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한 단상

이곳에 와서 내가 처음으로 얻었던 직장의 상사가, 권고사직후 이삼년 지나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 도시니 그 사람이 생전에 몰고 다니던 차가 (가족들이 계속 몰았으니)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쇼핑센터나 시내길에 주차된 것을 몇차례 내가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다. 보통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차나 물건들이 왔다가 가는데, 그 경우에는 반대였던 좀 특이한 경우라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사람 생전에 그 차 몰고 다닐때, 자기가 죽고나서 그가 몰던 차는 여전히 거리를 오가는 상상을 해보았을까…

미국에는 플린스톤스라는 우리에게도 알려졌던 만화때문에 인간과 공룡이 공존했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아마 한국에서도 물어보면 긴가민가 할것이다. 공룡은 실존했었기에 당연히 화석은 물론 잘 보존된 뼈도 발굴이 되어 왔다. 현재까지 발굴된 공룡의 뼈로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것은 1990년 미국에서 발굴된 ‘수(Sue)’라고 이름지어진 공룡이라고 한다. 90% 정도 완전한 골격이 그대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 공룡이 생존했던 시기를 포함한 많은 자료들이 연구발표 되었다.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나서 이야기를 계속하자 – 위 링크에 가서 우측상단의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수 있다.

방금 그대와 내가 인터넷으로 본, 실제로 지구상에 6,700만년 전에 돌아다녔던 이 공룡 수(Sue)의 유골은, 우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전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6,000만년 이상의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밖으로 나왔으며, 현대문명을 이룬 인간에 의해서 그 실체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현대 문명을 이루고 산 기간을 200년이라고 가정하여 이것을 24시간 시계로 비유하자면, 이 공룡이 죽어서 묻혀있던 시간은 23시간59분59초 이상이고, 그 실체를 밝혀낸 현대문명은 약 0.3초 정도의 시간이라 할수 있다. 예수의 탄생부터를 현대문명으로 쳐준다고 해도 약3초 정도의 시간이 되겠다.

이글을 시작할때 죽은 매니져가 몰던 차가 돌아다니더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실존했던 공룡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할 꿈도 꾸지 못했던 까마득한 먼 옛날에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이제사 인간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관련된 시간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 – 20만년 전에 현인류가 (지금인류의 직계조상) 지구상에 탄생했는데, 이 시간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100번 반복한 시간이 되겠다.
  • – 500만년 전에 인류가 침팬지등으로 부터 분리되었다고 하는데 (인류와 유사한 조상의 시초), 이 시간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2,500번 반복한 시간이다.
  • – 6,700만년 전에 이 공룡 ‘수(Sue)’가 살았었는데, 이 공룡이 죽은 이후,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30,000번 이상 반복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위에서 언급한) 침팬지와 인류가 분리되고 인류와 유사한 조상이 지구상에 등장했었던 것이다.
  • – 그리고 현재 인류의 조상이 지구에 등장한 것은, 예수탄생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이때로부터 또 다시 3,000번 이상을 더 반복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나? 인간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나? 나도 그런 기분이 좀 든다. 또 어떤 생각이 드나? 인간의 역사도 또 한 인간의 삶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짧고 허무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나? 어떤 과학서적에서 이런 글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천체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로 평생을 보내고 나서 깨달은 (인간과 과학의 한계에 대한) 내생각을 비유로 표현하자면, 100층짜리 마천루 빌딩의 지하층에 우연히 들어간 바퀴벌레가 지하실 천정을 보면서 벌레의 능력으로 마천루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것 같다는 것이다.”

건방떨며 정신없이 살기보다는, 겸손히 한계를 받아들여 조용히 살아야 할 이유들이 내 생각에는 훨씬 더 많지 싶다. 종교니 과학이니 이념이니 투쟁이니 역사니 발전이니 하는, 우리 인간 삶의 실체를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방금 위에서 말했던 그 바퀴벌레 운운하던 과학자, 내 생각에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직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바퀴벌레이면서도 또한 결코 바퀴벌레로 남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과학자도 자신의 글을 아마 그런 말로 끝맺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무심코 베켜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대 그리고 나. 정신 차리고 살자.

철봉에 100초 매달리기

철봉에 ‘100초 매달리면 100달러’ 준다는 영상 본적이 있나?

온 나라가 가택연금 상태인지라, 오늘 오후에는 그나마 허락된 달리기를 하고 집에 되돌아와서, 재미삼아 철봉에 매달리면서 시간을 재보았다. 그야말로 아무생각도 준비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나도 정확히 100초간 매달려 있었다 🙂

물론 체중이 가벼우니 쉬웠을테고 영상에 등장하는 거구들에 비하면 절대적인 악력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철봉에 매달린 ‘내 몸을 내 손으로’ 100초 동안 버티며 잡고 있었다는 것이 내게는 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고작 100초? 아주 크고 얇은 종이를 반으로 계속 접는다면 몇번 정도를 접을수 있을까? 100번? 2,000번? 세계기록, 아마 앞으로 깨지기 거의 불가능한 현재의 기록이 12번이다.

한번 직접 매달려 보시지 그래? 악력과 건강수명이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테고.

당신 괴로움의 절반 혹은 그 이상

언제 어디나 몸이 탈이 나서 괴로운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한국처럼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오염된 물 이외에는 마실물을 구할수가 없거나 굶주려 영양실조로 여러가지 병에 걸려 몸이 아픈 사람들 보다는, 아마도 마음이 탈이 나서 괴로운 경우가 훨씬 많지 않을까? 마음이 탈이 난 상태가 지속되다가 몸이 탈이 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굳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다시 말하지 않아도, 당신과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이 탈이 나는 주된 원인은 ‘인간관계’ 때문인 경우가 압도적이겠지. 당신 이외의 사람들이, 그 나쁜 넘들이, 당신에게, 죄없는 당신에게, 유형 무형으로 끼친 것들의 결과로…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많은 괴로움을 겪으면서 산다. 공해가 없다고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구밀도가 낮다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가 적은 것도 아니다. 평균 수명을 비교해보면 한국이 더 높다. 다만 약간 시간적 여유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고 또 궁금한 바가 커서 좀 찾아보고 궁리해 본 것들을 당신과 나누려고 한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괴로우면 도망치거나 찾는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도망치는 것이야 누구나 아는 그대로. 그런데 ‘찾는다’는 의미는 아마 ‘해결책을 강구한다. 대책을 찾아본다. 원인을 규명해본다’ 이것들이 섞인 것이 아닌가 싶다.

몇년전에 EBS에서 시리즈로 방영했던 ‘대한민국 화해 프로젝트 – 용서’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도 ‘찾는다’의 일환으로 년전에 열심히 보았었는데 최근에 마음이 복잡할때 다시 찾아서 몇개를 시청하였다. 년전에도 물론 찾는데에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큰 도움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패턴이, 어떤 기승전결이 좀 눈에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가만히 되앂어보니, 년전에 붓다의 가르침속에서 읽고 또 읽고 배우고 또 배웠던 바로 그 내용들이더라. 하수는 바로 코앞에 대줘도 못본다더만…

내가 보건데 ‘대한민국 화해 프로젝트 – 용서’에 등장하는 소위 ‘원수지간’인 사람들 열중의 아홉은 그 원수지간이 된 원인이 (시작이) ‘섭섭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 섭섭한 마음이란 것이 얼핏 보면 크게 해롭거나 위험한것 같지 않아보일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인간관계를 작살내는 화약같이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섭섭한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반복이라는 영양분을 받아먹고 자라면 아주 쉽게 ‘원망하는 마음’으로 변화 성장한다. 원망하기 시작하면, 덩달아 내가 해준것에 대한 본전생각이 나기 시작하고 이러면 끝장이 멀지 않게 된다. 사랑은 미움의 씨앗이라더만, 그러면 이 섭섭한 마음의 씨앗은 무었이었을까? ‘기대’가 가장 대표적인 씨앗이 아닐까? 서로 마음이 맞고 또 죽이 맞아 오가는 가운데 인간관계가 발생하고 발달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오가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한 사람에게는 마땅하고 당연한 그 무었이 상대방에게는 아닌 경우가 생길 수 밖에는 없다. 그런데 이것을 좋은 타이밍에 적절한 대화로 풀기란 현실적으로는 참으로 어렵다. 별로 이권도 없고 나오는데로 지껄여도 문제 없었던 어릴때도 이것이 안됐는데, 나이 들어 자기딴에는 자존심도 높고, 걸리는 것도 많고 또 서로 조심해서 언행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쌍방에게 좋은 타이밍을 찾고 적절한 대화로 이런 상황을 해결 하기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한쪽에 혹은 양쪽 모두에 앙금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대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한쪽은 기대에 맞추어 했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 이때부터 기대라는 씨앗이 발화를 시작하여 섭섭한 마음이라는 싹을 틔우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직도 크게 나빠 보이지 않을수도 있다.

섭섭한 마음이 싹이 터서 서서히 자라게 되면, 미움과 원망이라는 잎들이 점점 더 무성하게 자라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기대 -> 섭섭한 마음 -> 원망과 미움 -> 인간관계 파탄이라는 코스를 밟게 되는데, 이때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끝이 나는 경우는 또한 드물다고 하겠다. 원망과 미움을 폭발시키면서 장열히 산화하는 곳에, 우정이나 부부애 그리고 동료애등의 파편이 널부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기대라는 씨를 뿌리지 않을수는 없을까?’똑똑한 당신은 이미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연구한 바로는 이게 좀 역설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다. 씨를 뿌리지 않을수도 있고 또 뿌리지 않을 수가 없을 수도 있고 좀 그렇다.

인간이 오늘날 이러한 문명을 이루고, 21세기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바탕에 바로 이 인간들이 하는 ‘기대’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기대가 없으면 도전이 없고 시도가 없고 발전이 없고 향상이 없는 것 아닐까? 인간의 이처럼 모순된 운명이,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 바로 이 ‘기대’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잠시 잡담하나 하자면, 년전에 부탄인가 어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인상만으로, 이 나라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고라느니 무슨 이 나라 사람들이 인간행복의 열쇄를 쥔것처럼 떠들어 댓던 적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를 한국 사회전체가 정부의 주도로 대응을 하면서, 국내에서는 그야말로 끝없는 비난과 비평 그리고 책망의 목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던 것같은데, 막상 다른 선진국들이 한국과 유사한 상황에 쳐하고 나니, 그들로 부터 찬사와 부러움을 사며 한국으로부터 배우고 본받아야겠다는 말이 많이 오고가는 상황과 유사하다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부탄의 넓은 초원에서 말똥이나 줒어다가 불때서 씻지 못한 시커먼 손으로 쩔어빠진 그릇에 차 끓이고 밥해먹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면, 얄짤없이 그대로 사망이라는 말이다. 가난이 얼마나 진저리 쳐지고, 절대적인 가난이 만드는 카오스속에 인간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낮게 되는지, 자기손으로 가난을 물리져 본적이 없고 대부분의 것들이 주어진 세대들은 알도리가 없다. 그러니 부탄이니 부탄가스니 하는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하는 것이다. 가거라. 가서 1년만 살아 보거라. 아직도 부탄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말이 나오는지. 인간아 인간아…

기대가 적으면 섭섭한 마음이 적다고, 부탄처럼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내가 말했듯이 이게 좀 역설적인 면이 있는 것이, 부탄과 반대쪽인, 예를들면 노르웨이나 스위스처럼 부유함과 높은 국민수준으로 모든 것들이 정돈되어 제자리에 있고 (있어야 하고) 칼같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면 사람들이 행복한가하면 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야라꼬?

다음편에 계속하겠다. 야비한 3류 연속극 같구나. 광고 팔아 돈벌이 할려고 결정적인 순간에 ‘다음 이 시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