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분을 가장 잡치는 인간 – 어쩌면 그 안에 당신이 있다

노르웨이의 노장 골퍼 ‘수잔 페테르센’이 어제 막을 내린 솔하임컵 매치에서 미국팀을 꺽고 유럽팀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기사를 아침에 읽었다.

한때 LPGA경기를 자주 티비로 보면서 이 여자 선수의 경기 모습도 많이 보았었다. 이 선수를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겉은 어른처럼 보이지만 속은 성질 못된 어린아이’ (인데 골프를 잘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침묵하는 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이 여자의 모습이 티비에 등장하면 밥맛이 뚝 떨어지기 때문에 잠시 채널을 돌렸다가 되돌아 오는 경우도 있었다.

경기 매너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나쁘고, 철없는 못된 언행을 티비 카메라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당시 이미 서른 내외였다. 카메라가 버젓히 생중계를 하고 있는데도 ‘열여들’ 쌍욕을 해대는 것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 조성 또 심심할까봐 가끔씩 전설적인 쥐랄을 했었다.

2015년 솔하임컵 경기에서는, 미국팀에 소속된 한국계 골프선수와 일대일 매치를 하던 중에, 컵에서 50센티도 떨어지지 않았던 공을 당연히 컨시드를 받았다고 집어든 것을, 갑자기 가다가 되돌아와서 컨시드 준적이 없으니 반칙이라고 때를 써서 이겼던 적도 있었다. 상대선수 엘리슨리는 울고. 끝까지 제 잘났다고 우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사과 비슷하게 하는데 내가 사과문을 읽어 보니 이것 또한 철부지가 냄새가 솔솔나더라. 참 대책이 없는 인간이다 싶더라.

흔치는 않았지만 예전에 이런 인간들을 직접 상대했던 적이 나도 있었다. 나는 심하게 반발을 했었는데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었다. 나 자신이 그들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궁금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심하게 이런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안받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도를 넘어 (out of proportion) 심하게 반응하고 반작용을 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사람들의 어리석고 철없는 짓을 보고 상대하면서,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유사한 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강하게 부정하고 혐오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 메타에 관한 설법을 들으며, 그러한 좋은 수행을 내 스스로에게 먼저 적용시키라던 말씀이 많이 와 닿았다. 그렇게하면 자신의 부족함, 모자람 그리고 나쁜면들을 인정하게 되고 (차차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면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 것이라던, 그 붓다의 가르침이 참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오늘 아침에 든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나도 그대들도 또한 ‘이런 인간들도’ 🙂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

서양아이들은 철이 일찍든다지요. 빠다 먹어서 그런가 🙂

언젠가 네덜란드 음악가 안드레 리우 이야기할때, 그 사람의 초기 대표 음반인 Dreaming을 우리 아이가 수천번을 들으며 잠이 들어서 머리에 인이 박혔을 것이라고 했었지요. 무슨 조기교육? 언젠가 부모의 카르마가 자식들에게 대를 잊는다고도 했었는데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아시안 아이들이 지각을 하거나 오전에 유치원에서 맥을 못추는 일이 많다고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설령 부모가 이곳에서 태어난 이민 2-3세라고 하더라도, 자기들의 부모가 했었던대로, 자기 아이들을 어른들 주변에서 뒹굴면서 밤늦도록 함께 있게 하다가 불규칙적으로 잠자게 하니 그렇다고 했어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서양아이들이 철이 일찍드는 이유는 ‘부모가 오냐오냐 오래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를 한국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싶은데요, 부모세대가 하도 없이 살고 또 눌려 살다 보니 한이 맺혀서 자식이라도 좀 큰소리 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면도 있지 않을까 짐작해요. 그런데 그런 성격은 이곳에서는 미숙아 혹은 성격에 문제가 있는 철부지로 취급되요.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언젠가 어떤 일본지식인이 ‘한국엄마들이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시작할때부터 한국도 선진국이라 불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물론 나도 100% 동의 🙂 아주 어려서 젖먹이며 안아 기르는 거야 어딘들 다르겠나요 하지만 아이가 한두살이 되면서부터 (정확한 시기를 기억 못하겠네요) 이곳에서는 소위 말하는 routine을 (일정한 생활 ’습관’) 적용시켜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예요. 저녁먹고 재미있게 놀다가 이른 저녁이 되면 자기방으로 데리고 가요. 엄마가 (그리고 아빠도) 방에서 함께 노래도 불러주고 책도 읽어주며 잠을 잘 자도록 도와주다가는 딱 문을 닫고 나와요. 우리 경우는 ‘Dreaming’ 시디를 늘 틀어 놓고선 나왔지요. 그래서 아이가 그 음악을 수천번 들었던 것이지요. 좀 적응의 기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 아이는 아무리 난동을 부리거나 악을 써도 (아이에게 위해가 되는 상황인지는 부모가 잘 봐요) 결코 나타나지 않는 부모를, 다시말해서, 아무때나 같이 뒹굴면서 ‘오냐오냐 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잔인하다고요? 아니지 싶은데요. 아이의 인격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요? 이것 하나만 듣고서 나머지 아홉은 모르면서 하는 말 같은데요 🙂 우리가 어떤 과정에 대한 언쟁을 벌이면서 결말이 나지 않을때는 그 과정이 초래한 결과들을 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물론 또 다른 종류의 언쟁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지만요…

가난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난을 벗어나고 난 이후에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언젠가 말했어요. 아시아 아이들이 부모와 뒹굴게 된 것은 어쩌면 그 부모 혹은 그 조부모 시절, 가난한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뒹굴던데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지금 그 2-3세들은 성실하게 노력하여 방이 여럿 있는 큰집에서 살면서도, 마치 단칸방에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말이예요.

이야기가 좀 옆으로 더 새는데요. 옛날에 훌륭한 부모와 착한 아들이 살았대요. 아들은 부모님이 제사 지내는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자랐는데요, 아들이 어릴때 집에서 고양이를 길렀어요. 제사상에 생선이나 고기를 얻을때면 몰래와서 먹어보거나 훔쳐가는 고양이를, 부모님은 제사를 지낼때면 방 한쪽에 좀 목을 묶어 놓았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착한 아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요. 이 착한 아들은 정성껏 제사를 준비하면서 어릴적에 보았던 그 고양이를 기억했대요. 부인이 고양이를 싫어하기 때문에 집에는 없는대요, 잘 아는 집에서 좀 고양이를 빌어다가 제사를 지내는 날에만 방 한쪽에 목을 묶어서 놓아 두고선 절을 했대요 🙂 만약 이 착한 아들이 장차 큰 벼슬을 하게 되고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제사용 고양이 빌리거나 혹은 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지 싶네요. 우리는 때로는 몰라서 장님 노릇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알고도 아무 생각이 없이 살다 보니 그냥 장님으로 지내는 경우도 있지 싶어요.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렇게 ‘습관’을 어릴때부터 몸으로 익히며 자라나는 아이들, 세상에 아무리 악을 써도 안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룰 속에서 플레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아기때부터 배우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해야한다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저절로 싹트기 시작하고, 이러다보니 일찍 철이 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빠다 때문은 아닌것 같아요 🙂

철이 든다는 의미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어쩌면 ‘역지사지’ 하는 능력이 아닌가 해요. 언젠가 읽었는데, 미스월드대회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으로 경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미리 촬영해서 그 화면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전문가와 함께 보고 분석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거지를 수도 없이 수정한다고 해요. 자신이 상상하는 ‘화면에 비치는 내 언행은 이럴꺼야’와 실제 화면에 나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한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된 상황을 잘 그려볼 능력과 의사가 있어야 하겠지요. 역지사지 그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쌓는 엄연한 능력이지 싶네요.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 일어서 본 사람만이, 그것이 무었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또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도움과 자비를 배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바로 이런 이유로, 이나라 사람들이 매우 개인적인 경향이 높으면서도,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자발적으로 잘 돕는다고 나는 생각해요. 아이는 아비를 닯아서 축구를 잘 못했는데요, 어리버리한 아이가 축구팀이나 어떤 운동팀에 끼어서 함께 시합을 할때도, 어떤 아이도 부모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싫어하거나 배척하는 느낌을 주지 않았어요. 나는 이것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내 생각에는, 물론 여유있고 또 성격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그 바탕에는 ‘역지사지’ 하는 부모들의 성숙함이 있었고 그 영향 아래있는 아이들이 ‘감히’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거역하면서 잘 하지 못하는 동료 친구에게 나쁘게 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버릇이 대를 이어요. 그리고 이렇게 대를 이은 버릇들이 모이면 그 사회의 어떤 큰 흐름이 되는 것이겠지요.

지진이 났을때도 또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송이 될 때도, 수 많은 이곳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리고 ‘조용히’ 해준 아름다운 미담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사회전체가 어떤 ‘안전망’ 같은 것으로 둘러 쌓인 느낌이 들어요. ‘내가 곤경에 처하면 누군가가 도와준다’는 잔잔하지만 확실한 믿음이 (경험을 통해서 오래 증명된 것이)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이, 곤경에 처한 타인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또 다른 큰 이유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개인주의적이지만 결코 이기적이지 않아요. 한국은 전체주의적이라 얼핏보기에 덜 이기주의적이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대를 이어온 가난과, 어릴적부터 남을 존중하지 않고 군림해야 그들로부터 받들어진다는 전근대적인 육아로 길러진 결과라고 생각해요.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리지 싶어요 이것이 변화하는데… 고양이 빌리는 것도 그만두고 또 방 여러개인 큰 집에서 정말로 부유하게 사는 것에도 익숙해지길 바래요. 우리 모두가 참된 의미의 ‘부자 되기를’ 기원합니다.

메타에 관한 가르침 – 네번째

궁극적인 메타 수행은, 주로 자기 자신의 물리적 정신적 한계와 씨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때 마음도 또한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굳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사실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나, 자신 혹은 ego’가 무의식중에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속에 아무 생각없이 빠져서 저항하고 다투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그리고 또한 나쁘다 좋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대신에, 다만 그것이 존재함을 그리고 내가 현재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receive), ‘내가’ 이러니 저러니 따지며 ‘분별하는’ 그런 자기중심성(ego)에서 벗어나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괴롭히는 좋지 않고 괴로운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다른 다양한 수행의 방법들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러가지 상황이나 사람을 인정하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하노라면, 당신에게 괴로움을 주던 그런 상황들이나 사람들이 돌덩어리 같이 변치않는 그 무었이 아니라, 차차 모퉁이도 떨어져 나가고 조금씩 덜 딱딱한 것으로 변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상이 변화하면 당신 자신도 또한 동시에 그런 방향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요, 아상의(ego) 지배를 덜 받게 되는 것이요 또한 ‘나의 세상(대상)이 부드러워지면 나 또한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런 대상들은 불쾌하고 싫은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노력을 기울이며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그들이라는 이원적이며 이분법적인 마음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대상이나 상대는 (세상만물과 같이) 변화하고 있었겠지만 지나간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놓지 않으려던 당신의 마음이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면도 있습니다. 만약 메타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열고 그 변화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대상과 더불어 당신 자신 또한 변화할 것입니다.

내가 영국에 있을때 가끔 북아일랜드에 가서 설법을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너무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 했었을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던 이 메타의 실천을 권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다시 그곳을 찾았을때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듣게 되었고 그 이후에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싫어하던 그 사람이 결국은 회사를 옮겼다더군요. 하하하.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상대도 (상황도) 변한다는 것은 맞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오해나 섣부른 짐작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정확한 perception을 주고 그 결과로 실재하지 않은 환상을 오직 당신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풀리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녹듯 사라져버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에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실재하고 있었던가요? 열린 마음은 가벼운 마음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자기 스스로를, 어떤 이유로든지 좋게 대접하지 않고 또 자주 힐난해 왔다면, 이런 메타를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자신을 잘 대해줘도 괜찮다. 힐난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차차 부드럽게 상대하다가 보면,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때 자기 스스로에게 ‘또 그러네 친구야’ 하면서 좀 웃으며 가볍게 대할 때도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진지하거나 액면 그대로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함’ 혹은 ‘호의’라는 의미로 내가 사용하는 ‘friendliness’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친하고 호의적인 사람은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때, 따지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편이 되어 좋은 말을 해주며 힘을 주려고 할것입니다. 여태껏 메타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마음을 먹는 습관 그리고 생각을 하는 습관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메타를 실천하는 것도 또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에 생겨나는 불쾌감, 혐오감, 싫어하는 마음을 당신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면 당신 마음속에 다른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 여전히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 메타를 실천한다면 점차 그 실체를 점점 명확히 보게 되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대상에게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강제하려고 시도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지고 가까워지며 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상대에게서도 또한 나 자신에게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와 마음챙김이 더불어 적용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네요.

다시말하지만 메타 수행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수행입니다. 메타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눈은 멀며 몸은 굳어집니다.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며 보지 못하게 되며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내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의 well-being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메타를 통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순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나은 well-being의 추구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명상수행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 위에 명상을 덧붙여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정과 메타의) 과정을 통하여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여 더 잘 명상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바깥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먼저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보물을 찾아내서 활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차차 익숙해지면 이러한 메타 수행을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눈을 가리던 혼란함과 마음을 한계짓던 ego를 벗어나는 해방을 맛보고,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에 관한 티라다모 큰스님의 설법이었습니다. 끝.

메타에 관한 가르침 – 세번째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는 나쁘고 악한면들이 존재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고 또 정당하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열어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좁은 식견을 (perception)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수준에서 (realistic) 그것들과 좀 더 발전되고 기술적인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에 우리가 좁은 식견이었을때 깨닫지 못했던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흔히 성을 내고 혐오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스스로의 well-being을 헤칩니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잘 대해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메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런 설법을 듣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논리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 깊이 받아 들이고 스스로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도 메타 수행을 태국에서 처음할때 이런 과정을 시행착오를 통해서 경험하며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이상적으로 세상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메타를 설천하려고 했었는데 (예를 들어) 막상 더운지방에 많은 개미들이 내 몸에 마구 기어올라 올때, 머리로 생각하는 메타의 한계와 현실적인 실천의 차이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내가 영국의 사찰에 있을때 주변에 토끼가 많았는데 늘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고 가꾸는 꽃들을 먹어치우는 것 등을 싫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토끼는 그저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토끼로써 해야 할 것들을 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부터는 더 이상 그 토끼들이 정원을 어지럽히는 것에 내 마음이 따라서 어지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메타는 자기자신의 well-being에서 (평온과 안정) 시작되고 또 그것으로 되돌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순환이 반복되면 점점 자신의 well-being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전파되고 전달되겠지요. 결국에는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하는 상대에게도,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나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매우 싫어다는 상대가 (반대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이전에 했던 판단이나 느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은 결함이 없다고 흔히 생각하지 않나요? 그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됨.

인생 후반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었일까요?

아래는 코메디언 이용식씨의 대답인데요, 이분 참 잘 사시는 것 같아요. 이 말을 해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사실들을 종합해 보건데 정말 그런것 같아요. 아래 말씀 잘 새겨두려고 합니다.

“내 건강 그리고 가족의 건강입니다. 가까운 가족의 건강이 나빠지면 나 역시 무너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리고 큰 욕심부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굉장히 욕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욕심이 너무 많으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대신 긴장할 땐 긴장은 해야죠. 긴장하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어요. 50년쯤 했다고 해서 대본도 대충 보고 방송에 나가면 결국 티가 나게 돼 있어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재미없는 소리를 하면, ‘이용식이 재미없다’고 하지 ‘제작 PD나 작가가 재미없다’고 합니까? 또 하나, 후배들에게 자꾸 가르치려 들면 안 돼요. 선배로 사는 것보다 어른으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