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부장 개부장 x2

혹시 ‘자체발광 오피스’라는 티비 드라마를 본적이 있나? 최근 블로그에서도 짧게 언급했었다. 인생과 인간을 아주 잘 묘사하고 또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많은 생각과 토론의 소재를 제공하는 ‘훌륭한 책’과 같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서 수상한 신예 작가 정회현님의 주옥과 같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수준의, 한국판 인생철학 대사들도 참 훌륭하고. 두고두고 다시 보며 되씹고 있다. 여기 나오는 ‘박부장=개부장’ 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성도 직급도 또 하는 짓도 똑 같은 자와 오래전 잠시 직장 생활을 했었던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내가 이곳에 오기전 모국에서 만났던 실존인물 ‘박부장=개부장’은 이 드라마에 나오는 박부장과 그의 상사 한 본부장을 합친 x2 라고 할 수 있겠다. 궁금하거든 드라마 한 번 보던지 🙂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드라마에 그런 캐랙터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런 종들이 매우 흔하던지 (계속 번식 중?) 아니면 모국의 직장 환경에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자가 어떤 자였던지는 이 드라마에서 매우 잘 묘사되고 있으니 내가 길게 언급 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한 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소개 하면서 내가 발견한 ‘인간의 진면목’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강제적인 야근에 시달리는 부하직원들을 매일 밤 찾아와서 족치는데 용이한, 회사 바로 앞 아파트에 살던 ‘박부장=개부장 x2’ 이 한번은 부서원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무슨 생일이나 그런 날이었겠지.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그 별로 유쾌하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때우려고 하고 있었는데, 마침 책꽂이에 꽃혀 있던 잡지책 (출간한지 오래된 학생잡지 그리고 같은 달 치의 잡지가 두어권 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내 눈길을 끌었었겠지) 한 권을 빼서 흩어 보다가 이자가 신입시절, 입시를 앞둔 후배 고교생 독자들을 위해 기고했던 글을 발견하였다.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는 교훈적인 내용에 덧붙여 자신이 어떻게 공학쪽으로 진로를 결정했으며 그 결과 의미있고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인생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이런 이야기들을 진실하게 나눌 의지와 능력이 이자에게도 있단 말인가? 내가 매우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수 십년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지 않겠지.

빛과 어두움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뒤섞여 공존하는 것이다. 개부장들에게도 당신에게도 또한 내게도. 하지만 흡사 우리가 은하수를 이야기 하고 또 어떤 중요한 가치를 생각할 수는 있으되, 그 은하수에 결코 말로써 다다를 수 없고 또 그 가치가 생각만으로는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그 빛 또한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오늘 바로 이순간, 어떤 식으로든지 의식적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그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하류인생 그리고 악인들도 어떤 죄책감이나 선악의 느낌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선택에 영향을 끼칠만한 힘과 기운이 없으니 그저 짧게 왔다가 쉽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리라. 그들에게는, 빛이 이론적으로는 존재하되 실제로는 그들의 삶 속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영향력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점심시간에 신나게 산에서 달리기를 하고 사무실로 되돌아 오는 길에 종종 비만한 사람들을 지나친다. 나는 늘, 누구나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나처럼 이런 시간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지나칠때 나는 늘 두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이 사람에게 현재의 어두움이 너무나 짙어서 (고도비만) 그것을 빛으로 몰아 내기가 (감량을 하고 체력을 길러 결국 산을 뛰게 되는 그 과정이) 너무나 힘이 들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이런 고도비만이 내게도 어떤 다른 면에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다. 이 사람의 어두움은 눈에 뜨이고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어떤 어두움은 잘 보이지 않아 더욱 빛으로 몰아내기가 힘이 들지도 모른다.

어두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면 빛으로 몰아 낼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교묘한 과정을 통하여 어떤 어두움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때로는 남들에게) 정당화시킬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모르게 늘 추구하며 산다. 그래서 책을 읽고 산을 오르고 여행을 하며 자주 자신을, 먼 거리에서 홀로 조용히 되돌아 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어두움과 그것을 위장하고 정당화하는 그 뿌리 깊은 메카니즘을 보아야, 빛으로 그것들을 몰아 낼 가능성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만한 사람치고 운동 좋아하는 사람없고 또 아마도 운동을 좋아하지 않으니 비만하게 되었듯이, 어두운 사람치고 빛 좋아하는 사람없고 또 빛을 추구하지 않으니 어둡게 된 것이다. 어떤 순간이 지나면, 이론적으로는 아직도 가능하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어두움을 몰아낼 가능성이 사라진다. 내가 스쳐 지나갔던 그 뚱뚱이들 중에서 몇 명을, 장차 언젠가 내가 산에서 마주치게 될 것인가?

내가 이곳으로 떠나기 위해 사직하고 작별하던 그 날, 나는 다른 상사 동료들을 찾아 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자가 나를 불렀다. 동물적인 감각이 있으니 알아 챗겠지. 내게 묻더라. ‘나는 너를 이곳에 채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또 한때 너의 상사였는데’ (왜 인사하러 오지 않느냐?) 내가 정확히 어떤 대답을 했었던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자의 반응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한 두 마디 하는 순간 딱 안색을 바꾸더니, 알았으니 가보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때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아마 표정과 눈빛으로 분명하게 말했었으리라. ‘당신이 받을 감사와 상은, 당신 스스로 항상 넘치게 당신 자신에게 주었지 않느냐. 내가 더 줄 무었이 있다고 달라는 것이냐?’. 지금은 후회한다. 그저 통속적인 감사의 말을 한 두마디 던지고 걸어 나왔으면 더 이상의 기억도 또 이런 글도 없었을 것을. 하지만 인간은, 그 연속극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잘 묘사하고 있듯이, 모든 관계와 이벤트 에피소드를 통해 생각하고 배우고 또 성장한다. 죽는 순간까지.

나와 잠시 인연이 있었던 그 ‘박부장=개부장 x2’ 지금은 인생의 산을 즐겁게 사뿐사뿐 뛰어 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더 큰 어두움 속에 같혀 신음하는 중늙은이가 되어 있을까? 전자이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때 고마웠고 또 미안했었다는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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