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세번째 이야기

이전 글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은 ‘out of proportion’이라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이영훈선생은 ‘반일 종족주의’ 책에서 한국인 위안부의 숫자가 3,600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했어요. 그대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서 살해된 베트남 양민의 숫자는 9,000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어요.

우리가 위안부문제와 징용문제를 국내외적으로 아주 큰 이슈로 만들고 또 일본정부에 지속적으로 완전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요구할때, 그와 ‘동시에’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큰 잘못에도 완전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우리 국력수준 국가수준에 맞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국제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우리가 존중 받으며, 우리가 하는 말에 힘이 생기고 또 우리의 요구가 정당하고 떳떳한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어요? 스스로의 언행이 앞뒤가 맞지 않고 또 그것을 세상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존중 받을 수 없으며, 하는 말에 힘이 실릴 수 없으며 또 그 요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지 않겠어요? 다만 때쓰고 어거지를 쓰는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게 되지 싶네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라들 사이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베트남전쟁시 벌어진 양민학살에 대한)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국민정서는,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고 또 그들로부터 받아 내고자 하는 것들과 큰 차이가 있어 보여요. ‘전쟁통에 민간인이 죽을 수도 있다. 그들이 베트콩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어디 있는가. 다른나라는 그런 짓 안했나. 이미 반세기도 지난일을 가지고 뭘 그렇게 따지자는 것인가’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여요. 베트남전쟁 보다도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이고 또 사람을 학살한 것도 아닌 이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은 그동안 여러차례 성의를 보이고 노력을 했어요. 수차례에 걸쳐 정부(최고) 차원의 사과와 금전적 보상이 직간접적으로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 속이 후련하지 않고 또 진정성이 부족해 보인다고요? 그러면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는 왜 그들에게 후련하고 진정성 있는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단지 돈이 아깝거나 사과의 말을 할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 이면에 매우 복잡한 국내외의 이슈들이 묻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국민 대다수는 오래 묻혀 있던 부끄러운 과거사를 끄집어 내고 파헤치기를 바라지 않겠지요. 우리 선대 아버지들 삼촌들이 했던 짓이잖아요. 일본은 다를까요?

정상적으로 살려면 그리고 좀 잘 살려면 앞뒤가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은 물론이지만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소리를 내고 더 힘으로 밀어부치기 전에, 과연 무었이 지금 우리들에게 좀 더 앞뒤가 맞는 것인지 생각하면 좋지 싶어요.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베트남 여러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 중에서 비교적 알려진 2곳에 씌어 있는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아래에 옮겼어요.


“디엔즈엉은 예전에 강과 바다가 있던 곳으로, 신성한 이곳에서 락과 홍의 자손이 호앙선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땅을 열고 500년 전 나라를 세웠다. 사람들은 하미, 하깡, 하방, 하록, 지아록 등 마을을 세웠고, 이곳은 예로부터 평화롭게 살면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땅이었다.

먹구름과 천둥, 번개가 치고 적이 마구 몰려와 평탄한 땅에 파도를 일으키고 마을 사람을 한데 모아 마을을 버리게 하고 고향을 버리게 했다. 칼로 끊는 듯 내장이 찢기는 아픔으로 주민들은 땅을 잃고 강을 잃고 바다를 잃고 농사일을 잃고 낚시일을 잃었다. 악독하고 끔찍하여라. 떨어진 목에서 흐르는 피, 경악으로 야자수 숲은 마른 머리카락이 떨어지듯 흩날리고 강은 휘어져 돌고 눈물은 고여서 늪이 되고 만이 된다. 거기에는 단두대가 있었고 교회는 갑자기 잿더미가 되었고 하지아 숲은 마른 뼈들로 흰색이 되었고 케롱 해변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스무 넷째 날 청룡부대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흉포하게도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였다. 하미 마을은 30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는 산산이 흩어지고 태워졌다. 그 지역은 붉은 피로 덮였고 모래는 뼈와 섞이고 집들은 사람과 함께 불태워졌다. 탄 고기와 비린 피를 탐하는 개미들, 화염이 지나간 후 더욱 짙어진 어둠을 생각한다.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가 툇마루에 머리를 떨구고 쓰러져 있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 있겠는가. 아이들이 신음하고 시체가 서로 포개져 쌓여 있다. 아직도 죽은 사람의 피가 말라서 고여 있고 아이는 엄마 배 위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을 찾는다. 어린아이는 입을 다쳐서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다. 더 처참한 것은 그 후에 탱크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악마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지 위의 메마른 뼈, 무고한 영혼의 외침이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진다.

하늘은 어두울 때도 밝을 때도 있는 법. 지난 25년간 고향은 평화롭게 다시 세워지고 디엔즈엉 땅은 다시 비옥해지고 감자와 쌀이 잘 자라고 강의 물색도 좋아져 물고기와 새우도 많다. 당이 갈 길을 인도하여 거친 땅을 개간하였다. 과거 전쟁터의 아픔도 줄었다. 이 깊은 상처를 남긴 그때의 한국인은 지금 찾아와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용서 위에 비석을 세우고 고향 발전을 위한 인도적 협력의 길을 열고 있다. 모래와 소나무는 하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향불은 저세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함이다. 천 년의 흰 구름은 마을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한다.”

2000년 8월 디엔즈엉 당, 정부, 주민

출처 참고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우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출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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