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넘이 어두운 골목에서 강도짓을 목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뒷머리를 벽돌로 내려쳤다고 하자. 그런데 맞은 사람이 격투기 선수였거나 강력계 형사였던 바람에 곧바로 반격을 당해서 강도짓을 하려던 그넘이 오히려 코뼈가 부러지고 떡실신 되어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자. 단지 위협해서 돈을 빼았으려 했던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뒷머리를 벽돌로 가격한 경우’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넘이 퇴원하고 나서 나중에 ‘폭력은 나쁘고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이렇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복잡해지는데, 만약에 당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그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그 강도의 하수인으로 골목 끝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당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였었다면, 폭력은 나쁘고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며 ‘평화’를 외치는, 그 강도넘의 자식 손주들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눈치챗지? 일본과 한국의 과거사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사는 그대와 내게 끼치고 있는 영향을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카르마와 그 엄청난 에너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히로시마 핵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늘 ‘평화’를 기리고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즐겨 찾는다던 이곳의 아름다운 그 식물원, 그곳 한켠에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평화’의 불꽃과 히로시마에서 가져온 기념석이 있다. 오래전, 아름답게 단장된 이구역에 우연히 발을 들였다가 플라그에 (설명판) 씌여진 ‘히로시마’ ‘평화’ 이런 내용을 보고서 마음에 파장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그래도 들어보기라도 해본 사람들이니, ‘perception은 육감의 경험에서 비롯되나, 설령 그 경험이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사람마다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서 상이한 perception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내가 하는 이야기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대와 내가 ‘해탈을 증득하고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지, 어떤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책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를 강하게 표현하거나 혹은 그것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전서울대교수 이영훈선생과 다른 다섯분의 학자들이 쓴 책이다. 이영훈선생 말씀처럼, 여태껏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출판된 적이 역사상 없었다. 또한 이토록 충격적으로 우리모두를 발가벗기는 책도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리고 팩트에 근거하여 직설적으로 하는 책도 없었다. 물론 이분이 알려주는 사실을 넘어, 이분의 주장을 100%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개인이 해탈 열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또 괴로움을 참으며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껍질을 깨고 나와서 병아리가 되고 또 장차 훨훨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할 수 없고 미룰 수도 없다. ‘이런 책을 왜 썼어요?’라는 질문에, 이영훈선생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가 크게 망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하였다.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