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영화 Lykke-Per, 네번째 이야기

페르가 파탄에 이르는 장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역시 카르마가 주제입니다. 그 유대인 가족과 매우 가깝게 된 페르. 아름답고 이지적인 딸 야코버와는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고, 돈 많은 그녀의 아버지와 삼촌등은 페르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거대한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페르가 꿈에도 그리던 그 프로젝트를 이제 시작할 단계에 이르렀어요.

그 당시 덴마크에서는, 이런 대규모의 토목프로젝트들이 정부기관의 검토를 거쳐 사전 승인을 얻어야 했어요. 그 유대인 가족이 손을 써서 그 과정을 쉽고 빨리 끝내게 도와주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선사업가가 아니고, 장기적인 엄청난 이윤을 위해, 사람과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는 큰 사업가들입니다. 페르는 그들의 소개에 따라서, 정부기관에서 이런 일을 맡아서 하는 그 고위 공무원을 만나러 갔어요. 딱 한사람이 이 일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아!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하필이면 이 공무원이 군인장교 출신으로 ‘권위나 위계질서’ 같이 페르가 너무도 상처받고 싫어하는 그런 것들을 따지는 인물이었던 거예요.

약속한 두번째 방문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 고위 공무원. 듣자하니 자기를 끼워줘야만 승인을 고려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 같군요. 자존심 강한 페르는 (사실은 ‘상처가 큰 페르’가 더 맞는 표현이겠지요) 이 고위 공무원의 태도에 불쾌해하며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받았다고 느낀 그 모욕의 몇배를 절대적으로 도움을 받아야만할 이 인물에게 되돌려 주고서 사무실을 나옵니다. 큰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업가와 주변 사람들은 경험도 많고 연줄도 많고 또 돈도 많습니다. 다시 한번 페르를 위해서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이번에는 모든 투자자들을 전부 초대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그 고위 공무원이 오기로 되어 있어요. 몰론 돈을 좀 주었겠지요. 한가지 조건이면 이 프로젝트를 그자리에서 승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투자자들은 즉시 컨소시움을 만들어 페르의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게 되는 거지요. 그 한가지 조건은, 페르가 지난번에 했던 모욕적인 말에 사과를 하는 것이예요. 갑자기 이런 사실을 듣게 된 페르는 당황합니다. 하지만 사과 한마디면, 이제 그의 엄청난 행운이 어마어마한 행복으로 바뀔 절대적으로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 고위 공무원이 약속한 시간에 방으로 들어 옵니다. 사과의 시간. 페르가 입을 열기 시작하는데, 순간 그를 평생 따라 다니던 망령이 다시 그를 에워싸며 지배합니다. 페르의 머리가 휘리릭 돌아 버리는군요. 더 심한 모욕을 그 공무원에게 퍼붓고는 페르는 그 자리를 뜹니다. 어쩌면 아버지(같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하고 싶었던 그런 반항의 말이었던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오고 말았어요. 아무도, 어떤 돈도 이 상황을 되돌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투자자들은 모두 떠나고 그 돈 많은 유대인 가족도 이제는 ‘아! 이 사람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구나. 함께 이런 일을 도모할 상대가 아니다’ 깨닫게 되고 손을 듭니다.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었네요. 그 엄청난 행운을, 페르는 자기손으로, 마치 유리병을 콘크리트 바닥에 있는 힘껏 내던져 산산조각 내듯이, 송두리채 박살 내고야 말았습니다. 페르 나름대로는 할 말이 많겠지요. 하지만 원래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렇답니다. 이곳에서 하는 말이 있어요. ‘백가지의 성공은 한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지만, 백가지의 실패는 백가지의 각기 다른 이유들이 있다’.

야코버도 떠나고 말았을까요? 아름답고 품위있는 야코버는 일편단심 페르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고 또 그 결과로 성공의 기회를 송두리째 날려버렸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나의 페르입니다. 돈은 내게도 있어요. 그리고 나에겐 페르만 있으면 됩니다. 야코버는 페르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둘만의 영국여행을 계획합니다. 그 계획을 의논하던 카페에서, 페르는 야코버에게 갑자기 (약혼의) 파혼과 결별을 선언합니다. 페르의 마음이 변했을까요? 아닙니다. 야코버를 사랑하지만, 페르의 ‘카르마가 속삭이는 바’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야코버에게서 받는 사랑은 동정이며, 또 이런 비참한 자신에게 야코버를 묶어 두는 것은 자신에게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 되는 것이겠지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가 살아온 삶이, 그가 성장하고 자라며 (어떤 환경이나 이유로 말미암아) 생긴 ‘마음을 쓰는 습관’이 그로 하여금 이런식으로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럴때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래서 ‘습관이 카르마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카르마가 팔자를 바꾼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파혼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 하던 야코버는 이제 (모든) 결혼을 포기합니다. 그녀는 이미 페르와 영원한 가약을 맺었었습니다. 페르와 사이에서 임신한 아기를 (그에게 말해 줄 기회조차 없이 그는 떠나고 말았어요) 아무도 모르게 유산시킵니다. 되돌아와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부탁을 합니다. ‘제가 물려 받을 몫의 재산을 미리 좀 주시면 안되겠어요?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싶습니다.’ 야코버는 교장선생님이 되어 큰 heart로 수많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큰 엄마가 됩니다.

오늘 이 영화 이야기를 마치는 것이 좋겠네요. 계속합니다. 페르는 자기의 카르마와 그로 말미암아 한계 지어진 자신의 삶을 차차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아내의 삶에 더 이상 자신의 카르마가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 갑니다.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곳에서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사는 삶을 선택합니다. 참 안타까운 운명이지요? 마음 아프군요. 하지만 그는 이런 삶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페르와 야코버. 파혼한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의 소식은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이제 세월이 흘러서 두 사람 모두 많이 늙었습니다. 페르가 야코버의 학교에 편지를 보내 그녀를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페르는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어요. 야코버는 먼 길을 달려 페르가 홀로 사는 그 외딴 집으로 찾아옵니다. 페르는 야코버를 위해서 차를 끓여 떨리는 손으로 부어 줍니다. 그리고 오랬동안 조금씩 저축했던 작은 유산을 야코버의 학교에 기부합니다. 그의 풍차 모델과 설계도도 함께요.

내가 당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가 묻는 페르에게 야코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과 더불어 나누었던 기쁨과 슬픔이 나의 삶을 영글게 했고 오늘의 나를 만들었어요. 내 인생에 일어난 어떤 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알게 되서 좋았습니다.’  자코바는 그 돈을 받고나서 페르의 손을 잡으며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말합니다. ‘그 학교는 당신과 내가 함께 세운 것이나 다를바가 없어요.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당신과 나의 아이들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아요’ 이렇게 말이예요. 영화는 이쯤에서 끝이 납니다.

이 영화와 관련된 몇 가지 단상들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 하지요.

덴마크영화 Lykke-Per, 세번째 이야기

먼저, 영화 후반부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요. 페르는 결국은 자신의 카르마로 말미암아 (상세한 내용은 다음편에) 그 큰 행운을 모두 잃고서 아무런 행복도 찾지 못하고 고향 시골마을로 거의 폐인이 되어서 되돌아 옵니다. 부모님도 모두 돌아 가셨어요. 하나 있는 형과는 지난 충돌속에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좀 떨어진 마을에 어떤 성직자 가족이 있는데요. 순박한 시골처녀 딸이 있어요. 그녀는 페르가 누군지 어떤 화려한 과거가 있는지 들어서 알고 있어요. 자신에게는 언감생심이기도 하고 또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해요. 하지만 절망에 빠진 페르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페르의 적극적인 구애에 결국은 마음을 주고 결혼을 합니다. 순박하지만 들꽃처럼 아름답고 건강한 부인입니다. 아름다운 딸들과 사랑스러운 아들이 생기고, 가난하지만 함께 오손도손 살아요. 부인이 생활력이 강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요. 개미 부인과 베짱이 남편 🙂


페르는 아이들이 차차 자라남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자기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린시절 자신을 대하던 바로 그런 식으로 대하는 자신을 점점 발견하게 되요. 아! 슬프고도 힘든 카르마입니다. 페르는 마음이 아프지만 동시에 어떻게 달리 해보지도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 합니다. 한번은 어린 아들이, 아빠가 만든 풍차 모형을 (엔지니어링 모델입니다. 장난감이 아니고) 좀 심하게 돌리며 가지고 놀다가 그만 부수고 말았어요. 페르는, 흡사 자신에게 싫은 것을 오랫동안 늘 강요했었고 또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던 자신에게 빰을 때렸던 그의 아버지처럼, 아이에게 엄청나게 화를 내며 폭발합니다.

어쨋던 아이 엄마, 그 순박하지만 아름다운 심성의 부인이 아이를 달래서 아빠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하게 합니다. 엄마가 조언한데로, 아이는 작은 나무가지등으로 나름대로 힘껏, 부서진 ‘아빠의 풍차’를 대체할 ‘아가의 풍차’를 만들어 아빠의 서재에 들고 갑니다. 페르는 그 아가의 풍차를 보는 순간, 모든 의미와 상황을 깨닫고서 아이를 안으며 마음속으로 크게 슬퍼 합니다.

얼마 지나서 어린 아들의 생일날이 왔어요.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가족 모두가 케잌도 먹으며 파티를 합니다. 페르는 이때 불현듯 자리를 뜹니다. 일전에 아내에게 말했었어요. ‘당신과 아이들은, 내 카르마를 따라서 나와 함께 침몰하면 안된다’고. 페르는 깨달은 것 같아요. ‘아! 사랑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 이제 내가 떠날때가 왔구나’ 말이예요.

떠나기 전에 페르는 아버지 묘지를 찾아갑니다. ‘아버지 이것이 당신이 원했던 것인가요?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하면서 마음속으로 오열합니다. 나도 참 슬펏어요. 나도 애비고, 나도 아버지가 있었고, 우리 모두 인간적인 한계와 카르마를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니, 나 역시 이런 잘못과 카르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문득 ‘아빠가 잊었다’라는 글이 기억이 났어요 (아래에, 원문과 내가 그 의미를 전달하려고 나름대로 의역한 것이 있어요).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아이에게 편지를 썻어요. 지난 시절 아이에게 내가 저질렀던 잘못과 어리석음에 다시 한번 용서를 구했어요. 그리고 아내에게는, 그대의 사랑으로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이 달라졌다며 감사했어요.


FATHER FORGETS  by W. Livingston Larned

Listen, son: I am saying this as you lie asleep, one little paw crumpled under your cheek and the blond curls stickily wet on your damp forehead. I have stolen into your room alone. Just a few minutes ago, as I sat reading my paper in the library, a stifling wave of remorse swept over me.
Guiltily I came to your bedside. There are the things I was thinking, son: I had been cross to you. I scolded you as you were dressing for school because you gave your face merely a dab with a towel. I took you to task for not cleaning your shoes. I called out angrily when you threw some of your things on the floor. At breakfast I found fault, too. You spilled things. You gulped down your food. You put your elbows on the table. You spread butter too thick on your bread. And as you started off to play and I made for my train, you turned and waved a hand and called, ‘Goodbye, Daddy!’ and I frowned, and said in reply, ‘Hold your shoulders back!’ Then it began all over again in the late afternoon. As I came up the road I spied you, down on your knees, playing marbles. There were holes in your stockings. I humiliated you before your boyfriends by marching you ahead of me to the house. Stockings were expensive – and if you had to buy them you would be more careful! Imagine that, son, from a father!
Do you remember, later, when I was reading in the library, how you came in timidly, with a sort of hurt look in your eyes? When I glanced up over my paper, impatient at the interruption, you hesitated at the door. ‘What is it you want?’ I snapped. You said nothing, but ran across in one tempestuous plunge, and threw your arms around my neck and kissed me, and your small arms tightened with an affection that God had set blooming in your heart and which even neglect could not wither. And then you were gone, pattering up the stairs. Well, son, it was shortly afterwards that my paper slipped from my hands and a terrible sickening fear came over me. What has habit been doing to me? The habit of finding fault, of reprimanding – this was my reward to you for being a boy. It was not that I did not love you; it was that I expected too much of youth. I was measuring you by the yardstick of my own years.
And there was so much that was good and fine and true in your character. The little heart of you was as big as the dawn itself over the wide hills. This was shown by your spontaneous impulse to rush in and kiss me good night. Nothing else matters tonight, son. I have come to your bedside in the darkness, and I have knelt there, ashamed! It is a feeble atonement; I know you would not understand these things if I told them to you during your waking hours.
But tomorrow I will be a real daddy! I will chum with you, and suffer when you suffer, and laugh when you laugh. I will bite my tongue when impatient words come. I will keep saying as if it were a ritual: ‘He is nothing but a boy – a little boy!’ I am afraid I have visualized you as a man. Yet as I see you now, son, crumpled and weary in your cot, I see that you are still a baby. Yesterday you were in your mother’s arms, your head on her shoulder. I have asked too much, too much.

아빠가 잊었다.  W. Livingston Larned 지음

아가야, 네가 곤히 잠든 방에 잠시 들어와, 네게 마음으로나마 전해 보려는 아빠의 이야기란다. 잠시전에 서재에서 신문을 읽다가 후회막급한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네 머리맡에 왔단다. 깨닫건데, 나는 네게 자주 성을 냈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볼때, 신발을 잘 닦지도 않고 또 무언가를 흘리는 모습을 볼때마다. 그리고 아침에 밥을 먹으면서도, 음식을 흘리거나 식탁에 팔을 올리고선 마구 퍼먹는 모습등을 나무랫었지.
내가 출근하려고 나설때, 너는 뒤돌아서 손을 흔들며 ‘아빠 잘 다녀와’ 인사를 했었다. 나는 그때조차도 ‘어깨 펴라’고만 말했었다. 이런 일이 오후에도 반복되었지. 내가 퇴근하는 길에, 친구들과 놀고 있는 너를 잠시 지켜보다가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때, 나는 네 동무들 앞에서, ‘이 비싼 양말을… 네 돈으로 사면 그렇게 함부로 신겠어?’ 이렇게 망신을 주면서 내 뒤를 따라서 집으로 되돌아 오게 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빠로서 해야할 짓들이 아니었던 것 같구나.
기억하니? 내가 서재에 앉아 있는데, 네가 상심한 눈빛으로 슬그머니 다가 왔을때, 나는 신문너머로 너를 보고서 또 무슨 방해를 하려는가 생각하면서 ‘뭘 원하니?’ 이렇게 짜증을 냈단다. 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그러다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와서 내 목을 감싸 안고서 내 빰에 뽀뽀를 해주었어. 내 목을 꼭 감싼 네 작은 팔에서 나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흡사 신이 네 마음에 심어 놓은 꽃과 같은, 너의 애정과 사랑을 느꼈었단다. 네가 서재를 나가 계단 손잡이를 두드리며 네 방으로 올라 갔을때, 나는 신문을 손에서 떨어트리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는 것을 느꼈단다. 내가 도대체 왜 너의 작은 잘못들에 그렇게 지나치게 반응하며 크게 꾸짖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었던지. 그것이 아빠가, 아직 어린 아이인 네게 준 상이었던 것인지… 아가야,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단다. 아빠가 아직 어린 네게, ‘내 자신의 어른 기준’을 들이대며 너무나 많은 것을 어리석게도 기대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단다.
네가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빠는 안단다. 네 작은 가슴속에, 흡사 대지를 밝히는 새벽의 태양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심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아. 아까 네가 서재에 달려와 내게 뽀뽀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표현했던 ‘아빠 잘자’에서도 나는 그것을 보았지.
다른 아무것도 이밤에는 중요하지 않단다 아가야. 나는 어둠속에서 네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가 네게 했던 짓들을 뉘우치며 후회하고 있단다. 네게 이런 이야기를 설령 말로 한다고 해도 어린 너는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아. 그렇지만 또 내가 지금 이렇게 한다고, 네게 저질렀던 나의 어리석은 짓들에 대한 합당한 속죄가 될지는 아빠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가야 아빠가 약속하마, 내일부터 네게 진짜 아빠가 되도록 노력하마. 너의 좋은 동무가 되어주고, 네가 괴로울때 나도 괴로워하고, 네가 웃을때 나도 웃으마. 그리고 내가 늘 뱉었던 그런 꾸짓는 말들이 입안을 맴돌때 나는 혀를 깨물고 참으마. 그리고 나는 주문처럼 외우도록 하마.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가, 다만 어린 아이’라는 것을. 지금 작은 침대에서 곤히 잠자는 너를 보며, 내가 너를 장성한 어른으로 착각했던 그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있단다. 어제 네가 엄마품에 안겨 머리를 엄마 어깨에 기대고 있던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너무도 많은 것을 기대했었고 또 요구했었구나…

덴마크영화 Lykke-Per, 두번째 이야기

19세기말 발표된, 덴마크의 대표적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A Fortunate Man’은 카르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과응보라고 약간 다르게 표현하기도 하는 ‘인연과보’가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영향) 이 영화의 커다란 주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인연과보로 말미암아, 두 주인공의 삶이 한때 아름다운 사랑으로 맺어졌다가, 또한 인연과보로 말미암아 떨어지게 된 후에, 두 사람의 삶이 전개되고 또 익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주인공 페르는, 성직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장차 당연히 성직자가 되어야 할 운명을 거부하고, 고향을 떠나 수도 코펜하겐의 한 대학으로 토목공학을 배우러 떠납니다.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아버지와 충돌하며 성장한 아들이, 이제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러 집을 떠나는 것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또한 페르는 자신에게, 어릴때부터 그런 숙명을 강요해왔던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증오하며, 결국은 빰을 얻어 맞고서 집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건만, 평범한 엄마로서 그리고 한 성직자의 아내로서 평생을 살아온 엄마는, 이런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기는 벅찹니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약간의 먹을 것을 뒤따라 가서 전해주며 엄마도 아들과 작별 합니다. 한 세기전 덴마크는, 지금처럼 부유한 선진국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가난과 침울한 분위기가 페르네 가족을 감싸고 있습니다.

페르는 우연히 토목공학을 배우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고향 유틀란드의 습지를, 토목공학의 기술로 개발하여 쓸모있는 농지로 개간하고 또한 장차 산업화 시대에 꼭 필요할 에너지를, 풍력이나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생산 덴마크 전체에 공급할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르는 노력하는 천재입니다. 가난한 대학생으로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버린 음식이나 줏어 먹지만 그는 언젠가 그의 꿈을 이루게 될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의 용기도 있고, 꾀도 그리고 매력도 있는 페르는, 덴마크의 매우 부유한 은행가겸 투자가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 유태인 집안은 돈도 많을 뿐 아니라,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미리 알아보고 적절한 투자를 해서 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보려는 대단한 사업가들이기도 합니다. 돈 많은 동료 사업가들을 모아 컨소시움을 만들어 페르의 거대한 구상을 실제로 실현하게 도와줄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두 딸이 있어요. 먼저 쾌활한 동생이 페르의 능력과 인간됨을 한 눈에 알아보고 구애를 합니다. 페르는 이렇게 아름다운 부잣집 딸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믿기 어렵고, 또 다른 사람들이 좀 쑤군거리듯이,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채 떨어진 것 같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니 야코버는 이지적이고 생각이 깊은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돈 많은 뚱땡이 유태인 이혼남과 혼인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 뚱땡이의 귀여운 두 딸이 너무 가여워서요. 이렇게 착한 야코버입니다. 차차 페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요. 페르도 야코버의 큰 heart와 생각의 깊이에 놀라고 또 존경하게 되요.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부잣집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페르.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데요. 돈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야망을 이룰 기회. 이 모든 것들이 손아귀에 잡힐 듯 합니다. 그야말로 행운의 페르입니다. 덴마크어 ‘Lykke’는 ‘행운’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행복’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과연 페르가 이 행운을 가지고 행복을 만들수 있을까요?

야코버의 삼촌뻘 되는 사람이, 집안의 큰 투자에 야코버 아버지와 더불어 깊이 관여합니다. 이 삼촌은 좀 세상을 관조하는 철학자 같은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페르에게 ‘행운은 좀 어리버리한 사람에게 철썩 달라 붙는다’ 비슷한 뜻의 말을 합니다. 악의적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페르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 되고 말아요.

야코버는, 소위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guilt feeling’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쨋던 그녀는 유태인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우연히 차지하게 된 (가족의) 부유함과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누리며 괜스래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는 결국에는 그녀의 ‘행운’을, 그녀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만드는데에 ‘사용’합니다. 흡사 냇물을 건너지 못하는 여인을 별 생각없이 덥썩 업어서 건너주고서는 제 갈길을 가는 ‘해탈한 대인배’ 승려의 멋진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그녀를 건너주고 제 갈길을 가는 그 순간에 그녀를 잊었어요. 야코버 같습니다. 그 승려와 동행한 두번째 승려, 그녀를 업어서 건너주지도 못했고 또 그렇게 건너주었던 동료 승려의 행동을 가지고 오랫 동안 마음의 갈등을 하는 사람. 페르 같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정말 순수하고 또 아름답습니다. 흡사 나와 아내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

멋진 페르와 아름다운 야코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사람은? 청바지는 뭐임매? 감독 Bille August입니다. 영화촬영의 실제 장면들을 기념으로 남겨두었네요. 오늘은 이만…

덴마크영화 Lykke-Per, 첫번째 이야기

‘Lykke-Per’는 (영어로 ‘Lucky Per’, ‘행운의 사나이 페르’ 정도 되겠네요) 덴마크의 소설가 Henrik Pontoppidan이 1898년에서 1904년에 걸쳐 발표한 8권의 대작 소설이예요. 이 덴마크 작가는 장차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요. 그리고 이 소설은, 작년에 ‘A Fortunate Man’ 이라는 타이틀의 영화로 헐리우드에 만들어졌어요.

덴마크어 ‘Lykke’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행운’을 뜻하지만, 덴마크어에서는 이 단어가 동시에 ‘행복’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해요. 행운의 사나이 페르가 (‘Peter’를 아마도 덴마크에서는 줄여서 ‘Per’라는 애칭으로 부르는가 봅니다) 과연 행복도 찾을수가 있는지 우리 한번 영화여행을 떠나볼까요?

덴마크하면 무었이 떠오르세요?

어릴적 읽었던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동화? 나는 그 옛날 한국이 수입을 막 개방하던 시절, 덴마크에서 수입된 돼지고기 햄을 (큰 캔에 들어 있는) 어쩌다 먹어 보았던 맛있는 기억이 나는군요. 영화에서도 잠시 언급되듯이, 덴마크는 예나 지금이나 돼지고기가 유명한가 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한 몇 년전에 한국에서 유행했던 (지금도 유행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휘게 (hygge)’라는 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년전에 한국에 갔을때 친구가 ‘소확행’이라는 말을 쓰기에 좀 놀랐어요. 무슨 한국에서 새로 발견한 행성인가 🙂 말을 줄여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곳에도 있어요. 옛날에는 천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문화도 언어도 다른 이곳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서는, 원래 사람들이 그러나보다 좀 더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이야기가 옆길로 샛내요. ‘휘게’는 그 ‘소확행’과 좀 유사한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이곳에서 쓰는, 한국의 소확행처럼 줄여하는 말로는 ‘BLT’가 문득 떠오르네요. ‘오늘 점심 뭐 먹는데?’ ‘응 BLT sandwich’ 이렇게 말하는데요. 베이컨 상치 도마토 샌드위치를 줄여서 하는 말이랍니다.

나는 돼지고기햄과 더불어 덴마크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한 두가지 더 있어요. 언젠가 ‘미숙아’에 대한 (의술차원, 윤리차원, 부모와 본인의 삶의 차원등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도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보았던 기억에 따르면, 덴마크에서는 법이 정한바에 따라 00주가 되기 전에 태어난 미숙아들은, 태어나면 엄마에게 데리고 와서 엄마가 안아주며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게 해요. 그리고는… 충격적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기적과 같은 의술로 살려낸 00주 된 미숙아를 부모와 의사가 안고 찍은 사진’처럼 단순하지 않고 또 행복하지만 않다는 것을, 덴마크 사람들은 잘 알고 또 그 아는 것을 민주적이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실천하는 것 같네요. 이런 내용과 관련한 무슨 운동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입에 게거품을 물 이야기 같은데요, 나도 나름대로 달리기나 다른 운동을(?) 약간 해봐서 아는데요, 운동을 그렇게 불이 켜지고 거품을 물면서까지 심하게 하면 피곤해져서, 막상 무언가 자신의 삶에 의미있는 활동을 해보려면 잠도 오고 머리도 띵해서 제대로 못해요. 그러니 그런 운동 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자신의 삶에 먼저 좀 더 집중하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

두번째로 기억나는 것은 ‘Law of Jante’라는 (덴마크어로 ‘Janteloven’) 것인데요. 덴마크가, 세계에서 국민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사는 나라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덴마크의 젊은이들을 어떤 도큐멘터리에서 인터뷰하면서 행복의 이유 혹은 비밀 같은 것을 물어 보는 것을 보았는데요. 그때 덴마크 젊은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이 바로 이 ‘Law of Jante’예요. 일단 내가 설명하기 보다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그 10가지 법칙을 아래에 적었어요. 읽어보니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요?

[Law of Jante]
1. You’re not to think you are anything special.
2. You’re not to think you are as good as we are.
3. You’re not to think you are smarter than we are.
4. You’re not to imagine yourself better than we are.
5. You’re not to think you know more than we do.
6. You’re not to think you are more important than we are.
7. You’re not to think you are good at anything.
8. You’re not to laugh at us.
9. You’re not to think anyone cares about you.
10. You’re not to think you can teach us anything.

이곳에도 비슷한 내용의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언행의 기준’이 있어요. ‘Tall Poppy Syndrome’ 이라고 해요. 무슨 양귀비 마약 이야기가 아니고, ‘싯뻘건 양귀비 꽃이 저 혼자 잘났다고, 다른 (양귀비) 꽃들 위로 쑥 기어올라 오는 것을 사회적으로 용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또 그냥 두지 않는다’ 그런 뜻이예요. 이곳에서 직장생활 한지가 사반세기가 넘었는데요. 이런 정서가 이나라 국민들에게 깊이 뿌리 밖혀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어요. ‘내가 싫은 것 너도 싫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너도 하고 싶고. 정당한 대접. 공평한 대우. 공정한 거래.’ 이런 것들이 바로 ‘Tall Poppy Syndrome’ 혹은 ‘Law of Jante’ 같은 국민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서론이 길어졌네요. 영화 이야기는 다음번에.

NO 3C

No Condemnation No Criticism and No Complaint.

나무래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라. 집 나간 비둘기처럼 당신에게로 되돌아 오리니. (Dale Carnegie의 저서 ‘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에 나온 말로 기억)

그저께 내가 정신이 좀 돌았던 이야기를 했었는데 (옛날에 보초서다가 잠시 미쳐서 쓰레기 줏어 먹었음 – 참 잘했어요) 어디 그뿐이겠나. 비슷한 짓들 수없이 많이 했지.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을껄. 정신이 되돌아 오면 보통 아이씨 하면서 빨리 잊고 지나가려고 하겠지만, 일어났던 일을 글로 쓰면서 조용히 되돌아 보는 것은 어떨까? 당장은 잘 쓰지지도 않고 또 괜찮은 생각도 들지 않지만, 신체를 사용하는 운동기술처럼, 반복해서 쓰고 또 생각하노라면 점점 나아지고 좋아지지 싶은데. 며칠 지나서 읽어 보고 또 몇 주 지나서 다시 쓰고 하면서 얻는 것이 있지 싶다.

NO 3C가 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씨 하면서 자신을 나무래고 비난하고 또 자신에게 불평하면 어떤 일이 생긴다고? 집나간 비둘기처럼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 온다더만. 역설적인 말같지만, 이렇게 되씹는 과정을 통해 잠시 미쳤던 자신의 모습, 햇가닥 머리가 돌았던 자신의 이면을 보게 되고 차차 받아들이게 되면, 지나간 일들과 그런 짓을 했던 자기 자신을 차차 덜 나무래고 덜 비난하게 되지 싶다. 비둘기가 차차 헷갈려 하면서 집으로 되돌아 오는 횟수가 줄어들 것이다.

NO 3C를 타인들에게 적용시키면, 그들로부터 3C를 받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 것이다. 때때로 수준이 너무 낮은 상대방에게 적용시키다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좀 발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크고 길게 보면 그래도 남는 장사요 자기 자신에게 훨씬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말했지만, 이전에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짓을 계속할때’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았다. ‘모른다는 것’ 본인의 언행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인줄 알았었다. 근래에 와서, 어쩌면 ‘모른다는 것’ 보다는 ‘자기만의 이유가 완강하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 ‘자기만의 이유’ 놓지 못하고 또 양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짓을 계속하고 지속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때때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결과들을 보면서도, 그토록 자기만의 이유를 완강하게 고집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놓아 버리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아무 존재감도 없는 nobody가 될까 하는 ‘두려움’이 아닌가 한다.

우리 인간 존재가 필요로 하는 원초적인 욕구인데 어떻게 나무라겠나.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가지고 있을 ‘그들의 완강한 이유’를 인정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게 되겠지. 서로 서로가. 모르면 배우면 나아질텐데, 이렇게 손에 잡히는데로 본능적으로 완강하게 붙잡고 있으니, 어떻게 상태를 개선하거나 향상시키기도 훨씬 어려우리라.

NO 3C는, 일단 표면적으로라도 ‘자기만의 완강한 이유’를 좀 내려 놓아보자는 시도고, 이미 지나간 ‘내가 저지른 이상한 짓들’을 반복해서 쓰면서 되씹는 것은, 내가 완강하게 붙잡고 있었던 나만의 이유를 심사숙고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완강하게 붙잡고 있는 그들의 이유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는 시도다.

점점 더 작은 수의 비둘기가 점점 덜 자주 당신에게 되돌아 오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