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 그리고 인생무상

한국을 떠나와 이곳에서 산지도 이제 무척 오래 되었다. 물과 공기처럼 일상에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다가, 친구들이나 인터넷 매체등을 통하여 ‘한국’이라는 실체를 가끔 부닥치게 되면 새롭고 몹시 놀랄때가 있다. 특히 겉으로 쉽게 드러나며 변화하는 한국어를 통하여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수십년 만에 만난 친구가 서스럼없이 사용하던 ‘소확행’이라는 새로 만들어진 단어도 놀라웠지만, 예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단어, 예를들면 개를 ‘댕댕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을 보면서, 문득 만년설이나 빙하에 갖혀있던 맘모스가 깨어난 느낌이랄까(?) 혹은 혹성탈출 한참 후에 지구로 되돌아온 듯한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며 움직이는 지구를 인간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사는 것과 유사한가?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를 포함한 인간세상 그 모든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직접 체감하니, 이민와서 사는 어려움에 상응하는 어떤 철학적인 고찰의 기회를 홀로 누리는듯 기분이 좋기도 하다.

인터넷으로 본 신문에, 어떤 젊은이가 쓴 서울대 대학원 석사 논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이야 나와 관계가 없지만, 문득 그 논문 속에 사용된 어떤 단어에 눈길이 닿았다. 내가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한국어, 새로운 조어 ‘존버’라는 말이 논문에 사용되어 신문에 버젓이 나와 있었다. ‘소확행’과 마찬가지로, ‘존버’도 ‘존나게 버틴다’는 말의 첫짜를 따서 만든 신조어라고 한다. 젊은 세대들이 별생각없이 마치 옛날부터 존재하던 한국어의 일부인듯 꺼리낌없이 사용하는 이 ‘존나게’라는 말은, 조금만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즉시 알아차릴, 남자의 ‘성기가 튀어 나온’ 상태를 지칭하는 비속어, 욕이다. ‘너무 힘이 들거나 고생을 하다보니 마치 성기가 저절로 빠져 버린 듯하다’라는 뜻이라고 굳이 내가 설명해야겠니 🙂

하지만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에 따르면, 그런 상태에서는 그것이 반대로 쪼그라 들거나 안으로 들어가지 밖으로 돌출되지는 않는 듯 하던데… 고 김근태 선생. 지독한 고문의 결과로, 짐승으로 전락후 폭력 앞에 완전히 항복을 하고 그에 뒤따른 악마의 그림자 같은 자기파괴와 혐오를 불사조처럼 딛고 일어선 그 위대한 인간께서 진솔하게 해주신 말씀에 따르면, 그때 그 고문하던 나쁜넘들이, 나체상태로 물고문을 당하며 처절하게 망가진 자신의 모습 특히 쪼그라든 성기를 놀리면서 ‘민주화운동 하는 넘들은 성기 크기가 그것 밖에는 되지 않는가’ 놀렸다더만.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들이 옳고그름을 극렬히 따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며 또한 시대와 환경의 소산인 상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말년에 고문의 휴유증이 거의 확실한 파킨슨병등을 앓으시다가 64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그분에게, 말그대로 그분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위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는 분명한 사실을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새삼 밝혀 드리고 싶다. 파킨슨병에 걸리신 것도 모르고, 저분 국회의원 되시더니 목에 너무 힘을 주고 뻣뻣해졌다고 경솔히 생각했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며, 김근태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베풀어 준 소수는 목숨을 바쳤지만, 받은 다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고 그 흔적조차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요 또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한다. 인생무상이다.

다시 ‘존버’로 돌아와서. 우리세대 정도면 누구나 사용했었을 숫자 10혹은 18이 들어간 욕은, 그 10 이라는 한글 글짜의 기원이 여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 욕이라는 것을 나도 최근에 알았다. 물론 그 단어 자체가 비속어, 욕인줄이야 일찌기 알았었고 한때 즐겨 사용했었었지만 🙂 영어에도 유사한 것들이 있다. 당신도 들어보았을 그 F-word. 이곳에서도 일상에서 흔히 듣는다.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또 들을 수도 없다. 우리가 그 10자 들어가는 욕을 사무실에서 거의 하지 않듯이. 하지만 영어 단어에 fricking이라는 것이 있는데 가끔 들린다. 누구나 이말이 그 쌍욕을 애둘러 표현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서 쓰고 또 듣는다. 그리고 철자를 살짝 바꾼 fcuking이라는 단어도 있다. 모두들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데 보기에는 (기술적으로는) 그 쌍욕은 아니니 약간 이상하지만 애교로 봐주는 정도.

어쨋던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대학에서 출판된 석사논문에 ‘존버’같은 단어가, 옆에 친절한 해석까지 (‘매우 버틴다’는 뜻이라고 해석이 붙어 있더라) 달고서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서, 그 젊은이의 경솔함도 문제지만, 그 논문을 지도하고 승인한 교수는 도대체 어떤 자인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서울대학교 교수 정도 되려면 나이가 좀 있어야 할테고 그렇다면 이런 말을 척 보는 순간에 알아채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세상에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도 없고 또 언어나 문화를 포함하여 인간이 만들어 내거나 인간 주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도 변치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런 계기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니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을 밖에서 바라보고 또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참으로 대단한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속에서 각자각자 구성원들이 무슨생각을 어떻게 하면서 어떻게 살건 간에, 밖에서 오랜 시간 바라보면, 그 구성원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가 찍어낸 붕어빵과 다를바가 없는 언행을 하면서, 주어진 어떤 범위안에서, 자신은 개성있다는 일종의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우연히 두개의 매우 다른 붕어빵 기계를 거치면서 어쩌면 나쁘게 말하자면 좀 기형적이고 좋게 말하자면 좀 혜안 비슷한 것이 약간 생기지 않았나 싶다. 한 인간은, 평범하지 않은 방법과 노력 혹은 어떤 큰 우연에 의해서 이런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지 않고서는, 군집을 이루어 사는 한마리 개미나 한마리 벌과 궁극적으로 별반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다가 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면 무었이 달라질까? 글쎄 먹고 자고 싸는 일상이 뭐 달라질까만.

오늘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자신이 수년간 저질렀던 성추행 사실이 드러날 상황에, 스스로 쌓아 올렸던 어떤 상이 (이미지) 치명적으로 망가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상황을 영원히 피하는 일종의 선택을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실체가 없는 그 어떤 상을 (이미지) 가지고서 비서와 다른 사람들을 성추행 했었겠지. 그 여자들이 얼마나 배우고 똑똑한 여자들인데, 지나가는 ‘아무’ 중년 남자가 엉덩이를 슬쩍 스치기만 해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사람들이 수년을 침묵하며 괴로워 했었다더만. 그리고 또한 실체가 없는 자신이 만든 상을 (이미지) 지키느라 결국은 목숨을 바친 꼴이 아닌가. 그래서 지켜졌나? 그 상이 실체도 없지만 또 드러난 것을 보고서만 말하자면 어떤 것이었었던가? 아무런 상도 (이미지) 없는 보통 잡넘들은 지나가는 여자 엉덩이 만지고서 경찰서 잡혀가 혼나고 감옥에 간다고 쪽팔려서 미리 자살하지는 않지 않나?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상으로 (이미지) 세상을 (잘)살다가 바로 그 상에 의해 살해 당한 꼴이다. 그 자의 성추행을 고발했던 여성은 도리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지나 않으려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당신의 고발이 그자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자가 스스로 저질렀던 나쁜 짓과 그자 스스로 쌓아 올렸던 실체가 없는 상이 그자를 죽인 것이라니까.

오거돈이나 안희정이니 하는 사람들이 같은 패턴으로 정치 커리어나 인생을 종치는 것을 보면서, 그넘들 마누라들은 새대가리들인가 혹은 친구들은 전부 잡넘들인가 왜 어찌 한사람도 ‘젊은 여비서 혹은 이혼녀 여비서를 가까이 두며 출장 등을 함께 다니다가 잘못하면 ‘존’ 🙂 되니 남자나 할머니 비서로 당장 바꾸라’고 강력하게 강권하지 못했었던가 의아하다. 비서하려는 남자나 할머니가 아무도 없나? 한국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그 지랄하다가 종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전에는 호주 최고 대학교의 어떤 학장이 직원 여교수에게 음란문자등을 지속적으로 보내며 성추행을 하다가 (처음에는 서로 좋다고 같이 지랄을 하다가 나중에 여자가 그만하라는데도 계속하다가) 결국은 물러났다는 기사가 났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박사들이고 (여자는 무슨 심리학박사였던가 우하하하) 남자는 아카데믹세계 밖에서도 센넘들과 어울리던 명망있던(?) 늙은이였다. 유통기간이 지나 잘 작동도 되지 않는 ‘존’을 가지고 왜 그 지랄들인지 나로서는 정말 궁금하고 또 일종의 자괴감도 든다. 내 ‘존’만 유독이 유통기간이 지났나 싶어서 🙂

일전에 잘 모르면서 괜히 아는체 언급했었던 Five Aggregates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과 한번 나눠볼 희망으로 지금 티라다모스님의 설명을 십회 이상 듣고 있다 (1시간 정도 분량의 설법). 왜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분 설명 거의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Five Aggregates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고 해탈을 하고 열반을 성취한다고 five aggregates가 그 사람에게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명백하게 그것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고 또 종노릇 하지도 않는다.’ 위에서 ‘붕어빵 기계의 실체를 참으로 보고 느끼고 알아채면 무었이 달라질까?’ 했던 것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무상이다. 아무것도, 붕어빵도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이야기도, 영원하고 변치않는 것은 없다. 박원순도 안희정도 그 호주 학장도 또 성도착증 클린턴도 (그 유명한 아내에게 백악관에서 책으로 맞아서 코피를 질질 흘리고 또 쫒겨나서 서재에서 몇달씩 잤다더만) 결국은 그 어떤 것도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러하므로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중요한 이야기는 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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