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뇬과 라오스넘, 깨달음과 습관

직원중에 라오스계 넘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아마 어렸을때 와서 자란 듯하다. 볼때마다, 내게는, 더럽고 게으르며 어글리한 느낌을 준다. 팀원 중에서 가장 능력이 떨어지지만 최소한의 일 이외는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늘 헤헤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큰 소리로 낸다. 그넘 참… 사무실에서 손톱을 깍으며, 신발을 벗고 왔다 갔다 한다 (자기 이외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짓들을 하면서 자각하지 못한다는 뜻). 그 부모의 영향이며 또 그 부모를 길러준 그 나라의 영향일 것이다.

직원중에 스위스계 뇬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났던지 아주 어릴때 와서 자랐던지. 건데 생김새도 언행도 이곳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 있다. 팔등신 미녀에 똑똑하며 일을 딱 부러지게 한다. 회사 근처 공원에서 가끔 점심시간에 홀로 운동하는 모습을 본다. 그뇬 참… 이뇬은 신발을 벗는데서 한 수 더 떠서 아예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물론 이뇬 이외에 그 누구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 이 방면에 본좌다.

그 넘을 볼때는 ‘후진국’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고, 이 뇬을 볼때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생각이 떠오른다. 그 옛날 만화속에서 어쩌면 맨발로 잔디위를 뛰어 다녔을 그 예쁜 하이디가.


내가 일하는 이 대학에는,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을 위한 학사학위 특별 과정이 있다. 교육대학을 마쳤거나 졸업반인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이 이곳에서 1년 과정을 마치면서 TESOL 영어교육학사 학위를 받는 협력과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출퇴근때 그 건물을 자주 지나니, 소위 말해서 ‘대가리에 보자기 쓴’ 인도네시아 여학생들을 많이 보게 된다. 25년전 그 건물에서 잠시 영어를 배울때, 같은 코스를 공부하던 터키인인가 그 근처 나라에서 왔던 무슬램 여자, 보자기 쓴 그 여자가 전혀 건방지지 않은 태도로 ‘당신들이 이슬람 종교를 모르며 일생을 산다는 것이 나는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좋은 의사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대가리에는…

‘다문화 고부열전’이라는 EBS방송의 연재 도큐맨터리를 본 적이 있나?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많은 외국 문화와 그 결과물인 외국인 아내들이, 한국의 문화와 만나서 부딪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인간 삶의 어떤 진실 혹은 가치를 보여주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였다. 모든 문화는 (개인들은) 상대적이며 그 환경의 소산이고, 한국문화 (한국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문득 우리들 자신이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속에서 혹은 알 필요가 없다는 교만속에서 사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무언가 흔들리지 않는 것들,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나는 살아 왔다. 세상에 그런것들이 정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꽤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있다. 무지와 어리석음이 있는 곳에, 그 바탕위에서는, 흔들리지 않거나 바뀌지 않는 것들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다문화 고부열전’을 통하여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또 소위 후진국에서 자랐지만, 나의 수준이나 내공을 월등히 능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처했었던 어떤 상황보다 열악하고 힘든 여건속에서, 내가 해낼 능력이 없고 또 깜양이 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좋은 태도로 힘껏 해내는 그 사람들을 보고 나서, 나는 더 이상 ‘후진국’이니 ‘대가리에 보자기 쓴 뇬들’이니 하는 말들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깨달음을 잠시 맛보았다고 해서, 내가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을 며느리로 삼고 싶거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흡사 그 ‘다문화 고부열전’의 모든 결말이 이해와 화해로 끝은 나지만, 그것이 앞으로 갈등없고 행복하기만한 고부관계나 가족생활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머리로 부터 오는 것이요, 습관은 오랜 삶 속에서 굳어져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때문이다. 습관이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자명하듯, 깨닫음이 저절로 습관을 바꾸지 못하는 것 또한 자명하다.

깨달음은 다만 첫번째 문을 여는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첫번째 문조차도 열지 못한채 흘러 간다. 하지만 첫번째 문 뒤에 첩첩히 닫힌 문들이 습관 혹은 카르마라는 빗장을 걸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 빗장들을 풀며 그 첩첩히 닫힌 문들을 열기 위해서는, 그 머리로 깨달은 바가 가슴으로 흘러 내려가 내 몸의 새로운 습관이 되고 새로운 카르마가 되어야만 한다. 이 과정은, 친구의 급사에 크게 충격받은 배불뚝이 중년이, 새다리처럼 가는 팔로 턱걸이 20개를 목표로 철봉에 매달리는 그 손바닥 찢어지는 고통의 과정이며,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첫 몇 킬로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헉헉 억지로 뛰기 시작하는 그 물리적인 과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10% 덴트의 법칙’ 이라고 내가 명명한 법칙이 있다. 오래 지속된 습관 카르마를 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이 과거에 지속되었던 기간의 10분의 1 기간이라도 최소한 시도를 해야 덴트(dent) 즉 ‘이빨이라도 약간 먹힌다’는 법칙이다. 운동 안한지 얼마나 되었나? 보자기 쓴 뇬들이라고 싸잡아 무시하며 산지는? 20년? 그러면 최소한 2년은 노력을 해야 이빨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 내 일천한 경험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전에는 잠시 반짝한다고 까불다가 훅간다.

팀 미팅을 하면, 뒤쪽에 서 있는 내 눈에 그넘의 검은 양말이 흘낏 보인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앉아 있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맨발을 본다. 그리고 소리없이 웃는다. 내 습관 내 카르마를 생각하면서.

타클라마칸 –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그 인연

오랜만이다. 시간도 많았고 생각도 있었지만 쓰기가 어려웠다. 한 수 가르치려는 내용, 비난하는 내용, 그리고 나 잘났네 하는 내용, 이 세가지를 빼고 나니 쓸것이 없더라.

타클라마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두 바닥 인생이, 각자의 인연속에서 살아 오다가 우연히 엮이게 되고, 어떤 결말을 맺게 되는데, 그 결말이 각자가 지나온 삶에서 지은 인연이 결국은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조용히 그러나 잔인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한때 건설업쪽에서 잘 나갔었지만 부도를 냈고, 배우자로부터 멸시와 냉담 속에서 이혼을 당했고, 십대초반의 아들이 하나 있으며 (엄마와 살지만 아빠를 좋아 한다) 노모와 둘이 산다. 노모가 싸주는 도시락과 보온병을 가지고, 봉고차를 몰며 고물을 사서 (혹은 때때로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어쩌면 괜찮은 대학을 나왔을 것이다.

그 여자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좋다. 네일아트를 하고 싶어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다리의 한 계단도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비슷한 수준의 여자를 (나이 많은 거리의 통기타 노래꾼 – 현실을 회피하는 사람) 우연히 만나서 동성애로 발전하며 함께 잠시 낭만을 나누기도 하지만, 현실의 무게를 견딜 방법이 없어,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다가 장차 몸을 팔게 된다. 그 첫번째 그리고 생의 마지막 손님이 바로 그 남자.

늘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우연의 장난으로, 초보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화대를 주지 않고 도망쳤던 그 남자를 (아침에 잠든 그 여자를 보며 돈을 손에 들고 망설이다가, 돈을 기다리는 가족 생각에 도망을 쳤다만, 돈이 있었더라면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처럼 황량하고 우울한 곳에서 조우하였다. 각자의 과거, 그 가난과 우울의 시간속에서 쌓여온, 좌절과 배신의 기억들 그래서 이제는 악만 남은 두 사람의 마음이, 바로 그 곳 그 시간 그 인연속에서 부딛친다. 결국은 두 사람 다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살인.

우리 삶의 인연도, 그 실타래가, 단 두개의 실마리만 존재하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닥의 실타래가 얽키고 설키어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인연을 만들며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을때에도, 설령 잘 보지 못하고 즉시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여러 차례 다양한 실마리를 보게 되고 수 차례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었더라면, 평소에 술마시고 운전대 잡는 버릇을 들이지 않았었더라면, 그날 한잔으로 중지했었더라면, 그때 잘난체 우기지 말고 대리운전을 불렀었더라면, 그때 너무 늦게 마치지 않아서 좀 돌아가는 한적한 길을 선택했었더라면, 내일 해야 할 산더미 같은 회사일을 떠올리며 그때 과속하지 않았었더라면… 무단횡단 하던 그 사람을 치어 죽이지 않고, 어쩌면 서로에게 욕이나 퍼붙고는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 갔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끔찍한 인연으로 엮이게 된다. 그 수차례의 기회들을, 그 실마리들을, 쌍방 모두, 하나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다가, 결국은 그 인연의 결과를 크게 후회하면서 깨닫게 된다. 하지만 너무 늦다.

짧게 보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필연이고, 짧은 시간에는 우연의 역할이 커 보이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만 인연이었지만,

그 남자가 만약 부도가 나지 않았었더라면?
이돈철 회장도 ‘운7기3’ 이라던 사업이 자기만 열심히 한다고 다 성공하나. 그리고 돈은 악연을 더 많이 만들 가능성이 크다, 어떤 곳 어떤 사람들에게는. 따라서 이를 통해서 그 인연의 끝에 다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은 10%.

그 남자가 만약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런 장소에서 그런식으로 어울릴 친구들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그런 상황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이 오기전에 맨정신으로 기회를 하나라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50%.

그 남자와 아내가 만약 금실이 좋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였다면?
마지막 기회, 즉 그 여자의 극한 비난을 듣고 있던 그 남자가 손에 든 헤머를 위로 들어 올릴지 (살인) 혹은 아래로 내려 놓을지를 (사과나 도망) 결정지은 것은, 어쩌면 그에게 아무런 희망도 갈곳도 의지할 곳도 없다는 절망감이었으리라. 만일 집에 따뜻한 저녁을 해 놓고 그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마지막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70%.

그 남자가 만약 그런 어리석고 질 나쁜 친구들과 엮이지 않았었더라면?
좋지 않은 곳을 들락거릴 기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그런 상황에 빠진다고 하여도, 거짓말로 함께 가짜 사장노릇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녀와 조우했을때 그런 최악의 모욕적인 비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헤머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거짓말로 가짜 사장노릇을 했기에 반대 급부로 받은 극단적인 모욕이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그냥 별 볼일 없는 바닥인생이라는 것을 서로 속이지 않고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면 어쩌면 하나 정도의 기회는 잡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30%.

그 남자가 만약 아내와 금실도 좋고, 술도 전혀 마시지 않고,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부도가 났지만 열심히 하루하루 일하면서 살았었더라면?
그런 인연에 처음부터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런 상황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마지막에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전무. 이들 모두의 조합으로 그 인연과 그 결과를 피했을 가능성 90% 이상.

그 여자가 만약 현실을 참아 견디며 미래를 위해서 투자했었더라면? 현실이 억울하고 답답하고 암울하지만, 그래도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네일아트에 투자 하고 노력을 했었더라면? 아마도 노래방 도우미 노릇은 하지 않았지 싶고 또 나아가 몸을 팔지도 않았지 싶다. 소위 흙수저의 현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 한국 수준이 밥 굶고 기본 생활비를 벌지 못해서 몸을 팔아야 하는 사회는 아니지 않는가? 이로인해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80%.

그 여자에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 비록 레즈비언 파트너라 하더라도 그래서 ‘미래’와 ‘희망’을 진심으로 나눌 사람이 있었더라면?
몸을 팔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피했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그런 인연에 그 남자와 엮이게 되었더라도, 극단적인 모욕을 퍼부어, 모든 기회를 쌍방에게서 빼았고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60%.

그 여자가 만약 ‘남들 다하는데 나는 왜 못해?’ 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억울해 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남들 보기에 이게 무슨꼴?’ 이렇게 남들을 신경 쓰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노래방 도우미나 혹은 몸을 팔지 않으면서도 생존하고 또 생활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다리 위로 올라갈 생각 혹은 올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아득함도 절망감도 슬픔도 적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좋은 네일아티스트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인연을 피했을 가능성 70%.

그 여자가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완벽한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그 영화 속에서 그 여자는 (그리고 사실상 그 남자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인연의 끝에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젊은날,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현실속에서 비록 상대적으로 좋은 외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지와 무명속에서 그저 본능에 따라 눈에 뜨이는데로 큰 무리를 쫓아 다니다가 늙게 되면, 타클라마칸 사막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질 그 인연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외부적인 조건으로 궁극적인 인연과보를 바꿀 가능성 10%.

그대는 어떤 괴로움을 안고 살고 있나?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이 블로그를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들이라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 아닐까? 주로 가까운 사람들?

인연의 실타래, 여러개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 낸 그대의 현재 삶. 다양한 모습의 다수의 실마리가 존재하건만, 어쩌면 그대는 밖을 보느라 혹은 남들을 탓하느라 너무 바빠서,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그 중 단 하나의 실마리도 붙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대의 종착역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될 (위구르어로 ‘되돌아 나올 수 없다’는 뜻) 가능성이 크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되건 얼마나 좋은 옷을 걸치고 가건 간에, 그 사막에는 홀로 간다. 그리고 나올 수 없다.

안을 보자. 지난 날에는 오직 생존과 발전을 위해 정열과 노력을 쏟았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쌓아온 그 인연의 실타래를 보는데에, 그리고 실마리를 찾고 붙잡아 푸는데에 정열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지 않겠는가?

어떤 일이 일어나면 혹은 어떤 관계로 부터 괴로움을 당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지난 날 알게 모르게 만들었던 인연에 의해서 왔고 또 생겨난 것이다. 바로 지금, 과거의 인연을 일시에 바꾸어 현재의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또 미래의 괴로움을 막을 방법이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어떤 속임수로도 피할 수 없다.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돈도 속임수도 필요 없고 또 다행히 상당히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방법이다. 이미 예를 들면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있거든, 지난 블로그 글들을 읽어보면 더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도 나도, 행복의 길을 찾고 또 그 길을 걷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