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점점 어렵다

‘회색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 보건데 참으로 지당하고 또 훌륭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상대나 상황을, 경멸하거나 혐오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마음속에서 지레 포기하는 의사도 가지지 않으면서, 다만 기대치를 내리는 것이 그 열쇄가 아닌가 싶다. 이것, 일단 되기 시작하면 잘 되고 또 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 까지는 상당히 어렵고 때로 절망적이라고 까지 느끼지 않겠나 싶다.

글쓰기가 점점 어렵다. 굳은 신념을 (?) 가지고 큰소리로 떠들며 사람들과 상황을 나무랬던 (?) 지난날의 시간들이 때때로 그립기 조차하다. 부끄러운 내용의 글들이지만 일부러 내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인생의 어떤 시기 이후부터는, 심신의 변화와 여러가지 겪은바로 말미암아, 돌고도는 세상만사, 오가는 계절 그리고 시작과 끝 같은 것들을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최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며, 일전에 보았던 ‘Being 97’ (‘A 97-Year-Old Philosopher Ponders Life and Death: ‘What Is the Point?’) 라는 도큐멘터리가 여러차례 떠올랐다. 맨아래에서 볼수 있다.

동화를 스스로 지어서 손주들에게 녹음해서 보내주었던 자상한 할아버지. 평생을 철학 그리고 죽음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살았던 미국의 한 학자가 생의 마지막 몇달을 보내는 모습을, 그리고 그의 삶을 지배하던 생각과 언행들을,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나 이제 영화 도큐멘터리 제작자가 된 손자가 촬영하고 편집하여 세상에 내놓은 매우 특이하고 또 드문 훌륭한 도큐멘터리라는 생각이다.

UCLA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UC Santa Babara 철학과에서 평생을 가르치며 살았던 이 석학, 죽음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던 이 노인이 말한다.

‘노년이 실제로 되어보지 않고서는 노년의 정신세계를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다’. 자신은 오랜 세월 죽음을 연구하고 또 책을 쓰면서, 죽음을 이해했고 나아가 인간은 (자연의 질서속에서)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었지만, 막상 죽음이 몹시 가까운 상황이 되니 혼돈스럽고 두려우며,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What is the point of it all?’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혹은 ‘종말에 가까워 느끼는 이러한 두려움과 회의 등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이어령 선생의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내게 이 도큐멘트리가 왜 그렇게 자주 떠올랐던가 그리고 죽음에 임박한 이 미국 상노인의 일상이 내게는 왜 그렇게 더 와닿았을까 여러차례 생각해 보게 된다.