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본능, 무식 그리고 한잔 더

나이가 들면서, 인간이 만들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들은 하물며 종교까지도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는 뗏목이며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이 우연히 타게 된 배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우연히 가지게 된 종교가 그 사람일 수는 없다. 인간이 종교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배에서 우연히 만난 승객들끼리 치고 박는 것이 그 배의 탓이 아님과 같다.

늘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었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때때로 ‘이것이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자문해야 한다. 만취하여 배우자를 줘패는 넘이 순간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내게 도움이 되며 내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참으로 자문할 수 있다면 그 넘을 결국은 달라지게 된다. 인간이 종교를 이유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어떤 형태로건 싸우고 다툴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상대방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끊임없이 자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종교가 실패하고 종교가 다투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실천한답시고 언행하는 인간이 실패하는 것이 마치 종교가 실패하고 다투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이 실패하는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둘 다 우리 모두가 극복하고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것들이다. 첫째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본능과 감정들 때문이다. 숫사자들끼리 암컷들을 차지하기 위해서 벌이는 싸움 그리고 때로 맺는 숫사자끼리의 동맹은, 인간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힘과 지능을 가지고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서로 치고 박는 것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인간의 본능은 인간이 종교를 참으로 (주로 개인 차원에서) 실천하는 최대의 걸림돌이 된다. 때때로 이러한 본능을 콘트롤 하거나 혹은 제압 (?) 하는 것이 마치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듯 보이기까지 하다. 둘째는 무식 때문이다.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나는 ‘무지’는 정말 모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내가 미분적분이나 스웨덴어를 모르는 것은 무지한 것이다. 화성의 표면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인간을 되돌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내가 (기회가 아직 없어서) 무지한 것이다. 무지는 도움이 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집단을 이루어) 직접적인 해를 크게 끼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무식’은 시대나 상황에 걸맞는 인간의 도리 혹은 길을 모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때 모른다는 의미는 대부분 ‘듣고 보아서 머리로는 아는데 무슨 이유로던지 내게 register가 되지 않으니 (당연히 결과적으로) 몸과 마음이 그곳으로 향하지 않으며 또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분적분을 잘 알아도, 스웨덴어를 배워서 잘 구사해도, 화성의 표면을 보았어도, 공룡의 화석과 그 과학적 발견을 보고 배웠어도 ‘더 이상 스스로 하는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이 무식의 한 예가 아닐까 싶다. 집단 차원에서 집단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경우가 꽤 있다.

이 두가지 즉 인간의 본능과 무식이 종교와 결합하면 그야말로 가관이 된다. 우연히 한배를 탄 넘들끼리 (개인 차원에서) 치고박음은 물론이려니와 주변에 있는 다른 배에까지 기어올라 그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집단 차원에서) 동참하기까지 한다. 이미 말했듯이 이런 인간의 본능과 무식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며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아무리 가방끈이 길어도 지갑이 터져도 미모가 출중해도 또 큰 모자를 써도 전혀 예외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이 본능이 더 추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무식이 더 해로운 꼴로 구현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회사로 오가는 언덕길에 매우 고급 주택가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즐비하며 성공한 (주로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2주에 한번 재활용 병들을 시청에서 마련한 박스에 담아 집앞의 길가에 내놓는데 뚜껑이 없으니 오가며 지나는 길에 자연스레 박스 안이 보이게 된다. 그 큰 박스에 집집마다 한결같이 쌓아 놓은 온갖 술병들을 보면서 (대부분 비싼 와인병이나 고급 술병들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생을 생각하며 씁쓰레 웃게 된다. 나도 한때 그 만큼 비싼 술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정말 남부럽지 않게 (?) 마셨었다. 와인 특히 화이트 와인이 세계적인 나라에 사는데 그리고 아주 좋은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쩌겠나. 그 정도 크기의 박스에 와인병과 각종 술병들이 그득히 차는 것은 잠깐이다. 맥주병들은 애교라고나 할까. 산소같다는 뇬도 리처드 기알도 딜라이 라말도 그 누구도 그렇게 레드 와인을 들어 부으면 아침에 피똥 비슷한 색깔의 시커면 설사를 줄줄하게 된다. 무슨 와인과 특히 잘 어울린다고 품위있게 함께 드셧던 (아마도 블루) 치즈도 뜨뜻한 뱃속에서 발효가 되어서 그런지 그야말로 모진 (?) 향내를 풍기면서 같이 나온다. 누가 예외일 수 있겠는가?

아침에 밑을 씻고 낮에 술이 깨면 저녁에 다시 반복 그리고 다음 날이 또 오고… 그렇게 술병은 쌓여가고 인생은 흘러가는데 본능과 무식은 늘 그자리…

사는 것이 이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