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타이슨과 투이2

원래 이야기로 되돌아 옵니다. 이곳은 전세제도가 없는데요, 매 2주마다 내는 집세가 상당히 비쌉니다 (수입대비). 겨울동안 일거리가 많이 없었겠지요. 또 새로운 도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을 겁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한동안 일을 가지 않았어요. 트럭이 며칠씩 그냥 주차되어 있던것을 보았거든요. 우리 내외는 좀 염려가 되었어요. 하루벌어 하루사는데 어떻게 하려나… 한 이주쯤 전에 우연히 마주쳤을때 타이슨이 내게 말했어요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이사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 하겠어요.’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말에, 그리고 좋은 일이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을 할지 몰라서 다만 잘 알았다고만 말했어요.

그날 저녁 아내와 식사를 하면서 타이슨과 투이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어요. 나도 아내도 그 남자와 여자에게 앞으로 펼져질 삶을 짐작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오고가면서 오래 살았어요. 그래서 이 정도는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아내가 말합니다. 투이는 자신이 원하는데로 대학에서 심리학공부를 마치고 제대로된 직업을 구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녀는 여태껏 우리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그저 등뜨시고 배부르게 하루하루 사는 쪽으로 삶이 향하게 될 것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부부중 한명만 벌어서는 그저 현상유지만 하기도 급급한 실정입니다. 이 부부는 집세를 내고나면 아무것도 저축 할 수 없고 그저 사람도 트럭도 아이도 별 탈이 없기만을 바라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 체인을 벗어나 굴레를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아내도 이빨을 악물고 공부를 해서 직업을 찾아도 될까말까한 그런 상황입니다. 남자는 아마도 그들의 문화와 부모의 영향으로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던 사람일꺼예요. 좋은 성품과 정말 근면한 태도를 타고 났지만, 이 나라에서 오직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만을 팔아서는 가족 모두가 살기에 너무 힘이 듭니다. 앞으로도 달라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안타깝네요. 대학이 아니었더라도 배관이나 다른 어떤 기술을 배웠었어도 이나라에서는 자기 하기에 따라서 잘 살수 있습니다. 아무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코스를 다시 시작할 여력이 없어 보여요. 이미 아기도 태어났습니다. 아! 가족들이 좀 도와주면 좋을텐데요. 아기를 좀 돌봐주면서 아기 엄마가 대학을 가게 도와주고, 좀 얹혀살게 해주면서 남자가 기술을 배울 기회가 있다면 이 부부는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에 이런 상황을 알고 먼저 도움을 줄 가족도 없고 또 자신들도 이런 상황을 잘 자각하고 못하고 있지 싶어요. 그래서 변화와 발전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외부적인 도움을 작은 자본삼아 상당한 고통과 희생을 기꺼이 감당하는 수년의 과정이 없이는 어떤 의미있는 변화나 발전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내와 나는 다만 이 커플이 잘 살기만을 마음으로 기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령 내가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하고 싶어도 이런 조언을 이 나라에서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말을 한다고 무언가가 저절로 변화되는 것도 아니겠지요. 오직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또 열망해야 하겠지요. 남자는 머리가 있어요. 정직한 노력이 허무하게 자꾸만 끝이 나고, 자신도 모르는 과거의 카르마에 휘둘리며 살다가 크게 절망에 빠지면, 그는 좋지 않을 길로 접어들 가능성도 있지 싶습니다. 안타깝군요.

이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해야겠군요.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와 나는, 어쩌면 타이슨과 투이처럼 생계를 걱정할 입장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공통점이 있지 않나요? 지난 시절, 선대들이 그리고 자신이 멋모르고 했던 일들의 결과로 오늘날 내 삶을 짓누르게 된 카르마, 그리고 하루하루의 삶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나요? 나와 아내가, 타이슨과 투이 커플을 보면서 깨닫은 것을 내 자신의 카르마를 줄여 자유를 증득하고 또 나의 괴로움을 몰아내어 내 처지에 맞는 행복을 찾는데에 적용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내가 타이슨과 투이의 좋은 면과 강점을 보고 또 인정하듯이, 내 자신의 좋은 면과 강점을 알고 좋아하고 또 인정해 주렵니다.

타이슨과 투이는 떠났지만, 아직도 물청소로 깨끗한 드라이브웨이를 지나면서 그들을 떠올리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안녕과 성공을 기원합니다. 행복하시오…

타이슨과 투이1

무슨 권투선수나 새이름이 아니고, 연초에 앞집으로 세들어온 젊은 커플의 이름이예요. 두사람 모두 이나라 원주민과 백인의 피가 섞인, 이곳에선 마오리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일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는군요. 남자는 30대 중후반인데 성격이 밝고 붙임성도 있고 좋네요. 여자는 좀 어려보이는데 임신중이었다가 몇주전에 아기를 낳았어요.

남자는 작은 고물 트럭을 몰고 다니며 집이나 저층빌딩의 외부를 세척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가 꽤 되었는데 장차 대학에 진학해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요. 남자는 참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비록 세든 집이지만 늘 집 외부와 주변을 정말 깨끗하게 해놓고 살아요. 우리가 공유하는 드라이브웨이도 늘 물청소를 해서 깨끗합니다. 장차 우리집에 좀 해야할 일들이 있거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하는 사람을 찾으면 서스럼없이 추천해 줄만한 사람입니다.

두세번 부부가 큰소리로 (욕도 좀하면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한번은 대판 싸우는 것 같았어요. 며칠 지나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는 계면적게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괜찮고 이렇게 사과도 하는 태도가 참 훌륭하다고 말해줬어요. 짧게 덧붙였어요.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이 큰 변화의 시기에 가족 모두가 특히 부인이, 불안정하고 그래서 다툴수도 있다. 나도 그랬었다. 당신이 가족을 아끼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으니 앞으로 잘 풀릴 것이다’ 이렇게 좋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어요. 영어가 좀 정확하지 않았어도 그는 내 진심을 보았으리라 믿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빠지는데요. 이곳에서 수십년을 살면서 사람들이 큰소리로 다투고 싸우는 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내 자신이 그런 좋지 않은 짓을 했던 적은 옛날에 있었는데요, 술취한 내귀에는 별로 큰소리로 안들립디다. 지금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예요. 술을 먹지 않으면 나의 어리석음이 바깥으로 세나가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 그런데요 이곳에서 큰소리로 다투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마오리원주민 혹은 주변의 섬나라들에서 온 다혈질의 사람들입니다. 백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목격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어릴적에 (지금은 돌아가신지 오래된) 여행가 김찬삼님의 책을 즐겨 보았었는데요, 흥미있는 사진과 이야기도 많았겠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그분 말씀이 ‘나는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수없이 여행하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는데,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와이셔츠 찢으면서 싸우는 나라는 한국뿐이더라’는 말씀이었어요 (무슨 나쁜 뜻으로 악담하신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본데로 느낀데로 하신 말씀).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아닐수 없어요. 나는 아주 어릴때 이 글을 읽었는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이나라 백인들은 영국등 유럽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지만, 원주민들이나 태평양 여러 섬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큰 몸집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태평양 섬나라 문화가 반영된 아름다운 맬로디의 노래를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들으면 ‘정말 아름답다. 사람이 저렇게 먹고 마시고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본성이 아닐까’ 이렇게 좋은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인구대비로 감옥에 (다른 인종들에 비교해서) 몇배나 더 많이 가고 또 기업체나 회사에는 (특히 머리를 쓰거나 경영을 하는 자리에는) 거의 없습니다. 같이 일을 하려면 그들의 낙천적인 (좋게 말하자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자면 @^&*$??) 태도 때문에 잘하기 어렵고 또 함께 좋은 성과를 내기도 어렵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야자수 아래에서 유클랠레를 치면서 알로하오에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대를 이은 습관’은 바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불과 몇십년전에, 길거리에서 와이셔츠를 찢으면서 싸우는 유일한 민족이라던 우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나도 어릴때는 이웃집이나 혹은 길거리에서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을 흔히 보면서 자랐어요. 개천부근에서 흙놀이를 하면서 살아서 그런가 🙂 술먹고 유클랠레를 치면서 노래하는 민족 그리고 술먹고 길거리에서 와이셔츠를 찢으며 난투극을 벌이는 민족! 하지만 두 민족 모두가 흥을 아는 멋진 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또한 알아요. 어쩌면 백인들은 싸우지도 않지만 또 화끈한 사랑이나 감정의 표현도 없는 좀 물같은 (가짜해탈?) 민족들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구요. 부부도 그저 물처럼, 서울내기들 표현에 따르면 대면대면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또 박터지게 싸우고 진하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결국은 제로섬(zero sum) 인가요 🙂

내일 마저 할께요.

걷고 달려야 하는 이유

일전에 두뇌를 위해서 달려야 한다고 했었는데요, 이번에는 좀 더 절실하고 현실적인 이유를 이야기 하려고 해요.

‘노인들에게 물어 보면 가장 두려워 하는 질병이 치매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암도 밝혀진 원인들이 있듯이 (따라서 일부는 우리가 예방할 수 있듯이) 치매도 좀 예방하거나 늦출 가능성이 있는 것 같네요.

중년기의 심폐능력이 노년기의 치매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스웨덴의 한 대학에서 40년에 걸쳐서 연구한 내용을 인터넷 신문에서 우연히 보고서 조금 더 찾아 보았어요. 예테보리대학교 뉴스에 실린 글을 대략 번역하였는데요, 전체 논문은 이곳에서 읽어볼 수 있어요.

심폐능력이라고 번역한 cardiovascular fitness의 정의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심장과 폐가 산소가 녹아 있는 혈액을 근육에 전달하는 능력과, 그 근육이 전달 받은 산소로 운동에너지를 생산하는 능력을 함께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이 났을때 심장이 빨리 뛰고 또 숨을 많이 쉬게 되는데요, 그것이 심폐능력이 아닌 이유는, 그렇게 생성된 산소로 성을 계속 내는 것 이외에 달리 운동에너지를 근육에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내지 마세요. 운동 안됩니다 🙂


중년의 체력과 치매 위험 사이에는 상당한 관련이 있다.

‘중년시기에 높은 심폐능력을 (심폐지구력) 가졌던 여성들이 장차 노년에 치매에 걸릴 가능성은, 평균 혹은 평균이하의 심폐능력을 중년에 보여 주었던 여성들보다 90% 가까이 낮다. 다시말해 거의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이 연구결과는 우리가 치매를 (그리고 알츠하이머처럼 유사한 종류의 질병을) 예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 연구는 191명의 스웨덴 중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평균 50세였을떄 심폐능력을 측정하여 기록하고 비교한 다음, 향후 44년 동안 6차례에 걸쳐서 치매를 검사한 결과 입니다.

심폐능력을 측정했을때, 여성들은 크게 4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심폐능력 (40명) 중간정도의 능력(92명) 낮은 능력(59명) 그리고 혈압이 검사중에 너무 높아지거나 혹은 다른 건강상의 이유로 측정을 마칠 수 없었던 20명 등입니다.

높은 심폐능력을 측정시에 보였던 여성들은, 향후 44년간 실시한 치매검사에서 오직 5%만 (다시말해 40명 중에서 2명만) 치매가 발병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중간정도의 능력을 보였던 여성들은 25%, 낮은 능력을 보였던 여성들은 32%, 그리고 측정을 마치지 못했던 여성들은 20명 중에서 거의 반이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높은 심폐능력의 여성중에서 치매가 발병한 그 두명은 (다른 그룹들에 비하여) 평균 11년 뒤인 90세를 전후해서 발병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른 그룹의 여성들은 평균 79세에 치매가 발병했습니다.

연구를 진행했던 학자들은, 이 결과가 중년시기 (낮은) 심폐능력이 노년기 치매의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확실한 관련이 있음을 밝혀 냈다고 말합니다.

‘흥분되는 연구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중년시기에 심폐운동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우리는 치매를 지연하거나 혹은 예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예를들면, 삶의 어떤 시기에 육체적인 건강을 높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치매등을 포함한 노년건강에 영향이 있는가 등은 더 연구되어야 합니다.’

이 연구는 참여 대상이 비교적 소수이며 또한 50세 전후에 한번만 심폐능력을 측정했다는 한계가 있음을 밝힘니다.

당신의 기분을 가장 잡치는 인간 – 어쩌면 그 안에 당신이 있다

노르웨이의 노장 골퍼 ‘수잔 페테르센’이 어제 막을 내린 솔하임컵 매치에서 미국팀을 꺽고 유럽팀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기사를 아침에 읽었다.

한때 LPGA경기를 자주 티비로 보면서 이 여자 선수의 경기 모습도 많이 보았었다. 이 선수를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겉은 어른처럼 보이지만 속은 성질 못된 어린아이’ (인데 골프를 잘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침묵하는 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이 여자의 모습이 티비에 등장하면 밥맛이 뚝 떨어지기 때문에 잠시 채널을 돌렸다가 되돌아 오는 경우도 있었다.

경기 매너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나쁘고, 철없는 못된 언행을 티비 카메라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당시 이미 서른 내외였다. 카메라가 버젓히 생중계를 하고 있는데도 ‘열여들’ 쌍욕을 해대는 것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 조성 또 심심할까봐 가끔씩 전설적인 쥐랄을 했었다.

2015년 솔하임컵 경기에서는, 미국팀에 소속된 한국계 골프선수와 일대일 매치를 하던 중에, 컵에서 50센티도 떨어지지 않았던 공을 당연히 컨시드를 받았다고 집어든 것을, 갑자기 가다가 되돌아와서 컨시드 준적이 없으니 반칙이라고 때를 써서 이겼던 적도 있었다. 상대선수 엘리슨리는 울고. 끝까지 제 잘났다고 우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사과 비슷하게 하는데 내가 사과문을 읽어 보니 이것 또한 철부지가 냄새가 솔솔나더라. 참 대책이 없는 인간이다 싶더라.

흔치는 않았지만 예전에 이런 인간들을 직접 상대했던 적이 나도 있었다. 나는 심하게 반발을 했었는데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었다. 나 자신이 그들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궁금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심하게 이런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안받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도를 넘어 (out of proportion) 심하게 반응하고 반작용을 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사람들의 어리석고 철없는 짓을 보고 상대하면서,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유사한 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강하게 부정하고 혐오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 메타에 관한 설법을 들으며, 그러한 좋은 수행을 내 스스로에게 먼저 적용시키라던 말씀이 많이 와 닿았다. 그렇게하면 자신의 부족함, 모자람 그리고 나쁜면들을 인정하게 되고 (차차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면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 것이라던, 그 붓다의 가르침이 참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오늘 아침에 든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나도 그대들도 또한 ‘이런 인간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