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냐 스르럭뽕이냐? 첫번째 이야기

불교나 붓다는 몰라도 ‘윤회’는 들어 봤을테고 또 궁금하지?

옛날에 전쟁터에도 먹을 것 가지고 와서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더라.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고, 큰 수요가 있고 돈벌이가 되는 곳에 공급 과잉이 있기 마련이며, 그런 상황이 되면 불법과 사기가 또한 판치게 되는 것이 인간사 아닌가? 한 번 보고는 다시 안 볼 손님들에게 어떻게 음식을 팔까? 사려는 상대방이, 자신이 사려는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 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파는 장사꾼이 이미 알고 있다면 얼마나 정직한 거래를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윤회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 하고 있는지 머리가 돌 지경이더라. 좀 배우면 배운대로, 무식한 자는 무식한대로, 사기꾼들은 사기꾼들대로. 그들의 말을 하나 하나 따지며 들어 보다가는 그야말로 내가 몇 생을 윤회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겠다 싶어서 중지 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존경하고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고승 몇 분의 설명을 되풀이 하여 들어 보았다. 아래는 내가 현재까지 얻은 결론이다. 더 배우고 알게 되면 향상할 소지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해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붓다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본인도 결코 하지 않으셨던 것이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모르는 것을 짐작으로 말하거나 혹은 아는체 하는 것’이었다. 붓다께서는 ‘오직 자신이 직접 경험할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만 말씀하셨고 가르치셨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예들 들자면 우주의 크기나 끝 그런 질문들에는 침묵하셨고, 또 때로는 먼저 몸에 박힌 화살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2,600전에 살았던 붓다께서도 물리적 생리적 역사적 제약을 받는 인간이셨기에, 지금은 우리에게 상식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던, 예를들어 세균감염 의한 전염병이나 지구 달 태양의 자전 공전등에 대해서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매우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 누군가 그것을 물었었다면, 그리고 만약 붓다께서 대답을 주셨다면, 지금 우리가 들어도 틀리지 않을 대답을 하셨을 것이다. 물론 ‘모른다’라는 대답을 포함해서. 모른다라는 대답은 결코 틀린 대답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할 시간에 밭갈고 수행하라’고 좋게 말씀하셨다면 이것도 또한 틀린 대답이 아닐뿐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리고 지금은 더욱) 매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대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얏나무 (자두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참외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슨뜻인지 알겠지? 만약 내가 정말 잘 아는 분이 우연히 그러다가 과수원 주인에게 오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나 같으면 일단은 사실에 근거해서, 나는 이런 저런 사람이고 이분을 잘 아는데 아무것도 훔치는 분이 아니고 이전에 그런적도 없었다. 이분은 자두 엘러지가 있어서 자두를 먹으면 큰 병이 나는 것을 본인도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분은 상당한 부자이다. 이런 근거로 볼때 이분이 당신의 자두나무에서 자두를 몰래 땃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상에는 온갖 사람들도 많으니 어떤 자는 ‘비데오 분석 결과, 손의 각도나 갓의 위치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자두를 의도적으로 따고서 감추는 정황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자는 ‘그 사람의 엘러지는 어떤 타입인가? 그 엘러지가 실제로 그 훔치려던 종의 자두에서도 발견된 기록이 있는가?’ 이런 말을 하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자는 ‘결코 알 수 없다. 아마 본인도 모를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이 어디 있나’ 이런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싶다. 첫째는 시야가 좁고 세상을 협소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 심한 경우요, 둘째는 무언가를 그럴싸하게 말함으로써 어떤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우가 되겠다. 그 과수원 주인에게 이런 이유들이 없었다면 내 설명을 듣고나서, ‘아! 그래요. 알겠네. 이만 가보게.’ 하지 않았을까? 이게 사람의 상식이고 이런 대화들이 보통인 곳이 살기 좋은 곳이다. 붓다께서 궁극적으로 가르치려고 하셨던 지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른 훌륭한 수행을 한다고 내가 상당한 근거로 말할 수 있는 고승들께서 말씀하셨다. 붓다께서 의미하셨던 윤회는 ‘rebirth’ 이지 ‘reincarnation’ 이 아니라고. 왠 영어? 그분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분이거나 혹은 제3의 언어를 영어로 번역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말로는? 붓다께서 가르치신 혹은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개념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현재 없다. ‘윤회’는 중국어이며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뜻이 아니다. 왕서방이 제멋대로 지어내고 떠들어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소위 유식한 사람들이 얼씨구나 얻어다가 퍼트린 것이다. 왜? 이미 두가지 이유를 말했다.

이런 한국말 못 들어 봤지 ‘스르럭뽕’ 그리고 ‘사부작쏭’? 내가 방금 만들어 낸 ‘rebirth’ 와 ‘reincarnation’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최초의 순수 우리말이다 🙂 ‘윤회=사부작쏭=reincarnation’ 은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당신이 흔히 들었던 바로 그것인데, 내 생각에 그런것 없고 또 붓다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틀린 것을 내가 왜 굳이 설명하리오?

그러면 ‘스르럭뽕=rebirth’ 는 도대체 무었인가? 그 영어 단어 자체를 따지기 보다는 그 불교적 의미를, 우리가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그 질문의 (그 단어 ‘윤회’ 지금부터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틀 혹은 context안에서 알아보자.

지구상의 물은 전체로 보면, 줄지도 늘지도 사라지지도 또 새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방금 내가 마신 물 안에 우리 1000대 조상께서 마셨던 물이 들어 있겠나? 있다. 내가 30년 전에 쉬했던 것은? 그것도 극미량이겠지만 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뒷뜰에 묻어주고 너희들이 좋아하는 과일나무를 그 위에 심어달라고 유언하셨다고 치자. 그래서 가족들이 울면서 유언대로 사과나무를 10그루 심었다고 치자. 장차 그 사과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면, 할아버지 화장해서 묻었던 그 어떤 일부가 극미량이라도 사과에 들어 있지 않겠나? 그렇겠지. 할아버지께서 좀 맛있는 사과의 일부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다시 태어나셨다고 말할 수도 있겠나? 굳이 말하자면 꼭 틀린 말은 아니겠지? 할아버지 대소변도 사라지지 않고 그 전체 물 속에 아직 있다면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드셨던 물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어떤 형태로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그때 드셨던 그 물도 그 당시 새로 생겨난 물이 아니었었다.

감이 오나? ‘돌고 돈다’는 말이다. 이것이 물질의 ‘rebirth’ 가 되겠다. 이런 저런 물질들이 어떤 시간에 모여서 어떤 것으로 존재하다가, 그 생명을 다하면 다시 분해되어 장차 다른 시간 다른 어떤 것으로 다시 나타나고… 이런 과정이 ‘거의’ 영원히 지속되는 것. 그래서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 보면서,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너 안에 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 헛말이 아닌 것이다 🙂 사람도 이 물질 ‘rebirth’ 일부며 예외가 아니다.

이제 두번째, 비물질적인 ‘rebirth’. ‘비물질적인’이라는 말대신에 ‘정신적인’ 이라고도 쓸 수가 있었겠지만 혹시 오류가 있을까봐 굳이 그렇게 썼으니 이해하라. 돌쇠는 혈기 왕성한 20살인데, 지나가는 예쁜 여자 뒷모습을 보면 늘 음란한 생각에 사로 잡히곤 했었다. 얼마전 아랫마을 먹쇠가 우물가에서 꽃비씨 손을 잡고 입을 맞추려 하다가 붙들려서 오지게 박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는, 보통 들던 그 음란한 생각에 이어서 ‘조심해야지 함부로 굴다가 인생 막장으로 간다. 빨리 좋은 여자 찾아서 결혼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의 돌쇠와 들은 이후의 돌쇠는 같은 사람이지만 또한 같은 사람이 아니다. 돌쇠가 ‘rebirth’ 했단 말이다.

매일 회식에 접대에 술을 달고 사는 박과장이 어떤 계기로 ‘이러다가 내 명대로 못살겠다. 죽기전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최소한 ‘술에 대한 박과장의 의식 혹은 생각’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박과장이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이다. ‘스스럭뽕’한 것이다. ‘Rebirth’ 즉 새로 태어났다. 박과장이 그날 이후에 헬스장 회원권을 끊고 열심히 운동도 하며 업무상 술도 먹다가, 차차 직급도 올라가고 또 생각도 많이 변하면서 술과 멀어지게 되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건강한 심신의 소유자가 되면 그것도 ‘rebirth’ 하지만 좀 더 큰 ‘rebirth’가 되겠지. 이 큰 ‘rebirth’는 다시 유사한 종류의 ‘rebirth’ 를 잉태하고 또 삶에서 구현할 계기가 되겠지. ‘Rebirth’.

내가 존경한다는 그 고승들이 어떻게 오늘날 그런 고승들이 되셨을까? 박과장이 거치고 있는 바로 그 ‘rebirth’의 과정을, 어떤 특정 목표 혹은 특정 대상을 향해서 오랜 기간 꾸준히 시도하고 실천하신, 그 ‘rebirth’의 과정으로 오늘 그런 고승들이 되신 것이다. 그 분들은 이 ‘rebirth’의 과정이 멈췄나? 그 분들 중의 한 분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전에 보았는데, 자신도 예외 없이 지금도 ‘rebirth’의 과정에 있다고 하시더라.

오늘은 이만.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