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에 관한 가르침 – 두번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같이 화를 내면서 ‘저런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다 감옥에 쳐넣어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메타’는 훈련을 통해 증득되고 또 발전합니다. 이 과정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싫다 이런 것이 싫다’ 하는 생각을 반복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나’ ‘자신’이라는 의식을 점점 강화하는 가운데 나이가 들면 당연히 짜증 많이 내는 고약한 성격의 늙은이가 되겠지요.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메타’를 수행을 통해 개발하고 증득한다면, 자신과 관계 맺음 혹은 자신을 규정함에 있어서 큰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물론 쉽게 그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메타’를 어떻게 규정할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쪽으로 기울어 세상만사 모두가 오케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꼬치꼬지 따져며 아무것도 오케이가 아니라고 해서는 곤란하겠지요. 현실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들이 엄연히 섞여서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얼마나 기술적으로 그것들과 관계를 잘 맺는가 하는 것입니다. 뉴스를 듣고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소식에,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나쁘며 멍멍이 같은 일이라고 흥분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그런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광분을 하니 어떻게 심신에 병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응징이나 보복의 욕구 같은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기 보다는 용서나 연민의 감정을 앞세운다면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메타’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어떤 이상적이고 고귀한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이것은 틀리고 저것은 나쁘고 이것은 싫고 저것은 이래야하고 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어, 장차 더 높은 차원의 ‘메타’ 수행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인정하는 (receive everything) 단계입니다. 나는 인정한다 (receive) 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accept) 필요도 없고 또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세상 모든것들이 훌륭하며 사랑스러울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실제하는 나쁜면들과 악한면들을 (그 존재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렵고 힘들게 살게 되겠지요. 화를 내거나 반발하고 분개하며 점점 무의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됨.


최근에 쓴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두번째 이야기’ 이야기 말미에 몇장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는데요, 그중에서 ‘일본 대림사입구에 설치된, 안중근의사와 치바도이치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라고 씌어 있어요.’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었어요. 그 추모비에 치바도이치선생은 ‘정애의 지사’라고 씌어 있어요. 우리가 ‘애정’이라고 할때 사용하는 그 한자들이지 싶은데요, 여러가지 정황을 볼때 어쩌면 그 의미가 ‘메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언급하며 확대한 추모비 사진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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