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발표된, 덴마크의 대표적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A Fortunate Man’은 카르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과응보라고 약간 다르게 표현하기도 하는 ‘인연과보’가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영향) 이 영화의 커다란 주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인연과보로 말미암아, 두 주인공의 삶이 한때 아름다운 사랑으로 맺어졌다가, 또한 인연과보로 말미암아 떨어지게 된 후에, 두 사람의 삶이 전개되고 또 익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주인공 페르는, 성직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장차 당연히 성직자가 되어야 할 운명을 거부하고, 고향을 떠나 수도 코펜하겐의 한 대학으로 토목공학을 배우러 떠납니다.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아버지와 충돌하며 성장한 아들이, 이제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러 집을 떠나는 것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또한 페르는 자신에게, 어릴때부터 그런 숙명을 강요해왔던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증오하며, 결국은 빰을 얻어 맞고서 집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건만, 평범한 엄마로서 그리고 한 성직자의 아내로서 평생을 살아온 엄마는, 이런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기는 벅찹니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약간의 먹을 것을 뒤따라 가서 전해주며 엄마도 아들과 작별 합니다. 한 세기전 덴마크는, 지금처럼 부유한 선진국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가난과 침울한 분위기가 페르네 가족을 감싸고 있습니다.
페르는 우연히 토목공학을 배우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고향 유틀란드의 습지를, 토목공학의 기술로 개발하여 쓸모있는 농지로 개간하고 또한 장차 산업화 시대에 꼭 필요할 에너지를, 풍력이나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생산 덴마크 전체에 공급할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르는 노력하는 천재입니다. 가난한 대학생으로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버린 음식이나 줏어 먹지만 그는 언젠가 그의 꿈을 이루게 될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의 용기도 있고, 꾀도 그리고 매력도 있는 페르는, 덴마크의 매우 부유한 은행가겸 투자가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 유태인 집안은 돈도 많을 뿐 아니라,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미리 알아보고 적절한 투자를 해서 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보려는 대단한 사업가들이기도 합니다. 돈 많은 동료 사업가들을 모아 컨소시움을 만들어 페르의 거대한 구상을 실제로 실현하게 도와줄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두 딸이 있어요. 먼저 쾌활한 동생이 페르의 능력과 인간됨을 한 눈에 알아보고 구애를 합니다. 페르는 이렇게 아름다운 부잣집 딸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믿기 어렵고, 또 다른 사람들이 좀 쑤군거리듯이,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채 떨어진 것 같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니 야코버는 이지적이고 생각이 깊은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돈 많은 뚱땡이 유태인 이혼남과 혼인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 뚱땡이의 귀여운 두 딸이 너무 가여워서요. 이렇게 착한 야코버입니다. 차차 페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요. 페르도 야코버의 큰 heart와 생각의 깊이에 놀라고 또 존경하게 되요.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부잣집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페르.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데요. 돈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야망을 이룰 기회. 이 모든 것들이 손아귀에 잡힐 듯 합니다. 그야말로 행운의 페르입니다. 덴마크어 ‘Lykke’는 ‘행운’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행복’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과연 페르가 이 행운을 가지고 행복을 만들수 있을까요?
야코버의 삼촌뻘 되는 사람이, 집안의 큰 투자에 야코버 아버지와 더불어 깊이 관여합니다. 이 삼촌은 좀 세상을 관조하는 철학자 같은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페르에게 ‘행운은 좀 어리버리한 사람에게 철썩 달라 붙는다’ 비슷한 뜻의 말을 합니다. 악의적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페르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 되고 말아요.
야코버는, 소위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guilt feeling’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쨋던 그녀는 유태인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우연히 차지하게 된 (가족의) 부유함과 그녀 자신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누리며 괜스래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는 결국에는 그녀의 ‘행운’을, 그녀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만드는데에 ‘사용’합니다. 흡사 냇물을 건너지 못하는 여인을 별 생각없이 덥썩 업어서 건너주고서는 제 갈길을 가는 ‘해탈한 대인배’ 승려의 멋진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그녀를 건너주고 제 갈길을 가는 그 순간에 그녀를 잊었어요. 야코버 같습니다. 그 승려와 동행한 두번째 승려, 그녀를 업어서 건너주지도 못했고 또 그렇게 건너주었던 동료 승려의 행동을 가지고 오랫 동안 마음의 갈등을 하는 사람. 페르 같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정말 순수하고 또 아름답습니다. 흡사 나와 아내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
멋진 페르와 아름다운 야코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사람은? 청바지는 뭐임매? 감독 Bille August입니다. 영화촬영의 실제 장면들을 기념으로 남겨두었네요.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