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바꾸는 법

궁금하지요? 나도 궁금합니다. 바꿀 수 있을까요?

1. 지천명 혹은 주제파악 (스승)
2. 적선
3. 명상 (기도)
4. 독서
5. 풍수 (명당)

옛날부터 구전되는 5가지 팔자 바꾸는 법입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풍수 혹은 명당’은 조상의 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심신이 평온하게 살면 팔자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겠네요. 다섯가지 모두 맞는 말씀 같군요.

지난번에, 붓다께서는 그분이 깨달은 ‘세상이 돌아가는 Dhamma’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이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당신과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This is the way it is.’ 우리 이것 잘 기억하면서 계속 읽어 봐요. 참,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쓰는 글은 오늘 달리는 중에 깨달은 것이예요. 읽고 나거든, 과연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두뇌를 해치며 달리기를 하는지 각자 판단해 봐요 🙂

대학전산팀에 직원도 적지 않고 또 전체 교직원은 몇 천명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뛰어 갔다 온 그 풍력발전기가 있는 작은 산에는, 교직원은 커녕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거의 없어요. 조건은 같지 않나요? 그곳의 위치, 대학의 근무 여건, 날씨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고.

오늘 그곳에서 달리면서, 같은 조건을 현재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었보다도 먼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가 설령 (우연히) 같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만으로는 동일한 결과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가 현실과 딱 부딪치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뜻이예요).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현재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경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예요. 그 사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경험을 어떤 강도로 해보았는가, 즉 경험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 그 사람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아름다운 날씨에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곳에 오늘 한 번 뛰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점심시간에 뛰어 올라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왜냐하면, 그것과 관련한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조건은 같지만 원하지도 않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담배 끊는 이야기를 해봐요. 어떤 흡연자는 끊을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그러면 다만 흡연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더불어 사는 것 뿐이지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많은 흡연자는 아마도 담배를 끊고 싶어 할꺼예요. 그리고 ‘자유의지’로 결정은 하지만 (스스로 원하고 마음은 먹지만) 대부분은 며칠 혹은 몇주 이내에 실패해요. 왜냐하면 담배를 끊는다는 어떤 행위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끊게 되지요.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인 그 ‘총체적 경험’이 담배를 끊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양과 질에서 임계점을 돌파했기 때문에 담배를 결국은 끊게 되지 싶어요. 금연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무었이 생겨 났나요? 금연에 대한 ‘총체적 경험’ 그 양과 질이 늘어난 것이지요. 우리 이것 잘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총제적 경험’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거나 늘일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 내가 산에서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삶은 담배를 끊는 그런 종류의 행동 혹은 시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고, 또 나아가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찾아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버켓리스트를 만들어) 죽기전에 ‘일등석 타고 북구에 가서 오로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들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단지 그렇게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다고 또 뭐가 달라지나요? 그런 일회성이고 간헐적인 ‘경험을 위한 경험’은, 의미있는 ‘총체적 경험’으로 쌓이지 않으며, 따라서 인생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었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경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들을 허락해서, 내 ‘총체적 경험’의 양과 질을 늘이게 할까요? ‘총체적 경험’의 주인은 우습게도, (두뇌가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쓰는 습관’ ‘마음을 쓰는 습관’ ‘무었을 하는 습관’ 그리고 ‘무었을 하지 않는 습관’ 바로 이 습관들이 결국은 그대와 나의 ‘총제적 경험’을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렇게 모여진 유의미한 총체적 경험이, 당신과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오늘 실현하게 허락하는 것이지요.

중3때 담임이셨던 키작고 눈매 무섭던 선생님은 자주 몽둥이를 드셨어요. 목재소에서 맞춤 주문한 사랑의 매. 늘 교탁 아래 잘 준비 되어 있었어요.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일들이 있을때면, 나를 포함한 급우들은 늘 그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드려 맞곤했어요. 허벅지 같은데를 그런 굵은 몽둥이로 수차례 맞으면 피멍이 크게 드는데, 한번은 부모님도 보셨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을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데요. 참 잘했어요 🙂 그런 폭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쳤는가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 주제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었어요. 급우들은 모두 떠들썩하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에서 왁짜지껄 소란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모두들 내려와서 강당으로 가라고 한두번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학급 전체에 말했어요. 우리는 그래도 계속 떠들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 왔어요. 그리고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다행히 오늘은 몽둥이는 없었지만) 우리 급우들 모두에게 차가운 복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기를 시켰어요. 이제 한두시간 후면 졸업할 제자들인데요… 그때 나는 고작 열댓살 먹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지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의 매를 드시다가 이제 스스로 변하고 말았구나. 이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줄담배 때문에 일찌기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시작되었던 그 몽둥이를 상습적으로 드는 ‘습관’이 선생님의 ‘총체적 경험’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게 되었었던 것 같아요.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선생님의 ‘자유의지’는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습관이 만든 총체적 경험의 종이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 그날 선생님도 댁에 가셔서, 늘 피우시던 독한 한산도인가 하는 담배를 태우시며 자신에 대한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웠지만 존경했던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무지하게 얻어 맞았던 허벅지도 대가리도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은혜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니 요점 정리를 해야겠지요? 먼저, 붓다께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삶의 조건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요.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좌지우지 (결정)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이 만드는, 바로 이 ‘자유의지가 우리 자신의 팔자를 바꾼다’고 나는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결정론을 아주 반대하셨던 (이건 내가 알아요) 붓다께서도, 아마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으로 짐작해요. 차차 더 알아보고 확인해서 이야기 할께요.

누군가를 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산길에서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비슷해야겠지요. 동료 직원이든지 근처 동네에 살던지. 나이도 이십대 🙂 그리고 그 사람도 달리기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습관이 있어야 하고, 그 오랜 습관의 결과로 나와 비슷한 ‘총체적 경험’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느 아름다운 겨울 오후에 그 사람과 나는 그 산길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요…

달리기 하고 싶어졌어요? 팔자 바꿀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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