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흰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Perception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를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대를 기쁘게 해줄(?) 독설이 너무 많이 들어 있네요. 좀 묵혀 두었다가 잊혀질만 하면 다시 봐요 🙂

오늘은 대신에 ‘Perception’에 관한 이야기를 ‘티라다모 큰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좀 해볼까 해요. 한자로는 ‘지각’(知覺)이라는 단어와 대응하는 것 같군요. 좀 어려운 말 같은데요?

불교적 시각에서 영어로 하는 설명은 ‘Perception (Pāli – saññā, Chinese – 想蘊) is sensory and mental process that registers, recognises and labels, for instance, the shape of a tree, color green, emotion of fear’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Perception은 기록하고 인지하며 표식을 붙이는 (표를 다는), 감각 및 정신의 작용. 예를 들자면, 나무모양, 초록색, 공포감등이 perception이라 할 수 있어요’. 참고로 (perception으로 영역된) 팔리 원어 ‘saññā’는 ‘관련된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associated knowledge’라고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perception에 대응하는 태국어 단어는 그 의미가 ‘기억’ (memory) 이라고 하네요.

어떤 한국어 불교사전에서는 ‘6가지 감각기관의 접촉과 동시에 생기는 것이다’ 라고해요 (간접적인 설명이지만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어봐요). 우리가 모두 아는 오감에다가 ‘마음’을 더해서 6감인데요. 붓다께서는 마음도, 보는 것이나 감촉하는 것과 동일하게, 감각의 한 종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이 6가지의 감각기관에, 외부적인 접촉이 가해질때 발생하게 되는 것이 perception 즉 지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카레는 맛과 향은 좋지만 그 모양으로 말미암아 영국여왕의 만찬에 오르기는 어렵겠다’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말속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의 perception이 드러나겠지요. ‘짱께들은 다꾸앙들보다 더럽고 시끄럽고 무질서하다’ 이렇게 누가 말을 한다고 하면 또한 어떤 사람의 perception들이 그 말속에 들어 있겠네요.

자 이제 perception이 무었인지 좀 감을 잡았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가 궁금하지요? 혹시 기억을 할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에 이 글에서 The Five Aggregates를 간략하게 언급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다섯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perception입니다. 그 당시에는 cognition으로 번역했었던 책을 참조 했었네요.

이 perception은 ‘나’ (자신,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요소 중 하나로써, 우리의 일상 삶에도 (현실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칠뿐만 아니라, 그대와 내가 장차 수행을 해서 해탈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수행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들 모두, 오늘 하루 동안에, 수많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perception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었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하루를 보냈을 꺼예요. 그리고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그 세번째 글 안에 들어 있다는 ‘독설’들도 또한 나의 perception이 많이 드러나고 표현된 것들이지요.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모든 사람들이 perception을 가지고 있다. 지혜란, perception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perception을 자각하고, 나아가 그것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때로 그것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perception과 자유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 또한 변화하며 영속하지 않고 또한 당신이 아니다.’ 좋은 말씀이지요? 그래서 내가 쓴 세번째 글을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블로그에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

내 생각에, 그대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들은 무슨 크고 거창한 사건 사고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perception이 사람들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견해의 차이, 시각의 차이, 생각의 차이 그리고 느낌의 차이에서 비롯된 알력과 충돌이 아닌가 싶어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이라는 ‘아상’과 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perception도, 위에서 언급한 다른 The Five Aggregates들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생각이나 견해 혹은 느낌이 바뀌었던 적이 많지 않았나요? 바뀌기 전에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어떤 것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그리고 다른 경험이 쌓임으로써 변하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perception에서 비롯된 견해나 생각 혹은 느낌을 가지고 타인들과 언쟁을 벌이며 충돌할때, 혹은 말 못할 괴로움에 빠질때, 그대와 나는 바로 이러한 perception의 참 모습을 기억하도록 노력해요. 우리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지혜를 얻고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길 바래요.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두번째 이야기

옛날부터 흥얼거리던 노래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그리고 언젠가 이런 말도 했었다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 차리기가 무척 힘들다’. 오늘은 어제부터 시작한 ‘개인주의’ 이야기를 비교문화적인(?) 시각에서 좀 더 하고자 한다.

• 소속감 혹은 ‘자신을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일시 하는 어떤 경향’이 한국과 이 나라는 무척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팔았던 어떤 물건이 (서비스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반대로 잘되었을때, 한국에서는 흡사 자기 잘못인 듯한 태도로 사과를 하거나 혹은 기뻐하는데 반해서, 이곳에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하거나 일하는 집단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소비자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또 당연하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회사일을 가지고 자기의 일처럼 이리뛰고 저리뛰지도 않고 마음을 졸이지도 않으며, 그저 계약서에 써진 상식적인 수준 만큼만 자신의 삶과 에너지를 일터에서 사용한다. 다시말하건데, 반대편이나 혹은 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 앞서말한 태도와 관련이 있지 싶은데, 예를들자면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다고 (좋지 않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했거나 혹은 제공하는 방법에서 매끄럽지 못했다고) 그 개인을 직접적으로 나무래고 또 무릎을 꿇리며 사과하게 하는 짓 따위는 이곳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라면, 첫째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사람과 그가 속한 집단을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 댓가로 실질적인 이익을 취하는 주제를) 동일시 하지 않으므로 ‘무슨 이런 썩을 상점 / 회사 / 단체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지 (물론 ‘종업원 교육이 개판이구만, 이 회사 곧 망하겠네’ 이정도는 마음속으로 덧붙이겠지) 개인 차원으로는 잘 확대하지 않는다. 두번째로, 평등한 사회구조상 개인의 권리가 매우 존중된다. 위치고하를 막론하고 ‘좀 해달라’고 부탁하지, 돈을 줬고 당신 입장이 이러저러하니 네가 당연히 이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입고 있는 제복보다 그 사람 본연의 권리가 훨씬 더 크다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당연히 생각하므로, 제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그래서 ‘지나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이 이곳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학생때, 한 친구에게 ‘어디 들어가면서 누군가가 문 열어주기를 당연한 듯 기대하는 넘’과 ‘목욕탕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다른 사람의 힘으로 때미는 것이 당연한 넘’은 대가리가 근본적으로 좀 잘못됬다고 내가 말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지나친’ 서비스 업종은 이곳에 거의 없다. 인건비가 비싼 것도 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사려고 상상하는 사람들조차 없으니 당연히 팔고자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이 더 맞지 싶다. 어제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일을 자기 스스로 해내기를 서로가 기대한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나? 그리고 업종 자체의 존재유무만을 가지고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을 ‘한국에서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 이곳에서 대하는 경우와 그럴만한 업종이 잘 없다는 뜻이다.

•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들 말이, 영어는 존대어법이 없고, 같은 동양권에서라도 중국어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편이고, 일본어가 가장 존대어법이 많고 복잡하며 한국어는 그 중간쯤 된다고 하더라. 영어문화권에서는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 보다는 (구조적으로 제한이 있을터이니) ‘같은 말이라도 어떤 태도나 혹은 방식으로 전달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또 그런식으로 존대를 (존중을) 표현한다. 여담으로, 어제 어떤 국제적인 온라인 서비스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아마도 주말이라서 인도 어디에 있는 콜센터와 연결이 되었던 것 같다. 24x7x365 서비스를 제공하는 큰 회사들은 주말이나 야간에, 인도에 있는 콜센터로 서비스 번호를 되돌리는 경우가 많다. 영어가 좀 되고 또 시간에 관계없이 일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콜센터 비즈니스가 인도에서는 큰 산업이란다. 말끝 마다 ‘Sir sir’ 하면서 버벅대며 시간을 질질 끄는 것에 거부감이 많이 생기더라. 그런 ‘말’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고 숙련된 ‘태도’로 응대해주면 좋으련만 ‘문화적차이’ 때문에 그만큼까지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것을 나도 안다. 내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고 또 못된 면이 있어서 (무슨 삼위일체냐? 인생 쉽지 않았겠네?) 이런 경우에 통화를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경우가 이전에는 많았었는데, 어제는 그런 시도를 시작하다가 상대방이 어필하는 말을 좀 들어주고 더 시간을 주어서 좋게 잘 끝을 냈다. 밤에 누워서 문득, 이 여자 아마 중년의 인도여자 같은데, 그녀도 그 콜센터에서 퇴근하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되돌아 가고, 또 다른 어떤 어려움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터에서조차 괴롭지 않게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옛날에 이곳에서 콜센터를 지원하는 기술자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아는데, 이런 콜들을 매니져들이 모니터 하다가 고객을 잘 응대하지 못하고 콜을 놓치면 혼난다. 그리고 만약에 이런 곳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쫒겨나겠지. 죽을때까지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지만, 그녀가 하루를 잘 마치고 또 보수도 무사히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식사도 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기를 나는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내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더 버벅거리는 기술자였을때, 그 누군가도 어쩌면 내게 이렇게 해주었고 또 기원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철드네… 붓다의 가르침이 차가운 콘크리트를 뚫고 스며드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와 관련된 단순 호르몬 교란인가 🙂

• 일반화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선진국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다못해 다혈질이고 가족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조차도, 개인주의적 경향이 훨씬 큰 것을 볼 수 있다.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새로운 세대들은 어쩌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롭고, 영어권 문화에 오래 노출되고 또 인터넷사용등의 이유로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상대적으로 훨씬 크지 싶다. 동시에, 더불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전세대들의 영향으로 집단주의적인 경향도 함께 가지고 있는 (예를들어, 자신의 무지나 선대의 카르마에 기인한, 일본에 대한 지나치거나 이율배반적인 태도등) 어떻게 보자면 좀 복잡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한 두세대가 더 지나야 안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내가 존경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스승들은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 혹은 실제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 만으로도 (‘자각하는 것’ 만으로도) 큰 발전이며 장차 더 큰 변화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 의미있는 것이라고. 내가 전에 말했는데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때에는 그것이 카르마인줄 깨닫기가 무척 어렵지만, 만약 깨닫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께 이야기 해보는 것이다. 당신이 혹시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깨닫지 못한 당신의 자화상을, 숲밖에서 보는 숲속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어쩌면 훗날 어떤 실수를 저지른 백화점 종업원이 두려움 속에서 당신에게 혹시라도 무릎을 꿇을때,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당신 개인의 잘못만이 아니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좋은 태도로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한국도 그런 멍멍이 같은 일들이 그야말로 멍멍이 같은 일들로 모든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는 나라, ‘개인주의’가 잘 발달된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참된 해탈은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다. 니르바나는 어떻게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일 뿐이라더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가 모르겠지만 그래도 굳이 밝히고 싶다 🙂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첫번째 이야기

우연히 이곳에서 아래에 보이는 도표와 ‘개인주의’에 관련된 설명을 보게 되었다. ‘개인주의적 성향’을 나라별로 표시한 이 도표에 따르면, 미국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한국은 반대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높은 국가중의 하나로 나타나 있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은 스페인과 소련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통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을 더 뒤지며 교차검증을 시도하던 중에 원문으로 생각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몇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것인데, 그 중에서 ‘개인주의’ 편에 쓰인 글을 아래에 옮겨와 대략 번역하였다.

이토록 차이가 크게 나는 두개의 상이한 나라에서, 이럭저럭 살아온 내 자신이 나름대로는 놀랍고(?) 또한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이 통계를 기억하면서 되씹어 보니, 나름대로 설명이 되어지는 부분도 좀 더 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Individualism is the one side versus its opposite, collectivism, that is the degree to which individuals are integrated into groups. On the individual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the ties between individuals are loose: everyone is expected to look after him/herself and his/her immediate family. On the collectiv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people from birth onwards are integrated into strong, cohesive in-groups, often extended families (with uncles, aunts and grandparents) which continue protecting them in exchange for unquestioning loyalty. 개인주의는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와는 상반되는 수준만큼 (정도로) 개인들이 단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보살피는 것이 기대된다. 집단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태어나면서 부터 강하고 끈끈한 유대로 단체와 대가족의 일부가 되며, 그러한 무조건적인 충성의 댓가로, 단체와 대가족은 그 구성원을 지켜준다.

For example, Germany can be considered as individualistic with a relatively high score (67) on the scale of Hofstede compared to a country like Guatemala where they have strong collectivism (6 on the scale). 예를들면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독일은 상대적으로 과테말라같은 나라보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In Germany people stress on personal achievements and individual rights. Germans expect from each other to fulfil their own needs. Group work is important, but everybody has the right of his own opinion and is expected to reflect those. In an individual country like Germany people tend to have more loose relationships than countries where there is a collectivism where people have large extended families. 독일 사람들은 개인의 성취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 여긴다. 그들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단체의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런 구성원들의 의견이 단체에 반영되기를 (구성원들은) 기대한다. 독일처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인간관계가 보다 느슨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대가족에 소속되어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와 비교하자면 그렇다.

The United States can clearly be seen as individualistic (scoring a 91). The “American dream” is clearly a representation of this. This is the Americans’ hope for a better quality of life and a higher standard of living than their parents’. This belief is that anyone, regardless of their status can ‘pull up their boot straps’ and raise themselves from poverty. 미국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것을 확실히 대변한다. 그들이 떠나온 부모의 나라보다도 더 나은 삶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이를 통하여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아메리칸 드림’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희망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사회적 위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구두끈을 졸라매면’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전에 아내와 토오쿄오 근처 오다이바라는 지역에 갔던 적이 있었다. 마침 무슨 봄맞이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벗꽃도 흐드러져 있던데…

큰 건물들 사이 어디에선가 익숙한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길래 발걸음을 재촉해 보았다. 휠체어를 탄 수십명의 장애인들, 그리고 자원봉사자 ‘춤꾼’들이, 각자 휠체어를 하나씩 밀면서 함께 춤을 추고 있더라. 그 익숙한 노래에 맞추어서.

이 노래를 들으면 늘 그 기억이 난다. 몹시 놀라며 좀 부끄러웠던 기억도. 그리고 노래가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항상 같이 든다.

요새도 이 노래 크게 울려 퍼질까?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우 우 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우 우 아름다운 세상 너는 알았지 내가 사랑한 모습
우 우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우 우 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우 우 아름다운 세상 너는 알았지 내가 사랑한 모습
우 우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내가 사랑한 그대는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