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연기 자욱한 노름판

불과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한국은 인구의 다수가 농사를 지어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농업국이었다. 태국이나 베트남처럼 이모작 삼모작을 할 수 있는 기후여건이 되지 못하니,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나면 소위 농한기라는 것이 몇 달간 지속되었다. 너무 추워서 아무런 농사일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나마 조금 남은 것을 가지고 근근히 넘기던 그 기간에, 우리 선대들께서는 군불 땐 뜨거운 방에 모여 앉아서 화투등 노름을 하시며 소일하는 경우도 많았다더라.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하지. 그런데 술 자주 많이 마셔 봤나?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는, 장난이 아닌 상황으로 급변한다. 지난 여름내내 힘들게 농사지어, 가족들과 먹으려고 모아 놓았던 그 곡식, 내년에 모심기 할때 쓸려고 남겨 두었던 종자 할것없이 모조리 노름판에 판돈으로 걸게 된다. 그 다음은 집문서 논문서 그런 순서로. 그 담배 연기 자욱했던 노름판, 며칠씩 자지도 먹지도 않고 시뻘건 눈으로 밤을 세던 그 열기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면, 남은것은 훨씬 더 춥고 긴 겨울. 몇몇 아비들은 죄책감과 후회에 떡이 되도록 빚술을 마시고는 왼손 검지 손가락을 낫으로 잘랐단다. 다시는 화투장을 그 손가락으로 쪼이지 못하게. 지옥이 따로 없다. 그리고 그때 또 대를 잇는 비극들이 얼마나 많이 잉태되었을까…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니, 지금 고층 아파트에서 살며, 쌀은 동네 슈퍼에서 생산되는 줄 알며 사는 우리들의 DNA에 아직 남아 있을껄 🙂

그 왼손 검지 짤랐던 아비들, 손가락이 아물때 쯤이면 다시 농한기가 찾아오고, 그 아비들 대부분은 왼손 ‘중지’로 화투장을 쪼이고 앉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고. 아마 왼손목을 자른 사람들도 있었다지. 그러면 나중에는 왼팔을 왼쪽 가슴에 붙여서 화투장을 쪼이며 노름을 했다더만… 그렇게 그 사람들은 괴로움의 바다를 헤매다가 죽고 또 그들 때문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던 부인들과 가족들도 다 죽고 또 뿔뿔이 흩어졌겠지. 암진단을 받도 나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이 50%가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일전에 신문에 좋은 글 쓰는 분이,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아마 음주와 관련된 암)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싶어해서, 결국은 서로 평화를 찾고 (술사다 드리고) 좋다고 웃는 얼굴 보고서 나중에 임종을 했다고 쓴 글도 읽었다. 나 역시 이런면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을 한다.

아주 많이 도를 닦은 승려나 다른 종교인들을, 만약에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노름하던 그 담배 연기 자욱한 방, 그 상황, 그 입장에 처하게 만든다면 그들은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 생각에는 아니올시다. 맛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거나 하는 짓이 좀 덜 극단적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그들과 똑같은 언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었일까? 소위 말하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었일까? 아무 소용 없지 않은가 결국 똑 같은 짓을 하게 된다면?

최근에 니르바나 이야기를 하면서, 붓다께서도 강조하셨고 또 스스로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실천 하셨던 것처럼, 매일 매순간 그렇게 수행을 하는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어쩌면 니르바나의 또 다른 본질이 아닐까 말했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수행이란 그리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알고 깨달아, 담배연기 자욱한 노름판에 앉아 있는 자신을 장차 발견하지 않도록, 미리 매순간 깨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마 ‘뻥치기 좋아하는 왕서방과 남의 이야기 좋아하는 김서방’이 만나서 만들어 낸 엉터리 이야기들이지 싶은데, 인간의 생물학적 물리적 정신적 한계를 무슨 신비한 능력을 얻어서 극복한 어떤 상상속의 모습을 마치 수행의 이상 (혹은 도인의 진면목) 처럼 그려낸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많지 않았던가? 어쩌면 좀 스토리는 달라졌고 더 세련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아직도 주변에 그런 황당무계한 발상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내가 잘 알고 존경하는 스님들 그리고 성직자들 중에서, 돈을 쫓는 (명예 등을 포함한 ‘세상의 가치’라는 의미) 분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중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를 솔찍하고 적나라하게 (적절한 이유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드러내지 않는 분도 없었다. 신비한 능력? 인간이 무르익고 성숙해진 결과로,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어떤 저의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과 기꺼이 공존하게 된 이것이야말로 신비한 능력 아닌가?

‘섹스엔시티’라는 시트콤이 (연재드라마) 있었는데 나도 옛날에 가끔 보았다. 뉴욕에 사는 돈많고 예쁜뇬들의 허리띠 아래 잡담을 소재로 하는 코매디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는데, 사만다라는 여자가 (약간 덜 평범한 섹스를 좋아하던 케랙터?) 어떤 나이 많은 남자와 사귀게 된 상황이었다. 사만다는 이 남자의 중후한 멋 그리고 원숙한 매력에 이끌려, 자기보다 나이가 두배 혹은 그 이상이 되는 남자와 섹스를 원하게 되었다. 아마 이 부유한 늙은이의 크고 화려한 침실이었겠지. 이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화장실로 걸어가는 뒷 모습을 사만다가 우연히 보게 된 거라. 그 중후하고 원숙한 매력과 대비되는 쭈글쭈글하고 축 쳐진 늙은 영감의 엉덩이를. 그 순간 사만다의 환상은 깨지고 급격하게(?) 정신을 차린 사만다는, 그 남자가 아직 화장실에 있는 틈을 타서 그 방을 몰래 빠져나와 줄행랑을 쳤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섹스는 무슨 🙂

아! 나이가 들면 스큇을 해서 엉덩이를 최대한 빵빵하게… 그런 개 풀 뜯어 먹는 이야기가 아니라, 방금 말했던 ‘인간의 생물학적 물리적 정신적 한계를’ 알고 깨닫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 위에서 (환상이 아닌) 현실의 집을 지어야 자신도 주변도 모두들 행복하리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붓다께서 가르치시는 잘 사는 길, 행복을 찾는 길, 그리고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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