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의 비밀, 행복의 비밀

두 갈래의 길

70년을 함께 해로한 부부가 있다. 남편은 아흔이 넘었고 아내도 팔십대 중반이 되도록 함께 농사를 지으며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이다. 두 분 모두 손마디가 굵고 손톱이 다 닳았다. 그 손으로 논농사 밭농사 지어, 우리 같은 city boys & girls도 먹이고 또 두분과 가족들도 생활을 해 오셨겠지. 금슬이 참 좋아 보여, 나도 아내와 더불어 그렇게 익어 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다.

두 가지 장수의 비밀 그리고 행복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 부부는 오랜 세월 동안 더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그들의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도와 왔다. 요새도 때로 점심을 차려서 동네에 홀로 된 상노인께 가져다 드릴뿐만 아니라 먹여 드리고 또 식사를 하는 동안 말동무가 되어 드린다. 자선과 자비를 오래 베풀어 오셨다. 할아버지께서 말씀 하신다. ‘남들을 속이고 나쁘게 하면 내 마음에 괴로움이 가득차지만 남들을 돕고 좋게 하면 내 마음에 웃음꽃이 피나니 그 웃음꽃이 장수의 비밀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논밭에 오늘도 어김없이 일을 하러 와서는, 두 번째 비밀을 알려 주신다. ‘내가 100살이 될 때 까지만 일을 하고 그 다음에는 논밭을 팔아 (또 모은 돈으로) 다른 노인들을 위한 재단을 하나 만들겠다.’ 할머니는 이런 할아버지와 늘 마음이 잘 맞다고 하신다. 아! 참으로 훌륭하시다 두 분 모두.

‘하늘 밑 단 한 사람 그대’ – 제목도 로맨틱하게 🙂


또 다른 커플.

이 두 분은 부부는 아니지만 멀고 먼 외딴 섬에서 함께 살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한 분은 토오쿄오 대학교에서 불교관련 박사학위를, 또 한 분은 쿄오토오 대학교에서 불교관련 박사학위를 받은, 대단히 많이 배우고 크게 공부한 사람들이다. 전 세계를 다니며 훌륭한 스승들을 찾아 인생의 해답을 듣고 가르침을 얻고자 오랬동안 노력해 온 분들이다.
일본 선불교 그리고 한국의 간화선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또 수행하며 사시는 분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글을 읽어 보니 훌륭한 내용들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는데, 나 같은 사람이 보아도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분들의 웹사이트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골프의 참된 즐거움은 ‘치는’데서 온다. 오직 특별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즐거움을 ‘연구하거나 가르치는’데서 찾는다.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특별한 극소수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 치는 사람들 중에서 극소수가 어떤 인연에 의해 그 특별한 길을 저절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순서가 바뀔 수가 없고 또 그 특별한 길이 더 큰 ‘참된 즐거움’을 보장하는 것도 아닐 것이라 나는 믿는다.

삶이란 온 몸으로 사는 것이기에, 삶의 본질이 무었인지는 알고 있으되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사는 것이 참된 삶이라 생각한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 내가 입는 옷, 거쳐하는 집, 블로그에 관련된 기술등등 지금 나의 삶을 가능케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손발과 머리로 땀흘려 노력하여 만들어낸 실체요 은혜이기에, 내가 이 조건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내게 있어서 삶이란 온 몸으로 부대끼며 인연과 은혜를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요, 해탈은 그 안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두 분 박사님들께서는 그토록 원하던 해답을 얻었고 또 행복을 찾으셨을까? 그 촌로 부부께서는 ‘오늘’ 행복해 보이시던데…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할 것은 없지만…

레지나 보따리장사, 매리 레인보우

기차 혹은 기차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근래에 ‘인도 국경을 지나는 기차들’ 이라는 3부작 BBC 도큐멘터리를 보다가, ‘레지나’라는 네팔 여자의 삶을 잠시 옅볼 기회가 있었다.

레지나는 네팔과 인도 국경간 몇 십킬로 구간을 오가는 그 완전 고물 기차의 단골 고객이다. 그녀는 네팔 상점들에서 (고객들이) 원하는 물건들을, 인도에서 사다가 기차로 밀반입 해주고 얻는 적은 수수료로 아들 둘과 함께 사는 여자다. 십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서는 열아홉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 받고 그때부터 두 아이들을 기르며 홀로 살아 왔다. 최빈국에서도 하층 삶을 산다.

비록 국경은 없으나, 때때로 네팔 군경들이 기차가 도착할 때를 기다렸다가 출입구를 막고 밀수를 단속하여 물건들을 압수한다. 관세를 내야만 되찾을 수 있는데, 하루벌어 하루먹는데 무슨 관세를 어떻게 내나… 도큐멘터리 속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데, 레지나는 죽을 힘을 다해 보따리를 지키려고 하고 다만 하나라도 빼돌려 담장 밖으로 아들과 함께 가지고 나가려고 사력을 다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며 슬퍼한다.

레지나는 ‘unshakable spirit’의 소유자다. 달리 좋은 표현을 잘 모르겠다. ‘불굴의 영혼’? 그녀는 보따리장사지만, 가수요 신앙인이며 또한 달변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하버드 옥스포드 박사들이 쓴 그 어떤 책들 보다도 더 많은 훌륭한 가르침을 나는 레지나에게서 받는다.

밀수품 보따리를 잔뜩 실고 가는 고물 기차에서 노래하던 레지나. 무슬렘이면서도 힌두교 큰 축제때 염소 한 마리를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도 바치던 레지나. 그녀가 말한다 ‘그들의 신과 나의 신이 다르지 않다. 오직 인간의 마음이 분별할 뿐이다’. 다음날 떠날 기차를 기다리며 허름한 곳에서 고단한 몸을 누이면서 ‘비록 거적때기지만 (어떤 사람들처럼 몸을 팔지 않고) 내 손으로 벌어서 산 내 것 위에 눕는다’고 말하던 레지나. 자라나는 아들들이 엄마를 위해주고 또 밖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여 작은 돈이라도 벌어 오는데 감동해서 기뻐하던 엄마 레지나. 그때 레지나가 말하더라. ‘내 삶이 하도 힘이 들어서,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꺼졌다는 생각에 죽고 싶었던 적도 많았었다’고.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이리 잘 해주니 내 영혼이 충만하고 기쁘다’고 (Now my soul is content). 죽기 살기로 보따리 장사를 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하루벌어 하루먹으니. 그 고물 기차가 자기에게는 삶의 터전이요 기쁨이요 신 (god)이라고 하던 레지나.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이 훌륭한 인간을, 그 불굴의 의지를, 그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고 싶다.

이제 그 고물 기차는 영원히 멈추었고, 협괘는 부서졌으며, 낡은 역건물은 허물어졌다. 중국과 인도의 자본을 들여와, 세 나라를 연결하는 최신식 기차를 네팔 정부가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아! 레지나. 잘 살고 있기를…


아내가 만든 새로운 음식을 ‘레인보우 매리’라고 명명하였다. 여러가지의 채소를 오븐에 구운 다음에, 한 두가지 소스를 위에 뿌린 것이다. 맛있겠나 🙂 ‘매리 베리’라는 우리 내외가 좋아하는 요리사로부터 티비를 보며 배운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내가 음식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매리의 무지개’.

매리는 84살 할머니 요리사인데, 지금도 현역으로 티비에서 요리를 가르치고 또 책도 쓰고 한다. 영어권에서 가장 알려진 요리사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왼손이, 아마도 류머티스 때문에, 손가락들이 기형이 되어 제 구실을 못한다. 얼굴은 화장을 하지만 목 아래로는 쪼글쪼글한 상할머니다. 그 연세에 그 손으로, 보통 사람들이 만들기 쉽고 또 좋아할 음식들을 소개하고 또 쉽게 배우도록 도와 준다. 은근한 진짜 유머도 있고 또 멋도 잘 부린다. 우리 내외가 좋아하기도 하고 또한 존경한다. 이 분은 끝까지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지켜내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태워 촛불을 밝혀 자신에게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빛을 그리고 기쁨을 주는 삶을 산다. ‘래인보우 매리’를 함께 먹으면서 아내에게 ‘당신도 아마 저 분처럼 살게 될 것이오’ 덕담을 건넨다. 어떤 사람들은 흡사 그런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똑같이 힘들고 아무것도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레지나 보다 어쩌면 수 백배 더 부유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리 베리 할머니 보다 월등히 젊고 좋은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환경이 인간을 좌우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또 인간의 행복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노력해서 홀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계단,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스스로 알아내어 스스로 올라야 하는, 그 계단이 인간의 품격을 결정짓고, 행과 불행을 좌우하며 또한 해탈 열반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기차에 사람들이 매달리고 지붕에 잔뜩 앉고 또 동물들과 사람들이 섞여 있는 그런 사진을 보면, ‘아! 어떻게 저렇게 사나’ 생각했었다. 마치 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동물들과 비슷한 수준인 것처럼. 레지나를 알게 된 나는 이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와 똑 같은 삶이 그곳에도 있다는, 어쩌면 어처구니 없도록 명백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품격은, 그가 무었을 먹고 입고 어떤 차를 타고 집에 사는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되기에.

레지나 그리고 매리 베리. 두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을 본다.

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2

영어에 ‘dignity’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으로는 ‘존엄’ 정도로 번역되는 듯 한데 좀 부족한 느낌이다. 어떤 사전에는 ‘위엄, 존엄, 관록, 품위, 체면, 위신’ 이렇게 잔뜩 대응되는 단어들을 늘어 놓았던데 어쩌면 이것을 전부 다 합쳐도 실제로 dignity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렵지 싶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왜 이런 dignity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을까? 아프리카 스와힐리어에는 에스키모의 언어에서만큼 ‘눈'(snow)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들에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일까.

오바마여사의 자서전 전반을 통하여 내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dignity라고 하겠기에 서론이 좀 길었다. 무슨 어떤 dignity인지를 오바마여사의 자서전을 통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무었이 dignity가 아닌지를 오바마 대통령 부부를 이어 지금 그 크고 흰 집에 살고 있는 부부를 통해서 먼저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새로 영부인이 된 그 여자는 일찍부터 빼어난 몸을 밑천으로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아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돈이나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 즐기며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 소위 말해 궁합이 잘 맞는 부부라고나 할까. 이 여자가,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싼 옷을 입고, 한국여자가 신으면 키가 졸지에 2배로 커질 하이힐을 신고, 머리에는 FLOTUS (미국영부인) 라고 크게 쓰인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그 모습에 dignity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큰 집에 들어가기 이전에, 무었을 위해 그리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 왔고, 어떤 비젼과 희망을 지금 POTUS (미국대통령)가 된 배우자와 나누며 함께 이루려고 하는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 속에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들의 삶 속에 dignity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이런 사진들이 하이라이트인 삶을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고 있을때, 오바마 여사는 시카고 외곽 흙수저 가정에서, 오직 부모의 헌신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고의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5대 로펌에서 그리고 시카고의 사회단체들과 시립병원등에서 일했었다. 한 인간이, 과거 한때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가지고 마치 인간은 결코 변치 않는 존재인양 폄하하거나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한쪽 길을 오래 걷게 되면 그 길과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좀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똥물속에 잠수를 너무 오래하고 나면 그 물이 장차 샘물로 바뀌고 나서도 이미 대가리 속에 든 똥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

오바마 여사는 그녀의 자서전, 지난 2주 동안에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한 (발매 첫 주에만 140만귄이 팔렸다고 한다) 그 책을 통하여, 미국영부인을 포함한 이 세상 누구에게도 dignity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개인적이고 은밀하며 어쩌면 치부로도 보일 수 있는 내면의 갈등과 인간적인 괴로움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과정등을 가감없이 솔찍하게 말하였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 놓듯이. 이것이 dignity요, 오직 평생을 통하여 진실하게 dignity가 있는 삶을 살아 왔던 그녀이기에 또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살’ (Bodhisattva)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을 터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이 시대를 사는 보살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녀의 dignity로써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FLOTUS로서 지혜와 용기 그리고 힘과 능력으로 미국을, 어쩌면 세상을 바꾼 그 큰 업적들 때문이기도 하다.

내 카르마를 따라 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시대의 보살은, 수 백년 전 혹은 수 천년 전 사람들이 그 당시의 지적 수준과 세계관으로 붓다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님긴 책들을 평생 붙들고 씨름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이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지 싶다. 바로 그녀처럼, 바로 이 시대 이 현실속에서, 지금 닥친 난관과 좌절을 극복하며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찾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 있지 않을까? 올해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과학자 혼조 다스쿠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네이쳐나 사이언스같은 세계적인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의 90%는 10년만 지나도 거짓말로 밝혀진다’면서 자신은, 기존의 이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연구를 계속하기 보다는 일일이 스스로 확인하여 납득할 수 있을 때에만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하물며 현대 인터넷 시대의 첨단 과학 이론들이 이지경인데, 천 년 혹은 이천 년 전 옛날 사람들이 그 당시 수준으로 써서 남긴 이론들은? 손기정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이 위대한 것은 그때 그 당시 최고의 기록으로 올림픽을 제패했었기 때문이지, 그분의 2시간 29분이라는 올림픽 기록이 절대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기록으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아마츄어 마라토너들은 지금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당시 그 상황에서 훌륭하셨다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이고 변치 않는 기록을 (진리를) 남기신 것을 액면 그대로 대대손손 기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미국인들에게 그녀는 ‘유인원’ ‘늘 성난 뇬’ ‘엉덩이가 산만한 뇬’뿐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그런 모욕과 좌절 그리고 차별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사는 소수들을 위하여 (여자라서, 백인이 아니라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태어난 곳이 후져서, 부모가 흙수저라서) 용기를 주고 빛을 밝히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와 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그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소수들을 대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그들이 아니면 자기 자신이 그 더럽고 힘든 일들을 직접해야 한다는 ‘게으름’, 그들과 나누면 내것이 줄어든다는 ‘욕심’, 우리 증조부가 탈출한 흑인노예 잡으러 다니던 보안관이었는데 내 딸이 어떻게 흑인과 (장차 영부인이 되건 말건 알게 뭐냐) 기숙사에서 한 방을 사용할 수가 있는가를 미려한 언어와 배우자의 힘으로 대학에 관철시켜 딸의 기숙사 방을 바꾸었던, 그 부모의 ‘무지와 증오’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 싶다.

자신이 살아온 그 작은 세계, 그 가정, 그 지역, 그 대학, 그 회사, 그 나라가 마치 우주의 유일한 중심이며, 원래부터 늘 그랬던 그 무었이라 믿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바마여사가 그녀의 자서전을 통하여 조용하고 품위있지만 힘있게 전달하려는 매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들 이전에 ‘눈'(snow)은 이미 늘 언제나 존재해 왔고, 세상에는 나의 이 작은 세계 (그리고 이 제한된 시간) 이외에도 수 없이 다양한 다른 세계들이 존재하며,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더 좋겠다’라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노력하자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직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의 발로 서고 괴로운 과정을 극복하여 성취를 이루어 본 그녀 같은 사람들만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위에, 타인들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을 함께 개선 하려는 사심없는 노력을 할 수 있지 싶다.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을 읽으며 인간의 참된 품위와 가치 그리고 dignity를 배우며 또 생각한다.

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1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미셸 오바마 여사가, 최근에 출판한 자서전 ‘Becoming’을 읽고 있다. 읽으면서 생각도 많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블로그 옷을 새로 갈아 입혔는데, 이 멋진 사진들은 어디서 왔는가 혹시 합성 사진들인가 궁금해 할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그 대답을 영상으로 준비하였다.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다루어지는 ‘그 주제’를 내가 이야기 하는데에도 관련이 있다. 2개의 영상을 준비하였다. 한 10분 투자하면 좋은 구경도 하고, 사진들에 대한 궁금증도 풀리고 또 곧 올릴 블로그 글들에 대한 전이해도 좀 생기지 싶다.

E Ihowā Atua
O ngā iwi mātou rā
Āta whakarangona
Me aroha noa
Kia hua ko te pai
Kia tau tō atawhai
Manaakitia mai
Aotearoa

God of Nations at Thy feet
In the bonds of love we meet
Hear our voices, we entreat
God defend our free land.
Guard Pacific’s triple star
From the shafts of strife and war
Make her praises heard afar
God defend New Zealand.

Men of every creed and race
Gather here before Thy face
Asking Thee to bless this place
God defend our free land.
From dissension, envy, hate
And corruption guard our state
Make our country good and great
God defend New Zealand.

그렇다. 방금 그대들은 뉴질랜드 국가를 뜬금없이 두번이나 들었다 🙂 그리고 그 국가를 영어가 아닌 언어로 1절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어쩌면, 그 옛날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고 또 어머니은혜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경우, 처음 입대해서 힘든 기본군사훈련을 마치며 수료식에서 불렀던 애국가, 그리고 짓굳은 조교가, 비오는날 진흙탕 속에서 훈련을 마치는 끝에 일부러 부르게 했던 어머니은혜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경험을 공감하는 그대 조차도 좀 상상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은,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나라의 국가 1절을 이상한 언어로, 태어난 나라도 피부색도 모국어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다 함께 부르는 모습, 남의 나라 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몰래 훔치는 한 중년 남자, 그리고 미셸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에서 그렇게도 충격적이고 상세하게 묘사된 소수인종으로 (마이너리티로) 산다는 것의 의미지 싶다.

한 손에 총을 든 이십대의 내가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애국가가 ‘내가 지킬 조국이여 영원하라’였었다면, 이제 한 손에 아내의 손을 잡고 중년의 내가 아이의 졸업식에서 부르는 이 남의 나라 국가는 ‘내게 평화로운 삶과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행복을 준 아름다운 나라여 감사하다’이기에, 나는 이 두 구절을 부를때면 늘 눈물이 난다. 위대하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거대한 희망 보다는, 오늘 하루 서로 다투지 말고 좀 잘 해주면서 지내자는 바로 이 작은 소망들이.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얼핏 보기에 어리버리하고 순박한 촌넘들 사이에 내가 섞여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의 유대로 우리가 만나고…
불화와 질투, 증오와 부패에서 우리를 지키고…

타클라마칸 –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그 인연

오랜만이다. 시간도 많았고 생각도 있었지만 쓰기가 어려웠다. 한 수 가르치려는 내용, 비난하는 내용, 그리고 나 잘났네 하는 내용, 이 세가지를 빼고 나니 쓸것이 없더라.

타클라마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두 바닥 인생이, 각자의 인연속에서 살아 오다가 우연히 엮이게 되고, 어떤 결말을 맺게 되는데, 그 결말이 각자가 지나온 삶에서 지은 인연이 결국은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잔인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한때 건설업쪽에서 잘 나갔었지만 부도를 냈고, 배우자로부터 멸시와 냉담 속에서 이혼을 당했고, 십대초반의 아들이 하나 있으며 (엄마와 살지만 아빠를 좋아 한다) 노모와 둘이 산다. 노모가 싸주는 도시락과 보온병을 가지고, 봉고차를 몰며 고물을 사서 (혹은 때때로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어쩌면 괜찮은 대학을 나왔을 것이다.

그 여자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좋다. 네일아트를 하고 싶어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다리의 한 계단도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비슷한 수준의 여자를 (나이 많은 거리의 통기타 노래꾼 – 현실을 회피하는 사람) 우연히 만나서 동성애로 발전하며 함께 잠시 낭만을 나누기도 하지만, 현실의 무게를 견딜 방법이 없어,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다가 장차 몸을 팔게 된다. 그 첫번째 그리고 생의 마지막 손님이 바로 그 남자.

늘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우연의 장난으로, 초보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화대를 주지 않고 도망쳤던 그 남자를 (아침에 잠든 그 여자를 보며 돈을 손에 들고 망설이다가, 돈을 기다리는 가족 생각에 도망을 쳤다만, 돈이 있었더라면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처럼 황량하고 우울한 곳에서 조우하였다. 각자의 과거, 그 가난과 우울의 시간속에서 쌓여온, 좌절과 배신의 기억들 그래서 이제는 악만 남은 두 사람의 마음이, 바로 그 곳 그 시간 그 인연속에서 부딛친다. 결국은 두 사람 다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살인.

우리 삶의 인연도, 그 실타래가, 단 두개의 실마리만 존재하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닥의 실타래가 얽키고 설키어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인연을 만들며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을때에도, 설령 잘 보지 못하고 즉시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여러 차례 다양한 실마리를 보게 되고 수 차례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었더라면, 평소에 술마시고 운전대 잡는 버릇을 들이지 않았었더라면, 그날 한잔으로 중지했었더라면, 그때 잘난체 우기지 말고 대리운전을 불렀었더라면, 그때 너무 늦게 마치지 않아서 좀 돌아가는 한적한 길을 선택했었더라면, 내일 해야 할 산더미 같은 회사일을 떠올리며 그때 과속하지 않았었더라면… 무단횡단 하던 그 사람을 치어 죽이지 않고, 어쩌면 서로에게 욕이나 퍼붙고는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 갔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끔찍한 인연으로 엮이게 된다. 그 수차례의 기회들을, 그 실마리들을, 쌍방 모두, 하나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다가, 결국은 그 인연의 결과를 크게 후회하면서 깨닫게 된다. 하지만 너무 늦다.

짧게 보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필연이고, 짧은 시간에는 우연의 역할이 커 보이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만 인연이었지만,

그 남자가 만약 부도가 나지 않았었더라면?
이돈철 회장도 ‘운7기3’ 이라던 사업이 자기만 열심히 한다고 다 성공하나. 그리고 돈은 악연을 더 많이 만들 가능성이 크다, 어떤 곳 어떤 사람들에게는. 따라서 이를 통해서 그 인연의 끝에 다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은 10%.

그 남자가 만약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런 장소에서 그런식으로 어울릴 친구들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그런 상황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이 오기전에 맨정신으로 기회를 하나라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50%.

그 남자와 아내가 만약 금실이 좋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였다면?
마지막 기회, 즉 그 여자의 극한 비난을 듣고 있던 그 남자가 손에 든 헤머를 위로 들어 올릴지 (살인) 혹은 아래로 내려 놓을지를 (사과나 도망) 결정지은 것은, 어쩌면 그에게 아무런 희망도 갈곳도 의지할 곳도 없다는 절망감이었으리라. 만일 집에 따뜻한 저녁을 해 놓고 그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마지막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70%.

그 남자가 만약 그런 어리석고 질 나쁜 친구들과 엮이지 않았었더라면?
좋지 않은 곳을 들락거릴 기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그런 상황에 빠진다고 하여도, 거짓말로 함께 가짜 사장노릇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녀와 조우했을때 그런 최악의 모욕적인 비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헤머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거짓말로 가짜 사장노릇을 했기에 반대 급부로 받은 극단적인 모욕이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그냥 별 볼일 없는 바닥인생이라는 것을 서로 속이지 않고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면 어쩌면 하나 정도의 기회는 잡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30%.

그 남자가 만약 아내와 금실도 좋고, 술도 전혀 마시지 않고,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부도가 났지만 열심히 하루하루 일하면서 살았었더라면?
그런 인연에 처음부터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런 상황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마지막에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전무. 이들 모두의 조합으로 그 인연과 그 결과를 피했을 가능성 90% 이상.

그 여자가 만약 현실을 참아 견디며 미래를 위해서 투자했었더라면? 현실이 억울하고 답답하고 암울하지만, 그래도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네일아트에 투자 하고 노력을 했었더라면? 아마도 노래방 도우미 노릇은 하지 않았지 싶고 또 나아가 몸을 팔지도 않았지 싶다. 소위 흙수저의 현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 한국 수준이 밥 굶고 기본 생활비를 벌지 못해서 몸을 팔아야 하는 사회는 아니지 않는가? 이로인해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80%.

그 여자에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 비록 레즈비언 파트너라 하더라도 그래서 ‘미래’와 ‘희망’을 진심으로 나눌 사람이 있었더라면?
몸을 팔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피했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그런 인연에 그 남자와 엮이게 되었더라도, 극단적인 모욕을 퍼부어, 모든 기회를 쌍방에게서 빼았고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60%.

그 여자가 만약 ‘남들 다하는데 나는 왜 못해?’ 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억울해 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남들 보기에 이게 무슨꼴?’ 이렇게 남들을 신경 쓰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노래방 도우미나 혹은 몸을 팔지 않으면서도 생존하고 또 생활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다리 위로 올라갈 생각 혹은 올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아득함도 절망감도 슬픔도 적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좋은 네일아티스트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70%.

그 여자가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완벽한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그 영화 속에서 그 여자는 (그리고 사실상 그 남자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인연의 끝에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젊은날,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현실속에서 비록 상대적으로 좋은 외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지와 무명속에서 그저 본능에 따라 눈에 뜨이는데로 큰 무리를 쫓아 다니다가 늙게 되면,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질 그 인연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외부적인 조건으로 궁극적인 인연과보를 바꿀 가능성 10%.

그대는 어떤 괴로움을 안고 살고 있나?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이 블로그를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들이라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 아닐까? 주로 가까운 사람들?

인연의 실타래, 여러개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 낸 그대의 현재 삶. 다양한 모습의 다수의 실마리가 존재하건만, 어쩌면 그대는 밖을 보느라 혹은 남들을 탓하느라 너무 바빠서,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그 중 단 하나의 실마리도 붙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대의 종착역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될 (위구르어로 ‘되돌아 나올 수 없다’는 뜻) 가능성이 크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되건 얼마나 좋은 옷을 걸치고 가건 간에, 그 사막에는 홀로 간다. 그리고 나올 수 없다.

안을 보자. 지난 날에는 오직 생존과 발전을 위해 정열과 노력을 쏟았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쌓아온 그 인연의 실타래를 보는데에, 그리고 실마리를 찾고 붙잡아 푸는데에 정열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지 않겠는가?

어떤 일이 일어나면 혹은 어떤 관계로 부터 괴로움을 당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지난 날 알게 모르게 만들었던 인연에 의해서 왔고 또 생겨난 것이다. 바로 지금, 과거의 인연을 일시에 바꾸어 현재의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또 미래의 괴로움을 막을 방법이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어떤 속임수로도 피할 수 없다.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돈도 속임수도 필요 없고 또 다행히 상당히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방법이다. 이미 예를 들면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있거든, 지난 블로그 글들을 읽어보면 더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도 나도, 행복의 길을 찾고 또 그 길을 걷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