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사트바 (보살) 이야기, 네번째

일전에 언급했던 그 암벽등반 도큐멘터리 Dawn Wall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한다. 당신이 직접 보는 즐거움을 빼았지 않을 만큼만 이야기 하겠다. 감동적인 장면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이 장면을 선택하지 싶다.

그 암벽 코스 중간쯤에, 백미터 정도의 거리를 옆으로 횡단해야하는 구간이 있었다. 그야말로 손톱도 들어갈 곳이 거의 없는, 흡사 맨손으로 수직 거울을 횡단하는 그런 구간이다. 연습때 수백번 시도했었지만 단 한차례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먼저 주인공 토미가 수차례의 시도 끝에 (한차례의 시도가 몹시 힘이 드니, 하루에 한 두번 정도 시도하고 또 중간에 하루 이틀씩 쉬기도 하면서 시도한다) 그 구간을 기적적으로 통과 하였다. 암벽들은 그 전체 혹은 부분들이 (Dawn Wall처럼 암벽이 엄청나게 큰 경우에는 수십개의 구간들 하나 하나가) 어떤 난이도로 표시 되는데, 내 기억에 바로 이 횡단 구간이 세상에 알려진 암벽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였다. 이제 토미의 지원을 받으며 케빈이 그 구간을 통과할 차례가 되었다. 일주일 이상을 머물며 수십회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손가락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미 암벽에 올라 온지 2주가 넘었고,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토미도 남은 구간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고 있다.

토미는 이제 혼자 올라가야만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보았던 케빈은, 함께 그토록 꿈꾸었던 정상 등반의 영광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줄 이제 깨달았다.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안다. 토미는 충분히 기다려 주었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케빈에게 해주었었다. 하지만 케빈은 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암벽 구간을 성공적으로 돌파하지 못했다.

이제 토미가 케빈의 지원을 받으며 홀로 암벽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준비했고 기다렸던 등반인가. 홀로 오른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고 또 결코 여기서 그만 둘 수도 없다. 토미가 몇개의 어려운 구간을 올라 이 거대한 암벽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는, 몸을 누일수 있는 작은 공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잠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거의 손아귀에 닿을듯 말듯 다가온, 평생을 꿈꾸던, 그 성취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쏟아 부었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땀과 희생을 기억하였다. 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또 원했던 순간이었던가…

그런데 벌떡 일어난 토미가 위로 계속 올라가지 않고 반대로 내려간다. 그리고 케빈에게 말한다. ‘친구여 그대를 남겨두고 나 홀로 갈 수가 없네. 그곳으로 함께 되돌아 가서, 자네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게나.’ 이게 무슨 의미인지 그 도큐멘터리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 작은 공간에 누워서 곧 다가올 엄청난 성공을 상상하던 토미는 그 순간 케빈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다. 내가 이런데 그는 또 얼마나 간절히 원할까… 그런 마음을 알아주고 또 그런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성공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토미는 알았고 또 실천한 것이다. 보살행을 할려면 (세상을) 알아야 하고 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않은가?

토미가 하는 말이 무었을 의미인지 케빈은 잘 안다. 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자기가 다시 몇차례 실패하면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언제 또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미 투자했던 시간, 돈, 희생이 너무나도 컷기에. 케빈의 마음을 편히 해주고 오로지 암벽 횡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토미는 그동안 미디어들과 정기적으로 통화를 했던 휴대전화를 ‘실수로’ 암벽 아래에 떨어트렸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는 자네와 함께 이곳에 몇날 몇주를 머물든지 상관이 없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였다. 여때까지는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였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저 아래에서 세상이 뭐라든, 이곳에서는 오직 두사람 뿐인 것이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파트너 두사람 뿐. 케빈은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재시도한다. 그리고 결국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그 횡단 코스를 성공적으로 돌파한다. 아! 감동이다. 두 위대한 인간이 만들어낸 인생 드라마…

하지만 산넘어 산이다. 정상을 동반 등정하기 위해서 케빈은, 토미가 이미 도달한 그 높이까지 최대한 빨리 (당연히) 자력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시간을 더 끌면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둘다 지쳐 쓰러진다. 이미 지쳐있다. 토미가 암벽등반가로서는 극히 드물게, 상당한 거리를 아래로 내려와 우회 통과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어려운 구간에 이제 케빈이 도달하였다. 토미와 동일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시간도 없고 또 암벽을 자유등반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기보다도 더 어렵다. 이 구간은 중간에 실제로 잡을 것이 전혀 없어서, 2-3미터를 점프해서 쥐꼬리만한 바위틈을 손가락 한두개로 움켜 쥐어야 하는 곳이다. 바로 이 점프때문에 토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우회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작은 바위타기에 능한 케빈은 점프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은 없고 무조건 점프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 기적과 같은 점프를, 토미도 하지 못했던 그 점프를, 케빈은 해낸다. 이런 드라마를 거치며 또 그런 희노애락속에서 울고 웃으며, 두 사람은 결국 정상에 선다. 이래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체력이 강해서 또 기술이 좋아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결정을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내리며 또 서로를 믿고 도왔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이 위대하고 또 그들의 성공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새들은 그곳을 그저 날아서 올라갈테고 어쩌면 훈련된 원숭이나 다른 동물들도 그곳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오늘 ‘보살행’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이것은 오직 인간들만이 가능하며, 또 토미와 케빈뿐만 아니라 우리도 자신의 삶속에서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계적인 암벽등반가가 아니어도 된다. 인터뷰도 없고 또 상금도 기네스기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룬 이것을 당신과 나도 이룰 수 있다. 그대와 나도,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보살’이 될 수 있다 🙂

팔자 바꾸는 법

궁금하지요? 나도 궁금합니다. 바꿀 수 있을까요?

1. 지천명 혹은 주제파악 (스승)
2. 적선
3. 명상 (기도)
4. 독서
5. 풍수 (명당)

옛날부터 구전되는 5가지 팔자 바꾸는 법입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풍수 혹은 명당’은 조상의 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심신이 평온하게 살면 팔자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겠네요. 다섯가지 모두 맞는 말씀 같군요.

지난번에, 붓다께서는 그분이 깨달은 ‘세상이 돌아가는 Dhamma’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이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당신과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This is the way it is.’ 우리 이것 잘 기억하면서 계속 읽어 봐요. 참,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쓰는 글은 오늘 달리는 중에 깨달은 것이예요. 읽고 나거든, 과연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두뇌를 해치며 달리기를 하는지 각자 판단해 봐요 🙂

대학전산팀에 직원도 적지 않고 또 전체 교직원은 몇 천명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뛰어 갔다 온 그 풍력발전기가 있는 작은 산에는, 교직원은 커녕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거의 없어요. 조건은 같지 않나요? 그곳의 위치, 대학의 근무 여건, 날씨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고.

오늘 그곳에서 달리면서, 같은 조건을 현재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었보다도 먼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가 설령 (우연히) 같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만으로는 동일한 결과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가 현실과 딱 부딪치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뜻이예요).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현재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경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예요. 그 사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경험을 어떤 강도로 해보았는가, 즉 경험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 그 사람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아름다운 날씨에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곳에 오늘 한 번 뛰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점심시간에 뛰어 올라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왜냐하면, 그것과 관련한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조건은 같지만 원하지도 않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담배 끊는 이야기를 해봐요. 어떤 흡연자는 끊을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그러면 다만 흡연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더불어 사는 것 뿐이지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많은 흡연자는 아마도 담배를 끊고 싶어 할꺼예요. 그리고 ‘자유의지’로 결정은 하지만 (스스로 원하고 마음은 먹지만) 대부분은 며칠 혹은 몇주 이내에 실패해요. 왜냐하면 담배를 끊는다는 어떤 행위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끊게 되지요.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인 그 ‘총체적 경험’이 담배를 끊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양과 질에서 임계점을 돌파했기 때문에 담배를 결국은 끊게 되지 싶어요. 금연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무었이 생겨 났나요? 금연에 대한 ‘총체적 경험’ 그 양과 질이 늘어난 것이지요. 우리 이것 잘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총제적 경험’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거나 늘일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 내가 산에서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삶은 담배를 끊는 그런 종류의 행동 혹은 시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고, 또 나아가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찾아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버켓리스트를 만들어) 죽기전에 ‘일등석 타고 북구에 가서 오로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들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단지 그렇게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다고 또 뭐가 달라지나요? 그런 일회성이고 간헐적인 ‘경험을 위한 경험’은, 의미있는 ‘총체적 경험’으로 쌓이지 않으며, 따라서 인생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었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경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들을 허락해서, 내 ‘총체적 경험’의 양과 질을 늘이게 할까요? ‘총체적 경험’의 주인은 우습게도, (두뇌가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쓰는 습관’ ‘마음을 쓰는 습관’ ‘무었을 하는 습관’ 그리고 ‘무었을 하지 않는 습관’ 바로 이 습관들이 결국은 그대와 나의 ‘총제적 경험’을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렇게 모여진 유의미한 총체적 경험이, 당신과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오늘 실현하게 허락하는 것이지요.

중3때 담임이셨던 키작고 눈매 무섭던 선생님은 자주 몽둥이를 드셨어요. 목재소에서 맞춤 주문한 사랑의 매. 늘 교탁 아래 잘 준비 되어 있었어요.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일들이 있을때면, 나를 포함한 급우들은 늘 그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드려 맞곤했어요. 허벅지 같은데를 그런 굵은 몽둥이로 수차례 맞으면 피멍이 크게 드는데, 한번은 부모님도 보셨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을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데요. 참 잘했어요 🙂 그런 폭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쳤는가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 주제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었어요. 급우들은 모두 떠들썩하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에서 왁짜지껄 소란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모두들 내려와서 강당으로 가라고 한두번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학급 전체에 말했어요. 우리는 그래도 계속 떠들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 왔어요. 그리고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다행히 오늘은 몽둥이는 없었지만) 우리 급우들 모두에게 차가운 복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기를 시켰어요. 이제 한두시간 후면 졸업할 제자들인데요… 그때 나는 고작 열댓살 먹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지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의 매를 드시다가 이제 스스로 변하고 말았구나. 이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줄담배 때문에 일찌기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시작되었던 그 몽둥이를 상습적으로 드는 ‘습관’이 선생님의 ‘총체적 경험’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게 되었었던 것 같아요.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선생님의 ‘자유의지’는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습관이 만든 총체적 경험의 종이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 그날 선생님도 댁에 가셔서, 늘 피우시던 독한 한산도인가 하는 담배를 태우시며 자신에 대한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웠지만 존경했던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무지하게 얻어 맞았던 허벅지도 대가리도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은혜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니 요점 정리를 해야겠지요? 먼저, 붓다께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삶의 조건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요.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좌지우지 (결정)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이 만드는, 바로 이 ‘자유의지가 우리 자신의 팔자를 바꾼다’고 나는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결정론을 아주 반대하셨던 (이건 내가 알아요) 붓다께서도, 아마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으로 짐작해요. 차차 더 알아보고 확인해서 이야기 할께요.

누군가를 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산길에서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비슷해야겠지요. 동료 직원이든지 근처 동네에 살던지. 나이도 이십대 🙂 그리고 그 사람도 달리기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습관이 있어야 하고, 그 오랜 습관의 결과로 나와 비슷한 ‘총체적 경험’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느 아름다운 겨울 오후에 그 사람과 나는 그 산길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요…

달리기 하고 싶어졌어요? 팔자 바꿀 수 있겠어요?

명상 – 세번째 이야기

‘위빠사나’ 명상을 영어로 ‘insight meditation’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지요? 먼저 insight는 understanding 혹은 think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내가 직장에서 기술관련 이매일을 주고 받을때 understand나 think라는 말은 서로 흔히 사용하고 또 그 뜻은 우리가 아는 그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매일을 쓰면서 insight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어요. 기술이나 수학등의 세계에서는, 특히 나 정도의 수준에서는 insight가 나오기가 어렵다는 의미인가 🙂

지난번에, 붓다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주신 그 다섯분의 훌륭한 고수들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했던 말 중에서 이런 말이 있었어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도 일가견이 있다고 확신하는…’. 바로 이것이 어쩌면 insight와 관련이 있지 싶어요. Insight는 머리에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서 우러 나오는 거라고 해요. 어떤 큰 원리나 깊은 이론이, 때로 말로 설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증명하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오랜 경험과 쌓아온 지식을 통해서 저절로 우러 나와서 굳이 의식적으로 확신하려 들지 않아도 그냥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느끼게 되는 그런 것을 insight라고 한다고 해요.

언젠가 내가 10% 덴트의 법칙이라는 말을 하면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속되어온 기간의 최소한 10분의 1은 시도를 해봐야 어떻게 이빨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을 했었어요. 어제 부부싸움 하고서 ‘위빠사나 명상’하는 예를 들었는데, 전에 말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집중명상’과 마찬가지로, 몇 번 한다고 아무일도 생기지 않아요. 어쩌면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질지도 몰라요 🙂 겨자씨가 아주 작다고 하지요. 그것을 한두개 정도 겨우 땅에 떨어트리는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좀 많이 떨어트리고 또 몇개라도 싹이 트면 자주 찾아가고 물도 주면서 또 오가는 길에 씨도 더 뿌리고 하며 시간이 좀 지나야 해요. 그러니 ‘이상한 기대’는 하지 말되 동시에 ‘괜한 낙심’도 하지 마세요. 세상에 가치 있고 좋은 것이 그저 되고 빨리 되는 것은 없어요. 한가지 팁을 드리자면, 지난번에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고 했었지요? 위빠사나도, 주변의 기운이 좋고 조용한 곳에서, 혹은 고요한 시간에 좋은 등산로나 산책로등을 찾아서 걸으면서 해도 좋지 싶어요. 일단 몸도 기분도 좀 좋아야 마음도 머리도 기분 좋게 씽씽 아니겠어요?

명상 – 두번째 이야기

지난번에 우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는 명상’ 혹은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 보았어요. 이런 명상을 팔리말 (Pali language) 로는 Samatha 혹은 Samadhi 라고 하며, 영어로는calm meditation 혹은 concentration meditation 라고 말해요. 이 명상을 많이 하신 스님들의 말씀이, 밥맛도 좋아지고 잠도 잘오고 심신이 편하고 건강해진다고 해요. 많이 해봐요 🙂 하지만 이런 명상은 불교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예요. 다른 종교에서도 하고 또 붓다가 살아 계시던 고대 인도지역에도 흔히 어떤 수행의 한 방편 (방법)으로 쓰였다고 해요.

이제 불교에서만 하는 명상에 대해서 말할 차례예요. 붓다께서 직접 가르치신 명상입니다. 이런 명상을 팔리어로는 Vipassana 라고 하며 영어로는 insight meditation이라고 말해요. ‘비파사나’ 보다는 ‘위빠사나’ 정도로 발음되는 것 같아요. 무었을 명상하는 것일까요? 이 명상의 대상은 무었일까요? 바로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붓다의) 지혜를 (wisdom) 증득하는 것이 되겠어요. 그 분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고 되세겨 보고 또 내 자신의 삶과 경험에 비추어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 또 수긍하면서 깨달음을 서서히 얻게 되는 과정이 이 명상의 목표라고 해요. 그러니 이 명상을 할려면 우선 붓다의 가르침을 좀 알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면, 지난번에 이야기 했던 두카에 (Dukkha) 관한 붓다의 네가지 가르침도, 이 명상의 아주 좋은 대상이 되겠어요. 이런데 요긴한, 몇가지로 잘 정리 요약된 붓다의 (다른 종류의) 가르침들을 차차 전달해 드리겠는데 그때는 우리가 이런 명상을 할 대상이 더 많아지겠지요.

혹시 궁금해 할까봐 이야기하는데, 붓다의 가르침을 보면 (원본 경전들에 따르면) 가르침 X는 1,2,3,4 가르침 Y는 첫째는 무었 둘째는 무었 셋재는 무었… 이렇게 되어 있는 경우가 참 많아요. 붓다께서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해 주시는 훌륭한 선생님인 것이 이유겠지만, 후세의 제자 비구들께서 혹시나 붓다의 소중한 가르침이 한마디 한자라도 제대로 전달이 안되고 와전 될까봐 이렇게 딱 정리해서 우리가 어릴때 구구단 외우듯이 수십년을 달달달달 외워서 전달하고 또 전달했던 것이 또 다른 이유가 되겠어요 (세상에 언어는 너무 많지만 문자는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붓다께서 사용하셨던 그 팔리 언어도 문자가 없어서 이렇게 구전된 후대에 문자화 되었어요. 세종대왕님과 관련학자들께 경례!) 인간의 한계를 알았기에, 건방짐이나 가벼움없이 그저 최선을 다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가감없이 전달해 주고자 했었던 그 분들의 마음이 실려 있는 것이지요. 또 눈물이 나는군요. 좀 잘 살아 보고 싶어서, 좀 덜 괴롭게 좀 덜 시달리며 살아보고 싶어서, 행복을 찾아서 지푸라기라도(?) 잡아 볼려고, 이렇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서 인간적으로 애쓰고 난리치고 하다가, 이런 경전 문구들만 남겨 놓고 다 가셨잖아요. 애잔한 마음이 들어요. 어떤 훌륭한 연세 많은 불교학자도 말했어요. 붓다의 가르침을 알면 알아 갈수록, 애잔한 마음 짠한 마음이 자꾸 느껴진다고. 붓다를 향해서, 자신을 향해서 그리고 주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말이예요. 나도 좀 그런 기분이 드는군요.

셋길로 빠졌내요. 자 한가지만 예를 들고서 오늘은 마무리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해요. 아침에 배우자와 다투셨어요? 기분이 안 좋으시군요. 자 바로 이 상황을 붓다의 Dukkha 가르침에 대입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는 거예요. 담배 한대? 웃기는 실화로, 동남아 절에 가면 스님들이 식사후에, 어리거나 늙었거나 한 자리에 모여 앉아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해요. 외국인들이 보면 놀라고 기급할 일인데요, 붓다가 살았던 시절에는 담배가 없어서 그에 대한 가르침이 없어요. 물론 선진국에서 온 교육받은 스님들이야 그 폐해를 알고 또 한국분이라면 사회적 예절을 아니 (고승의 면전에서) 담배를 빡빡 피우지는 않겠지요. 어쨋던 필요하면 한대 피세요 🙂 (술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바로 그 기능이 정상 작동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생각을 해보자는 거지요.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나? 그렇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지? 그렇다. 지난번 다투고 1달이 지나고 나서는 어떻게 됬더라? 다시 손잡고 뽀뽀도하고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좋더나? 그렇더라. 그렇다면 그 좋은 것을 당장 하지? 그 1달을 혹시 1주일 아니면 이틀로 줄일 가능성이 있겠나? 있지만 상대방이 태도를 먼저 바꿔야 한다. 혹시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겠지. 그렇다면 내가 그래도 나이도 많고 또 여러가지로 강자인데 (착각인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더 쿨하지 않을까… 이런식으로 말이예요.

투카가 있고 (배우자와 다투고 괴로운 상태) 두카가 있게 된 원인이 있고 (표면적으로는 다툼 언쟁, 기저에 깔린 보다 큰 이유, 어떤 것에 반응하는 내 자신의 카르마, 버턴을 누르는 어떤 언행을 자신도 모르게 하는 상대방등등) 두카가 없어질 수가 있고 (이해, 화해, 시간이 지남, 망각) 그리고 그렇게 두카를 없게 할 길이 있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입장을 좀 더 이해, 술이 상황을 증폭 악화 시킨다면 술을 이런 상황에서 피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던지 아니면 아예 끊던가, 자신의 카르마를 들여다 보며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등등. 참 다음에 또 먼저 싸우기 시작하면 아파트 소유권을 넘겨 주겠다고 각서를 써주는 것은 소용 없어요. 법정에서 유효한 증거로 안 받아 줌. 헤헤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됬을까 🙂 ) 이렇게 차근 차근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내가 여태껏 배운 (비록 쥐꼬리 만큼이라고 해도) 붓다의 가르침에 ‘실제 상황’을 대입을 시켜 보면서 좀 생각을 조용히 해보는 것. 바로 이것이 일종의 ‘위빠사나’ 명상입니다. 할 수 있겠지요? 보니까 자주 싸우는것 같더만 기회 많겠네 🙂 오늘은 이만.

명상 – 현대판 만병통치약?

일전에, 그 옛날 박카스병에 넣어 팔던 ‘가짜 만병통치약’ 이야기를 했었지? 설탕물에 아스피린을 좀 갈아 넣었던지, 아니면 시골에서 양귀비를 몰래 키우던 넘들이었다면, 그것 이파리라도 삶은 물을 좀 섞었던지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내 생각에는, 정말 센 넘들 무리에 속해서 주류들과 함께 잘 나가는 사람들은, 밖에서 들릴만한 잡음도 만들지 않고 또 무슨 재미있거나 신기한 이야기 거리도 별로 만들지 않지 싶어. 문제아들, 주류에서 튕겨 나왔거나 쫒겨 나온 넘들이 꼭 소란하고 시끄러운 것 같더만. 나도 그런가? 내가 보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때로 지나치게 돈돈돈 하면서 돌아가는 것 같고 (물론 돈이 많으니 전에 말했듯이 훌륭한 일도 하고 그렇겠지만) 어떤 미국사람들은 머리가 좀 ‘돈’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 미국사람들 중에서 태국등 아시아 나라에서 수행하다가 중노릇이 너무 힘이 들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그만 두고서 자기 나라로 되돌아 갔던 사람들도 많았어. 그리고 그 중에서 원래 머리가 좀 ‘돈’사람들도 있었겠지. 가서 뭐 했을까? 붓다장사 명상장사 🙂

내가 본 이런 사람들은 일단 공통적으로 박사학위를 사요. 왜 산다는 표현을 쓰는가 하면, 통신과정 혹은 인터넷과정 뭐 이런식으로 돈을 갖다 주고 받는 그런 박사학위라는 냄새가 풀풀 나거든. 태국에서 아잔차 스님 아래서 수행하던 1세대 서구인 승려들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미국에 명상센터를 차리고 (미국과 서구에) 명상을 알린 유명한 사람이 되었어. 이 사람도 박사학위가 있는데, 무슨 임상심리학 박사인가 그래. 이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미국대학원 185개 중에서 ‘173번째로 좋다’고 알려진 대학원에서 취득한 것으로 나와 있어. 또 다른 유명한 명상 장사꾼이 임상심리학 (인기 좋네) 박사학위를 취득한 대학원은 그런 통계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 곳이야. 왜 이렇게 기를 쓰고 박사학위를 사려고 할까? 미국에서 발행되는 자기계발 서적들 표지 봤나? 그런책들 대부분에는 저자 ‘누구누구 박사’라고 크게 박혀 있어. 그래야 장사가 되고 돈을 벌수가 있으니까. 이런 거룩한 박사님들이 하시는 명상 과정들도 또 매우 비싸. 인터넷으로 한번 등록 안내를 봐. 내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대동강 물팔아 먹은 봉이김선달’이 따로 없지 안그래? 무슨 재료를 어떻게 투자해서 무었을 만들어 팔았고 또 그것이 어떤 결과를 냈는데?

일전에 이곳에서도 이런 사람이 교묘하게 머리를 써서, 무슨 비영리 단체인 것처럼 가장을 해서 이곳에서 제일 큰 인터넷 일간지에 버젓히 자기 사업 선전을 했던 것을 봤어. 나도 처음에는 좋은 느낌으로 읽어 보고, 좀 더 알아 볼려고 그 기사에 제공된 링크를 따라가 보았는데, 허… 붓다 팔아 (명상 비데오를 온라인으로 팔았던 것으로 기억해) 돈벌이 하는 곳이더라니까. 내가 마음에 상처를 좀 받았어. 그런데 이 사람 뒷조사를 좀 해 봤더니, 글쎄 다행히도(?) 그 ‘돈’나라에서 이곳에 와서 사는 사람이었던 거라. 그 버릇 어디 가겠어? 내가 정말 드물게 댓글을 하나 남겼어. ‘당신 말대로 당신 자신도 그렇게 명상을 좀 해 봐라. 이런 것 팔아서 돈벌이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그리고 당신이 파는 것들 중에서 당신 자신이 발견했거나 혹은 만들었던 것이 무었이 있는지’. 좀 야비했지만 내가 상당히 기분이 상했었어. 붓다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진실하게 깨닫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좀 들어 보고 알아 볼 기회를 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저절로 들게 되지만, 이것 팔아서 돈을 좀 벌어 봐야겠다는 생각은 ‘머리가 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게 돼’. 이런 종자들을 보면, 흡사 딸자식 팔아 술 받아 마시는 애비 꼴을 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러니 혹시 그대가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는 여정에서, 어떤 사람이나 단체를 존경하게 되거나 혹은 따르게 될때,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확실히 알아 봐야 하는 것은, 그들이 ‘돈을 노리는’ 넘들인가 아닌가야 (‘권위’처럼 무형의 것을 노리는 넘들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돈으로 환산 귀결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고, 어쩌면 더 나쁜 넘일 가능성이 커). 한계가 많은 우리 인간이, 사심없이 성심껏 최선을 다해도 무었 하나 제대로 이루기가 참 어려운데, 하물며 제것도 아닌 것을 팔아 돈벌이 할 궁리를 하는 넘들로부터 도대체 무슨 가치 있는 것이 나올 수가 있겠나? 선생님 이것 잘 기억하시길 바래요 🙂

이렇게 명상 팔아서 돈벌이 하는 넘들이 남긴 공적이라면, 명상을 세상에 많이 알린 것이겠지. 그리고 부정적인 면이라면, 명상이 흡사 무슨 대단한 이론과 습득의 과정이 필요하고, 또 자기들이 시키는데로 하면 어떤 엄청난 효과나 이익을 보게 되는, 현대판 ‘박카스병에 넣은 만병통치약’처럼 포장을 했다는 것이야. 그렇게 하지 않고서 어떻게 장사가 되겠어? 맨 위에서 내가 그 만병통치약 성분이 뭐랬더라?

이제 명상의 진실을 좀 밝혔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명상이 무었이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 그리고 왜 하면 좋은지, ‘자타가 공인하는 명상 전문가들과 더불어 반세기 가까이 명상을 해 오신 분들이, 십원 한장 달라는 말씀없이 가르쳐 주신데로’ 내가 전해 볼께. 먼저 웃기는 이야기 하나. 법륜스님 알지? 때때로 좀 심하다 싶기도 하고 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면도 있지만, 그래도 현존하는 한국의 승려들중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분이 아닌가 싶어. 그대도 들어보았을 ‘즉문즉설’ 시간에, 어떤 사람이 약간 멋있게 질문을 했어 ‘명상’에 대해서. 아마 좀 쿨한 대답을 기대했었겠지. 스님 왈 ‘명상하면 무슨 일이 생겨 아무일도 안 생겨.’ 우하하하 내가 이래서 스님을 존경한다니까 🙂 낙심했나? 그대를 위해서 조금 더 친절한 버젼으로 말해볼께. ‘명상을 하면 당장은 아무일도 안 생겨요. 그런데 이상한 욕심내지 않고 오래 그리고 자주하면, 더 크고 훌륭한 수행을 위한 기본을 (운동으로 치자면 ‘몸’을) 만들게 되요’ 이것 중요하지 않을까요?

붓다의 가르침을 좀 달리 표현하자면 ‘생각하며 살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싶어. 다시말하면 ‘아무 생각없이 그저 습관대로 무의식적으로 살다가 죽지는 말자’는 말이야. 내가 무슨 거창한 이야기 하는 것 아니니 긴장 하지 말고. 그런데 뭐가 되었던 간에 ‘생각하며 살려면’ 좀 의식을 가지고 해야 되. 예를 들면, 우리가 부엌에서 라면을 끓일때 그냥 자동적으로 하지 않나? 그것을 자기가 라면 끓이는 것을 딱 지켜 보면서 끓여 보라는 거야. 뭘 보라고?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고, 물을 담고 가스를 켜고 파를 썰고, 다 끓이고 나면 조심해서 불위에서 내리고 가스를 잠그고 탁자로 들고 오는 이 과정을 ‘자신이 딱 지켜보면서’ 해보라는 거지. 왜? 좋잖아 안전하고 또 맛잇게 잘 끓이고 🙂 아니고, 이렇게 하면 ‘라면을 먹고 나서 꽃비씨를 만나러 가는데 오늘은 어디가서 무었을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라면을 끓이지 않고, 오직 라면 끓이는데에만 집중하게 되겠지. 이것을 훈련하자는 거야. 왜? 당신 골프 정말 잘 치고 싶지? 내가 거리 늘이고 점수 줄이는 확실한 비법을 알려주께. 양심적인 도사급들이 이미 하신 말씀을 내가 그냥 옮기는 것이니 너무 고마뭐 하지 말고. 팔굽혀펴기를 하루에 백개 그리고 턱걸이를 오십개씩 매일,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한두해 하면 되십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 방금 위에서 말한 집중 훈련, 즉 ‘마음을 가라 앉히는 명상’이 바로 수행에 있어서, 팔굽혀펴기 그리고 턱걸이랍니다.

내가 좋아 한다던 Luang Por Tiradhammo 스님께서 최근에 어디선가 설법을 대중들에게 하셨어. 그리고선 질문과 대답 시간이 되었는데, 어떤 훌륭한 사람이(?) 좋은 질문을 하나 했어. ‘저 같은 보통 사람이 (아는 것도 없고 경험도 없고 또 시간도 없는 중생이) 매일 무었을 좀 하면 (수행으로) 좋겠습니까?’ 스님이 대답하셨어 한 마디로. ‘매일 10분만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숨쉬는 모습을 지켜보는 명상을 하세요’ (마음을 가라 앉히고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

오늘은 요까지만. 명상 이야기 좀 더 있는데 다음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