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시간

인간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한가지를 꼽으라면 무었일까? 어떤 뛰어난 사람이 ‘시간’이라고 하던데 나도 동감한다.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좋은 영화들이 여러편 있는데, 오늘은 ‘About Time’이라는 영국영화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매세지는, (영화속 주인공처럼)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마음대로 과거로 되돌아가 자신의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과거를 무한정 바꿀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참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보고 나면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리고 주변의) 행복을 증대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바로 지금, 오늘, 현재’에 딱 한 번만 가능한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제목을 잊었는데 언젠가 꽤 재미있게 보았던,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룬 또 다른 영화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있던 사람들이 결국은 자발적으로 평화로운 종말을 (죽음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유머러스하게 그렇지만 정확히 설명하였다. 흔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천국의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 영화가 잘 (그리고 과학적으로) 묘사한데로, (예를들어)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전부 다 여러차례 읽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곳을 수차례 여행하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통달하여 올림픽 금매달을 모조리 따고 나서도, 그 ‘영원’이라는 시간의 극히 일부도 사용하지 못한 꼴이니, 나중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게 되어 결국은 천국이 처음 생각하던 그 천국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며, 이것을 깨닫게 된 천국 입주자들은 결국에는 스스로의 종말을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발적이며 평화롭고 좋은 죽음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인데…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던지는 매세지를 무시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볼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짐작하건데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좀 다른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2023년을 시작하며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적절하다 싶다.

서로를 또라이로 생각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좋은 책들을 반복해서 읽다가,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구절이 최근 내 눈에 작열하고 마음에 꽂히는 일이 발생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또라이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자신에게 정신적 노안이 왔다는 것이며 또한 주변 사람들도 나를 또라이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수십년간 매일 그리고 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보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 오고 있지만 안경이나 노안은 커녕 의약품 통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인쇄된 주의사항을 읽으면서 점점 나아지는 시력을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이며 생물학적 나이와 비교해서 수십년은 젊다는 직간접적인 증거를 (원형탈모등 몇가지만 좀 빼고) 수시로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인데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한두해 전부터 내 주변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짓들이 또라이로 보이기 시작했거든 🙂 이것도 큰 문제지만 그보다 그 또라이들 눈에 나도 또한 또라이로 보일 것이라는 것이 내게는 더욱 큰 충격으로 와닿았다. 이럴수가…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서로를 또라이로 보기 시작하면서 정말로 나이가 드는가보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나도 별 수 없구나…

글쓰기가 어렵고 말이 줄어든다

비난하고 힐난하는 마음은 아마도 그대로지 싶은데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줄어드니 글쓰기가 어렵다.
내세워 자랑하며 잘난체 하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지 싶은데
그 다음에는 뭐? 이런 생각을 하게되니 주절주절 말하기가 어렵다.

이곳에서 산 지난 30여년 나는 다른 사람들의 권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지선다 객관식 보다는, 내 자신의 생각과 자발적 발상을 (inner self) 앞세우는 주관식 답안같은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결과야 누가 낫다 못하다 판단하긴 어렵고 또 내가 그럴만한 환경에서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그러한 측면도 있었다.

내게 이미 일어났던 일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일어났던 일을 내가 어떻게 해석했었고 또 받아들였던가가)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보이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보아왔던 시각이 달라지며 따라서 그에 대한 나의 반응도 달라짐을 자주 보게 된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세상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부인 사람도 변하고 또 그 일부인 나도 변한다.

비난과 힐난 대신에 침묵을 선택하기가 옛날보다 쉬워졌다. 마치 나이가 들면 단식하기가 쉬워지듯이.

우쭐대며 내세우는 대신에 내 자신을 더 자주 들여다 보는 일이 옛날보다 많아졋다. 마치 무인도에 살고 있는양.

사람은 마땅히 더불어 어울려 살아야 한다. 동시에 떨어져 홀로 살 줄도 알아야 한다.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말 쉽지도 않고 또 흔하지도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오늘날의 나를 가능케 해주신 사랑하는 이들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종교, 본능, 무식 그리고 한잔 더

나이가 들면서, 인간이 만들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들은 하물며 종교까지도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는 뗏목이며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이 우연히 타게 된 배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우연히 가지게 된 종교가 그 사람일 수는 없다. 인간이 종교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배에서 우연히 만난 승객들끼리 치고 박는 것이 그 배의 탓이 아님과 같다.

늘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었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때때로 ‘이것이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자문해야 한다. 만취하여 배우자를 줘패는 넘이 순간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내게 도움이 되며 내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참으로 자문할 수 있다면 그 넘을 결국은 달라지게 된다. 인간이 종교를 이유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어떤 형태로건 싸우고 다툴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상대방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끊임없이 자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종교가 실패하고 종교가 다투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실천한답시고 언행하는 인간이 실패하는 것이 마치 종교가 실패하고 다투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이 실패하는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둘 다 우리 모두가 극복하고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것들이다. 첫째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본능과 감정들 때문이다. 숫사자들끼리 암컷들을 차지하기 위해서 벌이는 싸움 그리고 때로 맺는 숫사자끼리의 동맹은, 인간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힘과 지능을 가지고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서로 치고 박는 것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인간의 본능은 인간이 종교를 참으로 (주로 개인 차원에서) 실천하는 최대의 걸림돌이 된다. 때때로 이러한 본능을 콘트롤 하거나 혹은 제압 (?) 하는 것이 마치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듯 보이기까지 하다. 둘째는 무식 때문이다.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나는 ‘무지’는 정말 모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내가 미분적분이나 스웨덴어를 모르는 것은 무지한 것이다. 화성의 표면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인간을 되돌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내가 (기회가 아직 없어서) 무지한 것이다. 무지는 도움이 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집단을 이루어) 직접적인 해를 크게 끼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무식’은 시대나 상황에 걸맞는 인간의 도리 혹은 길을 모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때 모른다는 의미는 대부분 ‘듣고 보아서 머리로는 아는데 무슨 이유로던지 내게 register가 되지 않으니 (당연히 결과적으로) 몸과 마음이 그곳으로 향하지 않으며 또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분적분을 잘 알아도, 스웨덴어를 배워서 잘 구사해도, 화성의 표면을 보았어도, 공룡의 화석과 그 과학적 발견을 보고 배웠어도 ‘더 이상 스스로 하는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이 무식의 한 예가 아닐까 싶다. 집단 차원에서 집단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경우가 꽤 있다.

이 두가지 즉 인간의 본능과 무식이 종교와 결합하면 그야말로 가관이 된다. 우연히 한배를 탄 넘들끼리 (개인 차원에서) 치고박음은 물론이려니와 주변에 있는 다른 배에까지 기어올라 그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집단 차원에서) 동참하기까지 한다. 이미 말했듯이 이런 인간의 본능과 무식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며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아무리 가방끈이 길어도 지갑이 터져도 미모가 출중해도 또 큰 모자를 써도 전혀 예외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이 본능이 더 추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무식이 더 해로운 꼴로 구현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회사로 오가는 언덕길에 매우 고급 주택가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즐비하며 성공한 (주로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2주에 한번 재활용 병들을 시청에서 마련한 박스에 담아 집앞의 길가에 내놓는데 뚜껑이 없으니 오가며 지나는 길에 자연스레 박스 안이 보이게 된다. 그 큰 박스에 집집마다 한결같이 쌓아 놓은 온갖 술병들을 보면서 (대부분 비싼 와인병이나 고급 술병들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생을 생각하며 씁쓰레 웃게 된다. 나도 한때 그 만큼 비싼 술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정말 남부럽지 않게 (?) 마셨었다. 와인 특히 화이트 와인이 세계적인 나라에 사는데 그리고 아주 좋은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쩌겠나. 그 정도 크기의 박스에 와인병과 각종 술병들이 그득히 차는 것은 잠깐이다. 맥주병들은 애교라고나 할까. 산소같다는 뇬도 리처드 기알도 딜라이 라말도 그 누구도 그렇게 레드 와인을 들어 부으면 아침에 피똥 비슷한 색깔의 시커면 설사를 줄줄하게 된다. 무슨 와인과 특히 잘 어울린다고 품위있게 함께 드셧던 (아마도 블루) 치즈도 뜨뜻한 뱃속에서 발효가 되어서 그런지 그야말로 모진 (?) 향내를 풍기면서 같이 나온다. 누가 예외일 수 있겠는가?

아침에 밑을 씻고 낮에 술이 깨면 저녁에 다시 반복 그리고 다음 날이 또 오고… 그렇게 술병은 쌓여가고 인생은 흘러가는데 본능과 무식은 늘 그자리…

사는 것이 이 모양이다 🙂

몬시뇰 그리고 결혼계약

‘몬시뇰’은 우리에게 슈퍼맨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1982년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결혼계약’은 2016년에 방영된 티비 주말드라마입니다. 보았고 또 어쩌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몬시뇰은 언젠가 한번은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이야기 했던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훌륭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영화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이 영화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IMDB에서 서양사람들이 (아마도 미국인들이) 매긴 점수가 10점 만점에 5점 정도로 그야말로 형편없는 어쩌면 중간도 못되는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는 내가 미친 것일까요 🙂 여하튼 내가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은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인터넷 관련 기술의 발달로 옛날에는 가능하지 않았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싸게 가능해진 것들이 있지요? 지나간 티비 드라마를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일것 같네요. 일년에 한 두번 한국 드라마를 볼까말까한 우리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만큼 감동적으로 보았던 ‘어른들의 동화’ 같은 드라마가 바로 이 드라마 ‘결혼계약’입니다. 물론 ‘묜시뇰’ 보다는 훨씬 한국에 더 알려진, 감수성 있는 어른들이 많이 좋아했다던 통속적인 소재의 티비 드라마 입니다. 이런 통속적인 프리티우먼 백설공주 신데렐라 이야기를, 훌륭한 대본과 연기 그리고 연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묜시뇰과 결혼계약은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개의 어른 동화에서 크나큰 공통점을 봅니다. 이 두개의 족보가 전혀 다른 드라마들이 인간에게 극히 공통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게 됩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 미국에 유학했던 우리 선대들이 남긴 이야기들 중에서 한두가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학 식당에서 식판 위에 건드리지도 않은 그 크고 맛있는 오렌지가 식사 후에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의 놀람과 더불어 미국 남녀 대학생들이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날때면 방문을 열어 두었다던 이야기 입니다. 그때 당시 그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 유학생의 시각은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과 다르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이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마치 조선시대에나 일어났을 그런 풍습을 유지했던 것은 문화적 시각적 차이를 떠나 사실로 여겨집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을 숭배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그 당시 미국인들을 지배했던 삶의 방식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보고 듣고 알게된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면들이 있어요.

그저께 우연히 독일국영방송 DW에서 만든 ‘미국의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에 관한 도큐맨터리를 잠시 보다가 무척 놀랐어요. 일대일로 대응하는 한국말이 없어보여서 그냥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라고 했는데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신앙’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요? 침례교냐 장로교냐 이런 종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주어 해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전세계에서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도큐맨터리에 어떤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러한 삶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십대 중반의 두 딸들은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21세기 미국인들과 한참 거리가 멀어 보었어요. 침대옆 서랍에서 오래된 낡은 책을 보여주는데요 아주 어릴때부터 닳토록 읽어 그야말로 닳고 닳은 성경이었어요. 그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다못해 아빠가 학교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도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매일 새벽기도를 몇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던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어요. 어떤 특정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 매우 훌륭한 신자일 그런 사람들과 만약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램 관련 사태들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까요? 아까 이야기한 도큐맨터리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많은 어른들과 학생들이 켄터키 어디에 있다는 노아의 방주를 방문해요. 미국답게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 박물관이에요. 그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역사에 언제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 배우고 또 기억합니다. 참 인간이란 안타까운 존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결과가 ‘비정상’ (?) 이라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묜시뇰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미국의 한 젊고 멋진 천주교 사제가 이차대전을 참전한 후에 로마에 남아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며) 카톨릭 최고 권력에 (?) 다가가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희노애락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이 주어진 어떤 상황 혹은 사회적 구조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친구와 적을 만들고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좌절하며 또한 천주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황의 암묵적 동의하에 마피아와 손잡고 아슬아슬한 사업을 벌이며 일어나는, 거룩한 천주교 의복 뒤에 감추어진 정말 있을 법한 인간들의 진면목을 담은 영화입니다. 왜 10점만점에 5점일까요? 그것은 흡사 우리가 어릴때, 부모님의 섹스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부끄럽고 괴로워했던 그런 상황이, 종교와 현실이라는 상황에도 일어난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나아가 걸프렌드와 섹스를 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케하는 (?) 자식을 둔 나이가 되고보니,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사랑을 나누셨다는 것에 조금도 거부감이 생기거나 이상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어요. 마치 식사를 하셨고 화장실을 가셨었다는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와 마주치게 될때 그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신도들’ 그리고 지금도 미국 어디선가 아마도 ‘방문을 열어두고 남녀가 이야기를 나눌 그 에반젤리컬 크리스쳔들’에게는 큰 혼란과 부끄러움 그리고 괴로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상황을, 어릴때는 그냥 괴로워 했겠지만 어른이 되고 힘이 생기고 나면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넘들의 가짜 진리’를 막으려고 하겠지요. 바로 이 결과가 묜시뇰이라는 탁월한 영화가 IMDB에서 10점 만점에 5점을 받은 이유지 싶네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신도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들이 자유로우며 그들이 사랑으로 자신과 타인들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실까요?

묜시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었을 만들어 어떤 매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명백히 알고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대본을 (혹은 원작 소설을) 쓴 분 그리고 영화를 만든 분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알았었고 생각했었고 또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내 블로그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이지 싶네요.

나는 ‘결혼계약’ 드라마를 보고선 그 극본을 쓰신 분의 뒷조사를 (?)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위에서 묜시뇰 영화의 대본을 쓴 분이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분도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분이 미디어에 인터뷰하는 (결혼계약 드라마에 대해서) 것도 읽어 보았어요. 이분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나는 알길이 없지만, 이분은 인터뷰 끝에, 어떤 철학 혹은 믿음이 결혼계약 극본 바탕에 깔려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 내게, 이 결혼계약이라는 드라마를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 반복 시청하고선 도대체 무었을 보았던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이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에서 해탈을 얻는 과정을 그린 (붓다의 가르침을 표현한) 위대한 현대판 경전이다’ 🙂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교니 사랑이니 붓다의 가르침이니 해탈이니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그리스도교도 사랑이라는 의미도 또 붓다의 가르침도 해탈이라는 표현도, 우리 인간의 삶이 먼저 있고 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들 인간의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먼 미래에도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조건들 속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도, 사랑을 주고 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도, 그리고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도 변치 않고 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임에 분명해요.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시고 내 놓으신 일종의 해결책들이 (?)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본질이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엄마와 둘이 사는 7살 은성이도,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멀리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동시에 엄마를 몹시 사랑하며 그 엄마의 행복을 깊이 바랍니다. 은성이는 결국 이 두가지 커다란 마음의 갈등을 이겨내고 스스로 해결하여 해탈에 도달합니다. 엄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닥쳐온 상황을 더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 냅니다. 그 싫어하던 아저씨를 받아들이며 결국은 새 아빠로 삼고 가장 아름다운 부녀의 관계로 발전시킵니다. 한 인간의 해탈을 이렇게 마음에 와닿도록 훌륭하게 표현한 것을 나는 일찌기 보았던 적이 없어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도대체 (현실 속의)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연기를 극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뛰어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래 느낍니다.

남자 주인공 지훈씨의 친모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도 아니고 마음이 제대로 밖인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들의 사랑으로 결국은 마음을 비워내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아들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기생하고 나아가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는 삶의 방식을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참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해요 (비록 내 몸은 병들어 죽지만) ‘나는 너 덕분에 살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보고 또 그의 대사를 들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밤에 이룬 해탈이 아침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나는 또한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블로그에 골프 이야기를 몇차례 쓴 적이 있었는데요. 골프 자체가 주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골프의 속성이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것이 주제였던 적이 많았어요. 유튜브 골프 레슨을 보거나, 잠시 연습을 하거나 혹은 새 골프채를 손에 쥐게 되면 골프가 ‘이렇게 하면 되지 싶다’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해탈을 (?) 하게 되요. 그런데 그런 해탈이 얼마나 힘이 없고 현실에서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지를 온몸으로 뼈져리게 깨닫는데 필요한 시간을 별로 길지 않아요. 마치 밤에 얻은 깨달음이 다음 날 아침에 (마주치는 현실속에서) 산산조각 나듯이, 다음 라운드를 나가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 (현실자각타임) 속에서 더욱 더 괴로워 지게 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남자 주인공 멋진 지훈씨는 여자 주인공이 (서로 지극히 사랑함에도 시한부 생명의 짐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지 않으려고) 자신을 밀쳐내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이제 너도 한번 살아봐. 내가 살릴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벌 2세로 제멋대로 살아온 지훈씨.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정말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심성을 가진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만나 차차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지훈씨는 주변 모두가 놀라자빠질 자신만의 해탈을 이루어 냅니다. 인생에서 무었이 중요하고 그 중요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힘을 주는지 재대로 맛본 다음부터 이 인간말종은 완전히 변화합니다. 한 인간을 참으로 존경하게 되면서 싹튼 사랑은 세상 그 무었도 막을 수가 없고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합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말했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극작가가 배우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하듯이) ‘돈으로 막으려면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해탈하고 나면, 그래서 돈을 진심으로 포기하고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보려는 시도를 진정으로 그만두게 되면, 상대방은 신기하게도 저절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결코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우리 삶의 큰 진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주인공 혜수씨. 신데릴라 입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 시한부 생명. 어린 딸을 위해 모든 것 무슨 짓이던 하고선 세상을 뜰 훌륭한 엄마입니다. 난 남자 주인공 지훈씨가 쓰레기짓을 할때 ‘아 저런 것들을 사람들이 쓰레기 짓이라고 하는구나’ 배운 것이 많아요 🙂 그리고 동시에 ‘어 나도 보통 저렇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적이 (때로 훌륭한 일이라고 조차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렇게 좀 놀라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미남에 금수저라는 것만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 지훈씨와 내가 닮은 점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이토록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동시에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훈씨와 닮은 점이 많듯이 아내는 혜수씨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혜수씨가 지훈씨를 ‘살게 해 주었듯이’ 어쩌면 아내도 나를 살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산다는 것이 무었일까요? 지훈씨가 혜수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했고, 또 지훈씨 엄마가 아들 지훈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했는데요, 도대체 이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까 위에서 비유로 말했던, 매일 새벽 기도를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다는 그리스도교인과 내가 마주 앉아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 다난한 일들에 대한 견해를 서로 밝히고선, 전 세계에서 뽑은 수 많은 배운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누구의 견해가 보다 균형 잡혀 있는가 묻는다면,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나의 견해가 좀 더 균형 잡히게 들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또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언행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두 개의 상반된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기울이며 여태껏 살아 왔어요.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안타까움은 (수십년 매일 새벽기도 같은) 그런 노력과 성취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변화하며 나아가 그런 변화의 영향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싶어요. 이처럼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 인생이라, 아마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 (불완전, 불만족, 괴로움) 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다시 되돌아가서 ‘살게 해주었다’ 혹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몽고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야생 늑대는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최약의 적이기도 하다고 해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추적하여 죽이고 때때로 새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요, 태어난지 몇주만 지나도 늑대 새끼들은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이 되지 않은 핏덩이 새끼들을 데려다가 사람들과 가축들 사이에서 기르기도 한다는데요, 한살 정도가 되고 나면 (그동안 그렇게 같이 잘 놀고 좋았던 그 녀석이) 야성을 결코 감출 수가 없어 사람과 가축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가 되어 결국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녀석과의 우정은 (?) 한장의 늑대 가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숙명이라네요. 늑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물려받은 DNA가 합쳐서 빚어낸 삶을 살겠지요. 그 드라마에서는 혜수씨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훈씨가 알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그의 형을 그 자리에 대입한다고 똑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다만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공평하기도 하지 싶네요. 서론이 길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산다’는 의미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그리고 물려 받은 DNA에 지배되는 그 작은 세계, 좁은 믿음 그리고 굳어진 가치관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세상에 산재하는 다른 환경들 그리고 과거에 살다간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와 믿음 그리고 가치관을 (최소한) ‘볼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무언가 작은 것들이라도 배워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결과적으로 덜 다투고 더 사랑하고 더 가볍게 왔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그리고 묜시뇰 영화에서도 많은 등장 인물들이 바로 이렇게 ‘살게 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뛰어나게 그리고 있어요.

두가지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며 오늘 이 길었던 두 편의 드라마 이야기, 내가 생각컨데 가히 최고의 드라마의 이야기를 마칠까해요. 먼저, 위에서 비유로 들었던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 드라마를 보고선 아내에게 비유로 말했어요. 평생 권투를 한 사람의 주먹은 부드러울 수가 없다. 샌드백을 때린 정권과 손에 베인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심신도 다르지 않다. 권투선수에게 부드러운 손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새벽기도 평생한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고 부드럽기를 기대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리고 두번째는, 밤에 얻은 해탈이 아침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나면, 다시 말해 비록 다음날 아침에 산산조각 나는 해탈이나마 하고 또 하면서 시간이 지나노라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덜 나든지, 산산조각이 나도 덜 괴롭든지 아니면 산산조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든지 하면서 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해탈에 가깝게 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에베레스트 산을 목숨을 걸고 오르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웃기는 존재 입니다. 그 등반을 이 세상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목숨걸고 그 힘들고 위험한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그래도 할 사람이 소수는 있겠지요). 어떤 면에서는 해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 모두 각자 각자 어떤 시간이 오면 홀로 세상과 작별해야 합니다. 해탈? 그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좋아하는 당신이나 가지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