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카에서 벗어나는 8개의 훌륭한 길 – 네번째 이야기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방법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난번에 이야기 했지요.

‘지혜’ (머리로 하는 앎), ‘덕행’ (몸으로 하는 실천) 그리고 ‘집중’ (마음으로 하는 수행) 이렇게 3개의 그룹으로 나누며, ‘머리’ ‘몸’ 그리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고’ ‘실천하며’ ‘수행하라’고 붓다께서 가르치셨어요.

맨 아래에, 이렇게 나뉘어진 3개의 그룹이 적혀 있지요? 이미 세가지 정도는 이야기 나누었는데, 나머지는 (특히 ‘덕행’에 관련된 것들은) 특별한 설명이 따로 필요가 없을 듯 해요. 어쩌면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집중’에 관계된 3가지 길은 조금 더 이야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더 읽고 배워서 다시 이야기해요.

이렇게 수행하여 얻고자 하고 또 얻을수 있는 결과가 ‘니르바나’입니다. 영어로 Nirvana라고 쓰며, 팔리어로는 nibbana 혹은 nibbāna로, 그리고 한자로는 열반(涅槃)으로 씁니다. 붓다께서는 니르바나를 ‘불이 꺼진 상태’ 그리고 ‘목마름이 사라진 상태’라고도 표현하셨어요. 이렇게 ‘마음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경지’를 인간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계셔요. 열반은 나이 많은 스님이 죽어서 드시는 (가시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대와 나 우리 누구나, 이 8개의 훌륭한 길을 따라서 노력하면, 살아 있을때, 각자의 능력과 그릇에 따라서 증득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 혹은 상태가 ‘니르바나’입니다. 너무 좋지요 🙂 아닌가? 혹시 무었인가 엄청난(?) 한방을(?) 기대했다가 실망 했나요? 그 엄청난 한방이 그리고 또 그런 한방을 찾는 그 마음이 바로 ‘불 타는 상태’ 그리고 ‘목 마른 상태’라고 내가 말한다면, 다만 말장난이라고 하겠어요?

태권도가 9급도 있고 9단도 있지만 그 중간에 또 많은 급과 단이 있듯이, 그리고 또한 설령 5단이었었다고 하더라도 수련하지 않고 술퍼먹고 놀다가는 5급에게도 대련하면 얻어 터질 수가 있듯이, 니르바나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 그렇게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 좀 더 꺼진 사람 혹은 목마름이 좀 더 사라진 사람처럼 다양한 수준이 (차원이 혹은 레벨이) 있겠지요. 또 분명한 것은, 한번 획득하면 그 사람에게 철썩 들러 붙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붓다께서도 매일 몸소 실천 하셨듯이, 죽는날까지 수행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수행을 할 수 있는 그 ‘습관’을 참으로 기르게 되는 것이 또한 니르바나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Wisdom (Paññā) ‘The head’
Right Understanding
Right Aspiration

Morality (Sīla) ‘The body’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Concentration (Samādhi) ‘The min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Right Concentration

미소

그대는 아시나요
지나간 옛시절의 꿈을
못다한 많은 사연들을
밤바람에 날려 보내리
외로운 마음은 누구의 선물인가
그대의 마음을 나에게주오
장미꽃 향기처럼
부드러운 그대의 미소
아무도 주지말아요
나에게만 영원 하리라
외로운 마음은 누구의 선물인가
그대의 마음을 나에게 주오
장미꽃 향기처럼
부드러운 그대의 미소
아무도 주지 말아요
나에게만 영원 하리라

보디사트바 (보살) 이야기, 네번째

일전에 언급했던 그 암벽등반 도큐멘터리 Dawn Wall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한다. 당신이 직접 보는 즐거움을 빼았지 않을 만큼만 이야기 하겠다. 감동적인 장면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이 장면을 선택하지 싶다.

그 암벽 코스 중간쯤에, 백미터 정도의 거리를 옆으로 횡단해야하는 구간이 있었다. 그야말로 손톱도 들어갈 곳이 거의 없는, 흡사 맨손으로 수직 거울을 횡단하는 그런 구간이다. 연습때 수백번 시도했었지만 단 한차례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먼저 주인공 토미가 수차례의 시도 끝에 (한차례의 시도가 몹시 힘이 드니, 하루에 한 두번 정도 시도하고 또 중간에 하루 이틀씩 쉬기도 하면서 시도한다) 그 구간을 기적적으로 통과 하였다. 암벽들은 그 전체 혹은 부분들이 (Dawn Wall처럼 암벽이 엄청나게 큰 경우에는 수십개의 구간들 하나 하나가) 어떤 난이도로 표시 되는데, 내 기억에 바로 이 횡단 구간이 세상에 알려진 암벽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였다. 이제 토미의 지원을 받으며 케빈이 그 구간을 통과할 차례가 되었다. 일주일 이상을 머물며 수십회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손가락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미 암벽에 올라 온지 2주가 넘었고,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토미도 남은 구간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고 있다.

토미는 이제 혼자 올라가야만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보았던 케빈은, 함께 그토록 꿈꾸었던 정상 등반의 영광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줄 이제 깨달았다.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안다. 토미는 충분히 기다려 주었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케빈에게 해주었었다. 하지만 케빈은 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암벽 구간을 성공적으로 돌파하지 못했다.

이제 토미가 케빈의 지원을 받으며 홀로 암벽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준비했고 기다렸던 등반인가. 홀로 오른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고 또 결코 여기서 그만 둘 수도 없다. 토미가 몇개의 어려운 구간을 올라 이 거대한 암벽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는, 몸을 누일수 있는 작은 공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잠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거의 손아귀에 닿을듯 말듯 다가온, 평생을 꿈꾸던, 그 성취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쏟아 부었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땀과 희생을 기억하였다. 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또 원했던 순간이었던가…

그런데 벌떡 일어난 토미가 위로 계속 올라가지 않고 반대로 내려간다. 그리고 케빈에게 말한다. ‘친구여 그대를 남겨두고 나 홀로 갈 수가 없네. 그곳으로 함께 되돌아 가서, 자네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게나.’ 이게 무슨 의미인지 그 도큐멘터리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 작은 공간에 누워서 곧 다가올 엄청난 성공을 상상하던 토미는 그 순간 케빈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다. 내가 이런데 그는 또 얼마나 간절히 원할까… 그런 마음을 알아주고 또 그런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성공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토미는 알았고 또 실천한 것이다. 보살행을 할려면 (세상을) 알아야 하고 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않은가?

토미가 하는 말이 무었을 의미인지 케빈은 잘 안다. 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자기가 다시 몇차례 실패하면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언제 또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미 투자했던 시간, 돈, 희생이 너무나도 컷기에. 케빈의 마음을 편히 해주고 오로지 암벽 횡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토미는 그동안 미디어들과 정기적으로 통화를 했던 휴대전화를 ‘실수로’ 암벽 아래에 떨어트렸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는 자네와 함께 이곳에 몇날 몇주를 머물든지 상관이 없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였다. 여때까지는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였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저 아래에서 세상이 뭐라든, 이곳에서는 오직 두사람 뿐인 것이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파트너 두사람 뿐. 케빈은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재시도한다. 그리고 결국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그 횡단 코스를 성공적으로 돌파한다. 아! 감동이다. 두 위대한 인간이 만들어낸 인생 드라마…

하지만 산넘어 산이다. 정상을 동반 등정하기 위해서 케빈은, 토미가 이미 도달한 그 높이까지 최대한 빨리 (당연히) 자력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시간을 더 끌면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둘다 지쳐 쓰러진다. 이미 지쳐있다. 토미가 암벽등반가로서는 극히 드물게, 상당한 거리를 아래로 내려와 우회 통과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어려운 구간에 이제 케빈이 도달하였다. 토미와 동일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시간도 없고 또 암벽을 자유등반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기보다도 더 어렵다. 이 구간은 중간에 실제로 잡을 것이 전혀 없어서, 2-3미터를 점프해서 쥐꼬리만한 바위틈을 손가락 한두개로 움켜 쥐어야 하는 곳이다. 바로 이 점프때문에 토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우회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작은 바위타기에 능한 케빈은 점프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은 없고 무조건 점프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 기적과 같은 점프를, 토미도 하지 못했던 그 점프를, 케빈은 해낸다. 이런 드라마를 거치며 또 그런 희노애락속에서 울고 웃으며, 두 사람은 결국 정상에 선다. 이래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체력이 강해서 또 기술이 좋아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결정을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내리며 또 서로를 믿고 도왔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이 위대하고 또 그들의 성공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새들은 그곳을 그저 날아서 올라갈테고 어쩌면 훈련된 원숭이나 다른 동물들도 그곳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오늘 ‘보살행’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이것은 오직 인간들만이 가능하며, 또 토미와 케빈뿐만 아니라 우리도 자신의 삶속에서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계적인 암벽등반가가 아니어도 된다. 인터뷰도 없고 또 상금도 기네스기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룬 이것을 당신과 나도 이룰 수 있다. 그대와 나도,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보살’이 될 수 있다 🙂

팔자 바꾸는 법

궁금하지요? 나도 궁금합니다. 바꿀 수 있을까요? 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1. 지천명 혹은 주제파악 (스승)
2. 적선
3. 명상 (기도)
4. 독서
5. 풍수 (명당)

옛날부터 구전되는 5가지 팔자 바꾸는 법입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풍수 혹은 명당’은 조상의 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심신이 평온하게 살면 팔자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겠네요. 다섯가지 모두 맞는 말씀 같군요.

지난번에, 붓다께서는 그분이 깨달은 ‘세상이 돌아가는 Dhamma’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이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당신과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This is the way it is.’ 우리 이것 잘 기억하면서 계속 읽어 봐요. 참,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쓰는 글은 오늘 달리는 중에 깨달은 것이예요. 읽고 나거든, 과연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두뇌를 해치며 달리기를 하는지 각자 판단해 봐요 🙂

대학전산팀에 직원도 적지 않고 또 전체 교직원은 몇 천명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뛰어 갔다 온 그 풍력발전기가 있는 작은 산에는, 교직원은 커녕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거의 없어요. 조건은 같지 않나요? 그곳의 위치, 대학의 근무 여건, 날씨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고.

오늘 그곳에서 달리면서, 같은 조건을 현재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었보다도 먼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가 설령 (우연히) 같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만으로는 동일한 결과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가 현실과 딱 부딪치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뜻이예요).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현재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경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예요. 그 사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경험을 어떤 강도로 해보았는가, 즉 경험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 그 사람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아름다운 날씨에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곳에 오늘 한 번 뛰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점심시간에 뛰어 올라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왜냐하면, 그것과 관련한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조건은 같지만 원하지도 않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담배 끊는 이야기를 해봐요. 어떤 흡연자는 끊을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그러면 다만 흡연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더불어 사는 것 뿐이지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많은 흡연자는 아마도 담배를 끊고 싶어 할꺼예요. 그리고 ‘자유의지’로 결정은 하지만 (스스로 원하고 마음은 먹지만) 대부분은 며칠 혹은 몇주 이내에 실패해요. 왜냐하면 담배를 끊는다는 어떤 행위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끊게 되지요.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인 그 ‘총체적 경험’이 담배를 끊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양과 질에서 임계점을 돌파했기 때문에 담배를 결국은 끊게 되지 싶어요. 금연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무었이 생겨 났나요? 금연에 대한 ‘총체적 경험’ 그 양과 질이 늘어난 것이지요. 우리 이것 잘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총제적 경험’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거나 늘일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 내가 산에서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삶은 담배를 끊는 그런 종류의 행동 혹은 시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고, 또 나아가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찾아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버켓리스트를 만들어) 죽기전에 ‘일등석 타고 북구에 가서 오로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들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단지 그렇게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다고 또 뭐가 달라지나요? 그런 일회성이고 간헐적인 ‘경험을 위한 경험’은, 의미있는 ‘총체적 경험’으로 쌓이지 않으며, 따라서 인생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었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경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들을 허락해서, 내 ‘총체적 경험’의 양과 질을 늘이게 할까요? ‘총체적 경험’의 주인은 우습게도, (두뇌가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쓰는 습관’ ‘마음을 쓰는 습관’ ‘무었을 하는 습관’ 그리고 ‘무었을 하지 않는 습관’ 바로 이 습관들이 결국은 그대와 나의 ‘총제적 경험’을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렇게 모여진 유의미한 총체적 경험이, 당신과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오늘 실현하게 허락하는 것이지요.

중3때 담임이셨던 키작고 눈매 무섭던 선생님은 자주 몽둥이를 드셨어요. 목재소에서 맞춤 주문한 사랑의 매. 늘 교탁 아래 잘 준비 되어 있었어요.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일들이 있을때면, 나를 포함한 급우들은 늘 그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드려 맞곤했어요. 허벅지 같은데를 그런 굵은 몽둥이로 수차례 맞으면 피멍이 크게 드는데, 한번은 부모님도 보셨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을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데요. 참 잘했어요 🙂 그런 폭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쳤는가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 주제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었어요. 급우들은 모두 떠들썩하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에서 왁짜지껄 소란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모두들 내려와서 강당으로 가라고 한두번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학급 전체에 말했어요. 우리는 그래도 계속 떠들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 왔어요. 그리고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다행히 오늘은 몽둥이는 없었지만) 우리 급우들 모두에게 차가운 복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기를 시켰어요. 이제 한두시간 후면 졸업할 제자들인데요… 그때 나는 고작 열댓살 먹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지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의 매를 드시다가 이제 스스로 변하고 말았구나. 이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줄담배 때문에 일찌기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시작되었던 그 몽둥이를 상습적으로 드는 ‘습관’이 선생님의 ‘총체적 경험’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게 되었었던 것 같아요.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선생님의 ‘자유의지’는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습관이 만든 총체적 경험의 종이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 그날 선생님도 댁에 가셔서, 늘 피우시던 독한 한산도인가 하는 담배를 태우시며 자신에 대한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웠지만 존경했던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무지하게 얻어 맞았던 허벅지도 대가리도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은혜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니 요점 정리를 해야겠지요? 먼저, 붓다께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삶의 조건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요.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좌지우지 (결정)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이 만드는, 바로 이 ‘자유의지가 우리 자신의 팔자를 바꾼다’고 나는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결정론을 아주 반대하셨던 (이건 내가 알아요) 붓다께서도, 아마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으로 짐작해요. 차차 더 알아보고 확인해서 이야기 할께요.

누군가를 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산길에서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비슷해야겠지요. 동료 직원이든지 근처 동네에 살던지. 나이도 이십대 🙂 그리고 그 사람도 달리기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습관이 있어야 하고, 그 오랜 습관의 결과로 나와 비슷한 ‘총체적 경험’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느 아름다운 겨울 오후에 그 사람과 나는 그 산길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요…

달리기 하고 싶어졌어요? 팔자 바꿀 수 있겠어요?

명상 – 세번째 이야기

‘위빠사나’ 명상을 영어로 ‘insight meditation’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지요? 먼저 insight는 understanding 혹은 think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내가 직장에서 기술관련 이매일을 주고 받을때 understand나 think라는 말은 서로 흔히 사용하고 또 그 뜻은 우리가 아는 그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매일을 쓰면서 insight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어요. 기술이나 수학등의 세계에서는, 특히 나 정도의 수준에서는 insight가 나오기가 어렵다는 의미인가 🙂

지난번에, 붓다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주신 그 다섯분의 훌륭한 고수들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했던 말 중에서 이런 말이 있었어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도 일가견이 있다고 확신하는…’. 바로 이것이 어쩌면 insight와 관련이 있지 싶어요. Insight는 머리에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서 우러 나오는 거라고 해요. 어떤 큰 원리나 깊은 이론이, 때로 말로 설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증명하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오랜 경험과 쌓아온 지식을 통해서 저절로 우러 나와서 굳이 의식적으로 확신하려 들지 않아도 그냥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느끼게 되는 그런 것을 insight라고 한다고 해요.

언젠가 내가 10% 덴트의 법칙이라는 말을 하면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속되어온 기간의 최소한 10분의 1은 시도를 해봐야 어떻게 이빨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을 했었어요. 어제 부부싸움 하고서 ‘위빠사나 명상’하는 예를 들었는데, 전에 말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집중명상’과 마찬가지로, 몇 번 한다고 아무일도 생기지 않아요. 어쩌면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질지도 몰라요 🙂 겨자씨가 아주 작다고 하지요. 그것을 한두개 정도 겨우 땅에 떨어트리는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좀 많이 떨어트리고 또 몇개라도 싹이 트면 자주 찾아가고 물도 주면서 또 오가는 길에 씨도 더 뿌리고 하며 시간이 좀 지나야 해요. 그러니 ‘이상한 기대’는 하지 말되 동시에 ‘괜한 낙심’도 하지 마세요. 세상에 가치 있고 좋은 것이 그저 되고 빨리 되는 것은 없어요. 한가지 팁을 드리자면, 지난번에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고 했었지요? 위빠사나도, 주변의 기운이 좋고 조용한 곳에서, 혹은 고요한 시간에 좋은 등산로나 산책로등을 찾아서 걸으면서 해도 좋지 싶어요. 일단 몸도 기분도 좀 좋아야 마음도 머리도 기분 좋게 씽씽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