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세번째 이야기

이전 글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은 ‘out of proportion’이라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이영훈선생은 ‘반일 종족주의’ 책에서 한국인 위안부의 숫자가 3,600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했어요. 그대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서 살해된 베트남 양민의 숫자는 9,000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어요.

우리가 위안부문제와 징용문제를 국내외적으로 아주 큰 이슈로 만들고 또 일본정부에 지속적으로 완전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요구할때, 그와 ‘동시에’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큰 잘못에도 완전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우리 국력수준 국가수준에 맞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국제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우리가 존중 받으며, 우리가 하는 말에 힘이 생기고 또 우리의 요구가 정당하고 떳떳한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어요? 스스로의 언행이 앞뒤가 맞지 않고 또 그것을 세상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존중 받을 수 없으며, 하는 말에 힘이 실릴 수 없으며 또 그 요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지 않겠어요? 다만 때쓰고 어거지를 쓰는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게 되지 싶네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라들 사이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베트남전쟁시 벌어진 양민학살에 대한)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국민정서는,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고 또 그들로부터 받아 내고자 하는 것들과 큰 차이가 있어 보여요. ‘전쟁통에 민간인이 죽을 수도 있다. 그들이 베트콩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어디 있는가. 다른나라는 그런 짓 안했나. 이미 반세기도 지난일을 가지고 뭘 그렇게 따지자는 것인가’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여요. 베트남전쟁 보다도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이고 또 사람을 학살한 것도 아닌 이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은 그동안 여러차례 성의를 보이고 노력을 했어요. 수차례에 걸쳐 정부(최고) 차원의 사과와 금전적 보상이 직간접적으로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 속이 후련하지 않고 또 진정성이 부족해 보인다고요? 그러면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는 왜 그들에게 후련하고 진정성 있는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단지 돈이 아깝거나 사과의 말을 할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 이면에 매우 복잡한 국내외의 이슈들이 묻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국민 대다수는 오래 묻혀 있던 부끄러운 과거사를 끄집어 내고 파헤치기를 바라지 않겠지요. 우리 선대 아버지들 삼촌들이 했던 짓이잖아요. 일본은 다를까요?

정상적으로 살려면 그리고 좀 잘 살려면 앞뒤가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은 물론이지만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소리를 내고 더 힘으로 밀어부치기 전에, 과연 무었이 지금 우리들에게 좀 더 앞뒤가 맞는 것인지 생각하면 좋지 싶어요.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베트남 여러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 중에서 비교적 알려진 2곳에 씌어 있는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아래에 옮겼어요.


“디엔즈엉은 예전에 강과 바다가 있던 곳으로, 신성한 이곳에서 락과 홍의 자손이 호앙선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땅을 열고 500년 전 나라를 세웠다. 사람들은 하미, 하깡, 하방, 하록, 지아록 등 마을을 세웠고, 이곳은 예로부터 평화롭게 살면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땅이었다.

먹구름과 천둥, 번개가 치고 적이 마구 몰려와 평탄한 땅에 파도를 일으키고 마을 사람을 한데 모아 마을을 버리게 하고 고향을 버리게 했다. 칼로 끊는 듯 내장이 찢기는 아픔으로 주민들은 땅을 잃고 강을 잃고 바다를 잃고 농사일을 잃고 낚시일을 잃었다. 악독하고 끔찍하여라. 떨어진 목에서 흐르는 피, 경악으로 야자수 숲은 마른 머리카락이 떨어지듯 흩날리고 강은 휘어져 돌고 눈물은 고여서 늪이 되고 만이 된다. 거기에는 단두대가 있었고 교회는 갑자기 잿더미가 되었고 하지아 숲은 마른 뼈들로 흰색이 되었고 케롱 해변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스무 넷째 날 청룡부대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흉포하게도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였다. 하미 마을은 30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는 산산이 흩어지고 태워졌다. 그 지역은 붉은 피로 덮였고 모래는 뼈와 섞이고 집들은 사람과 함께 불태워졌다. 탄 고기와 비린 피를 탐하는 개미들, 화염이 지나간 후 더욱 짙어진 어둠을 생각한다.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가 툇마루에 머리를 떨구고 쓰러져 있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 있겠는가. 아이들이 신음하고 시체가 서로 포개져 쌓여 있다. 아직도 죽은 사람의 피가 말라서 고여 있고 아이는 엄마 배 위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을 찾는다. 어린아이는 입을 다쳐서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다. 더 처참한 것은 그 후에 탱크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악마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지 위의 메마른 뼈, 무고한 영혼의 외침이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진다.

하늘은 어두울 때도 밝을 때도 있는 법. 지난 25년간 고향은 평화롭게 다시 세워지고 디엔즈엉 땅은 다시 비옥해지고 감자와 쌀이 잘 자라고 강의 물색도 좋아져 물고기와 새우도 많다. 당이 갈 길을 인도하여 거친 땅을 개간하였다. 과거 전쟁터의 아픔도 줄었다. 이 깊은 상처를 남긴 그때의 한국인은 지금 찾아와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용서 위에 비석을 세우고 고향 발전을 위한 인도적 협력의 길을 열고 있다. 모래와 소나무는 하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향불은 저세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함이다. 천 년의 흰 구름은 마을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한다.”

2000년 8월 디엔즈엉 당, 정부, 주민

출처 참고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우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출처 참고


출처

개가 당신의 자식?

인연은 소중합니다. 설령 개와 맺은 인연일지라도, 십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다 보면, 특별하고 애틋하고 또 잃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우리와 함께 12년 세월을 살았었던 버둑이 녀석이 죽은지도 이제 2년이 되었어요. 뒷산에 온 가족이 울면서 묻어 주었는데 요새는 자주 가지 않게 되네요. 하지만 출퇴근길에, 버둑이가 다니던 그 가축병원을 지나면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처음 우리집에 데리고 올때 안고 왔던 사람도 나였었고 또 안락사 시키러 마지막으로 그 가축병원을 함께 걸어 갔던 사람도 나였어요.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었는데요, 그 어리버리하고 먹을 것만 밝이며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잘 자던 븅신개 (내 나름의 유머러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버둑이는 내게 좋은 교훈도 남겨주고 떠나 갔어요. 지금도 그 븅신개를 생각하니 븅신주인이 눈물 나네요.

몇년전에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로 수출한 도축용 소를 (어떤 이유로 소고기를 수입하는 대신에, 살아 있는 소를 수입하여 자기들이 직접 도축. 호주 북부와 인도네시아는 가까운 거리) 인도네시아인들이 비인도적으로 다루는 장면을, 아마도 호주동물보호단체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도축장에서 몰래 찍어서 호주 전체에 방송을 하면서 크게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던 적이 있었어요. 혹시 여러분도 봤을지도 모르는 ’60 Minutes’라는 프로그램에, 이 내용이 방영되는 것을 나도 보았어요.

그 나라의 수준을 보려면, 사람들이 장애인들과 동물들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를 보라는 말이 있어요. 지당한 말이지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게 도축하려는 소들을 대접합디다. 그 사람들이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대접할 것 같아요? 가난하고 무식하면, 더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당연하고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인도네시아도 차차 호주처럼 부유해지고 또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도축장 환경도 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방식도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민주화되고 더 선진화되겠지요. 지금 선진국인 나라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겠지요.

그런데 방송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돈받고 판 소들이 인도네시아 도축장에서 얻어 맞는 것을 보는 호주인들이 그만 흥분하여 그 소들과 자신들을 동일시 하기 시작했어요. 동물애호협회나 그런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이지 싶은데요, 몰래 찍은 필름에 등장하는, 얻어 맞고 나쁘게 대접 받는 호주소들을 설명하면서 사람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저 앞줄에서 맞고 있는 소는 ‘John’ 그 뒤에 쓰러져 있는 암소는 ‘Jenny’ 이런 식으로 말이예요. 그 장면을 보면서 그런 이름을 듣는 호주 사람들은 기분이 어땟을까요? 마치 내 친구 ‘John’을 혹은 내 이웃 ‘Jenny’를 야만한 동양인 새끼들이 마구 팬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단번에 생기지 않았을까요? 이것을 노렸겠지요, 그리고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소수출 금지).

그때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딱 들었어요. 그 ‘John’과 ‘Jenny’를 호주에서도 죽여서 스테이크로 만들어서 방송전에 당신도 먹고 왔잖아요? 아니 채식하라는 말이 아니고, 식용으로 길러서 판 소가 비록 도축되는 과정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마치 사람처럼 감정이입을 할 수가 있나요? 그리고 그 일부 호주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달성했을지 몰라도, 이런 발상 자체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극히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도 무시했을 꺼예요.

작년에 버디와 오선이 이야기 하면서 ‘개는 개로 대접하는 것이 좋다. 주변에 있는, 개 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는 동족 인간들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 개라고) 나오는데로 지껄이고 하고 싶은데로 하면, 당신 자신에게도 그리고 개에게도 좋지 않다’고 말했었어요.

이번주에 우연히 개와 관련된 몇개의 기사를 읽으면서, 기사를 쓴 개인도 단체도 개를 ‘아이들’ ‘우리아들’ 같은 말로 공식적인 매체에서조차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참 왜 이러나 싶네요. 일전에 말했던 ‘out of proportion’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와 인연이 있다고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면서 마치 사람처럼 대접하면서, 나와 인연이 아직 없거나 혹은 내가 그 인연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개보다 못한 상태로 살고 있는 것에 털끗만큼의 관심도 없이 살면, 삶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까요? 사람이 사람의 도리가 있듯이, 개나 짐승도 (특히 사람들과 비교할때면) 그들의 위치와 받아 마땅한 대접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호주넘들이, 잡아 먹으려고 키워서 돈 받고 판 소를 ‘John’이니 ‘Jenny’니 부르는 꼴이나, 어떤 자들이 자기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는 꼴이나 참 가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 내가 호주인들이 어떤 특징이 있다고 했었지요? 두 나라가 닮아가나요? 점점 선진국이 되어가는 모습인가요 🙂

적선 이야기 3 – 빌 게이츠

어제 본,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에 이어서 오늘은 2부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보았어요. 영화 ‘포레스트검프’ 기억나세요? 주인공 포레스트가 어렸을때 다리에 쇠로 만든 보조장치를 하고서 바보처럼 걷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당시 미국에서도 있었던 소아마비 (폴리오 바이러스 감염) 때문이었지요. 내가 어렸을때도 동네나 학교에 몇 명씩 그런 보조장치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빌 게이츠와 부인 멜린다는 많은 질병중에 왜 하필이면 소아마비를 박멸시키려고 그렇게 많은 돈과 정력을 투자했을까요? 왜냐하면, 주로 가난하고 (백신을 맞지 못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폴리오 바이러스 전염이 쉬운) 사는 어린 아이들이 소아마비에 걸리는데요, 사지가 멀쩡해도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운 그런 곳에서, 소아마비의 결과로 하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앉은뱅이 혹은 절름발이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라는 것을 이분들이 가슴 깊이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88올림픽이 열렸던 시기에, 세계적으로 약 40만명의 운명을 그토록 가혹하게 바꾸었던 이 소아마비라는 질병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더불어 빌 게이츠 재단의 헌신적이고 (돈만 쏟아 부은 것이 아니예요) 천문학적인 투자의 결과로 작년에는 약 30명 세계적으로 발병했다고 해요. 도큐멘트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서는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병이 발견되었는데요, 빌 게이츠는 그의 두뇌와 간절함 (마음씀)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합니다.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나이지리아 각 지역으로 보내서 백신을 맞히는데요, 그들이 사용했던 유일한 지도는 1940년대 영국인들이 만든것이었다고 해요. 그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지역의 경계에 있는 마을들에 (이 지역에 속하는지 저 지역에 속하는지 모호한 마을들) 백신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고 해요. 마치 아주 좋은 총은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타겟이 흐릿한 상황과 비슷한 것이랄까요. 아무리 총의 성능이 좋아도 아무리 많은 탄환을 쏟아부어도 명중시킬 수 없습니다. 빌 게이츠는 위성사진과 첨단 컴퓨팅을 결합하여 (엄청난 돈이 들었겠지요) 정확한 나이지리아 지도를 만들어 냅니다. 이 지도를 활용하여 그 취약한 지역들을 찾아내어 정확하게 작살(?) 냅니다.

이 사람, 자신도 인정하듯이 젊은 시절에 잘못했던 일들도 있었어요. 삼성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어떻게 항상 100% 합법적이고 윤리적으로’만’ 경영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적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해내는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존경심이 생겼어요. 그냥 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의 삶을 바치고 있어요. 아무도 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또 극히 어렵고 힘든 일들을 사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 다시 꺼내서 미안한데요 어떤 사람은 노년에 집으로 창녀들이나 불러들여 추잡한 짓이나 하고, 또 그 부인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유명한 사찰에 가서 중들에게 돈을 주고 큰 행사를 하며 복을 빈다는 것을 뉴스에서 들었어요. 지금은 그 사람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는지 모르지만, 이 부부는 과연 서로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할까요? 빌 게이츠가 ‘지금 버스에 치여 죽는다면 한가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무었인가’ 묻는 질문에 거의 울먹이면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한번 더 말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것 같다’라고 대답하던데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은 과연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왜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사람들이, 사는 수준은 이렇게 상이한지 나는 정말 궁금하고 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금 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돌대가리’라는 것인데요,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돌대가리가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나도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진짜 돌대가리’가 분명할테니까요 🙂

1960년대 미국은 자신에 차 있었다고 해요. 곧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질병들을 지구상에서 ‘박멸’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네요. 지금 들으면 참 기가 막힌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소아마비를 박멸하면 그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더이상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될까요? 또 빌 게이츠 아니었으면 걸렸을지도 모를 소아마비를 걸리지 않게 되었다고 알아주고 또 고마워하며 잘 살까요? 아니겠지요. 그런 일은 우리 인간세계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것을 모를까요? 물론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 왜?

그에 대한 일부의 대답이 이곳에 있어요. 어떤 훌륭한 분이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우리도 새발의 피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번에 한 사람씩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내가 덧붙이고 있네요. ‘보살은, 오늘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의심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덧없는 삶의 본질을 꽤뚫어 보기에, 최종적으로는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적선 이야기 2 – 빌 게이츠

인류역사상 가장 부자였으며 가장 많은 적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빌 게이츠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지금 컴퓨터로 지금 읽고 있다면 이 사람이 만든 윈도우즈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겠네요. 나도 이 사람 덕분에 직장도 있고 봉급도 받으며 산지가 오래 됬네요. 개인적으로도 고마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Inside Bill’s Brain: Decoding Bill Gates 라는 도큐멘터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3부작인데요, 그중에서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편을 보았어요. 불과 2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어요. 똥과의 전쟁도 그렇고 이산화탄소와의 전쟁도 (원래 제목은 다른데요, 더 정확하고 좋은 제목으로 내가 바꾸었어요??) 그 규모와 중요성이 (인류전체에 끼치는) 참으로 어마어마하네요. 이분은 그 좋은 머리와 세계최고부자의 재력으로 사실상 그대와 나를 대신하여 이 엄청난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랍니다. 몰랐지요 🙂

도큐멘터리 거의 마지막에 빌 게이츠에게 물어요. ‘만일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해서 지금 당장 죽게 된다면 가장 아쉽거나 안타깝게 생각하며 눈을 감을 것은 무었인가요?’ ‘아내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깝지 싶네요’. 너무 허무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나요? 그럼 도큐멘터리를 장식하는 이 마지막 말은 어때요? 읽어보면 마치, 어제 이야기한 붓다의 적선에 관한 가르침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Each one of us has to start out with developing his or her own definition of success, and when we have these expectations of ourselves, we are more likely to live up to them, ultimately its not what you get or even what you give, its what you become.’

‘우리들 각자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 무었인지를 찾아내고 계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산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될 가능성이 훨씬 커집니다. 궁극적으로 (성공이란) 얼마나 가지는가가 아니며, 나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는가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혹은 ‘내가 진정 원하는 사람으로 사는가’가 궁극적인 인생의 성공입니다.

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