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후안마이의 마지막 편지

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은 한국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도 부인이 기뻐 보이지 않으면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남편은 왜 오히려 아내에게 화를 내는지, 당신은 아세요?

남편이 어려운 일 의논해 주고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내를 제일 아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저는 당신의 일이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저도 한 여자로서, 아내로서 나중에 더 좋은 가정과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은 아세요?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는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려 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 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한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있어요. 좋으면 결혼하고 안 좋으면 이혼을 말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진실된 남편으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결혼에 대한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어요.

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누구든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되요. 물론 부부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처가 너무 많아 결국 이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 사람의 감정을 존경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는 상황들과 원망하게 하는 상황들이 무관심하게 지나가게 되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자존심이 있고 자신을 ‘정답’에 서게 하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부부가 행복할 수 없고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에요. (중략)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아세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치민 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하지만 봉급은 얼마 못 받았지요. 저는 노동이 필요한 일도 했었어요.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그것이 가축을 기르는 일이든, 농작을 하는 일이든. 가족들은 노동일로 벼를 심고 베는 일을 했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랬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가 베트남에 돌아가게 되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에요. 저는 당신이 저말고 당신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래요. 당신이 잘 살고 당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길 바래요.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 저를 잘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다시 처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의 희망은 이제 이것뿐이에요. 당신과 전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저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 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이 그 경위에 어찌 되었던 간에 피고인과 결혼하여 피고인만을 의지하여 말도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에 온 19세의 피해자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그 결과가 지극히 무거워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가 남긴 편지 내용을 보자. 피해자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피고인과 서로 이해하고 위해주는 애틋한 부부관계를 이루고, 한국어를 빨리 배워 한국생활에 적응하면서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한국에 와 피고인과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고인의 피해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 어려운 경제적 형편 및 언어문제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원만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였다.

피고인의 무관심과 통제로 인하여 피고인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기는커녕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누리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피고인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을 것이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이와 같은 반응을 보고 피해자가 처음부터 피고인과 결혼할 생각 없이 사기결혼을 하였다고 오해한 것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에 이른 주된 원인이 되었다.

거기에 피고인의 피해망상적 사고경향과 음주 중 폭력습벽이 더 해져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사건 범행은 결국 계획적이거나 미리 의도된 범행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피고인의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피해망상적 사고경향 및 음주 중 폭력습벽에 기인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이러한 그릇된 성행을 교정하기 위하여서도 상당한 기간동안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형의 선고는 불가피하다고 판단된다.

한편 시각을 바꾸어 이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돌아보고 싶다. 특히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남성과 제3세계 여성 사이의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국제결혼의 명암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고 있다. 배우자감을 국내에서 찾을 처지가 되지 못했던 피고인이 결혼정보회사를 통하여 베트남 현지에 임하여 졸속으로 피해자를 만나게 된 전 과정을 보면서 스스로 깊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은 그저 피해자가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단 몇 분만에 피해자를 배우자감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누구 집 자식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도 알려 준 바 없었고, 그래서 이를 전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또한 스스로 알고자 하지도 아니하였다. 목표는 단 한 가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일 뿐, 그 이후의 뒷감당에 관하여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지탄을 피고인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의 한 발로일 뿐이다. 노총각들의 결혼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는 남녀를 그저 한 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혼인은 사랑의 결실로 소중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의 아내가 되고자 한국을 찾아온 피해자 후안마이. 그녀의 예쁜 소망을 지켜줄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19세 후안마이의 편지는 오히려 더 어른스럽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되리라는 소망을 해 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다.

이 법원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사람과 결혼하여 이역만리 땅에 온 후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한 채 살해되어 19세의 짧은 인생을 마친 피해자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무하고 싶었다. 그 전제로 피고인이나 결혼을 알선한 결혼정보업체를 통하여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리려고 하였다.

결혼정보업체는 피해자의 성장배경, 생활환경 및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에 대한 이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고, 관계당국이나 피고인을 통하여서도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릴 길을 찾지 못한 채 이 사건 판결에 이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피고인으로서도 피해자의 가족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기회를 갖지도 못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에 피고인의 연령, 성행, 전과관계, 범행의 동기, 경위, 결과 및 범행 이후의 정황 등 양형의 조건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에 대하여 징역 12년을 선고한 제1심의 형량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대전고등법원

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3

큰 돈이 걸린 투견을 위해 싸움개를 전문으로 기르는 자들이, 장차 돈을 벌어 줄 미래의 챔피언 싸움개를 양성하는데 사용하는 기술을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족보가 좋은 새끼개를 골라서 은퇴한 늙은 싸움개와 장난반 연습반 싸움을 붙이면서 훈련을 시키는데, 잘 지켜 보면서 새끼개가 은퇴한 개로부터 기술은 배우되 절대 진다는 느낌이 들때까지는 놓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런 훈련을 많이 한 다음 큰 돈이 걸린 진짜 투견 대회에 참가 시키는데, 이렇게 체계적으로 훈련된 그 개는 두려움이 무었인지를 모른다고 한다. 단 한 번도 패해본 적이 없으니. 전혀 겁을 내거나 위축되지 않는 상태에서 싸움에 임한다더라. 이게 무슨 뜻일까?

미셸 오바마 여사가 자서전에서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인종차별의 ‘최대 최악의 원인이자 결과’가 미국흑인들로 하여금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미 두렵고 무서워서 정신적으로 패하도록’ 미국사회가 온갖 방법으로 그들에게 패배의식 혹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얼마나 무섭고 나쁜 이야기인 줄,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 대부분은 경험 해본 적이 없을테고 또 나아가 미국의 영부인까지 왜 이런 이야기를 자서전에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가장 큰 주제로 다루고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지난번 글에 ‘남의 나라의 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감추는 중년 남자’ 언급을 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면 좀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블로그에 등장했던 그 보살원장은 나의 아내다. 나는 그녀를 통하여 뉴질랜드 유치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난 십여년간 많이 듣고 또 알게 되었다. 다양한 장르에서 서당개 노릇하느라 내가 좀 바쁘다 🙂 이를 통하여, 이 나라의 국가 1절이 왜 원주민말인 마오리어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왜 국가의 가사에 내가 이전에 말했던 그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게 되었다.

이 나라의 공립 유치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몇 주전에 아내의 유치원이 속해 있는 지역협회에서도 90주년 기념일을 크게 축하 하였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학습의 내용은 물론이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교육철학적인 측면도 정부와(문교부) 유치원협회들이 함께 개발하고, 실행하며 또 모니터링 한다. 원장이나 선생들 마음대로 (시끄럽다고 보드카를 몰래 먹여 ‘곤히’ 재우거나 하면서) 아무것이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의 의사를 유치원 교육 내용에 반영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뉴질랜드 국민 다수가, 아빠 엄마의 입장에서 우리 아가에게 무었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그 원하는 내용들을, 합의된 교과와 방식 그리고 절차에 따라서 유치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아내가 유아교육과 학생으로 유아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시절부터 십수 년이 지나 큰 공립유치원 원장으로 일하는 지금까지, 유치원 교육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또 아무것도 모르던 나 같은 사람도, 이 나라의 유치원 교육에서 원주민 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를 얼마나 체계적이고 제도적으로 아이들에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정성들여 가르치는지, 때때로 이것 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서너살된 어린 아가들에게, 일찍부터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을 알게하고 또 자신과 이질적인 문화를 대할때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마치 밥 먹을 때마다 테이블매너를 가르치듯이 지속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장차 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버스에서 들리는 외국어 소리, 식당에서 나는 이질적인 음식냄새 그리고 함께 사회 구성원으로 생활하면서 느끼는 문화의 차이를 ‘삶의 당연한 일부’로 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 새끼 싸움개가 패배나 두려움이 무었인지 모르면서 큰 싸움개로 자랐듯이. 비록 목적은 극단적으로 다르나 그 방법은 지혜로우며 또 결과는 같지 않을까?

그냥 개인적으로 내 생각과 비위에 맞지 않다는 것과, 저것들이, 저 인종들이, 저 무리들이 하는 짓이니 혐오스럽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지난날 나는 사소하고 어리석은 이유들로 때로 상사나 동료들과 언쟁을 벌였던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건데 한 번도 ‘인종간의 어떤 문제’가 원인이 되었던 기억은 없다. ‘인간간의 어떤 문제로’ 부딪혔었지. 이 두가지가 매우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셸 오바마 여사는 아마 잘 이해하고 공감 하실 것이다.

나는 이 착하고 훌륭한 국민들, 약자를 보살피고, 쉽게 믿고 또 인간적인 동정을 베풀며, 있다고 별로 거만하지 않고 또 없다고 별로 기죽어 하지 않는 이 사람들이, 피부색 언어 그리고 문화가 다른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화목과 조화를 위하여, 그 좋은 머리와 세금을 아낌없이 쓰고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감동을 느낀다. 서로에 대한 존경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고 구성원 상호간의 유대와 지원은 이런 과정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이렇게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돈으로 살 수 없고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조차도 이나라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구성원이 되고 싶게끔 만든다. 그래서 이나라 국가를 부를때면 내가 늘 눈물을 몰래 훔치게 되는 것이다.

영어 속담에 이런말이 있다. A great man shows his greatness by the way he treats little men (Thomas Carlyle 18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개인은 물론이려니와, 사회도 나라도 그의 위대함을 약자와 소수를 대접하는 태도와 방법에서 보이지 않을까?

그대가 속해 있는 그 조직, 그 사회와 나라는 어떤 식으로 약자와 소수를 대접하는가? 당신은 그것에서 위대함을 느끼는가?

헬조선 진단서 1

최근 자료들에 따르면, 권위 있는 국제기구들이 나라들을 구분할 때 대한민국은 확실하게 선진국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 헬조선 하면서 이민을 고려한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흡사,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멀쩡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근육미 넘치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 죽겠다 죽겠다 하는 꼴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런 기사들이 가끔 신문에 나는데, 나는 원본 내용들을 찾아서 자세히 살펴본지가 꽤 오래 되었다. 이번에도 그 레가툼연구소의 웹사이트를 살펴 보았는데, 이전에 다른 조사들에서 보아왔던 어떤 패턴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어쩌면 ‘헬조선 진단서’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아래에 보이는 그림이 바로 그 레가툼연구소의 2018년 리포트인데, 각 나라들을 경제, 안전, 자유, 환경등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순위를 매기고 그 합산으로 전체 순위를 정하는 식으로 리포트가 작성된 듯 하다. 내가 검은색으로 표시한 항목이 ‘Social Capital’ 이라는 항목인데 오른쪽에 설명이 붙어 있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간의 유대, 사회지원망, social norms 그리고 사회참여등의 역량을 측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 ‘social norms’라는 것은 ‘구성원들의 언행을 제어하는 상호간의 비공식적인 이해 혹은 약속’이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더라. 다시말해 ‘사회 구성원 다수가 볼때, 무었이 좋고 나쁜지 어떤 짓이 부끄러운지 아닌지를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하고 또 서로 지키게 하는 어떤 약속 혹은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 순위에서 1,2위를 차지하는 노르웨이와 뉴질랜드가, 이 항목에서도 각각 3위 1위에 랭크되어 있는데 반해서, 한국은 78위에 랭크되어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권위 있는 조사결과를 보자.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소위 말해서 선진국 36개 나라만 속해있는 OECD회원국 간의 행복도 조사 결과를 비교한 것이다. 한국도 여러 항목들에서 다른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함은 물론이려니와 어떤 항목에서는 톱을 달리기도 한다. 역시 검은색으로 표시된 ‘Community’라는 항목을 주의해서 보자. 위에서 본 ‘Social Capital’과 거의 동일한 항목이다. 뉴질랜드가 거의 톱을 달리는데 반해서 한국은 그야말로 ‘빵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Social norms’가 무었이라고 했던가? ‘사회 구성원 다수가 볼때, 무었이 좋고 나쁜지 어떤 짓이 부끄러운지 아닌지를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하고 또 서로 지키게 하는 어떤 약속 혹은 힘’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 ‘social norms’가 0점인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사회 구성원 다수가 무었이 좋고 나쁜지, 어떤 짓이 부끄러운지 아닌지를 모르거나 동의하지 않고, 또 나아가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이런 사회라면 그 구성원간에 유대나 지원이 가능할까?

헬조선? 자신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 이 모두가 그들 탓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남 탓하는 그 모습이 또한 헬조선의 반증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런 ‘강대국’을 만든 한국인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존경해 마지 않는다. ‘선진국’?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