 이기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일부러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위로 올려주고 또 자신도 더불어서 한두단계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간 것이지요. 이것 참 고수들이 만드는 win win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눈치 채셨나요? 일부러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에 바람을 잡았던 것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으니 하고 싶네요. 일본을 이기고 싶지요? 일본에게 존경받고 또 최소한 대등한 관계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지요? 그러려면 시장에서 다투는 잡상인들처럼, 우악스럽고 큰소리로 어거지를 써서 상대방의 입을 막고 내가 원하는 것을 힘으로 빼앗아 보려는 시도를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해야 해요. 서로가 상대방을 성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한 상대가 여태껏 내게 했던 것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순진한 이야기라고요? 교활한 상대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가는 당장 잡아먹힌다고요? 오십년전 백년전보다 세상은 훨씬 더 발전하였고 또 우리나라의 힘도 엄청나게 세졌어요. 누가 가야금을 가지고 있나요? 그러니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상대방과 발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지 싶어요.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특히 상대가 나보다 힘이 더 센 경우에는, 내가 ‘힘으로’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들’ 수는 결코 없어요. 언젠가 블로그에서 말했듯이 영어권에서는 ‘you earn respect’입니다. 인정과 존경은 ‘내가 무었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입니다. 어떤 힘으로도 그리고 아무리 악을 쓰고 발광을 해도 상대가 나를 참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외교란 ‘잘 치장된 방에서 잘 차려 입은 신사들이 매너있는 말을 나누고 있을때, 옆 방문을 슬그머니 열어서 그곳에 앉아 있는 사나운 불독개를 슬쩍 보여주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어요. 이렇게 싸워야 합니다. 당장 잘 차려 입은 신사에게 욕을 하고 구정물을 끼얹으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나중에 정말로 그넘의 불독에게 물려서 크게 다쳐요. 이것 알아채고, 상대방 불독이 지금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좀 조심해서 상대하면서, 우리도 불독을 기르고 또 살살 달래서 우리 불독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자꾸 상대를 해야 결국은 균형이 잡히게 되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커다란 불독으로 상대방이 우리에게 나쁜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면서도, 서로가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오가며 좀 국민들끼리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모두가 바라는 것 아닌가 싶네요. 그곳에도 좀 미친넘이 있고 그넘이 태평양 건너에 있는 더 미친넘과 한편이 되어 자기들의 이익을 함께 쫓는 꼴을 보면 우리는 불안하기도 하고 또 불쾌해요. 하지만 누구나 또 어떤 나라나 자기 능력껏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나무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길게 보면 이런 미친넘들은 그런 선진국 이런 현대사회에서 오래가는 주된 세력이 될 수는 없어요. 마치 우리나라에서 군사쿠데타가 더 이상 실제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세상은 돌아가는 어떤 방향과 수준이 있고 얼마 이상은 뒤로 혹은 아래로 되돌아 가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상대방까지 우리 가야금이 더 좋다는데도 우리가 너무 자신감 없이 행동해 온 것은 혹시 아닌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우리의 가야금에 대한 참된 자심감과 믿음을 스스로가 가질 수가 있을지 그래서 장차 우리도 일본의 고토가 매우 훌륭하다고 짐심으로 칭찬해 줄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 해야 되지 싶어요.

가야금을 연주하는 우리가 차차 고토를 연주하는 이웃과 대등하고 성숙한 관계로 서로의 음악을 평화롭고 진심으로 즐기게 되길 바래요. 인생은 싸우고 다투다가 가기에는 아깝고 또 한번 뿐이잖아요? 아이에게 늘 말해요 ‘자유롭게 살거라’ 물론 내가 저질렀던 과거사가 찔려서 또 내가 만들었던 카르마가 무서워서 하는 말인 것도 맞아요. 그래도 아이는 ‘응 아빠 알았어’ 합니다. 무심하고 진심인것 같아요. 그러면 되지 않나요? 우리 이렇게 좀 살아요 🙂

멋진 고토연주 그리고 이 아름다운 연주자가 고토에 맞춰서 부르는 우리의 아리랑을 함께 들어 봐요.

당나귀 마차

일전에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일부 보았었다. 그날 내용은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아내를, 남편이 잘 보살피며 그 아내가 오랬동안 원해 온 외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당나귀를 두마리 사서 마차 끄는 훈련을 무려 2년을 해서 결국은 그 꿈을 이룬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마비라서 자동차를 극도로 두려워한다던가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사람들의 외모와 언행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집을 보니, 단지 가난한 시골집이어서 뿐만이 아니라, 잡동사니를 온 천지에 쌓아 놓은 모습, 무질서 그리고 이런 저런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꼴을 보면서, 일단은 거부감이 먼저 드는 것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부인은 정말 슈렉을 닮았기에 일단 그 상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보다는 우스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미안하게도.

방아깨비처럼 바싹 마른 남편이 슈렉처럼 크고 뚱뚱한 아내를 극진히 보살핀다. 그리고 참으로 위해주며 조금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힘들어 하지 않는다.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보건데 대소변을 모두 받아주며 사는 것 같다. 참으로 대단한 부부애 인간애가 아닐 수가 없다. 내가 아내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나도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또 아내를 사랑하지만, 내가 이 사람과 동일하게 과연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좀 황당하게 보였지만 이 사람은 결국 그 당나귀들을 훈련시켜, 아내가 그토록 바랬던 그 바닷가에 함께 당나귀 마차를 타고 가더라. 리포터의 눈에 살짝 맺히는 눈물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주루룩 떨어졌다. 아! 이사람 정말 해탈한 사람인가보다. 세상에 무었이 그로 하여금 이런 깊이의 끝없는 사랑과 헌신이 가능케 했을까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그 리포터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록 이런 엄청난 사랑과 헌신에 감동은 하지만, 그 슈렉부인의 자리를, 그리고 그녀를 24시간 간병해야 하는 그 남편의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싶다.

우리 부부를 생각해 보자면, 나 보다 아내가 그렇게 배우자에게 해 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내가 어쩌면 몇권 더 읽었고 몇자 더 안다고, 아내보다 도가 더 튼 사람이라고 결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각보다 흔하고 또 누구도 자신이 예외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고고한 인생철학도 탁월한 수행도, 따뜻한 밥 한그릇먹고 괴롭지 않게 배설하고서 좀 편히 하루를 지내는 그런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 또한 우리삶의 적나라한 일면인 것이며, 이것들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겟지만, 동시에 이것들을 우습게 여기고 도외시하면서 건방 떨며 살다가는 장차 크게 부메랑을 얻어 맞지 싶다. 그리고 그때는 결코 아무런 처방도 대책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부족하고 짧으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기를 두려워하고 또 그 남편처럼 할 자신이 없는 내 자신을 싫어하고 부끄러워할 뿐이지만, 장차 세월이 흐르며 나도 조금씩 발전하노라면, 두려움도 줄고 또 싫어함과 부끄러움도 줄어들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리디아 고

일전에 ‘인경씨’이야기 하면서 한국계 뉴질랜드 교포골퍼 ‘리디아 고’ 이야기를 하기로 했었다.

리디아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때 뉴질랜드로 이민온, 지금은 이십대 초반이 된, 뉴질랜드인 프로골퍼다. 불과 일이년전만 하여도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고수했던 그야말로 세계최고의 여자 골퍼였다. 아내와 나도 LPGA골프 중계를 종종 보았었는데, 아내는 리디아의 팬이었다.

리디아의 아버지가 뛰어난 아마추어 골퍼인 연유로 어릴때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장타자는 아니지만 정확한 샷들과 좋은 숏게임으로 매이져를 비롯한 수많은 LPGA챔피언쉽에서 우승을 하였다. 스물이 덜 된 나이에 아마 백억은 벌었지 싶다.

뉴질랜드에서는 ‘우리의 리디아’ 하면서 누구나 그녀를 좋아하고 (플레이하는 태도도 좋고 또 티비에 인터뷰할때도 어른스럽고 튀지 않아서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았다) 그녀의 추락을 모두들 안타까워 한다.

나는 그녀의 경이로운 성공을 놀라워하면서도, 티비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볼때면, 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완벽하고 성숙한 대답’을 늘 ‘비슷한 내용과 톤’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같은 한국인으로서 무언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 아내는 괜히 샘내고 깍아 내린다고 하더라마는 🙂

한번은 티비에서 좀 특집으로 ‘리디아 고’에 대한 도큐멘터리 같은 것을 방영했던 적이 있었다. 수많은 훌륭한 성취와 몇 차례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중에서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참고로, 그녀는 14세 되는 시절에 LPGA 캐나다오픈을 우승하면서 세계 무대에 등장하여, 17세에 세계랭킹 1위 그리고 18세에 매이저 챔피언쉽에 우승하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교 시절이 그녀의 ‘프로골프’ 전성기였던 셈이다. 인터뷰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뭐 특별히 좋아 하는 음식이나 잘 먹는 것이 있니?’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없고 해주시는 것 다 잘먹어요. 그런데 한달에 한번 아이스크림 한 개를 먹을 수 있는데요 좋아해요. 하지만 어떤 달은 안먹고 그냥 넘어가는 달도 있어요’.

내가 이말을 듣는 순간에 ‘오잉 이게 무슨 말이냐?’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넌 무슨 기계 아니면 수도승 할아버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부모와 가까운 친척등이 소위 ‘리디아 군단’을 조직해서 (사실상 작은 회사와 같지 않나? 그 수익이) 그녀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단지 골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서 ‘관리’하신다고 하더라. 그런 ‘관리’의 결과로 그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저 리디아 하고 싶은데로 놓아두었었더라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가 없었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 이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순종적이고 착한 한국소녀’ 리디아에게 지긋이 붙어 있는 캐디가 없는거라. 그야말로 캐디 갈아치우기를 밥 먹듯이 하더라. 그 다음에는 코치 갈아치우기. 이 기사를 쓴 데이비드 리더베트라는 코치는, 내 기억에 타이거 우즈 같은 사람도 코치한 세계적인 코치인데, 이 사람을 갈아치우는 것은 물론이요 그 뒤로도 수 많은 세계적인 그리고 또 듣도보도 못한 코치들이 왔다가 가는거라. 이상하지 않나? 리디아의 어두운 뒷면? 아니지. 리디아 뒤에서 누군가가 하는 짓이었지. 캐디, 코치 바꾸기를 밥먹듯이 하고난 다음에는 장비 바꾸기에 돌입.

나의 아내, 자칭 ‘나를 알고 또 내 수준에 맞는 유일하고 무료인 골프 코치’께서도 이야기 하기를 ‘골프는 일관성의 운동이니 제발 이랫다 저랫다 쥐랄을 좀 하지말고 지긋이 해보라’는 골프 최고의 진리를 힘주어 여러번 말씀하셨다. 핸디도 없는 내 아내도 아는 진리를 리디아 뒤에 있는 그 사람들은 왜 ‘더 이상’ 모르는 것일까? 이전에는 ‘아이스크림 한달에 한개’처럼 극단적으로 일관성을 추구 하더만.

리디아 성공의 요인이, ‘리디아가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는 그 과정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제 리디아 실패의 요인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순종적인 ‘아이’ 리디아. 스물이 넘었는데도,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허락하지도 않고 또 도와주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 왜요? 눈이 잘 안보여요 🙂 내가 사이비 도인으로 리디아의 추락을 보면서 딱 한마디 했었다. ‘그녀가 이제 girl에서 woman으로 바뀌고 있는데, 이 세상 그 무었도 이 과정을 세우거나 변화 시킬 수가 없다’.

이 기사에서, 세계적인 코치라는 데이비드 리더베터는, 그녀의 부모를 비난하며 ‘그 무지함이 실로 상상하기 어렵다’고 표현했었다. 영어권에서는 정말 심한 비난이다. 물론 전에 코치하다가 잘렸으니 사심도 좀 있겠지, 하지만 데이비드 리더베터의 표현에 따르면 ‘부모의 무지가 리디아를 세계최고의 골퍼에서 이제는 평범한 골퍼로 추락시킨 요인’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리디아를 관리하여 큰 성공을 이루어 냈던 그 똑똑한 사람들이 한가지 못하는 것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내려 오는가’ ‘어떻게 놓아 주는가’ ‘어떻게 그녀가 행복하게 살게 도와 주는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 아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알려고 한 적도 없지 싶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것들에 대한 해답은, 그런 ‘관리 잘하는 사람들’로부터 결코 나올 수가 없다. 바로 이게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한 인간이 두가지 상반된 것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 누군가를 ‘관리’하면서 오래 살다보면 세상을 ‘관리의 시각’으로 보게 되고 흡사 인간의 삶이 ‘관리의 대상’으로 착각하여 보이게 되는 것이다.

‘관리’하면 떠오르는, ‘스카이 케슬’이라는 드라마를 한두편 본 적이 있다. 인기도 좋고 또 열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며? 훌륭하십니다. 계속 그렇게 사세요… 그런 사람들이 들으면, 내 행색을 아래위로 흩어 보면서, 콧웃음을 치거나 펄쩍 뛰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게 다 가난을 면치 못한 꼴이다. 부유함이 무었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110원 가지면 100원 가진 것보다 부유하다고 일차원적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 가난인 줄 깨닫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인의 카르마인가 싶다. 카르마에 좌지우지 되고 있을때는 당사자가 그 카르마를 자각하기가 정말 힘들다.

리디아가 인터뷰하는 말을 들으며 이 나라 사람들은 ‘어린 것이 참 성숙하다’ 좋게 생각했었을 것이다. 같은 한국인인 내가 그때 느끼기에는 ‘저것 누가 써 준 것을 외워서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말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녀 뒤에 있는, 그녀를 관리하는 그 자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던 것이라 짐작했었다. 어리버리한 리디아. 아니 어리버리하게 만들어진 리디아. 정말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녀도 예외없이 겪어야 하는데, 그 뒤에 있는 ‘취한’ (술만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요) 부모와 관리전문가들 덕분에 그 과정이 험난해 보인다.

‘마이 해뭇다 아이가? 가가 고마 대학 가서 연애도 하고 술도 퍼묵고 공부에도 시달리고 하면서 정상적으로 커구로 이제라도 좀 나조라.’ 이것 지금 안하면 장차 그 백억을 다 써도 행복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결국은 행복하자고 모두들 이런 쥐랄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행복이 또 다시 트로피를 ‘당장’ 들어 올리는데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카르마가 카르마인 것은,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때 그 당사자가 그것이 카르마인 줄을 깨닫기가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지만, 만약 깨닫는다면, 그 순간부터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덴마크영화 Lykke-Per, 네번째 이야기

페르가 파탄에 이르는 장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역시 카르마가 주제입니다. 그 유대인 가족과 매우 가깝게 된 페르. 아름답고 이지적인 딸 야코버와는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고, 돈 많은 그녀의 아버지와 삼촌등은 페르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거대한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페르가 꿈에도 그리던 그 프로젝트를 이제 시작할 단계에 이르렀어요.

그 당시 덴마크에서는, 이런 대규모의 토목프로젝트들이 정부기관의 검토를 거쳐 사전 승인을 얻어야 했어요. 그 유대인 가족이 손을 써서 그 과정을 쉽고 빨리 끝내게 도와주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선사업가가 아니고, 장기적인 엄청난 이윤을 위해, 사람과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는 큰 사업가들입니다. 페르는 그들의 소개에 따라서, 정부기관에서 이런 일을 맡아서 하는 그 고위 공무원을 만나러 갔어요. 딱 한사람이 이 일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아!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하필이면 이 공무원이 군인장교 출신으로 ‘권위나 위계질서’ 같이 페르가 너무도 상처받고 싫어하는 그런 것들을 따지는 인물이었던 거예요.

약속한 두번째 방문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 고위 공무원. 듣자하니 자기를 끼워줘야만 승인을 고려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 같군요. 자존심 강한 페르는 (사실은 ‘상처가 큰 페르’가 더 맞는 표현이겠지요) 이 고위 공무원의 태도에 불쾌해하며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받았다고 느낀 그 모욕의 몇배를 절대적으로 도움을 받아야만할 이 인물에게 되돌려 주고서 사무실을 나옵니다. 큰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업가와 주변 사람들은 경험도 많고 연줄도 많고 또 돈도 많습니다. 다시 한번 페르를 위해서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이번에는 모든 투자자들을 전부 초대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그 고위 공무원이 오기로 되어 있어요. 몰론 돈을 좀 주었겠지요. 한가지 조건이면 이 프로젝트를 그자리에서 승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투자자들은 즉시 컨소시움을 만들어 페르의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게 되는 거지요. 그 한가지 조건은, 페르가 지난번에 했던 모욕적인 말에 사과를 하는 것이예요. 갑자기 이런 사실을 듣게 된 페르는 당황합니다. 하지만 사과 한마디면, 이제 그의 엄청난 행운이 어마어마한 행복으로 바뀔 절대적으로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 고위 공무원이 약속한 시간에 방으로 들어 옵니다. 사과의 시간. 페르가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순간 그를 평생 따라 다니던 망령이 다시 그를 에워싸며 지배합니다. 페르의 머리가 휘리릭 돌아 버리는군요. 더 심한 모욕을 그 공무원에게 퍼붓고는 페르는 그 자리를 뜹니다. 어쩌면 아버지(같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하고 싶었던 그런 반항의 말이었던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오고 말았어요. 아무도, 어떤 돈도 이 상황을 되돌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투자자들은 모두 떠나고 그 돈 많은 유대인 가족도 이제는 ‘아! 이 사람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구나. 함께 이런 일을 도모할 상대가 아니다’ 깨닫게 되고 손을 듭니다.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었네요. 그 엄청난 행운을, 페르는 자기손으로, 마치 유리병을 콘크리트 바닥에 있는 힘껏 내던져 산산조각 내듯이, 송두리채 박살 내고야 말았습니다. 페르 나름대로는 할 말이 많겠지요. 하지만 원래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렇답니다. 이곳에서 하는 말이 있어요. ‘백가지의 성공은 한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지만, 백가지의 실패는 백가지의 각기 다른 이유들이 있다’.

야코버도 떠나고 말았을까요? 아름답고 품위있는 야코버는 일편단심 페르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고 또 그 결과로 성공의 기회를 송두리째 날려버렸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나의 페르입니다. 돈은 내게도 있어요. 그리고 나에겐 페르만 있으면 됩니다. 야코버는 페르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둘만의 영국여행을 계획합니다. 그 계획을 의논하던 카페에서, 페르는 야코버에게 갑자기 (약혼의) 파혼과 결별을 선언합니다. 페르의 마음이 변했을까요? 아닙니다. 야코버를 사랑하지만, 페르의 ‘카르마가 속삭이는 바’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야코버에게서 받는 사랑은 동정이며, 또 이런 비참한 자신에게 야코버를 묶어 두는 것은 자신에게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 되는 것이겠지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가 살아온 삶이, 그가 성장하고 자라며 (어떤 환경이나 이유로 말미암아) 생긴 ‘마음을 쓰는 습관’이 그로 하여금 이런식으로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럴때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래서 ‘습관이 카르마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카르마가 팔자를 바꾼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파혼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 하던 야코버는 이제 (모든) 결혼을 포기합니다. 그녀는 이미 페르와 영원한 가약을 맺었었습니다. 페르와 사이에서 임신한 아기를 (그에게 말해 줄 기회조차 없이 그는 떠나고 말았어요) 아무도 모르게 유산시킵니다. 되돌아와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부탁을 합니다. ‘제가 물려 받을 몫의 재산을 미리 좀 주시면 안되겠어요?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싶습니다.’ 야코버는 교장선생님이 되어 큰 heart로 수많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큰 엄마가 됩니다.

오늘 이 영화 이야기를 마치는 것이 좋겠네요. 계속합니다. 페르는 자기의 카르마와 그로 말미암아 한계 지어진 자신의 삶을 차차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아내의 삶에 더 이상 자신의 카르마가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 갑니다.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곳에서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사는 삶을 선택합니다. 참 안타까운 운명이지요? 마음 아프군요. 하지만 그는 이런 삶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페르와 야코버. 파혼한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의 소식은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이제 세월이 흘러서 두 사람 모두 많이 늙었습니다. 페르가 야코버의 학교에 편지를 보내 그녀를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페르는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어요. 야코버는 먼 길을 달려 페르가 홀로 사는 그 외딴 집으로 찾아옵니다. 페르는 야코버를 위해서 차를 끓여 떨리는 손으로 부어 줍니다. 그리고 오랬동안 조금씩 저축했던 작은 유산을 야코버의 학교에 기부합니다. 그의 풍차 모델과 설계도도 함께요.

내가 당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가 묻는 페르에게 야코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과 더불어 나누었던 기쁨과 슬픔이 나의 삶을 영글게 했고 오늘의 나를 만들었어요. 내 인생에 일어난 어떤 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알게 되서 좋았습니다.’  자코바는 그 돈을 받고나서 페르의 손을 잡으며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말합니다. ‘그 학교는 당신과 내가 함께 세운 것이나 다를바가 없어요.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당신과 나의 아이들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아요’ 이렇게 말이예요. 영화는 이쯤에서 끝이 납니다.

이 영화와 관련된 몇 가지 단상들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