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문화 다른 생각 다른 삶

2주전 국민투표와 함께 실시되었던, 안락사와 대마초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물었던 투표 결과가 방금 발표되었다.

안락사는 65%의 지지를 받아 12개월 이내로 법으로 제정된다고 한다. 아무나 죽겠다면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자면 다수의 의사가 동의하는 6개월 미만의 생존 가능성 밖에는 없는 사람이 적법한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런 내용들이 포함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대마초는(마리화나) 안타깝게도(?) 46%의 찬성만으로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불법으로 여전히 남게 되었다.

최근에 김의신박사의 ‘암 걸리지 말고 행복하게 사는 법’ 주제의 강연을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분은 단지 세계적인 암전문가로서 좋은 의학 정보를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 최고의 암병원에서 오랜 기간동안 (대부분 다른 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다가 안되서 온) 수많은 미국인 암환자들과 또한 돈 보따리를 들고 (치료비가 엄청남) 태평양을 건너 그 병원을 찾은 수많은 부자 한국인 암환자들이 ‘암’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다른 태도와 자세를 보이는지에 대한 사회인류학적인(?) 고찰을 또한 나누는 내용이라 내겐 큰 흥미가 있었다. 이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수십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나도, 이분이 묘사하는 그런 한국인의 태도와 자세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아직 시간이 좀 있을때 자각을 하고서 무언가 개선과 발전을 이루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강연은 2011년 경에 촬영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현재에도 적용될 것으로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신문에 난 ‘한국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관한 종합 연구’ 관련 기사를 보고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540페이지 논문을 대략 읽어 보았는데, 영미권국가들과 공통된 내용들도 물론 있었지만 몇가지 특이한, 다시 말해서 김의신박사가 말씀한 (암과 죽음에 관련하여 미국인들과 비교할때) 한국인들이 보이는 특이한 태도와 일맥상통하거나 어떤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짧게 언급한다.

일전에 하버드대학교 연구결과를 (‘돈 잘 쓰는법 ‘연구하여 책으로도 발간된 논문) 언급한 글에서도 나왔듯이 이 나라를 비롯한 영미권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요소들은 ‘경험’이나 (자기계발) ‘이타행’과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서 기쁨과 의미를 찾는 것) 관련된 것들이 상위에 랭크 되는데 반하여, 이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이러한 ‘경험’ ‘개인의 발전’ ‘이타행’ 같은 분야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또한 이런 것들이 자신의 행복을 증신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수준이 영미권과 거의 동등한 상위 20%의 부유한 한국인들 조차도 동일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김의신박사의 강연과 이 논문의 (신문기사의) 내용을 동시에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면 무언가 우리들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요약한 표]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든 논문이니 결과에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굳어지면 죽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소위 말하는 클리세인가?

시작하기전에 일단 한마디 하자면, 어떤 사람이 말했다더만 ‘If common sense is that common, why is it so hard to see it?’ ‘상식이 정말 상식이라면 왜 그렇게 상식을 보기가 어려우냐?’.

요즘 드는 생각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아는 것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런식으로 좀 객관적으로 단순하고 명확히 구분된다면 얼마나 인생이 더 쉽고 덜 복잡하겠는가 싶다.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섞여 있고,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아는지 모르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절대적으로 틀리거나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은 드물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얼마만큼 맞고 얼마만큼은 잘 모르겠고 (혹은 틀리고)’를 좀 객관적으로 심사숙고하기 보다는 (이것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오직 자기가 보기에 맞는 부분만을 내세우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틀린 생각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내서 말하면. 잘못된 주장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낸 주장만을 보자면… 이러니 세상이 쉽지 않고 복잡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러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덧붙이는 두가지 가르침은, (지금 나의) ‘생각이나 주장은 변한다는 것’과 또 ‘자기 자신이라고 (자아, ego) 그렇게 움켜지고 주장할 그것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정말?

다시 굳어지면 죽는다는 말로 되돌아 가보자. 최근 신문에서 읽은 내용중에 ‘나이가 들면 늘어나는 것은 고집과 불만이고, 줄어드는 것은 웃음과 인사’라는 말이 있었다. 고집과 불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자기 주장’을 적당한 상황에 적절히 하는 센스를 점점 잃음과 동시에, 그것의 절대적인 양이 많아지니 배우자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똥고집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자신의 2차적인 반응이 불만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자기생각 자기주장은 나이가 들면 점점 많아지게 되어 있다. 마치 주름살이나 뱃살처럼. 가만히 두면 저절로 쌓이고 강화되는 것이 바로 ‘자아, ego’ 아닌가? 그것의 표출이 고집이고 불만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어렴풋이 깨달아도 그것과는 상반 힘이 (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별 소용없이 무너지며 ‘속절없이 늙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머리만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heart & soul이 (영혼이) 동시에 굳어지는 모습이, 고집과 불만이라는 것을 우리들 모두가 자각하기를 바란다.

몸이 굳어지는 것도 막기 어렵고 또한 위험한 일이지만, 머리와 영혼이 굳어지는 것은 더욱 막기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굳어지고 있는지 또 이미 얼마나 굳어졌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고, 종종 굳어지지 않은 자신의 단편적인 모습에 집중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하면 위험하다. ‘이래도 되는가?’ ‘이것이 맞는가?’ 늘 좀 불안해하면서 궁금해하고 또 자연스레 비교도 하고 검증도 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더 낫다. 그러면 굳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불안한 부드러움 보다는 덜 불안한 굳어짐쪽으로 자꾸 가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래도 저래도 좀 안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서 붓다께서는 만족스럽고 여한없이 살기가 어렵다고 하신것이지 싶다. 그래도 생각하며 살아라고 가르치셨지 아마…

이겨봤자 별로인데 지면 아주 괴로운 게임

혹시 들어봤나? 이겨봤자 별로인데 지면 아주 괴로운 게임?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가진 대표적인 (그리고 삶에 도움이 되지않는) 착각들 중에서 지난번에 짧게 언급한 ‘나 (self 혹은 ego) 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과 더불어 ‘인생이 행복하다 혹은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시절 이런 착각들 속에서 마치 무었에 취한 듯 살아왔던 면도 있었다 싶다. 생각할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누구나 때가 되면 깨닫는데 어떤이들은 그럴 형편이 못되거나 혹은 취한 사람들에 너무 둘러쌓여 살아 늘 취해서 사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겨봤자 별로인데 지면 아주 괴로운 게임? 돈버는 것? 그것도 맞긴한데 만점 정답은 인생.

자칫 무슨 허무주의처럼 오해받을까 덧붙이자면 ‘당연히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고 붙는 게임은 하면서도 스트레스 엄청 받고 또 막상 이기고 나도 감흥이 없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지기라도 하면 무슨 혼자서만 끝장이 난 것처럼 생각하게 되지 않겠나? ‘당연히 괴롭지 않아야 한다’고 어떤 이유에서건 생각하며 사는데 현실이 괴로우면 더욱 더 괴롭지 않겠나?

‘이렇게 되어야 한다’ ‘저렇게 되면 안된다’ 미리 생각하고 친 골프 라운드가 원하는데로 되고 잘된 적은 최소한 내게는 없었다.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 골프인데 여태껏 내가 착각을 했거나 건방을 떨었으니, 이번부터라도 이것을 받아들이고 라운드를 하겠다’ 이런 마음을 정말로 가지면, 안되도 본전이니 손해날 것이 없고 잘되면 횡재 아닌가?

이게 허무주의? 🙂

히나코 시부노, 루이 우스테이즌

들어본 이름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유명한 골프 선수들입니다. 한사람은 일본 여자고 한사람은 남아공화국 남자인데요, 두 사람 모두 소위 말하는 ‘major championship’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는 아주 훌륭한 골퍼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골프는 아닙니다. 이 두사람, 연령대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었’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저는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오래전부터 알고 좋아했었지만, 사실 히나코 시부노 선수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김인경 선수 이야기 하면서 언급했던 그 ‘브리티시 오픈’이라는 최고의 여자 골프 대회에서 히나코 시부노 선수는 201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아마도 처음으로 우승을 했었습니다. 그 장면을 우연히 유튜브로 보는 중에 무언가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년전에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의 ‘마스터스’ 대회 장면을 보고서 놀랐던 것과 비슷한 바로 그 ‘무었’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골프에서는 원래 정해진 홀의 타수보다 3타를 적게 치는 것을 (홀아웃) ‘더불 이글’ 혹은 ‘알바트로스’ 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홀인원’ 보다 훨씬 더 (천문학적으로)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12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바로 이 더불 이글을 쳤는데요, 저도 생방송으로 경기를 보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선 매우 놀라고 흥분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파5 홀에서 두번째로 친 아이언샷이 그대로 홀에 들어간 경우였습니다. 물론 운도 따라야 하지만 그 두번째 아이언 샷도 훌륭한 것이었어요. 관중들로부터 엄청난 박수를 받으면서 홀에 도착한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인사를 하고 홀컵에서 공을 꺼내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그 공을 관중석에 서스럼 없이 선물로 던져 주고 다음 홀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의미가 있고 또 고마운 골프공이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 공으로 계속 경기를 하거나 아니면 잘 넣어 가서 오래 보관하려고 하지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는 2012년 마스터스에서 연장전 끝에 패하여 그만 준우승에 머물고 맙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우승했던 버바 왓슨 선수보다는 이렇게 스스럼 없고 그야말로 무심하게 골프를, 그 엄청난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도 웃으며 즐기던 루이 우스테이즌 선수를 늘 오래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별명이 슈렉인데요 아래 사진을 보면 닮았지요? 성격이 참 좋은 선수로 원래 잘 알려져 있는데요, 경기를 하는 태도를 보면 그것이 진실임을 잘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히나코 시부노 선수의 브리티시오픈 마지막날 모습입니다. (그녀와) 동점을 기록한 선수들 한두명이 조금 전에 마지막 72번째 홀을 끝내고 경기를 마무리 하면서, 이제 히나코 시부노 선수가 마지막 18번 홀로 이동하는 모습이 여기에 나옵니다. 길지 않은 비데오니 전체를 한번 보시길 바라지만, 원하면 2분40초 경부터 보세요. 저도 많은 LPGA 그리고 PGA 결승전을 보았는데요, 물론 매이져 챔피언쉽도 포함해서 입니다, 이렇게 극도로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히나코 시부노선수와 유사한 행동을 하던 선수를, 제 기억으로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분은 (20대 초반이지만 ‘여자분’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대회 마지막날 라운드를 시작하기 전에도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주며 웃고 친절했지만, 이제 결승전 마지막 홀을 향해서 이동하는 그 지극히 중요하고 또 어쩌면 일생을 살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도, 주변 관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는 얼굴로 그들의 성원에 감사하고 있어요. 히나코 시부노 선수의 얼굴에는 어떤 긴장도 보이지 않지만 동시에 꾸미는 모습이나 가장하는 태도도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그녀는 참으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저도 볼수가 있네요. 어쩌면 동양의 일개 무명선수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녀가 침착히 샷을 합니다. 이제 홀에서 몇 미터 떨어진 자리까지 온 그녀의 공. 이것을 퍼팅으로 넣으면 우승하지만 아니면 연장전을 가야 합니다. 상대는 경험도 많고 또 우승도 했었던 노련한 노장선수들입니다. 그 짧지 않은 퍼팅을 하면서 히나코 시부노 선수가 만약 이런 것들을 생각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침착하고 용감한 퍼팅으로 그녀는 일본 골프는 몰론 세계 골프사에 길이 남을 매이저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 입니다. 김인경 선수의 ‘로즈’ 노래 같은 부활도 너무 훌륭하지만, 동시에 히나코 시부노 선수의 우승 또한 매우 훌륭합니다. 세상은 이런 두가지 종류의 놀라운 성공들이 공존하지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골프장에 갈때 늘 이 두사람의 멋진 모습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매우 훌륭한 골퍼고 또 우승을 하고 성공을 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상황에서 온몸으로 보여준 ‘골프를 대하는 자세’ 아니 어쩌면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보았고 또 크게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그들에게 보고 배운 ‘자세’로, 제 자신의 골프를 대하고 또 제 자신의 삶을 대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이길녀선생. 선각자요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며 교육사업가(?) 그리고 90세가 되도록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대단한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여자 정주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하네요. 얼마전에 로타리클럽에서 주는 봉사상을 받으셨는데, 구순의 나이에 마치 오육십대의 중년여자분처럼 꼳꼳하고 바른 몸매로 단상에 걸어올라 감사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길녀선생이 도대체 어떤 비결로 그런 ‘건강한 장수’를 누리고 계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것 같네요. 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아마도 젊은 학생들과 늘 함께 지내며 공감하고 일을 하면서 그들의 좋은 기를 많이 받아서 그렇지 않겠나’ 하시더만요. 오늘 이분을 언급하면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전 블로그에서 언습했던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길녀선생의 인터뷰나 기사를 접하면서 여러번 놀라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최근에 나를 깜짝놀라게 만들었던 말이 어떤 인터뷰에서 나왔어요. ‘지난 9일 연휴동안에 나는 매일 골프를 쳤다. 젊은 시절 쳐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바로 이 말입니다. 참고로 이분은 일찌기 일본 미국 유학을 하셨던 선각자세요. 골프를 몰랐겠어요 아니면 칠 돈이 없었겠어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문화나 사고방식대로 해석하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승과 대승’으로 불교를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방법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다투어온 것이라 할수 있어요. 붓다의 가르침에는 소승도 대승도 그런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이런 허망된 판단, 나눔 그리고 다툼이 덧없으니 하지 말라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참 우리 인간이 이런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요?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사람들 각자가 속한 환경과 가치 그리고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 이러한 일이 어쩔수없이 발생한 것이겠지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화 시키다보니 어떤 세력 혹은 이익 집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면 밥그릇 싸움을 하면서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로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어떤 종교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만 그분의 가르침을 훌륭한 분들을 통해 배울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람들은 일단 먼저 자신을 돌보고 그 이후에 여력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기에, 아마 소승불교에 가깝다고 할수 있겠네요. 같은 맥락에서, 비록 그 결과나 효과는 세상에 도움이 될지라도,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함께 모여 조직적으로 타인들을 돕고 가르치고 또 그들의 삶을 향상시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 하는 그런 시도를 저는 선듯 동의하기도 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은 예외없이 얕고 이기적이며 오감의 지배를 받는, 때로는 어처구니 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저는 제 자신을 통해서 늘 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주 상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을 것이 있고 내 뱃속이 편안할때 주변에 굶주린 사람에게 내가 가진 일부를 내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어쩌면 일부 동물들조차도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그것이 그냥 저절로 되거나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모습이나 상상하는 이상을, 타인들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도움으로써 획득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행동은, 비록 그 상대방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상당한 부작용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전에 적선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한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여러가지 증거로 볼때 이러한 부작용을 잘 피하며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적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어요. 그래서 크게 존경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런 정말 똑똑한 부자들의 공통점은 배우자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무것도 몰라도 거대한 성공을 극도의 노력으로 성취하고 나면 아마도 인간의 한계와 행복의 진정한 비결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모습이 엄청난 문화와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붓다의 가르침과 별반 다를바가 없음을 보면서 저는 정말 놀라게 됩니다.

붓다께서도, 그 위대한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이전에 무척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일단 사람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살다가 가실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나 고민을 오래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그랬을것 같네요. 붓다께서 결국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로 결심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일단 자신이 먼저 가졌기에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베품으로써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나 발상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주고 받고 의도하는 그런 차원 위에 존재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박원순 전서울시장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업적이 있겠지만, 결국은 자기자신의 어처구니 없도록 앞뒤가 맞지 않는 삶 그리고 인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어리석고 교만하며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물론 지켜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지킬 명예가 과연 있었던가 싶기도 해요, 상황이 이꼴이 되고 나니) 부인과 자식 친구들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해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어쩌라고요? 그 성추행 대상이었던 여자분은 어쩌고요? 자살도 일종의 살인 아닌가요?

다시 이길녀선생의 9일 연휴 골프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일전에 블로그에 적었듯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되면 세상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때문에 길게 보아 인간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며 감사드렸던 고 김근태선생도 또 사람들이 존경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사실상 그분들이 아니었더라고 하더라도 길게보면 오늘날의 한국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우연히 역사의 수래바퀴에 딱 끼였던 인연으로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며 칭송하고 또 이곳에도 언급할 뿐이겠지요. 좀 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전에 언급했던 ‘적선을 베푸는 것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짐작하듯이), 동물에게 베푸는 적선은 10배로 되돌아 오고, 사람에게 베푸는 적선은 100배, 수행자에게 베푸는 적선은… 사찰을 지어주는 적선은… 이렇게 죽 계속되다가 거의 끝에 가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적선의 은혜에는 0000000배’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최고의 가성비를 (return on investment) 자랑하는 적선은,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한 순간이라도 붓다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묵상하는 행위’라고 하네요. 어때요 놀랍지 않나요? 붓다께서는 결국에는 인간의 모든 행과 불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듯 한데요?

다시 말하자면, 민주화운동도 좋고 나라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무었보다 먼저 자신을 잘 돌보고 배우자와 가족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한다면 비약인가요? 그것 먼저 하고 나서 민주화운동도 하고 서울시정도 돌보고 또 다른 야망도 가꿔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 같은데요? 그리고 두가지가 충돌할때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쪽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만약 그랬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 필요한 지혜를 얻은 사람이었다면, 시장이 되고나서 가장먼저 밀실 침대를 없애고, 사무실과 주변의 벽을 유리로 갈아치우고 비서들을 적절한 사람들로 바꾸는 일을 아무 소리 소문없이 했었겠지요. 이미 말했듯이 자연의 지배를 받는 몸을 가진 우리 인간은 자주 어처구니없이 앞뒤가 맞지 않고 지극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상황에 (오래) 빠지게 되면 특출하게 심신이 반응하는 사람들은 전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혜롭고 훌륭한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미리 알고서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에게 참으로 유리한 상황들을 계속 만들고 유지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황진이가 옷 벗고 유혹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큰소리 칠 수 있나요? 만약 그랫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길게 보아 나중에 더 큰 이익을 취하려고 잠시 참았던 수준이겠지요.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능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황진이가 자신에게 다가올 이유도 원인도 애초에 제공하지 않는 것이, 그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정도 되고나면, 황진이도 없고 뭐 보호하고 잣이고 할 아무것도 결국은 없는 상황이 되겠지요. 아마 이것을 붓다께서는 ‘불이 모두 꺼져버린 상태’ 즉 ‘니르바나’ 혹은 ‘열반’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열반은 고승들만 죽어야 들어가는 무슨 거룩한 천당 극락이 아니라 그대와 내가 이러한 배움과 실천의 결과로, 살아서 누리는 조화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곳과 비교하면 한국은 참으로 살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밥을 못먹거나 스마트폰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에서 서로에게 간섭하고 참견하고 좋지 않은 영향을 심하게 끼치는 것이 흔하고 일반적인 곳이라, 어떤 도인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최소한 2시간 이상의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해야 살아 남을수 있을까 말까한 곳이라고 하네요. 공감합니다. 어떤이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네요.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추함위에서만 존재하거나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그렇게 상대성과 가성비를 따지며 살지는 않아요. 자신 내면의 은밀하지만 진실한 아름다움은, 주변의 추함이나 서로 드러내어 계산하며 비교하는 상대적인 아름다움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추한 주변과 가짜 아름다움을 멀리해야만 존재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Five Aggregates 이야기로 다음 글부터 되돌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