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2

영어에 ‘dignity’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으로는 ‘존엄’ 정도로 번역되는 듯 한데 좀 부족한 느낌이다. 어떤 사전에는 ‘위엄, 존엄, 관록, 품위, 체면, 위신’ 이렇게 잔뜩 대응되는 단어들을 늘어 놓았던데 어쩌면 이것을 전부 다 합쳐도 실제로 dignity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렵지 싶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왜 이런 dignity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을까? 아프리카 스와힐리어에는 에스키모의 언어에서만큼 ‘눈'(snow)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들에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일까.

오바마여사의 자서전 전반을 통하여 내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dignity라고 하겠기에 서론이 좀 길었다. 무슨 어떤 dignity인지를 오바마여사의 자서전을 통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무었이 dignity가 아닌지를 오바마 대통령 부부를 이어 지금 그 크고 흰 집에 살고 있는 부부를 통해서 먼저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새로 영부인이 된 그 여자는 일찍부터 빼어난 몸을 밑천으로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아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돈이나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 즐기며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 소위 말해 궁합이 잘 맞는 부부라고나 할까. 이 여자가,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싼 옷을 입고, 한국여자가 신으면 키가 졸지에 2배로 커질 하이힐을 신고, 머리에는 FLOTUS (미국영부인) 라고 크게 쓰인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그 모습에 dignity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큰 집에 들어가기 이전에, 무었을 위해 그리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 왔고, 어떤 비젼과 희망을 지금 POTUS (미국대통령)가 된 배우자와 나누며 함께 이루려고 하는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 속에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들의 삶 속에 dignity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이런 사진들이 하이라이트인 삶을 (경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진 들일 수 있음) 살고 있을때, 오바마 여사는 시카고 외곽 흙수저 가정에서, 오직 부모의 헌신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고의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5대 로펌에서 그리고 시카고의 사회단체들과 시립병원등에서 일했었다. 한 인간이, 과거 한때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가지고 마치 인간은 결코 변치 않는 존재인양 폄하하거나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한쪽 길을 오래 걷게 되면 그 길과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좀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똥물속에 잠수를 너무 오래하고 나면 그 물이 장차 샘물로 바뀌고 나서도 이미 대가리 속에 든 똥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

오바마 여사는 그녀의 자서전, 지난 2주 동안에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한 (발매 첫 주에만 140만귄이 팔렸다고 한다) 그 책을 통하여, 미국영부인을 포함한 이 세상 누구에게도 dignity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개인적이고 은밀하며 어쩌면 치부로도 보일 수 있는 내면의 갈등과 인간적인 괴로움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과정등을 가감없이 솔찍하게 말하였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 놓듯이. 이것이 dignity요, 오직 평생을 통하여 진실하게 dignity가 있는 삶을 살아 왔던 그녀이기에 또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살’ (Bodhisattva)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을 터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이 시대를 사는 보살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녀의 dignity로써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FLOTUS로서 지혜와 용기 그리고 힘과 능력으로 미국을, 어쩌면 세상을 바꾼 그 큰 업적들 때문이기도 하다.

내 카르마를 따라 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시대의 보살은, 수 백년 전 혹은 수 천년 전 사람들이 그 당시의 지적 수준과 세계관으로 붓다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님긴 책들을 평생 붙들고 씨름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이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지 싶다. 바로 그녀처럼, 바로 이 시대 이 현실속에서, 지금 닥친 난관과 좌절을 극복하며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찾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 있지 않을까? 올해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과학자 혼조 다스쿠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네이쳐나 사이언스같은 세계적인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의 90%는 10년만 지나도 거짓말로 밝혀진다’면서 자신은, 기존의 이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연구를 계속하기 보다는 일일이 스스로 확인하여 납득할 수 있을 때에만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하물며 현대 인터넷 시대의 첨단 과학 이론들이 이지경인데, 천 년 혹은 이천 년 전 옛날 사람들이 그 당시 수준으로 써서 남긴 이론들은? 손기정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이 위대한 것은 그때 그 당시 최고의 기록으로 올림픽을 제패했었기 때문이지, 그분의 2시간 29분이라는 올림픽 기록이 절대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기록으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아마츄어 마라토너들은 지금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당시 그 상황에서 훌륭하셨다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이고 변치 않는 기록을 (진리를) 남기신 것을 액면 그대로 대대손손 기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미국인들에게 그녀는 ‘유인원’ ‘늘 성난 뇬’ ‘엉덩이가 산만한 뇬’뿐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그런 모욕과 좌절 그리고 차별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사는 소수들을 위하여 (여자라서, 백인이 아니라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태어난 곳이 후져서, 부모가 흙수저라서) 용기를 주고 빛을 밝히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와 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그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소수들을 대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그들이 아니면 자기 자신이 그 더럽고 힘든 일들을 직접해야 한다는 ‘게으름’, 그들과 나누면 내것이 줄어든다는 ‘욕심’, 우리 증조부가 탈출한 흑인노예 잡으러 다니던 보안관이었는데 내 딸이 어떻게 흑인과 (장차 영부인이 되건 말건 알게 뭐냐) 기숙사에서 한 방을 사용할 수가 있는가를 미려한 언어와 배우자의 힘으로 대학에 관철시켜 딸의 기숙사 방을 바꾸었던, 그 부모의 ‘무지와 증오’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 싶다.

자신이 살아온 그 작은 세계, 그 가정, 그 지역, 그 대학, 그 회사, 그 나라가 마치 우주의 유일한 중심이며, 원래부터 늘 그랬던 그 무었이라 믿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바마여사가 그녀의 자서전을 통하여 조용하고 품위있지만 힘있게 전달하려는 매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들 이전에 ‘눈'(snow)은 이미 늘 언제나 존재해 왔고, 세상에는 나의 이 작은 세계 (그리고 이 제한된 시간) 이외에도 수 없이 다양한 다른 세계들이 존재하며,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더 좋겠다’라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노력하자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직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의 발로 서고 괴로운 과정을 극복하여 성취를 이루어 본 그녀 같은 사람들만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위에, 타인들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을 함께 개선 하려는 사심없는 노력을 할 수 있지 싶다.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을 읽으며 인간의 참된 품위와 가치 그리고 dignity를 배우며 또 생각한다.

미셸 오바마 자서전 ‘Becoming’ 이야기 1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미셸 오바마 여사가, 최근에 출판한 자서전 ‘Becoming’을 읽고 있다. 읽으면서 생각도 많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블로그 옷을 새로 갈아 입혔는데, 이 멋진 사진들은 어디서 왔는가 혹시 합성 사진들인가 궁금해 할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그 대답을 영상으로 준비하였다.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다루어지는 ‘그 주제’를 내가 이야기 하는데에도 관련이 있다. 2개의 영상을 준비하였다. 한 10분 투자하면 좋은 구경도 하고, 사진들에 대한 궁금증도 풀리고 또 곧 올릴 블로그 글들에 대한 전이해도 좀 생기지 싶다.

E Ihowā Atua
O ngā iwi mātou rā
Āta whakarangona
Me aroha noa
Kia hua ko te pai
Kia tau tō atawhai
Manaakitia mai
Aotearoa

God of Nations at Thy feet
In the bonds of love we meet
Hear our voices, we entreat
God defend our free land.
Guard Pacific’s triple star
From the shafts of strife and war
Make her praises heard afar
God defend New Zealand.

Men of every creed and race
Gather here before Thy face
Asking Thee to bless this place
God defend our free land.
From dissension, envy, hate
And corruption guard our state
Make our country good and great
God defend New Zealand.

그렇다. 방금 그대들은 뉴질랜드 국가를 뜬금없이 두번이나 들었다 🙂 그리고 그 국가를 영어가 아닌 언어로 1절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어쩌면, 그 옛날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고 또 어머니은혜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경우, 처음 입대해서 힘든 기본군사훈련을 마치며 수료식에서 불렀던 애국가, 그리고 짓굳은 조교가, 비오는날 진흙탕 속에서 훈련을 마치는 끝에 일부러 부르게 했던 어머니은혜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경험을 공감하는 그대 조차도 좀 상상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은,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나라의 국가 1절을 이상한 언어로, 태어난 나라도 피부색도 모국어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다 함께 부르는 모습, 남의 나라 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몰래 훔치는 한 중년 남자, 그리고 미셸 오바마 여사의 자서전에서 그렇게도 충격적이고 상세하게 묘사된 소수인종으로 (마이너리티로) 산다는 것의 의미지 싶다.

한 손에 총을 든 이십대의 내가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애국가가 ‘내가 지킬 조국이여 영원하라’였었다면, 이제 한 손에 아내의 손을 잡고 중년의 내가 아이의 졸업식에서 부르는 이 남의 나라 국가는 ‘내게 평화로운 삶과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행복을 준 아름다운 나라여 감사하다’이기에, 나는 이 두 구절을 부를때면 늘 눈물이 난다. 위대하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거대한 희망 보다는, 오늘 하루 서로 다투지 말고 좀 잘 해주면서 지내자는 바로 이 작은 소망들이.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얼핏 보기에 어리버리하고 순박한 촌넘들 사이에 내가 섞여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의 유대로 우리가 만나고…
불화와 질투, 증오와 부패에서 우리를 지키고…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팬, 그대에게 미안하다.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배우고 알게 될수록, 쓰고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일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요, 장차 원래 계획했었던 것들을 포함하여, 더 낫고 좋은 원을 가지고 되돌아 올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나눌까 한다. 그대들에게는 어쩌면 처음 듣는 좀 놀라운 이야기 일수도 있고, 내게는 눈물 나는 이야기니 기대하시라 🙂

‘불교가 종교인가 철학인가?’ 하는 논쟁에 맞물려 자주 등장하는 것이, ‘붓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혹은 인간으로 왔었지만 신이 되었던 존재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신이었고 지금도 신으로 남아 있는 존재인가?’하는 질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어떤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가지를 먼저 밝힌다. 첫째는,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약 150년 전에 그리고 일본에서는 약 80년 전에 번역되어 누구나 구입해서 볼 수 있다. 많은 분량의 책들이기도 하고 또 독자가 한정적이니 책값이 좀 비싸다고 하더라. 한국에서는 약 20여년 전부터 훌륭한 분들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일한 문헌이 영어와 일어로 이미 번역이 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가 흔히 들어 이름이라도 익숙한, 무슨 x장경이니 y강경 z심경 등은 이 원본 불경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전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쓰던 후대의 지식층 인도인들이 ‘자체 제작’ 했던 것들을, 그 짜장면 원조국에서 천년 세월 자기네 문화와 언어에 녹여 ‘다시 제작’ 하여 우리들에게 전파했던 것들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처음에는,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으로 보고 혐오했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에게 어떤 사회문화적 혹은 종교인류학적인 이유들이 있어서,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이런 모습의 불교를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장차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아래에 적은 이야기는, 내가 존경하는 두분의 세계적인 불교 학자들의 저서에서 발췌하였다. 한 분은, 스리랑카 출신의 학자이자 스님이신 ‘왈폴라 라훌라’ (Walpola Rahula Thero)라는 분인데, 위에 언급한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과 그에 사용된 고대 언어에 정통했던 학자요 스님으로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이분 이전에는 승려가 영어권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참고로 ‘라훌라’라는 예쁜 이름은, 붓다께서 출가하시기 이전에 낳은 아들의 이름이다 (그럼 붓다께서 섹스를? 물론이쥐 🙂 부인 이름은? ‘야쇼다라’. 둘다 실존했던 사람들로서, 아빠와 남편의 길을 따라 해탈 열반을 성취 했다고 전해진다 – 훌륭한 전례가 있으니 나도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정생활에 힘쓰고 있다). 이 분께서 쓰신 ‘What The Buddha Taught’라는 책을 참조하였다. 아름다운 책이니 기회가 되면 읽어 보시라. 한국어 번역도 있을 것이다. 이분은 1997년에 90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두번째 분은,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라는 일본의 불교학자시다. 선생의 ‘아함경 이야기 – 지혜와 사랑의 말씀’ 이라는 한국어 번역서를 참조하였다. 매우 아름다운 책이니 이 또한 추천한다. 왜 아름답다는 표현을 되풀이해서 사용하는지,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좀 공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 불교는, 1800년대에 이미 학승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을 배우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문헌들을 일본어로 1930년대에 완역함으로써 ‘제2의 불교전래’ 라고도 할만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마스타니 후미오 선생은, 도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서 ‘일본종교학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이다. 아빠가 스님. 오잉? 🙂 이분의 저서 ‘아함경 이야기’는 붓다의 일생과 가르침을, 종교학자로서의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한 책으로써, 저자 본인께서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 그 부제에 많은 독자들이 동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1900년대 초에 출생하였으니 아마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그 당시의 기록들이 영어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붓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붓다께서 80세 고령에 이르러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돌아가시는 생생한 모습이 경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게 와닿은 세 개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첫째, 어떤 열렬 극성팬이, 아파서 돌아가시는 와중인데도 꼭 좀 만나서 말씀을 나누어 보고 싶다고 졸랐다. 하도 조르니 제자들이 어렵게 말씀을 드려 붓다께서 허락하셨고, 너무 아프고 돌아가시기 직전임에도 붓다께서는 이자의 장광설을 모두 들어 주시고, 이은 가르침으로 그를 깨닫게 하여 마지막 제자로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식중독을 일으킨 음식을 제공한 그자를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심히 비난함에도, 붓다께서는, 내게 처음으로 공양을 한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의 복을 빌었듯이, 내게 마지막 공양을 한 이 사람에게도 감사하며 또한 복을 빈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스승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나의 가르침에 관계 되어 확실하지 않거나 혹시 물어 볼 것이 있는가’ 물으셨다. ‘없습니다’ 라는 거듭된 대답에 마지막으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 ‘너희들이 혹시 스승이 아파서 죽어가는 마당에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질문할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혹시 원하거든 너희들 친구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 물어 보게 하거라’.


‘매일 먹고 싸야 살수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한계와, 매순간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인생의 본질’ 바로 이것들 위에 붓다의 가르침이 있고, 그 분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수행과 해탈을 통하여 증득한 ‘그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시면서 큰 가르침을 주시며 돌아가신 것이다.

가식 없고 진실한 가르침을 주신 붓다의 말씀은, 그 돌아가시던 장면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원본 불경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가, 혹시 미안한 마음에 돈 더 달라고 말 못하겠거든, 옆집 돌쇠한테 부탁해서 좀 더 달라고 대신 말하게 해도 된단다’. 고통속에서 돌아가시는 마당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면, 흡사 남겨 두고 떠나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미 아비의 마음과 같이 한없이 큰 사랑과 자비가 느껴진다. 하물며 가식이나 욕심 권위 혹은 우월감이 어디에 있을손가! 신? 나이키 아디다스 말인가?

비록 몸에서는 대소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위대한 정신과 자비의 마음은 조금의 흐트짐도 없이 오히려 이런 극도의 고통과 최악의 상황에서 그 빛과 아름다움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다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으며, 오직 수행 정진으로 매일 매순간 스스로를 닦아 살아서도 그리고 죽을때도 빛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똥오줌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것이 우리를 더럽히고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오물들이야말로 참으로 더럽고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인 줄을 그대와 내가 깨달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닦아 낼 수 있도록 형편이 되는데로 부지런히 걸레를 빨아대며 우물가를 들락날락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분의 위대함은, 무슨 뜬구름 잡는 도술이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신비함, 혹은 주인 자리 빼앗아 아랫목 차지한 그 난해한 경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와 나, 오늘 마음이 아프고 몸이 괴로운, 이것 저것 닥치는데로 잡아 먹고는 쪼글쪼글한 구멍으로 한 두 덩어리 똥을 밀어 내고서는 또 다시 쪼르르 달려가 같은 짓을 반복하며 한 평생을 살다가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삶의 본질을 참으로 이해 하시고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갈 수 있는 훌륭한 지혜와 방법들을 우리들 같이 눈멀고 귀먼 똥대가리들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상세히 가르쳐 주시는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마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